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밀라》를 펴낸 초록달 출판사1인 출판사다. 한 사람이 혼자서 책 한 권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책 한 권 만드는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든 업무는 외국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해보지 않았지만, 조금만 역자들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번역하는 일이 고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역자는 원문의 단어 하나하나 끊임없이 눈으로 만져본 다음 그 의미와 비슷한 제2의 단어를 찾아내서 종이에 옮겨 써야 한다. 홀로 단어들과 씨름하고 있는 역자들 덕분에 독자는 다른 나라의 글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초록달 출판사가 레 파누(Le Panu)의 대표작 두 편(『카르밀라』와 『그린 티』)을 번역하기로 한 점,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을 위해 후원해준 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하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문에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카르밀라』의 번역문부터 살펴보겠다.

 

 

 

 

 

  아무 말이 없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큰소리로 글을 읽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소리 내어 말했다. (27~28쪽)

 

 

 

 

 

 

 

 

 

 

 

 

 

 

 

 

 

 

 

* 메리 램, 찰스 램 《명화와 함께 읽는 셰익스피어 20》 (현대지성, 2016)

* 메리 램, 찰스 램 《셰익스피어 이야기》 (비룡소, 2012)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소설을 쓴 적이 없다. 그는 희곡 작품과 소네트(sonnet)를 썼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은 소설 형식으로 편집되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Charles Lamb)과 그의 누이 메리 앤 램(Mary Ann Lamb)은 1807년에 어린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썼다. 메리 램은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류하는 작가였으나 정신병 발작으로 어머니를 살해했다. 찰스 램은 평생 독신으로 누이를 간호하면서 살았다. 남매가 함께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고전이 되었다.

 

『카르밀라』의 시대적 배경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레 파누가 작중 시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로라(Laura)가 어느 시기에 살았는지 어림짐작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르밀라』의 작중 시간은 19세기 중반이다.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19세기 초반에 나왔으니 로라가 이 책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가 언급된 원문과 번역문만 봐서는 로라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 이야기》의 한 구절을 인용했는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에 있는 구절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원문에는 ‘셰익스피어의 소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구절이 없다. 어린 로라는 어른이 읽는 희곡 버전보다 소설 버전의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더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소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은 오역이다.

 

 

 

 

  라폰테인이 머리에 검은색 터번을 쓰고 인상이 험악했던 여인에 대해 설명했다. (38쪽)

 She described a hideous black woman, with a sort of colored turban on her head.

 

 

 

 

 

 

 

 

 

 

 

 

 

 

 

 

 

 

 

 

* [품절]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다음 인용문은 흑인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은 아니다. ‘colored turban’을 번역한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coloured’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을 비하하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검은색 터번을 쓴 여인’이라고 번역하면 독자는 (원문에 분명히 언급된) 그 여인이 흑인이라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리면서 번역한다면 ‘색깔 있는 터번을 쓰고 인상이 험악했던 흑인 여성’으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 이미 『카르밀라』를 번역했던 정진영‘유색 터번을 두른 오싹한 흑인 여자’라고 썼다(《뱀파이어 걸작선》, 36쪽).

 

 

 

 

 

 

 

 

 

 

 

 

 

 

 

 

 

 

 

 

* [품절] 윤호송 엮음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 (자유문학사, 2004)

 

 

 

 

다음 인용문은 『그린 티』의 결말에 해당하는 문장의 일부다. 마틴 헤셀리우스 박사(Dr. Martin Hesselius)는 동료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녹차를 마신 뒤부터 악마를 목격하게 된 제닝스(Jennings) 신부의 증상에 대한 소견을 밝힌다.

 

필자는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에 수록된 『녹차』를 읽었는데, 『녹차』(자유문학사)의 결말과 『그린 티』(초록달)의 결말에 있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는 걸 느꼈다. 확인해 보니, 『그린 티』의 결말 부분에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었고, 심지어 원문의 일부가 누락된 것을 알았다.

 

 

 

  You know my tract on “The Cardinal Functions of the Brain.” I there, by the evidence of innumerable facts, prove, as I think, the high probability of a circulation arterial and venous in its mechanism, through the nerves.

 

 ‘뇌의 기본적인 기능’이란 제목을 붙인 내 논문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많은 사례를 들어, 뇌 조직의 기능에 신경이 연결되어 정 · 동맥 혈액의 순환 작용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녹차』, 343쪽)

 

  제가 뇌 주요기능학회에서 어떤 연구를 발표했었는지 아실 겁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신경세포가 뇌 메커니즘에서 동맥과 정맥 순환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린 티』, 250쪽)

 

 

 

‘my tract’ ‘내 (소)논문’ 또는 ‘내 팸플릿’으로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The Cardinal Functions of the Brain’은 헤세리우스 박사가 쓴 논문 제목이거나 주제이다. 원문에 ‘학회’라고 번역할 만한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다음 문장은 『그린 티』에 누락된 원문과 그 번역문이다.

