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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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소설들은 어째서 그토록 빨리 읽을 수가 있을까? 읽기 쉬워서? '읽기 쉽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가 읽기 쉽다고? 『죄와 벌』이 읽기 쉽다고? 『이방인』보다도, 『적과 흑』보다도? 결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들이 학교 교과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시칠리아 미망인을 비롯하여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된 이른바 '교양 필수 권장 도서' 따위는 으레 '고리타분'할 것이라고 속단한다. (p.173)



아주 어릴때부터 이웃집에 놀러가면 그 집 책장 앞에 가 책들을 구경하고 또 빼서 읽었더랬다. 놀러간 내 형제들이나 혹은 친구들이 수다를 떨며 다른 놀이를 즐길 때 나는 꼭 그렇게 혼자 책들을 구경하고 읽곤 했다. 고모네 집에 가면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오빠의 국어책을 꺼내 읽었다. 소설을 다룬 부분만 읽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재미있었던 거다. 나보다 아홉살 많은 이모네 집에 가면 이모가 없을 때에도 아무 책이나 꺼내 읽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아직 어린 내가 읽지 말아야할 책들도 더러 껴있었다. 아니, 대부분 그랬다. 이모는 집에 오고 나서 '그건 니가 볼 책이 아닌데... '했다. 그렇다고 이모는 내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여동생이 친구로부터 빌려온 <스타킹 훔쳐보기>시리즈를 하루 꼬박 몰아 읽었더랬다. 마침 시험기간이었던지라 여동생은 도대체 왜 공부를 안하고 책을 읽는 거냐며 내게 잔소리를 했다. 그래서 너는 전교 일등 나는 일등 한 번 못해본 사람...이었던 건가보다.



내가 공부보다 소설 읽기를 즐겨한 데는 그것이 교과과정이 아니라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읽는 책이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스타킹 훔쳐보기를 열과 성을 다해 읽는다고 해서 내 성적이 오를 리가 없다. 아니, 떨어지겠지. 내가 2년 위의 사촌 오빠 국어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의 나의 교과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없다. 예습도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재미있어서 읽었다. 나는 소설 읽기가 재미있었다. 교과과정이 아닌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책 마다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들이, 다른 인물들의 삶을 읽는 것이 정말 좋았다. 책 좀 그만 읽으라는 소리를 들어도 도무지 끊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누가 왜 소설을 읽냐고 물어보면 '재미있어서'가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사실 그것말고 다른 이유는 어린시절에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아니 왜?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데 책을 왜 안읽지? 안읽어봐서 재미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닐까?



나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좋았지만, 내가 이야기 자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책마다 품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좋다고 늘 생각했으면서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게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놀랐다.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p.151)



나는 위의 문장을 읽고 내게 몇 번이나 물었다. 내가 정말 이야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던 거야? 나는 이야기 그 자체를 좋아했던 거야? 늘상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말해왔지만, 나는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 이기 때문에 좋아했던거야? 이야기? 이야기란 대체 무엇이지? 물론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의 나열은 아니지만, 거기엔 작가 고유의 문체라는 것도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런데, 어쨌든,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 나는 이야기에 목마른 자란 말인가?



묻고 묻고 또물었는데 답은 '그렇다' 였다. 왜냐하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으니까. 소설은 이야기였으니까. 소설이란 무릇 이야기이니까. 작가의 고유한 문체가 그 안에 들어있고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들어있다해도, 작가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다해도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야기였구나.


아,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어. 이 사람의 저 이야기, 저 사람의 저 이야기.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그렇다면 말이 된다. 그래, 말이 돼. 내가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 연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 모두가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었어.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 그 안에는 인간들이 저마다 품고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어. 내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소설을 계속해서 읽어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었다. 그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좋아하기에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였어.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사는 존재니까.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이 작은 책의 절반쯤을 읽을 때까지는, 그러니까 책 읽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게다가 청소년에게 책을 읽게 만드는 책이라면, 이 책보다는 '김소영'의 《어린이책 읽는 법》이 이천오백배쯤 낫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간을 지나면서부터, 그러니까 좋지 않은 학교의 열등생들, 자신들이 공부도 못하고 책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두꺼운 책을 이해할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을 책에 빠져들게 만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책은 반짝거리며 빛이 난다.


서른 다섯명의 아이들, 도통 책 읽기엔 흥미가 없을 뿐더러 그런건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어느 책의 첫 구절을 읽어주면서부터, 그 때부터 갑자기 독서란 너무나 재미있고 아름다운 행위가 된다.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을 궁금해한다. 그러니까 그 다음의,




아.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이렇게 다시 이 자리로 나를 불러오는 힘이 있다. 이제 아이들은 선생님이 읽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책의 책장을 넘긴다. 읽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책들의 책장을 넘기고, 저마다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전하기에 바쁘다. 아, 이 과정이야말로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닌가. 너무 좋아 ㅠㅠ

책이란 나랑 안어울려, 라고 생각하다가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렇게 책을 읽게 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읽은 책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이 작은 책 한 권은 그렇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한다.




게다가 책이란 것에 실려있는 사연, 그러니까 책이 품고 있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드웨어적인 것으로서의 의미, 누군가와 얽힌 사연에 대한 것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또한 책에 대한 느낌도 우선은 가장 소중한 이에게 먼저 전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감정이란 원래 책읽기의 욕망처럼 무엇 무엇을 더 좋아한다는 속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 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쥐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p.110-111)



누군가가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읽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든 우리는 책에 대해 다른 누군가와 하나의 사연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더러 하게 되지 않나. 이 부분을 읽는데 가슴 속에 봄이 오는 기분이었어. 크-




다니엘 페나크는 물론, 나쁜 책도 있다고 말한다. 나쁜 책을 흥분하면서 읽었던 때도 분명 있었을 거고,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을 거라고. 동시에 책을 읽지 않아도 되고, 건너뛰며 읽어도 되고,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고, 다시 읽어도 된다고, 아무 데서나 책을 읽고, 군데군데 골라 읽고, 소리 내서 읽고, 읽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모든 권리가 책 읽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책 읽는 사람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자유로움이 우리를 계속해서 책을 읽게 하는거겠지. 자, 읽고 읽고 또 읽자. 이야기를 만나고 또 만나자.


