여행가방

 

                                              정호승

 

 

너는 나를 끌고

인천국제공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비행기에 싣고

시나이반도 위를 신나게 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카이로공항에서 다시 만나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피라미드 안 좁은 통로를 헤매고 다니거나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슬픈 눈으로 들여다보거나

사막에서 하룻밤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다가

질질 나를 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는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평생 나는 너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나 혼자 갈 뿐

너는 너 혼자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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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7-1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잘 다녀오세요 사이러스님~~~~~ :)
(설마 도서관으로 여행을 가는 건 아니겠지?! ㅋㅋ)
 

 

 

 

 

 

 

 

상처적 체질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는 오독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까봐 배려하는 오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세상은 상처투성이로 비춰진다. 관조자가 오히려 더 다치고 상처 입는 경우도 많다. 시인에게 상처는 악기가 된다. 낭만은 없고 고통만 남은 강물, 바다, 하늘, 바람, 별이 악보가 된다. 겹겹이 누적된 상처로 스스로가 폐허가 되어감에도 그는 사랑을 열망한다. 어떤 달콤한 절망도 쓰러뜨리지 못한다. 너무 아픈 상처는 그에게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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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2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시보다(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쫌 그럴까? ㅋ) 아니 시만큼이나 니 평 좋다, 멋진 녀석!!!! (근데 서울 안 와? 이번에는 얼굴 좀 보고 가!!!!)

cyrus 2013-05-28 23:41   좋아요 0 | URL
시집 즐겨 읽는 누님! 누님은 류근 시집 읽어보셨겠죠? 제목의 표제시처럼 사랑의 상처 받는 내용의 시가 왜이리 많던지.. 오늘 같은 날 시집 읽으면서 괜히 우울해지더군요 ^^;; 방학 때 서울에 갈꺼 같은데 누님 만나는 스케줄 잡도록 노력할께요. ^^

hnine 2013-05-2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독'이고 '오만'일까요?
상처가 악기가 될 수 있는 시인이라면 그건 행운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 반대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는 말도 있지만,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겠지요.

cyrus 2013-05-28 23:4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이네님. 말씀 듣고보니 제가 시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많은 크고 작은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았는가 봐요.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가고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은근히 그게 참 쉽지 않은거 같아요.
 

 

 

               

 

로베르트 슈만  「시인의 사랑」제 13곡

'나는 꿈 속에서 울고 있었네' (Ich hab' im Traum geweinet)

 

 

 

 

 

시인의 사랑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가정법의 세계는 슬프다. 특히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가장 슬프다. 가정법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상상이며 위로이며 서글픈 자위다. 어떤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실패의 흔적을 상상으로 메우려는 슬픔에 찬 몸부림들. 가정법은 그래서 슬프다.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를 계속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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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16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식어서 상대가 웬수처럼 보일 때의 가정법도 있죠.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cyrus 2013-05-16 21: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사랑 후의 가정법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새봄 4

 

                                   김지하

 

 

아직 살아 있으니

고맙다.

 

하루 세 끼

밥 먹을 수 있으니

고맙다.

 

새봄이 와

꽃 볼 수 있으니

더욱 고맙다.

 

마음 차분해

우주를 껴안고

 

나무 밑에 서면

어디선가

생명 부서지는 소리

새들 울부짖는 소리.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4월이 잔인한 달이라... 아무래도 낯설고, 어색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올해도 반쪽을 찾지 못한 모태솔로에게 4월은 정말 잔인한 계절이기는 합니다.

 

4월은 꽃 피고, 새가 지저귀는 생명의 계절, 축복의 계절입니다. 지금 온 천지가 꽃의 물결이고, 연둣빛 생명이 넘실거리는 봄의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새봄의 정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춘심(春心)에 몸과 마음을 차분히 맡겨 보면서 삶의 여유를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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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욱 억울해진다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오늘 자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읽은 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억울해하면서 사는 거 같다. 무언가 손해를 본 것 같고 누군가한테 당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러나 조금만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보면 어떨까. 내가 조금 손해를 봐서 다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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