 

 

 

  The seat, or rather the instrument of exterior vision, is the eye. The seat of interior vision is the nervous tissue and brain, immediately about and above the eyebrow. You remember how effectually I dissipated your pictures by the simple application of iced eau-de-cologne. Few cases, however, can be treated exactly alike with anything like rapid success. Cold acts powerfully as a repellant of the nervous fluid. Long enough continued it will even produce that permanent insensibility which we call numbness, and a little longer, muscular as well as sensational paralysis.

  I have not, I repeat, the slightest doubt that I should have first dimmed and ultimately sealed that inner eye which Mr. Jennings had inadvertently opened. The same senses are opened in delirium tremens, and entirely shut up again when the overaction of the cerebral heart, and the prodigious nervous congestions that attend it, are terminated by a decided change in the state of the body. It is by acting steadily upon the body, by a simple process, that this result is produced—and inevitably produced—I have never yet failed.

 

 

  외적 영상으로서의 역할, 혹은 도구는 바로 눈(eye)이다. 하지만 내적 영상의 역할은 눈 주변에 있는 조직과 뇌가 담당한다. 내가 얼음으로 차게 만든 오드콜로뉴(eau-de-cologne: 향수 이름)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당신의 환각 증상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그렇게 신속정확하게 큰 효과를 본 예는 좀처럼 없었다. 어쨌든 차게 한다는 것은 신경 유동체(nervous fluid)를 흩어지게 하는 데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을 장시간 연속해서 사용한다면, 마비(paralysis)라는 영속적인 불감성(不感性, 감각이 없는: insensibility)을 생기게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오랫동안 연속해서 사용하면 감각과 함께 근육(muscular)까지도 마비될 것이다.

  사실 나는 제닌구즈(제닝스) 씨가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해서든 그의 내면의 시력(inner eye)을 잃게 해서, 마지막에는 결국 그것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지각은 섬망증(delirium tremens: 의식장애와 내적인 흥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운동성 흥분을 나타내는 병적 정신상태)의 경우에도 일어나는 신경의 이상 충혈(congestion)이 신체 정황의 결정적인 변화에 의해서 한정될 때에 완전하게 폐지된다. 이런 결과는, 신체상에 항상 작용하는 단순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써,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녹차』, 343~344쪽)

 

 

 

이 긴 내용을 요약하자면, 헤세리우스 박사는 제닝스의 환각 증상을 녹차에 중독된 ‘내면의 눈(inner eye)’에서 일어난 이상 증세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 증상의 원인을 제대로 발견한다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린 티』의 역자는 ‘내면의 감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이 표현이 ‘inner eye’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번역을 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독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이 글에 대한 반박 의견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정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년에 읽다 만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셜록 홈스 시리즈 읽기는 여러 명의 번역가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전투적인 독서’였다. 내가 결투에 사용한 무기는 번역기와 영어사전이 전부다. 하지만 번역가들은 내 결투에 응하지 않았다. 하긴 이런 조용한 블로그에 전문적으로 글 쓰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자주 접속할 일은 없다. 언젠가 우연히 검색하다 내 글을 보고 딴죽을 걸겠지.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책이 내 심기를 건드린다. 문제의 번역본이 절판되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 코난 도일, 정태원 옮김 《셜록 홈즈 전집 8: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시간과공간사, 2002)

 

* 코난 도일, 정태원 옮김 《셜록 홈즈 전집 7: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시간과공간사, 2013)

 

* 코난 도일,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승영조 옮김 《주석 달린 셜록 홈즈 4》 (현대문학, 2013)

 

 

 

 