아,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우린 정말로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어찌나 걱정스러운지 시도 때도 없이 내 아이를 또래의 다른 아이와 시시콜콜 비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둔 친구 아무에게나 …… 가 아닌, 학교 성적이 뛰어나며 죽어라 책만 읽는다는 아이를 둔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다.
귀가 잘 안들리나? 난독증이 아닐까? 아예 학교에 안가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학습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았다. 청력 검사에서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 언어 치료사도 안심해도 좋단다. 심리 검사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둔해서일까?
단지 둔해서일 뿐이라고?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와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이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 P58

열두 살인가 열세 살 때(열세 살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난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여름 방학의 초입부터 형(앞서 말한 『계절풍』을 읽던 형)은 그 두꺼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럴 때 형의 눈빛은 고향 생각을 오래전에 잊은 탐험가처럼 아련해지곤 했다.
"형, 그렇게 재미있어?"
"응, 무지."
"무슨 얘긴데?"
"으응,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다, 결국은 세번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얘기야." - P196

더욱이 한밤중에 50명의 친구가 코를 골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기숙사 방 한가운데서, 이불을 텐트처럼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비추어가며 책을 읽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감시 초소를 지척에 두고도, 언제나 나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을 얻느냐 마느냐뿐이었다. 당시 내 손에 쥐여 있던 그 책의 두께며 무게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 P198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쁜 소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그러한 소설은 창조의 결실이 아니라, 미리 짜맞춘 일련의 ‘형식‘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진실석(복합적이다)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런 복제품은 단순화(거짓이다)를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호기심만을 달래줄 뿐이기 때문이다. - P208

무엇보다도, 결국 그런 책에서는 작가도, 작가가 보여주겠다고 하는 현실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해진 틀에 짜 맞춰져 우리까지도 덩달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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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토록 부끄러운, 남자의 향기
    from 마지막 키스 2019-04-04 16:50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단발머리 2019-04-04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 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p.110-111)

저번주에 친구에게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했어요. 그저께 <질의응답>을 선물받았구요.
책이 저와 친구, 저와 언니 사이에 있어요. 확, 들어와버린거죠.
너무 좋아요, 이 글!! 다락방님, 하트뿅뿅!!!

다락방 2019-04-05 14:5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께 제가 받은 하트의 정확히 두 배 돌려드립니다.

저도 제가 받았던 어떤 특별한 책들에 대해 떠올렸어요. 또한 특별하지 않고 내보내고 싶었던-순전히 그걸 준 사람 때문에-그런 책도 떠올렸고요. 책은 그 안의 내용으로도 소중하지만 그걸 선물한 사람때문에 특별햊기도 하는 것 같아요. 선물이란 게 물론 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성질의 것이지만, 책은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잖아요. ‘아, 이 부분 때문에 줬구나‘, ‘어떤 이유로 내게 이 책을 준걸까?‘ 같은 거요. 그래서 더 유심히 읽게 되는.

저도 이 공간에서 단발머리님과 끊임없이 책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읽고 때로는 책을 선물로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행복합니다, 단발머리님!! >.<
 
















'세르게이 폴루닌'은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체조를 배웠는데,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엄마는 세르게이를 발레 학교에 보낸다. 키예프 발레학교는 등록금이 너무 비싸 이 가난한 부모는 아이 학비 마련을 위해 떨어져 살게 된다. 아버지는 포르투갈에 가 돈을 벌고 할머니는 그리스로 가 돈을 번다.


키예프에서도 실력이 다른 누구보다 앞서는 세르게이인지라 세르게이의 엄마는 여기도 작다, 런던으로 가자, 하고는 십대의 아이를 데리고 런던 로열발레단으로 가 오디션을 본다. 오디션에 합격하고 로열발레단에 아이를 입학시키지만, 엄마에게는 비자 문제가 있어 아이와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아이를 그곳에 남겨둔 채 엄마는 우크라이나로 돌아오고 그렇게 아이는 런던에, 엄마는 우크라이나에, 아빠는 포르투갈에, 할머니는 그리스에 있는 삶이 시작되는 거다.



아이의 엄마도 아빠도 발레를 했던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아이의 발레애 대한 재능을 알아보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더 큰 곳, 더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을까. 엄마의 세르게이에 대한 교육열은 정말 대단한 것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능력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재능이 있었다한들 우리 부모님이 '이것은 이 아이의 어마어마한 재능이다' 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알 수 있었다해도 '이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 더 큰 곳으로 가야한다, 그곳은 여기다' 를 알 수 있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재능이 있다해도 발견되지 못한채 그저 평범하게 지내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재능인줄 모르는 주변 어른들과 설사 알았다해도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어른들만 가득해서 더 크게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엄마의 눈은 적확했다. 아이는 로열발레단에 들어가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하고 최연소로 수석 발레리노가 된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엄마는 아이가 어릴적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토록이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면서도 어떻게나 그렇게 큰 미래를 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이 세르게이의 운명이기 때문이었을까? 운명이 착실하게 그 수순을 밟도록 한걸까?



세르게이는 그렇게 자꾸만 더 크게, 더 크게 된다. 종국에는 세르게이의 발레를 보기 위해 2년 전부터 티켓팅을 해야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세르게이는 아주아주 큰, 아주아주 유명한 일류의 발레리노가 된다. 그러나,



세르게이를 그렇게 어마어마한 발레리노로 만든 가족들은 세르게이의 공연을 볼 수 없었다. 세르게이는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공연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오지말라고 말할 뿐이었다.


어린 세르게이가 열심히 발레를 했던 건, 자신이 열심히 발레를 하는 것만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과 얼른 합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열발레단에 들어간지 얼마 안돼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나 함께 살고 싶어했던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알게된 세르게이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내가 발레하는 걸 가족에게는 보여주지 않겠어'라고 화가난 채로 마음을 먹는다. 결국 그토록 훌륭한 발레리노로 만들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가족들은 볼 수 없게 된거다. 세르게이는 가족들과 헤어져 산 것이 몹시 슬펐고 아팠고 힘들었다고 했다.



무엇이 나은 것이었을까.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가 된다는 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이 아닌데, 이토록이나 훌륭한 발레리노가 되도록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잘한 선택이라 해야할까.

그러나 세르게이가 원했던 것 '가족들과 다함께 사는 것' 이었으니, 발레리노라는 미래 보다는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함께 있도록 선택했어야 하는걸까?



세르게이는 발레학교에 입학해 자신을 엄하게 대하는 엄마가 야속했고 떨어져 사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엄마는 세르게이가 발레 연습이 끝나도록 밖에서 기다린 것이 집에 돌아갈 차비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의 고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그것은 결국 세르게이를 그토록 어마어마한 발레리노가 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세르게이에게 어린 시절은 힘들고 상처 받았던 기억들이었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 이 가족들의 희생은 세르게이를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로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세르게이가 원하는 것이었나. 세르게이가 '나는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어!'라는 목표를 가진 적이 있었나.


물론 지금의 세르게이는 춤을 하루라도 추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아픈 그런 댄서가 되어 있었다. 춤을 사랑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가족이 떨어져 살았던 것에 대한 상처 역시 그대로 가지고 있다.