《셜록 홈스의 마지막 인사(His Last Bow)는 1917년에 발표된 단편집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코난 도일세 편의 단편집(《셜록 홈스의 모험》, 《셜록 홈스의 회상록》, 《셜록 홈스의 귀환》)을 썼다. 그는 홈스 시리즈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서 홈스가 사망하는 이야기(『마지막 사건』, 《셜록 홈스의 회상록》에 수록)를 끝으로 홈스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홈스 시리즈 마지막 단편소설이 발표되자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영국과 미국의 홈스 팬들(홈 동생들)은 ‘우리 홈(스)을 살려내라’면서 항의하는 내용의 편지를 도일에게 보낸 것이다. 홈 동생들의 성화에 못 이긴 도일은 장편 소설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을 발표했지만, 이 작품은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홈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홈 동생들은 ‘우리 홈의 생전 모습’이 아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우리 홈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도일은 홈스 시리즈를 다시 쓰기로 했고, 1905년에 홈스가 부활하는 단편이 실린 《셜록 홈스의 귀환》을 발표했다. 홈 동생들은 살아 돌아온 홈스를 격하게 환영했지만, 정작 도일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홈스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셜록 홈스의 마지막 인사》는 전작에 비하면 작품의 질이 좋지 못하다. 전작에서 이미 썼던 서사 전개와 약간 유사한 작품(『붉은 원』, 『프랜시스 카팩스 여사의 실종』)이 있으며 작품 곳곳에 ‘설정 오류’로 보이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전작과 달리 홈스가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는데, 용의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거나(『브루스 파팅턴 호 설계도』) 자신이 맡은 사건의 유력한 범인을 놓치기도 한다(『프랜시스 카팩스 여사의 실종』).

 

내가 읽은 《셜록 홈스의 마지막 인사》 번역본은 故 정태원 씨가 번역한 것이다. 2002년에 나온 이 번역본은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데, 이상한 점은 ‘개정판’과 같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정판이 나왔으면 당연히 구판은 절판되어야 한다. 2002년 초판 번역본은 ‘구판’이다. 구판은 양장본이고, 개정판은 반양장본인데 가격은 같다. 그렇다면 이 두 권의 번역본 중 무엇을 골라야 할까? 그런데 굳이 두 권 중에 무조건 골라야 하나? 나 같으면 두 권 모두 고르지 않겠다. ‘완역본’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코난 도일, 바른번역 옮김 《그의 마지막 인사》 (코너스톤, 2016)

 

 

 

구판에 왓슨(John H. Watson) 박사의 서문이 누락되어 있다. 왓슨 박사는 ‘홈스의 (약간 머리가 둔한) 조수’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홈스가 해결한 사건들(해결하지 못한 사건들도 포함된다)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기록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당연히 왓슨 박사의 서문을 실제로 쓴 사람은 도일이다. 개정판에도 왓슨 박사의 서문이 없다. ‘서문이 없는 완역본’은 완역본이라 할 수 없다.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니 추리소설 전문가 박광규 씨가 감수한 ‘코너스톤’ 판본에도 서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다. 다음 문장은 『위스테리아 로지(Wisteria Lodge, ‘등나무 별장’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에서 홈스가 자신의 수사에 만족감을 드러내면서 하는 말이다.

 

 

 전보를 읽고 수첩에 넣어 두려던 홈즈는 내가 궁금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웃으면서 전보를 건네주었다.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홈즈가 말했다.

 

(정태원 옮김, 구판 30쪽)

 

 Holmes read it and was about to place it in his notebook when he caught a glimpse of my expectant face. He tossed it across with a laugh.

“We are moving in exalted circles,” said he.

 

 

‘exalted’는 ‘상류층’ 또는 ‘너무나 기쁜(행복한)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아마도 정태원 씨는 후자의 의미에 맞춰서 문장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홈스는 기이한 사건을 수사하고 해결하는 것을 즐기는 괴팍한 인물이라서 사건을 수사하는 내내 기분이 들떠 있고 즐거워한다. 그렇지만 “We are moving in exalted circles”는 홈스 본인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는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의 주어 ‘We’는 홈스와 왓슨을 의미한다. ‘exalted circles’는 서로 비슷한 이해관계나 직업, 계층 등을 이유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우린 상류사회를 파고들 거야”(승영조 옮김, 주석판 33쪽)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 박상우 《박상우의 포톨로지》 (문학동네, 2019)

*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20세기북스, 2018)

* [절판] 콜린 비번 《지문》 (황금가지, 2006)

 

 

 

『붉은 원』의 역주(구판 108쪽)지문 식별 시스템의 기초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인 ‘프랜시스 갤턴’이 언급되어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쓴다면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다. 골턴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외사촌 형이며, 그는 인종 분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연구는 특정 인종을 촬영한 합성사진으로 지구에서 우수한 인종, 즉 ‘평균인’에 부합하는 인종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골턴은 범죄자의 얼굴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고 범죄자의 특징을 알아내기 위해 합성사진을 이용해 인체를 측정했다.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따로 있다는 그의 생각은 ‘우생학(eugenics)이라는 학문이 발전하게 만든 씨앗이 되었다. 골턴이우생학의 아버지’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너무 많이 알려진 탓에 대부분 사람은 그가 지문 식별 시스템을 고안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범죄학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골턴이다.

 

골턴과 그 밖의 여러 인물들이 지문 식별 시스템을 고안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책으로는 절판된 《지문》(황금가지)이 있다. 범죄 수사의 기초 증거로 사용되는 지문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평균의 종말》(20세기북스)《박상우의 포톨로지》(문학동네)는 과학(전자의 책은 통계학, 후자의 책은 사진술)이 인종 차별 담론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개입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사이비 이론이 학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중심에 골턴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중고서점 동대구역점 오픈

 

 

 

지난달에 알라딘 중고서점 동대구역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대구 동성로점, 대구 상인점에 이어 대구에서 세 번째로 들어선 알라딘 중고서점입니다. 대구에 있는 중고서점은 총 네 곳입니다. 나머지 한 곳은 ‘Yes24 반월당점’입니다. 대구도 알라딘 중고서점과 Yes24 중고서점이 있는 지역이 되었네요. 중고서점 개장 소식을 접하면 양가적인 감정이 듭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사는 지역에 중고서점이 하나 더 생겨서 기분이 좋습니다. 지갑의 두께가 얇아지더라도 제가 원하는 책이 서점에 있으면 무조건 가서 살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고서점이 늘어나면 헌책방과 동네 책방의 입지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헌책방을 찾는 단골손님 대부분은 연세가 많은 분입니다. 그분들의 건강이 점점 좋지 않게 되면 외출을 하지 못할 것이고, 헌책방에 가는 일도 줄어들겠죠. 그리고 헌책방을 오래 운영하신 분들도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의 힘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제가 자주 가는 헌책방 중에 두 곳은 문을 닫았어요. 손님이 너무 없다 보니 주말에 문을 열지 않는 헌책방도 있어요.

 

동대구역점 후기를 쓸려고 했는데, 헌책방이 사라지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시작했네요. 각설하고 동대구역점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제가 동성로점 후기 이벤트에 참여해서 ‘우수 후기’에 당첨되었고요, 상인점 후기 이벤트에서는 ‘최우수 후기’에 당첨되었어요. 당연히 이 후기를 쓴 목표는 2회 연속 ‘최우수 후기’로 당첨되는 것입니다. 최우수 후기로 당첨될 수 있는 참신한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해봤는데요, 남들이 쓰지 않는 방식으로 후기를 써봤습니다. 그리고 중고서점을 자주 애용했던 사람으로서 이번에 새로 생긴 동대구역점에 대해서 소신을 밝혔습니다.

 

 

 

 

 

 

 

서점 내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어요. 지난주 토요일에 동대구역점에 갔는데요, 역시 휴일이라서 그런지 서점에 온 손님들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어요. 손님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었어요.

 

새로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서점이라서 그런지 내부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이었어요. 하지만 알라딘 굿즈 진열대가 하나둘씩 늘어나면 점점 공간이 좁아지겠죠?

 

 

 

 

 

 

G(소설, 에세이, 여행) 책장에서 찍은 내부 모습입니다. 벽 쪽에 있는 D 책장음반, 만화, 라이트노벨 등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기다란 통로를 따라 끝까지 가면 외국도서로 채워진 D 책장을 볼 수 있습니다.

 

 

 

 

 

 

 

사고 싶은 책을 담을 수 있는 스테인리스강 바구니는 검색용 컴퓨터 책상 밑에 있어요. 동성로점과 상인점에 많이 가본 저는 바구니가 출입구 주변에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대구역점에 들어오면서 한동안 바구니를 찾아 헤맸답니다. 동대구역점에 처음 오신 분은 바구니의 위치를 기억해두세요.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는 성인용, 아동용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성인용 책상과 의자는 다른 서점(동성로점, 상인점)에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해요. 책상 위에 휴대폰, 노트북 충전기, USB 등을 꽂을 수 있는 콘센트가 있습니다. 아동용 책상은 의자에 앉은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비스듬한 형태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책상 위에 스케치북과 물감을 놓여 있네요. 책을 덜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이 자리를 좋아하겠어요. 물론 성인용 책상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리가 있어요.

 

 

 

 

 

 

 

B 책장(청소년, 부모, 어린이)과 C 책장(유아) 주변 공간이 다른 책장이 있는 공간과 비교하면 넓어요. 서점에는 적어도 손님들이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이런 공간을 가만히 놔둘 알라딘이 아니죠. 손님들 지나가는 공간 한가운데에 알라딘 굿즈 진열대를 놓던데요, 저는 진열대를 자꾸만 들여놓으려는 알라딘의 공간 배치 방식이 손님 친화적인 공간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손님들의 눈길을 끌도록 상품을 진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님들의 쾌적한 보행이 가능하도록 공간을 조성하고 잘 유지해주었으면 합니다.