엄마는 하나의 선택을 하면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지어야 하는 거라 말했다. 그렇다면 세르게이가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을 지고 가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가족들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걸 택하고 발레리노가 되지 않는 걸 지고 사는 것이면 안되는 거였을까?




나는 뜬금없이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소설 《일곱 번째 파도》생각이 났다. 소설 속에서 레오는 에미이게 말한다. '너를 위해 선택한것이었는데, 그것이 너에게 좋은 게 아니었다' 고.






나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을 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 자신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유감이고 불행이에요. 기회를 놓쳤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p.242)











세르게이의 엄마가 세르게이에게 '그 때 내가 한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를 말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그저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아이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세계 일류 발레리노가 되었으니,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거야' 할 수 있는걸까?


행복이란 저마다의 것이니 누가 뭐랄 순 없는 거지만, 어쩌면 세르게이에게 가장 좋은 길은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사는 건 아니었을까. 물론, 세르게이의 춤을 보는 내내 나는 너무나 좋았지만, 와, 이런 발레리노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지만, 마지막 <take me to church>를 볼 때는 진짜 너무 좋아서 '여긴 계속 돌려봐야지' 싶었지만, 그렇지만, 결과가 좋으므로 다 좋은걸까. 결과가 좋다는 것은 누구에게 좋다는 것일까. 자꾸만 자꾸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야 늘 남는 법, 가족들과 있는 걸 선택했다면, '그때 내가 발레를 계속 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레오는 위의 문장에서처럼, '에미를 위해 뭐가 좋을까'를 선택하다가 나중에야 '내가 가장 좋은 답이 될 수도 있었는데'를 깨닫게 되는데, 이 남자는 항상 이런 식이다. 파멜라를 위해서도 '파멜라가 행복해하는 걸' 택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이때 에미는 '너 자신의 행복은?' 이라고 묻는데, 선택은 항상 '나는 어떤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한가'를 물어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두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기에 오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읽은 '리안 모리아티'의 《당신이 내게 최면을 걸었나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존과는 4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엘런은 존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런한테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존은 엘런하고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였다.
엘런은 정말로 상처를 입었다. 도자기 컵 여러 개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것처럼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예리한 통증이 파편이 되어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콧구멍 속을 따끔거리게 만든 고통들이 커다란 통증이 되어 쐐기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P192








엘런과 헤어진 연인 '존'이 다른 여자랑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될 거란 소식을 들은 엘런은 몹시 상처 받는다. 자신과 지낸 4년동안 자신에게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결혼을 한다니. 자신은 뭐였을까, 자신과 함께한 시간은 대체 뭐였나. 엘런은 상처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 아, 결혼을 하고싶어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랑' 결혼을 하고싶었던 게 아니구나.


이 뒤늦은 깨달음은, 비록 그들이 헤어진 뒤라도 그녀에게 몹시 상처를 남긴다. 예리한 통증.



나도 정확히 저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예리한 통증이 어떻게 엘런을 아프게 했을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엘런이 깨달은 것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라는 얘기를 꼭 엘런에게 해주고 싶다. 존은, 정말로, 어쩌면, 그간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고 하고 싶지 않았었던 걸지도 모른다. '엘런이라서'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정말로 '결혼은 관심없어'라는 태도로 살아왔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났고, 지금 다른 여자랑 사귀면서는, 자연스레 '아, 이제 나도 결혼을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엘런이 그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될만큼, 그것은 어쩌면 그저 '타이밍'의 문제였을 수 있다는 것. 물론, 이렇게 말해봤자 그 예리한 통증이 금세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이 책에서 엘런의 아버지는 ˝뒤늦은 깨달음이라. 항상 문제가 생겨야 알게 된다는 거구나.˝(p.585)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 전에 알아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레오는 에미를 위한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세르게이는 그토록 훌륭한 발레 공연을 연달아 하면서도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가족들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는다. 생애 얼마만큼의 시간을 꼭 아들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건만, 정작 그 아들의 성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엄마와 다른 가족들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지 않았을까. 그간의 시간들이 도무지 잡히지 않아 안타깝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러면 안되는 거였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았을까.





레오, 왜 "당신이랑 ( …… ) 하고 싶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 ( …… ) 할까요?", 이렇게 물어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몰라요? 아니면 내가 원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당신도 원하지 않을 여지를 남겨두는 건가요? (일곱 번째 파도, p.280-281)




이제와 '그랬어야 하는 건 아닐까'는 어쩌면 부질없는지 모른다. 세계 일류의 발레리노가 되었으니 '사실은 어릴 적에 가족이 함께 있고 싶었어' 라는 말을 뒤늦게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자리는 너무도 크고 높으니까. 그렇지만 선택에 있어서 중심은 '너'가 아니라 '나'가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너에게 가장 좋은 게 무얼까' 가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게 무얼까' 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세르게이가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저런 가족들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이 없었을 지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은 꼭 지금이어야 했던걸까. 잘 모르겠다.




마지막 하와이에서의 촬영이 진짜 눈이 부셔서, 와, 어떻게 저런 장소를 잘도 찾아냈다 싶었다. 이 영상은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했다 한다.










그나저나 인용문 찾는다고 일곱 번째 파도 펼쳤다가 또 흠뻑 빠져들어서 끝까지 다 읽을 뻔 했다. 하핫, 나란 여자는 정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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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04-05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상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4-08 15:13   좋아요 0 | URL
천만에요!
:)
 
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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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기존에 속해있던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로 말하자면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고(새로 사귄 남자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탈코르셋을 선언하고 비혼을 선언한다. 비연애나 비섹스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존에 자연스레 하고 있던 것들, 그것이 응당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과 작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레 따라올거라는 생각을 하게된거다. '거다 러너'의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으면서, 남자사람들과 또 결혼과 멀어진 사람이 있는것처럼, 종교랑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그 보수성과 남성주의를 도무지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거다.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부장제의 창조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기 때문에 나는 거다 러너가 이 책을 쓰기까지 아주 많이 애를 썼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읽기에는 결코 쉽지가 않았다. 낯선 용어와 여신들의 이야기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좀 힘들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성서를 가져오고나서부터는 읽기에 수월해졌는데, 그러면서 '아, 종교를 버텨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싶었던 것. 



성서에서 성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은유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된 여자에 관한 은유와, 신의 은총에서 인간의 타락을 초래한 유혹자 이브에 대한 은유이다. 이 두 은유는 여성의 종속을 신이 승인했다는 증거로써 2천년 동안 인용되어 왔다. 동시에 이들 은유는 그 자체만으로 성별 관계에 관련된 가치와 실천을 정의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창세기와 같은 시적, 신화적, 풍습적 복합체에 대한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욕구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라고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의 전통이 지나치리만큼 가부장적이었다는 점과, 지난 700년 동안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구축해 낸 다양한 페미니스트 해석들이 그동안 굳건히 지켜졌고 신학적인 인가도 받았던 기독교신앙 이전의 오랜 전통에 대항해 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p.318-319)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성을 창조한 것은, 수천년 동안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하느님이 부여한 여성의 열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 해석이 이브가 창조된 갈비뼈가 아담의 '아래' 부분 중 하나이며 그래서 여성의 열등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에 기대고 있거나, 혹은 아담은 흙에서 창조되었지만 이브는 뼈와 살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거나 간에, 그 구절은 역사적으로 극도로 가부장적인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p.319-320)




창세기 이야기의 상징적 의미는 둘 다 야훼의 개입을 통해 신성한 물질들이 스며들었지만, 흙에서 창조된 아담과, 인간 몸의 일부에서 창조되었으며 고대 다산 여신들의 후계자인 이브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분법은 야훼가 벌로써 노동의 성별분업을 명한 타락 이야기 속에서 강화된다. 아담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 속에서 일할 것이며, 이브는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낳고 후손을 키울 것이다. 부과된 처벌이 남성에게 일을 부담으로 만들지만, 여성을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도록 한 벌은 여성의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자연적 결과인 여성의 출산하는 몸에 대해서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323)




이로써 3월의 마지막 날에 3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완독했다. 으하하하하. 장하고 뿌듯하다. 아직까지는 제 때에 잘 읽어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렇게 같이 읽기를 하는 게 너무 좋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같이읽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약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까지의 책들을 다 읽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읽다보니 더 읽고 싶어진다.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는 너무 오래전의 역사로 거슬로 올라가 힘들게 읽혔던만큼 좀 더 가까운 과거 속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다르게 쓰여진 가부장제에 관련된 책들이 궁금해지는 거다. 이성애를 스톡홀름 신드롬에 비유한 책을 한 권 사둔만큼, 가부장제, 결혼, 이성애에 관련된 책들을 더 많이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 권을 읽으면 또 다른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내가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만큼,

대학시절에, 그렇게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학교 도서관! 여대!) 그때 이렇게 페미니즘에 열정을 쏟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도 생각한다. 그랬다면 지금쯤 페미여전사가 되어 가부장제를 다 뿌셔버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다.






‘온정주의‘의 토대는, 교환을 위한 문서화되지 않은 계약이다. 그것은 모든 사안에서의 종속의 대가로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남성이 제공하고, 성적 서비스와 무임가사서비스를 여성이 제공한다는 계약이다. - P414

우리느 반드시, 최소한 당분간은 여성중심적(woman-centered)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능한 한 가부장적 사고를 떠나야 한다. - P396

여성들은 항상 자아(self)와 공동체의 현실을 경험해 왔고, 그것을 알고, 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는 오명을 안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을 배웠다. 월경 속에 무슨 지혜가 있을 수 있는가? 모유로 가득 찬 젖가슴 속에 무슨 지식의 원천이 있는가? 일상적인 수유와 청소 속에 추상성을 위한 무슨 재료가 있는가? 가부장적 사고는 그와 같은 성별 정의된 경험들을 비초월적인 ‘자연스러움‘이라는 영역에 소속시켰다. 여성의 지식은 단순한 ‘직관(intuition)‘ 으로 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수다(gossip)‘로 되었다. 여성들은 특히 희망이라고는 없는 특수한 것들을 다룬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비스 기능(음식과 쓰레기를 처리하는)속에서, 끊임없이 방해받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분산된 주의집중 속에서, 매일 매시간 현실을 경험한다. - P390

그 특수한 것들이 자신의 소매를 당기는 동안 사실들을 일반법칙으로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상징을 만들고 세계를 설명하는 그와, 그의 신체적,심리적 욕구와 그의 자녀를 돌보는 그녀- 그 둘간의 간극은 엄청나다. - P390

가부장제 체계는 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성의 협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수단에 의해 확보된다. 그 수단들은, 성별교의의 주입(gender indoctrination), 교육기회의 박탈, 여성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는 것, 여성의 성적 행동에 따라 ‘존중받을 수 있음‘(respectability)과 ‘일탈‘(diviance)을 규정함에 의해, 제재와 노골적 강압에 의해, 경제적 자원과 정치적 권력에의 접근 차별에 의해, 그리고 동조하는 여성들에게 포상으로 계급적 특전을 줌으로써 여성들을 분리하고 서로 반목하게 하는 것이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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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3-3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시절에 그 좋은 환경에.... 공부하지 않았던, 찬란하지 않았지만 어마무시 바빴던 20대를... 저도 엄청 후회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그래도 자꾸 아쉬움이 밀려오기는 해요.

전 아직 좀 남았네요. 재독이라고 괜히 여유부리다가 ..... ㅠㅠ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다락방 2019-03-31 21:26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에 왜그렇게 공부를 안햇을까요, 저는 ㅠㅠ 대학때도 학사경고나 받고 다니고 ㅠㅠ 그 때 못한 공부 지금 다 몰아서 해야하는가 봐요 ㅠㅠ

완독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렇지만 이 책은 다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전 너무 어렵더라고요. 용어도 낯설고 그래서 ㅠㅠ
이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좋겠지만 나와있는 다른 책들을 열심히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앞으로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단발머리님도 천천히 완독하시고!!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읽어요!

비연 2019-04-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같이 읽기 .. 넘 좋은데 번번히 참여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1인입니다.. 흑흑.
다시 참여해보기로 굳게 결심... 그래도 뭔가 꾸준이 읽고는 있는데 여러 권 붙잡고 진도는 안 나가고...

다락방 2019-04-01 17:08   좋아요 1 | URL
4월 도서는 [여자 전쟁] 이에요. 이 책은 [가부장제의 창조]에 비해서 읽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그렇다해도 내용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요.

천천히 같이 해봐요, 비연님. 천천히 같이 해봅시다.

비연 2019-04-01 17:41   좋아요 0 | URL
여자전쟁.. 이군요. 일단 시작해보렵니다. 꾸준히 길게 가기로...

무해한모리군 2019-04-01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사 15년만에 ‘나요즘 여자가 되나봐(바로 직전에 짜증을 냈음. 쉽게 감정적이 된다란 뜻인듯)‘란 남자팀장의 말에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예요. 주의해주세요‘라고 처음으로 말했어요.

제가 입사했을때 관리자급중 여성 ‘0‘명, 현재는 메니저급은 6명(대다수는 원래도 여성팀원이 많던 디자인팀) 팀장임원은 여전히 0.