 

 

 

 

 

 

 

A 책장이 있는 곳에 가면, ‘알라디너의 선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책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알라디너들로부터 높은 평점이 받은 책들이 꽂혀 있어요. 막연하게 책장에 ‘알라디너의 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책을 진열하기보다는 ‘특정 알라디너의 닉네임’을 언급하면서 그분들이 직접 추천한 책들 위주로 책장을 마련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로쟈의 선택’, ‘다락방의 선택’, ‘syo의 선택’, 이런 식으로 말이죠. 조유식 대표이사님!(이 글을 보진 않겠지만‥…) 알라디너가 ‘온라인 알라딘’과 ‘알라딘 서점’을 지금까지 유지하게 만든 열혈 구매층이고 팬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역시 새로 생긴 서점이라서 그런지 제가 사고 싶은 책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제가 요즘 책 소비를 자제하고 있는 중이라서 지름신을 막느라 참고 또 참았습니다. 책장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절대로 사면 안 되는 책’도 만납니다.

 

 

 

 

 

 

 

 

G37 책장 제일 아래쪽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소설 전집《우울과 몽상》이 꽂혀 있네요. 가격은 12,000원입니다. 정가(28,000원)의 반값에 2,000원 할인된 가격입니다. 책 상태는 좋아요. 그러나 안사는 게 좋아요. 번역이 정말 구리거든요.

 

 

 

 

 

 

 

G37 책장 제일 아래쪽에 절판된 《주석이 달린 앨리스》가 있어요. 책 겉모습만 보면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죠. 하지만 이 책의 번역도 그다지 좋지 않아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책입니다.

 

서점 후기에 ‘절대로 사면 안 되는 책’을 언급하니까 마치 제가 알라딘 영업을 방해하는 손님 같네요. 그런데 저는 예전부터 이런 후기를 한 번쯤 써보고 싶어요. 저의 오랜 소원을 이루게 해준 알라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동대구역 안 생겼으면 이런 솔직한 후기를 못 썼을 거예요.

 

 

 

 

 

 

 

 

 

 

개점한 지 얼마 안 된 서점인데 책을 안사고 그냥 갈 수 없었어요. 언젠가는 읽게 될 책들을 골랐어요. 이 책을 사게 된 이유는 다음 글에서 밝히겠습니다.

 

 

 

 

 

아! 깜빡 잊을 뻔했네. ‘알라딘 중고서점 검색기’ 어플에 ‘동대구역점’을 추가해주세요. 서점이 문을 연지 한 달이나 지났는데 왜 어플 업데이트를 안 합니까?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9-07-3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 서점 거의 안 가는데, 그 이유가 말이 중고서적이지 그냥 현재 유통되는 책이 대부분이에요. 사실, 헌책방 단골들이 헌책방 가는 이유는 절판된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런 책은 거의 없고, 덤핑으로 창고에 박힌 책들만 쌓아놓고 파니....

cyrus 2019-07-31 17:25   좋아요 0 | URL
헌책방과 알라딘 중고서점에 각각 장단점이 있어요. 헌책방이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의 절판본이 있는 곳이라면, 알라딘 중고서점은 90년대 중반 이후의 절판본이 있는 곳이에요. 곰발님이 말씀하신 대로 알라딘 중고서점에 있는 책들 대부분은 팔리지 못해 출판사 창고에 있던 것들이죠.

레삭매냐 2019-07-3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후기가 깔금하네요.

날카로운 지적에 앞으로 나아갈 방향
까지~ 모름지기 이런 후기를 써야 하는
데 너무 천편일률적인 후기로 도전했
다가 물 먹었나 봅니다 ㅋㅋㅋ

하나의 트렌드로 보이는데 일단 새로운
곳 매장이 오픈하면 집중적으로 갠춘한
책들을 몰아 주지 않나 싶네요 :>

사지 말아야 할 책에 대한 정보도 인상
적이었습니다 쵝오.

cyrus 2019-07-31 17:29   좋아요 0 | URL
저는 후기든 리뷰든 눈으로 보거나 직접 만진 것들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솔직하게 쓰는 편입니다. 대부분 리뷰나 후기는 장점만 언급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요.