저는 제가 남성문화에 맞추면서 살아남았는데 후배들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생활에서 불편해져 보려구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열심히 해야되는데 삶이 비인간적으로 바쁘네요 제길 ㅠㅠㅠㅠㅠㅠ

다락방 2019-04-01 17:11   좋아요 0 | URL
아이고 바쁘셔서 어떡해요, 모리님 ㅠㅠ 비인간적으로 바쁘다니 너무해 ㅠㅠ 아마도 지금이 3월이라 (이제 4월됐지만) 더 바쁘셨던 거겠죠? 아무쪼록 4,5월은 좀 한가해지시길 바랍니다.

일일이 지적하고 잔소리하는 거 너무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도 제가 지금 피로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저보다 훨씬 젊고 어린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세상이 되는거겠죠. 지치지말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어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그 과정에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자, 우리 열심히 합시다, 모리님!

블랙겟타 2019-04-0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역시나 마지막은 스티키인증샷으로. ^^
제가 가지고 있는 책표지랑 다른걸로 봐서 구판인가요?

읽으면서 저도 느낀건데 이 책을 읽으면 종교 속에도 드러나는 가부장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껏 여성주의에 대한 책을 몇권읽어가면서 특히 가부장제도에 대해 관심이 더 갔었는데요.
그래서 이 책을 제목만 봤었을 땐. 나에게 딱 맞는 책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으.... 저에게 제일 취약한 종교와 옛날이야기..를 중심으로 내용이 쓰여져있다보니(변명? 인가...;;;;)
아직도 쪼..쪼꼼.. 남았는데 고..곧 따라갈께요. ^^;;;
(3월안으로 읽지 못한 것은 스스로에게 분하지만요.ㅠ)

다락방 2019-04-03 08:55   좋아요 1 | URL
으하하핫. 축하 감사드려요!
네, 제가 가지고있는 건 구판이에요. 구판을 구입했던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지요. 그 친구는 다 읽지도 않고 제게 건넸답니다. 아하핫.
그나저나 저 구판은 난장판이 되었어요. 중간이 떡- 벌어지는 바람에 ㅋㅋㅋ 그래서 새 책을 살까 했지만, 그냥 구판으로 읽고 가지고있기로 결정했어요.


종교야말로 사실 가장 가부장적이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여자의 위치는 그런식으로 남자로 인해, 남자 때문에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인식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을텐데, 그러니 가부장제로부터 빠져나오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자신이 믿었던 종교로부터 느꼈을 배신감을 생각하면, 뭐랄까,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고요. 너무 오래된 역사라 갈 길이 그만큼 더 멀게 느껴져요.


저도 역사에 너무 취약해서(학교다닐 때 국사, 세계사를 제일 못했어요 ㅋㅋ 아 정치경제도 ㅋㅋㅋㅋ 다 못했네 ㅋㅋㅋㅋㅋ), 그래서 이 책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메소포타미아 나오는데 눈알 팽팽 돌아가더라고요. 역시 현대물이 저한테는 읽기가 더 수월해요. 얼른 따라오시고요, 블랙겟타님! 여러가지로 4월의 도서도 기대됩니다. 4월의 도서 읽고 우리가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블랙겟타 2019-04-03 10:48   좋아요 0 | URL
네네!!
4월에도 자주뵈어요 다락방님 ^^ (๑˃̵ᴗ˂̵)و

다락방 2019-04-03 10:48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은 대체 어케알고 쓰시나요 ㅋㅋㅋㅋ 지난번부터 너무 귀여워서 원 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4-03 10:58   좋아요 0 | URL
어이쿠.. (◜▿‾ )ノ
그 그런가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03 11:05   좋아요 1 | URL
아이참 ㅋㅋㅋ 귀여워 미치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일까지 다 읽을 생각으로 까페에 들고옴!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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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3-30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ㅠㅠ
저 이번주엔 개인적인 일로 전혀 읽을 시간없었네요.
그리고 주말엔 알바로 시간이 많진 않지만 저도 부지런히 읽어서 끝내야겠어요.
결국 이번달 이 책의 글도 하나도 못썼... (˃̵͈᷄⌓˂̵͈᷅)

다락방님도.. 저도 빠샤!! :))

공쟝쟝 2019-03-30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글을 읽고 캘리번과 마녀 들고 카페 나왔습니다..ㅋㅋㅋ 히히

단발머리 2019-03-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랑 책이랑 북마크라니....
아~~~~ 정갈하네요.

퍼론 2019-03-3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힘을 보탭니다 빠샤!!
 
















'엘런'은 데이트앱을 통해 '패트릭'이란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만날수록 더 좋아지는 남자. 결국 내 연애가 그간 실패로 끝났던 것은 결국 이 사람에게 닿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게 만든 남자.



엘런은 실패로 끝난 자신의 과거 연애를 늘 뭐랄까, 정말로 실패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엘런은 그 세 번의 연애가 사실은 지금 이 해변에서의 순간이라는 운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트릭 스콧이라는 녹색 눈의 측량사에게 닿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p.37)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나면 늘 언제나 슬프고 힘들지만, 언젠가의 연애에서는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연애들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이 내게 행운이었다' 라고 생각하게 됐던 거다. 만약 그 연애들 사이에 결혼이라도 끼어있었어봐, 나는 지금 이 남자를 만날 수 없었을 거 아냐!

분명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는 힘든 시간들을 겪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내게도 분명 있었던 거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고 해서, 다시 싱글이 됐다고 해서 그 사랑이 '실패한' 사랑은 아니라고, '마리 루티'가 자신의 책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사랑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마리 루티의 말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안정성을 기준으로 연애의 성공을 측정하곤 합니다. 남녀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속석 외에도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영혼을 건드리지 않는 밋밋한 관계를 오래 끌고 가느니 아주 잠깐이라도 무모한 열정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불안정한 관계를 좇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정감, 편안한, 신뢰감이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근본적인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통찰은 사랑의 좌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좌절은 인생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게 만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좌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보상인 셈이죠. (pp.22-23)




엘런은 패트릭을 만나기 위해 결국 이렇게 돌아온 것일까, 를 생각하는데 패트릭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무엇일까. 나는 혹시 프로포즈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한 뒤에 나쁜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 뒤에 고백을 들은 적도 있어서, 당연히 흐름은 그렇게 가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엘런은 '우리는 아닌 것 같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한다. 잠깐 그가 화장실 간 틈을 타,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처럼 '너를 사랑해' 하는 고백도 아니고, 엘런이 생각한 것처럼 '그만 만나고싶다'는 고백도 아니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그에게 스토커가 있다고 한다. 스토커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패트릭은 '사스키아'란 여자와 사귀었고 함께 살기도 했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패트릭의 아들인 '잭'의 엄마 노릇을 했다. 사스키아가 채 준비되지 않았는데, 사스키아는 아직 사랑으로 가득찼는데, 그런데 패트릭은 사스키아에게 '그만두자'고 말을 했던 거다. 그 후로 계속해서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뒤를 따라다니고, 그가 없는 동안 집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아들의 축구경기를 보러가고, 이메일을 보내고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패트릭이 그만하라고 해도 막무가내. 그녀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패트릭이 없는 게, 잭이 없는 게.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귀려고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결국 그녀는 패트릭이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엘런'이 최면술사란 직업을 가진 걸 알고 그녀에게 찾아가 가명을 대고 최면을 받으며 엘런의 내담자가 되기까지 한다.



'리안 모리아티'의 책은 읽을 때마다 항상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조용히 은근히 감상할 수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은, 그것도 시끄러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딱히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그런데 나 마니아..), 그녀가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쓰는 건 사실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힘드니까. 게다가 수시로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엘런'에게 이입이 되지 않아 초반부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가 전여친으로부터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는데, 나는 너무 짜증이 나는 거다. 그런데 엘런은 그녀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거다. 좀 재미있게 생각한달까. 나는 이런 엘런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너무 싫은 거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에게 '전여친이 스토커가 되어서 쫓아다녀, 지금 여기에도 와있어' 라고 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고 무섭고 걱정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관계를 어쩌나 고민할 것 같은데, 엘런은 그렇지가 않은 거다. 왜 스토커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 아 스트레스...



그런데 놀라운 건, 읽다 보면 나 역시 스토커인 '사스키아'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거다. 나는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는 내게 끝났다고 하는거지, 나는 여전히 그의 옆자리가 내자리인것 같은데, 왜 그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려고 하는거지. 노이해... 이런 마음, 너무 잘 알겠는거다. 그를 향한 집착,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그게 뭔지 너무 알겠어서, 그래서 또 스트레스인거다. 내가 사스키아, 이 스토커랑 다른 게 뭔가, 이 집착, 이 열정, 이 미련... 모두 다 내것인데, 나나 사스키아나 별다를 바 없는 거 아닌가. 스토커에게 이입하다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막 이렇게 되어가지고 스트레스가 대박 찾아오는 거다. 나.. 스토커 가능성 있는건가. 이래서 너무 스트레스 ㅠㅠ



누구나 사랑을 잃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힘이 든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깝고 친근했는가, 얼마나 많은 걸 나누었는가. 우리가 그저 친구였다면 계속 그렇게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여전히 다정할 수 있을텐데, 우리가 애인이었으므로 다시는 이 뜨거운 사랑을 줄 방법도 없고 그의 다정함을 느낄 수도 없다니. 가장 가까운 사이가 어떻게 이토록 가장 먼 사이가 되었나, 다시 보지 않을 사이가 되었나, 너무 슬프잖아. 아, 이별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한 사람과 아주 친근한 관계를 맺고 매일같이 함께 자고 일어나고 주기적으로 엄청나게 사적인 일들을 함께하다가 갑자기 그 사람의 전화번호는 물론, 어디에서 사는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지난주에는, 작년에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다니, 엘런에게는 가끔 그런 상황이 아주 기묘하고도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p.38)



매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매시간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주말에는 무얼하는지 죄다 알고 있다가 이제는 어디에서 사는지, 무얼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는 거, 엘런 말대로 너무 기묘하고 잘못된 것 같잖아. 그렇지 않은가요, 여러분... 슬픔의 새드니스.....




엘런과 패트릭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란다. 사스키아가 졸졸 따라다녀도 그들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엘런은 '나는 사스키아만큼 패트릭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사랑의 크기는 그보다 작다' 라고도 생각하고,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그저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건 아닌가'도 수시로 자신에게 묻는다.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깊어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남자 때문에 짜증도 난다. 아아..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아버지 사진은 하나도 없냐고 물은 건가? 그러니까 내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거네? 내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한지 벌써 몇 년은 됐다는 듯이,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엘런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또다시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졌다. 내가 이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에 절실하게 매달려 있는 거면 어쩌지? 이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이 내 지나친 망상이면 어쩌지? 이 사람이 사실은 그저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멍청이라면 어쩌지? (p.124)




그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그들은 같이 살기로 한다. 그렇게 패트릭과 그의 어린 아들 잭은 엘런의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는데, 아아, 여기서 또 한번 스트레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데이트 할 때는 몰랐는데, 데이트 할 때 그의 집에 가서 자고 그럴 때는 몰랐는데, 이 남자가 세상에,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이었고, 오래된 짐을 가져와서 놓고는 그걸 치우라고 치우라고 잔소리를 해도 치우지 않는 사람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엘런은 이제 딥빡이 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양 내가 뭘한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트레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아, 이 부분에서 나 엘런하고 같이 대박 스트레스 받았다. 그러게, 혼자살아 이 여자야!! 막 이렇게 일어나서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달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패트릭 거지?"

매들린이 덥석 그 주제를 잡았다.

"맞아. 계속 옮겨달라고 부탁했거든. 상자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잔소리를 하지 않고 남자가 일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엘런이 물었고,

"오호, 그거야말로 10억짜리 질문이군."

매들린이 대답했다. (p.408)



아아 스트레스 스트레스. 엘런은 그러지말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자꾸만 상자는 언제 치울거냐고 묻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외조부가 살던 이 집이 패트릭의 짐으로 좁아지고 지저분해졌어, 아 빡침이...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


그러나 무릇,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데 어찌 순탄하기만 할것이요, 이렇게 마찰이 일어나면 해결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짐을 치우지 않는 패트릭과 거기에서 빡침 오는 엘런을 보면서 건지 아일랜드 생각을 했다. 건지 아일랜드에서도 약혼자가 같이 살러 들어오기 때문에 책장의 절반을 내어줬더니 거기에 트로피만 잔뜩 진열하는 남자가 나왔더랬지. 나중에 여자는 약혼자랑 헤어지지. 후훗.



그러나 사실 엘런이 패트릭과 결혼하게 되는데 가장 망설이는 이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그가, 패트릭이, 죽은 그의 아내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신과 비교하며 자신을 그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것. 그 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늘상 그녀를 괴롭힌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 남자가,그러나 나를 '가장'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

슬픔의 새드니스..

우리는 이렇게 다들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사는건가요..