저도 대구 알라딘 서점 세 곳을 가보면서 느낀 건데, 개장 초기에 제가 읽을 만한 책을 많이 샀던 것 같습니다. ^^

stella.K 2019-07-3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누구의 선택 같은 디테일한 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중고샵을 찾을 정도라면 책에 대한 애정, 정보 등은 이미 장착하고 있고
그렇게까지 특화할 필요는 없어 보이거든.
하지만 너처럼 번역이 구린 걸 색출해 내는 알라디너의 특별한 시선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정보는 정말 필요하거든.
난 중고샵 안 나간지가 꽤 된다.
몸이 안 좋아서 아끼고 있는 중이거든. 보니까 나가고 싶네.ㅠ

헌책방이 점점 설 자리가 없는 건 정말 안타까워.ㅠ

cyrus 2019-07-31 17:33   좋아요 0 | URL
예전부터 중고서점에 있는 책들을 리뷰해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중고서점에 가보면 ‘정말 내용은 좋은데 팔리지 못한 책’과 ‘내용이 별로라서 사기 아까운 책’을 보게 돼요. 저는 후자의 책에 대한 리뷰를 쓰고 싶었어요. ^^

박균호 2019-07-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석달린 앨리스가 번역이 구렸군요. 장정이나 디자인은 정말 좋은 책인데...

cyrus 2019-07-31 17: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구성은 정말 좋은데, 번역이 ‘옥에 티’입니다. ^^;;

나와같다면 2019-07-3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 yes24 중고서점 생긴다는 기사 보고 cyrus님 생각났어요.

동네 헌 책방보면 마음이 짠하지요. 저도 그래요..

cyrus 2019-07-31 17:38   좋아요 0 | URL
만약에 헌책방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면 90년대 이전에 나온 책들을 접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헌책방이 문 닫아버리면 거기에 있던 책들은 다른 헌책방에 이전하게 되거나 아니면 폐지로 분류되어 처분됩니다.

카스피 2019-07-30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헌책방을 찾아 대구를 간 기억이 나는데 서울과 마찬가지로 대구역시 기존의 헌책방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문을 닫게 되어 참 안타깝네요.

cyrus 2019-07-31 17:44   좋아요 0 | URL
주말에 자주 헌책방에 가는데, 문이 닫힌 헌책방의 모습만 보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

syo 2019-07-3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다락방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간 취급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연료는 칼국수로 드리겠습니다.

????

cyrus 2019-08-01 09:13   좋아요 0 | URL
서문시장에 파는 칼국수를 먹고 싶습니다! ^^

syo 2019-08-01 11:15   좋아요 0 | URL
그럴까요 그럼? 저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잘 되었네요.
 

 

 

1977년 학술대회에 참석한 미국의 시인 오드르 로드(Audre Lorde)는 청중들 앞에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듬해 그녀는 한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암세포는 이미 다른 장기에 퍼진 상태였다. 1982년에 로드는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199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쓰기와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 오드르 로드 《The Cancer Journals》 (Aunt Lute Books, 2016)

 

 

 

1980년에 발표된 《The Cancer Journals》(암 일지)는 로드가 유방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쓴 책이다. <암 일지>는 유방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게 만든 책으로 알려졌지만, 질병을 개인적 문제로 여기는 인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페미니즘 고전’이다.

 

‘페미니즘 스쿨’ 교육 일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로드의 <암 일지>에 대한 강연을 진행할 계획이 있었다. 전혜은 선생님이 ‘암 일지’에 대한 강연을 해야 한다고 레드스타킹에게 먼저 제안을 했다. 그분은 <암 일지>를 ‘교차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아픈 사람의 위치에서 어떤 중요한 통찰과 정치를 발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놀랍도록 멋지게 보여주는 페미니즘 고전’이라고 소개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암 일지> 강연을 교육 일정에 포함하는 것에 찬성했다. 나 말고도 <암 일지>에 호기심을 느낀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해야 할 주제가 너무 많은 데다가 <암 일지> 강연을 하기에 시간상 어려울 것 같아서 결정을 유보했다. 하지만 교육 일정이 진행되는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암 일지> 강연을 하는 것으로 변경될 수 있다.

 

 

 

 

 

 

 

 

 

 

 

 

 

 

 

 

 

 

* 말린 쉬위 《일기 여행》 (산지니, 2019)

 

 

 

최근에 일기 쓰기가 여성에게 주는 긍정적 효과를 설파한 《일기 여행》(산지니)을 읽다가 로드의 <암 일지>를 언급한 내용을 보게 됐다. 어찌나 반갑던지. <암 일지>에서 인용한 문장도 있다. 《일기 여행》의 저자는 로드가 유방암 투병 중에 일기를 쓰는 행위를 ‘카타르시스(catharsis)에 가까운 글쓰기’로 본다. 로드가 암을 받아들이면서 투병 경험을 공개하는 글쓰기는 안정과 치유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카타르시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카타르시스는 “예술로 감정을 순화하거나 정화하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적으로 카타르시스는 “과거의 사건들, 특히 억제된 것을 정서적으로 해소하여 장애의 원인과 정직하게 마주함으로써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는 것”을 지칭한다.