한편,스토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으로서 그리고 잭의 엄마 역할까지 잘해내면서 행복했다. 게다가 패트릭의 부모님들까지도 자신을 좋아하고 다정하게 대해줬고. 그런데 패트릭과 헤어지니 잭도, 그리고 패트릭의 부모님도 잃게된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 소속감을 느끼던 사람이 이들 뿐이었는데, 그런데 한꺼번에 이들을 모두 잃게된 것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그 사람들을 대체할 사람들을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해. 나에게는 이모도, 고모도, 사촌도, 조부모도 없단 말이야. 나는 백업이 되어줄 사람들을 마련해두지 못했어. 이런 상실을 겪었을 때 나를 지탱해줄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어. (p.225)



사스키아가 패트릭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그의 집에 침입하고 그의 새로운 애인을 감시하는 것 모두, 그녀에게는 패트릭 외에 다른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생각나고 보고싶고. 헤어진 뒤에 상실감 역시 어마어마할 것이다. 늘 친근했던 그의 소식을 이제 알 수조차 없다니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그러니 어떻게해서든 그의 삶을 엿보고 싶고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스키아와 내가 같다. 그러나 사스키아는 그러기 위해 상대의 스트레스와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한다. 누굴 만나는지 보고 약속장소에 따라가고. 그녀의 삶은 온통 그로 채워져있다. 나는 그녀가 갈 데까지 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옆엔 내가 있어야해' 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면 화가 난다. 제발 날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그녀의 바람대로 '역시 너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 하고 그녀에게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 이제 패트릭의 새로운 여자친구는 임신했다. 그 사실마저도 사스키아는 알게 됐고, 이 때는 정말 그녀가 미칠지경에 놓인다. 아이고.. 참... 몰랐으면 미치지는 않았을텐데. 게다가 초음파 사진 찍으러 패트릭과 엘런이 잭까지 함께 데리고 갔는데 거길 따라가서 통곡을 한다. 이 때는 정말이지 너무... ㅠㅠ 아니 이 여자야, 거길 왜 따라가서 자기한테 스스로 상처를 줘, 몰랐으면 됐잖아, 몰랐으면...

몰랐으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스토커에게도 스토커의 사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시작한걸까, 싶었는데,

마지막에는 스토커가 상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사스키아 역시도 자신이 자신의 감정, 자신의 사랑에 빠져서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은 패트릭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패트릭이 어떤 기분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다.


나는 상대를 괴롭히는 사랑은, 그것이 상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스토커의 경우에도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잊지못해', '나는 늘 너랑 있고 싶어' 라고 표면적으로 상대를 사랑해서라 말하지만, 그러나 스토킹을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지마', '하지마', '니가 그러면 괴로워'라고 누누이 말해도 그걸 들을 생각조차 없는 거다. 자신의 사랑에 갇혀서 거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도무지 상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데, 네, 그 사랑 크죠, 너무 큰데, 그거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에요.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괴롭히면 안되는거죠. 괴롭게 하는 게 무슨 사랑이에요.



사스키아가 뒤늦게라도 이걸 깨닫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당신이 계속 전화를 걸었을 때, 패트릭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패트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패트릭은 그날 밤 두려웠을까요?"

이상한 건, 지난 3년 동안 나는 패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패트릭이 어땠을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거야.

"폭력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육체적인 폭력만 폭력인 건 아니에요. 당신은 패트릭을 무기력하게 만든 거예요."

"무기력하게 만들다뇨? 나는 패트릭을 사랑했어요. 그저 다시 함께하기를 바란 것뿐이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사스키아."

내 정신과 의사는 나를 어디로든 달아나지 못하게 했어. 마치 나를 거울 앞에 세워놓고는, 내가 자꾸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려고 할 때마다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거울 앞으로 돌려놓는 것처럼 느껴졌어. 내가 손으로 눈을 가릴 때마다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내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는 거야. 마침내 나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게 말이야. (p.621)






진짜 반복해 말하지만, '너 없이 안돼' 는 안된다. '너가 없어도 된다'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씩씩하게. 다른 사람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돼. 물론 당신이 있으면 내 삶은 더 즐겁고 행복해지겠지, 가급적이면 당신하고 같이 살고 싶겠지. 그러나 '너 없으면 난 못산다' 로 살아가면, 헤어짐을 견디지 못할 뿐더러 상대를 괴롭히게 된다.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사스키아가 자신이 '백업해둔' 인간 관계가 없다고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없으니 미치는 거다.

그러나 사스키아의 경우, 없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 곁에도 다른 사람들이, 친구랑 회사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녀가 몰랐다. 그녀가 그들을 관계라고 생각하지를 않은 거였어. 이게 그녀가 자신의 사랑안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렇다. 자기 사랑에, 자기의 큰 사랑에 갇혀 있으니, 상대으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따라다니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보지도 못해. 그것은 그렇다면 '상대를 향한 이토록 큰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내 사랑은 사랑이되 상대의 사랑은 타이밍일 수 있다.

나 역시 내 사랑이 타이밍이고 상대의 사랑이 사랑이었던 적도 있고.

사랑이 그저 순수한 사랑이라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시작되고 또 끝나는 관계는 드문 것 같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식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이유들로도 헤어질 수 있다.

사랑은 중요하고 또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지만, 사랑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순간순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홀로 서는 것도, 살아갈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때로는 애인과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거니까.





내 정신과 의사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이유가 사실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녀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건 그 자신의 문제, 콜린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고 했어.

"만약 그때 회의장에서 만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엘런이었다고 해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헤어졌을 거예요."

내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어.

"아니에요.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인걸요.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어.

"타이밍의 문제예요." (p.623)





어디에서 어떤 타이밍이 어떤 방식으로 끼어든걸까, 나는 계속 생각한다. 멈추지 않고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큰 사랑을 품고서, 아무도 이렇게 큰 사랑을 품을 수 없다고 자부할만큼 큰 사랑을 품고서는, 그러나 사랑하고 헤어지게 된 것은 어디에서 어떤 우연이 끼어든걸까. 어쩌면 운명이란 큰 틀에서 이 시기에 누군가 들어오고 또 이 시기에 누군가 나가고 하는 것들이 다 정해져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정해져있다면, 그래서 이 시점에 헤어져야 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큰 사랑은 남겨두지 말고 같이 거둬갔어야 하는 건 아닌가. 이 감정은 남겨둔채로 관계만 정리하라고 하면 그건 너무 엉망진창의 운명의 흐름 아닌가. 헤어지는 게 운명이었다면 고통스럽지 않아야 운명을 받아들일 거 아냐.

나에게는 사랑이었고 상대에게는 타이밍이었던걸까.




누군가를 뒤에서 한참 응시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돌아보게 돼. 실제로 쳐다보는 사람을 보지는 못하지만 공기를 흐르는 기운이 다르다는 걸 느끼는 거야.

그게 바로 내가 패트릭을 오랫동안, 충분히 오랫동안 생각하면 패트릭이 나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유야. 같은 방에서 한 사람을 오랫동안 쳐다봤을 때 그 시선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리 떨어진 지역에 있어도 엄청난 감정을 계속해서 보내면, 수많은 감정을 해일처럼 보내면, 그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p.145-146)




겁나 텔레파시 쏘고 있는데, 느껴지니?







사스키아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온 친구가 사스키아가 받은 초콜렛을 먹어봐도 되냐고 묻고서는 하나씩 계속 먹는 장면이 있다.




나는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려고 했지만, 아주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손이 너무 떨려서 꺼내지지가 않았어.

"내가 해줄게요."

랜스가 부드럽게 말했어.

"초콜릿 한 개만 먹어도 돼요?'

케이트가 말했어.

"나중에 할게요."

내가 말했어.

"초콜릿 하나 먹으면 안 돼요?"

케이트가 말했어.

"케이트!"

랜스가 말했어.

"미안해요."

케이트가 말했어.

"당연히 드셔도 돼요."

내가 말했어. (p.523)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우리가 가져다 줄게요."

케이트가 초콜릿을 두 개쩨 먹으면서 말했어. (p.524)



나는 다시 랜스의 아내를 봤어. 정말로 말랐고, 가슴은 평평했어. 엄마가 봤다면 '남자아이처럼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구나'라고 했을 것 같아. 케이트는 산림지대에서 온 사람처럼 머리가 정말 짧았고 눈이 컸어. 그리고 아주 이상한 각도로 의자에 앉아서 여전히 내 초콜릿을 먹고 있었어. (p.524-525)



아이고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 늘상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초코릿을 좋아한다. 어느 날에는 되게 먹고싶어질 때가 있는 거야. 그렇지만 매일 그런 건 아니야. 초콜릿보다는 와인을 더 사랑합니다. 아니 근데 저 장면 읽는데 갑자기 나도 하나씩 꺼내먹는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은 거다. 고디바라든가 길리안 이라든가, 왜 그렇게 하나씩 작게 들어가 있는 그런 초콜릿. 아 너무 먹고 싶어, 나도 하나씩 꺼내먹다가 정신을 차린 다음에 '헐, 내가 이거 다 먹어버렸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야. 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장면 읽은 뒤로 머릿속에 초콜릿 생각만 하다가 잊고 있었는데, 아까 페이퍼 써야지, 하는 순간 '아 초콜릿 먹고싶어!' 이렇게 된거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에게는 얼마전에 동료로부터 받은 초콜렛이 있지.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서 허겁지겁 그 초콜릿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건 내가 원한 그 낱개 초콜릿이 아니라 뭐라고 하지, 막대 초콜릿이라고 해야 하나 통 초콜릿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부러뜨려 먹어야 하는 허쉬초콜렛이고, 아아, 초콜렛이 순수하지 못하고 피넛버터랑 캬라멜 크림.. 어쩌고 막 이렇다. 아쉬우나마 이거라도 먹긴 했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그 초콜릿이 아니야,진짜가 아니다! 아아, 고디바 낱개 박스째 열어놓고 하나씩 집어 먹고 싶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런거 부러뜨려 먹는 거 말고, 그런걸로 하나씩 집어 먹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리고 제일 하고 싶은 건 다 먹은 다음에


Oops!! I did it again!!



하는 것이야...











길게 쓰긴 했는데 뭘 썼는지를 모르겠다. 킁킁.





엘런은 그런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고 있을까? 엘런은 특별히 운동을 좋아하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아. 엘런이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어. 나에게 엘런은 그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찬가를 읊는 사람일 뿐이야. 요가는 하겠지. 태양을 보고 합장하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할 것 같아. - P148

엘런은 언제나 엄마가 늘 엘런 자신을 그렇게 날카롭고 맹렬하게 쳐다보는 이유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건 엄마가 엘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감추려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항상 사랑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엄마의 사랑스러운 단점이라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엄마에게 ‘나를 조금만 더 좋아해봐. 사랑에 좀 더 너그러워지란 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사랑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감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엘런도 사랑이 얼마나, 문자 그대로 얼마나 아픈지를 안다. 가슴 한가운데가 사랑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 P613

"패트릭이 널 보는 눈길이 참 좋더라. 네가 옳아. 존은 재미있기는 했지만, 패트릭이 바라보는 것처럼 너를 보지는 않았어."
"패트릭이 나를 어떻게 보는데?" - P541

"난 항상 패트릭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훨신 사랑하면 되는 거니까." - P498

엘런의 혈관 속으로 따뜻하고 평온한 감정이 퍼져나갔다. 엘런의 마음을 움직인 건 패트릭이 한 말이 아니었다. 엘런의 이해가 너무나도,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듯이, 말하는 내내 패트릭의 미간에 잡혀 있던 두 가닥 굵은 주름이었다. - P571

존과는 4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엘런은 존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런한테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존은 엘런하고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였다.
엘런은 정말로 상처를 입었다. 도자기 컵 여러 개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것처럼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예리한 통증이 파편이 되어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콧구멍 속을 따끔거리게 만든 고통들이 커다란 통증이 되어 쐐기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 P192

"그만두라고요?"
"맞아요. 그게 내가 주는 아주 끝내주는 충고예요. 그만둘 것!"
"그냥……그만두라고요?"
케이트는 웃기 시작했어.
"내가 치료사라면 그렇게 말할 거예요. 사스키아, 그냥 그만둬요. 스토킹은 관두고 뜨개질이나 해요!" - P588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어야 했어요."
엘런은 걸어가는 로지를 보면서 말했다.
"뒤늦은 깨달음이라. 항상 문제가 생겨야 알게 된다는 거구나."
엘런의 아버지가 말했다. - P585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반쪽 마음도 아니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남은 평생을 다해서 그걸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미친 최면술사님?" - P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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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이트 콤플렉스] 스토커와 아버지
    from 마지막 키스 2020-10-15 10:37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우에 나르시시즘은 발달의 한 단계로 간주될 수 있는데,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대상에게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사랑은 보통 부모 중 한명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자기애를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시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원래의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초래하게 되고, 이는 정신병의 발달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정신병의 징후들에는 자기 자
 
 
jeje 2019-03-2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낱개 초코렛 하나씩 집어먹고싶은 최면에 걸렸습니다아아아아.....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3-29 22:24   좋아요 0 | URL
가까운 시일내에 고디바를 꼭 사먹고 싶습니다!!! 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19-03-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랑학 수업 꼭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9-03-29 22:25   좋아요 1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후회하지 않으실거라 말씀드려요. 후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