 

  가끔 카타르시스적 글쓰기를 통하여 치유된 상처들은 편견과 차별에서 나온 것이다. 일기에서 글쓰기는 역시 카타르시스적인데, 그것은 내가 견디면서, 삶에 존재하는 많은 상처를 치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더 로드(Audre Lorde)는 “흑인 여성 동성애자 투사 시인”으로 자신의 유방암 경험을 일기로 쓰면서, 자신의 말이 “자기 치유의 가능성과 모든 여성을 위한 생활의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것”이기를 원했다. 그 일기는 로드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자신의 질병은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전환하는” 힘으로 만드는 결심을 증언한다. 1979년 11월 19일에 그녀는 적었다. “분노를 쓰고 싶지만 결국 남는 것은 슬픔이다…. 죽음을 삶으로, 죽음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한다.”

 

 로드는 회고한다. 『암 일기(The Cancer Journals)』의 출판 준비는 “그 시점의 나와 그 시간을 지나면서 변화하는 나 자신을 정돈하고, 추후의 검토뿐만 아니라 해소를 위해서, 가공의 나를 내려놓기 위한” 글쓰기 과정이었다. 이것 또한 카타르시스다.

 

 

(《일기 여행》 169, 171~172쪽, cyrus가 임의로 발췌 편집했으며 밑줄 친 문장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암 일지>의 서문 일부도 인용되어 있다. 《일기 여행》의 저자도 <암 일지>를 극찬한다.

 

 

 암에 대한 나의 분노와 고통과 공포가 여전히 다른 침묵 속으로 화석화하거나, 공공연히 인정되고 검진된, 이 경험의 중심부에 놓인 어떤 정신력도 나에게서 강탈하기를 원치 않는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건 강요된 침묵은 분리와 탈권력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연령, 피부색, 성적 정체성에서 다른 여성과 나 자신을 위하여, 내 감정과 생각들을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자연 치유의 가능성과 삶의 풍요를 강조하는 표현이 되기 바란다. (<암 일지>의 서문 중에서)

 

 유방암이 자신의 개인적 삶에 미치는 영향의 양상에 대한 혹독한 서술로, 오더 로드는 우리 자신의 높은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유인한다. 이 일기는 모든 여성들에게 정말 좋은 선물이다.

 

 

(380쪽, 밑줄 친 문장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이 ‘좋은 선물’ 안에 무엇이 있을까? 로드가 세상의 모든 여성을 위해 남긴 ‘선물’을 확인해볼 수 있는 날이 확정되었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9-07-12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기를 쓰고 나면 머릿속이 정돈되고 근심이 줄어드는 효과를 봅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일기를 쓰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글쓰기의 놀라운 효과를 잘 압니다.

cyrus 2019-07-12 15: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금 글쓰기의 긍정적 효과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분이 페크님이시죠. ^^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세이 선집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 실천)《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사)를 동시에 읽었다.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에세이 몇 편이 있는데, 그중 한 편이 『Good Bad Book』이다. 이틀 전에 『Good Bad Book』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 [품절]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사, 2003)

* 조지 오웰, 하윤숙 옮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 실천, 2003)

 

 

 

 

오늘도 내가 『Good Bad Book』을 언급한 이유는 《코끼리를 쏘다》에 발견된 오역(원문에 있는 문장이 빠져 있다)과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 설명이 미흡한 역주가 있던데 일단 이것부터 먼저 언급하겠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237쪽에 볼테르(Voltaire)의 시 『오를레앙의 성처녀(La Pucelle d’Orléans)에 관한 역주가 있다. 역주에 볼테르의 작품이 ‘1899년’에 발표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1694년에 태어나 1778년에 세상을 떠난 볼테르가 1899년에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한 세기가 지난 뒤에서야 발표되었을까?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프랑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Jeanne d’Arc)의 별명이다. 당연히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잔 다르크의 삶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고, 볼테르는 이 시를 1730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한동안 잊힌 작품은 영국의 작가인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William Henry Ireland, 1775~1835)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고,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1899년이다.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알마, 2014)

* 주명철 《계몽과 쾌락》(소나무, 2014)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시’라고 말하기 민망한 ‘포르노그래피’. 제목만 보면 볼테르가 프랑스의 영웅을 찬양하는 시를 섰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볼테르가 잔 다르크를 음란한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외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취급받았지만, 자극적인 소재를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통되면서 널리 읽히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프랑스의 독서 문화와 금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분석한 《책과 혁명》(알마)을 쓴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은 1769년부터 1789년까지 불법 유통된 720종의 금서가 적힌 목록을 조사했는데, 그 목록에 『오를레앙의 성처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단턴은 『오를레앙의 성처녀』와 같은 특정 인물을 비방하기 위해 만든 포르노그래피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한 부싯돌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포르노그래피 형태로 만들어진 책들 대부분은 군주와 기득권층을 풍자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정부는 이 포르노그래피 유통을 막기 위해 금서를 지정했다. 그러나 금서는 발 빠르게 유통되었고, 이로 인해 금서를 접한 대중들의 마음에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단턴은 음란물로 규정된 프랑스의 금서들이 군주와 귀족 중심의 구체제(ancien régime)에 어떻게 균열을 냈는지 《책과 혁명》에서 설명하고 있다.

 

자, 다시 역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래서 정리하자면, 『오를레앙의 성처녀』를 '1899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대충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역주에 ‘볼테르가 1730년에 쓴 미완성 작품’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이제 《코끼리를 쏘다》에 발견된 오역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 두 개는 《코끼리를 쏘다》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발췌한 『Good Bad Book』 번역문이다.

 

 

 

* 원문

A cut above most of these was Barry Pain. Some of Pain’s humorous writings are, I suppose, still in print, but to anyone who comes across it I recommend what must now be a very rare book — The octave of Claudius, a brilliant exercise in the macabre. Somewhat later in time there was Peter Blundell, who wrote in the W. W. Jacobs vein about Far Eastern seaport towns, and who seems to be rather unaccountably forgotten, in spite of having been praised in print by H. G. Wells.

 

 

* 좋으면서 나쁜 책, 《코끼리를 쏘다》, 118쪽, 박경서 옮김.

 

 이들보다 더 우수한 작가로서 베리 페인(Barry Pain)도 있다. 그의 유머스러운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지만, 그의 책을 접하는 사람에게 오늘날 구하기가 힘든 작품인 『클로디어스의 8일(The octave of Claudius)』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후의 작가로는 극동지방의 항구도시에 대한 이야기로 출판 당시 웰스(H. G. Wells)의 찬사를 받았지만 이상하게 요즈음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피터 블룬델(Peter Blundell)이 있다.

 

* 좋은 대중소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316쪽, 하윤숙 옮김.

 

 이보다 상급에 속하는 작가로는 베리 페인(Barry Pain)이 있는데, 그의 작품 중에는 여전히 판매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혹시 읽을 사람이 있다면 지금은 필시 구하기 힘들 『클라우디우스의 8일(The octave of Claudius)』을 추천한다. 이 작품은 섬뜩한 분위기를 띤 탁월한 작품이다. 다음 시기로 내려오면 피터 블런델(Peter Blundell)이 있다. 그는 극동의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W. W. 제이콥(W. W. Jacobs) 같은 성향의 작품을 썼는데 H. G. 웰스가 지면상에서 높은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잊힌 것 같다.

 

 

 

박경서 씨의 번역문에는 원문에 있는 문장(필자가 밑줄 친 문장) 두 개가 빠져 있다. 박경서 씨는 조지 오웰의 작품을 주로 번역했고, 오웰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인데 원문을 누락한 번역을 했다는 점이 아쉽다. W. W. 제이콥은 ‘제이콥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영국의 작가다. 그의 대표작은 『원숭이 손』으로, 역대 최고의 공포 단편 소설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추천받는 작품이다. 필자는 3년 전에 W. W. 제이콥스를 소개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내가 쓴 졸문을 참고하길 바란다.[주]

 

 

 

* 원문

 

Enough talent to set up dozens of ordinary writers has been poured into Wyndham Lewis’s so-called novels, such as Tarr or Snooty baronet. Yet it would be a very heavy labour to read one of these books right through.

 

 

* 좋으면서 나쁜 책, 《코끼리를 쏘다》, 121쪽, 박경서 옮김.

 

타르 혹은 속물의 귀족(Tarr or Snooty baronet)과 같은 윈담 루이스(Wyndham Lewis)의 소설을 보면 수십 명의 평범한 작가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재능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란 무척 어렵다.

 

* 좋은 대중소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320쪽, 하윤숙 옮김.

 

 윈덤 루이스가 쓴 『타르』나 『오만한 준남작(Snooty baronet)에는 평범한 작가 12명을 탄생시킬 만한 재능이 들어있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은 매우 힘든 중노동이다.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 1882~1957)는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화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1918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타르(Tarr)다. 『오만한 준남작(속물의 귀족, Snooty Baronet)』은 1932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러므로 『오만한 준남작』은 『타르』와 별개의 작품이다.

 

 

 

 

[주]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 <원숭이 손>] (2016년 5월 17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84997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