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쓴 공저자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p.35)



이 책의 70페이지까지 읽은 현재, 머리말에 쓰여진 이 구절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추천의 말, 옮긴이의 말, 해설, 감사 인사, 머리말.. 까지, 읽을 게 많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되게 '쎄다'. 와 쎄다, 하면서 읽다가 저 머리말을 딱 만나게 되는데, 그 후에 시작되는 본문을 읽노라면 다시 앞페이지로 돌아가 저 머리말을 읽고 끄덕이게 된다. 아, 거짓없이 과장없이 당신이 한 말은 사실이네요.



이 책의 1장은 일단 스톡홀름 증후군 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겨나게 된 바로 그 사연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는데, 이 자세한 사연만 읽으면서도 너무 충격적이라 멍해진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서 알고는 있을 것이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현상. 나도 그렇게는 알고 있었지만, 그 용어가 탄생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알게된 건 이 책 때문이었는데, 아, 외부에서 보는 것과 내부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싶었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어떤 감정에 깊이 빠져있을 때, 그것이 분노나 슬픔이나 어떤 감정이든 거기에 깊이 들어가있을 때, 그 때는 판단하기를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그 때 내릴 판단은 잘못된 확률이 크므로. 그 때의 나는 내 감정의 내부자이니까. 그 감정에서 조금만 비켜나도 우리는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온전히 내 개인에 대한 문제라면, 사회적으로도 역시 마찬가지. 


나는 종교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을 여기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깊이 들어가있을 때, 그 종교를 열렬하게 믿고 있을 때, 그 때 성직자는 신도에게 매우 힘이 세다. 절대적인 권력자. 그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신도들을 성폭행을 하게 될 때,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왜 그사람 말을 듣고 그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그 내부 안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거다.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인질은 철저하게 내부자였다. 외부자인 내가 볼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당연히 인질은 인질범을 두려워한 후 증오해야 한다. 왜 자신을 인질로 잡아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했는지, 그러므로 인질범을 미워하고 경멸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인질범의 편이 되어 인질범을 동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거야말로 내부와 외부가 나눠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됐을까.



'스톡홀름 증후군'은 1973년 인질로 잡힌 4명의 은행 직원이 인질범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자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p.47)



인질로 잡힌 4명중 3명이 여자였는데, 인질범은 2명이었고, 인질범들은 이들을 인질로 잡아 목숨을 위협함과 동시에 인질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아직도 왜 신호가 안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리에만 쏘겠다니 올손은 너무나 친절하다고 감격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당연히 올손은 강도였고,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목숨을 위협했던 범법자였으며,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됐다." (p.53)



그들이 며칠간 인질로 잡혀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건 인질범들 때문이었다. 인질범들이 은행으로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인데, 인질들은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제때 들어주지 않는 경찰들을 원망하게 된다. 경찰들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최루 가스를 살포하기로 했고 가스를 살포할 구멍을 금고실 천장에 뚫으려고 하자 인질범은 환기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이후 폭발물에서 멀어지려던 올손은 바닥에 함께 웅크리고 있던 엔마르크와 올드그렌에게 다가왔다. 둘은 손으로 귀를 막고 머리 위로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올손은 참을성 있는 말투로 둘에게 벽에서 움푹 들어간 곳까지는 폭발물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자기처럼 폭발물에서 더 멀리 떨어질 것을 충고했다. 귀를 막을 필요는 없지만 입은 열고 있는 게 좋을 거라는 팁도 주었다. 올드그렌은 인터뷰에서 "전 그때 경찰은 왜 저이만큼 배려심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p.59)



인질범이 인질로 잡지 않았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폭발물 설치도 인질범이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질범에게 '배려심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가장 놀란 건 이 사건이 종결되고난 후였다. 




1985년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 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질이었던 여자 세 명 중 두 명이 인질범 두 명과 각각 약혼했다. (p.62)



정말 놀랐다. 너무 놀랐다. 어떻게 인질로 만든 사람과 약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외부인의 시각과 이토록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 대체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무엇인가. 너무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다. 초반에 이미 스톡홀름 신드롬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내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인데,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이야기될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식의 흐름으로 진행될지 짐작이 되면서,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읽고 싶으면서 동시에 읽기 싫은 마음. 알고 싶으면서 동시에 알기 싫은 마음이 공존해서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본문 전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과 해설에도 쎈 말들이 가득해서, 와, 이거 이성애자인 사람들이 읽으면 대단히 충격받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아래 밑줄긋기로 추가하겠다.



아아, 일요일 밤, 나는 이 책을 조금 더 읽을 것인가, 여자 전쟁과 여자는 인질이다로 지친 마음, 줌파 라히리로 달랠 것인가 잭 리처로 달랠 것인가,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오늘 봄날의 선물이라며 친구에게 이 책을 같이 읽자고 선물했는데, 내가 잘한걸까.... 못할짓 한 건 아닐까... 아아 혼란스럽다.




"너는 창녀, 아기는 사생아라 불리겠지.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은 없어." 1920년대가 배경인 한 영국 드라마(피키 블라인더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제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싸튀충(정액을 싸고 튄 사람이라는 뜻)‘ 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으로 가해자를 끌어낼 때 페미니즘은 가속 페달을 밟은 듯 거칠게 돌진했다. (유혜담, 옮긴이의 말) - P19

꼭 소개하고 싶었던 용어가 ‘탈혼‘이다. 온라인을 주축으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이 단어는 이혼이 일종의 탈출 감행임을 지적한다. 결혼 제도 속의 여자는 인질이나 마찬가지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책의 메시지를 꿰뚫는 용어를 만들어낸 셈이다. 실제로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탈출‘이며, 6장 전체를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범에 할애하고 있다. (유혜단, 옮긴이의 말) - P22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가해자와 애착을 형성한 것은 이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피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심리적 기제였더 것이다. (박혜정, 해설) - P27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남자들이 조직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여자들을 때리고 강간하고 살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대다수가 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가 하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남자들의 폭력과 이성애는 서로의 존재를 상호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한 순간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남자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고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찾아 그에게 의지하고자 하게 된다. 여자에게 서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신사적인 남자라 할지라도, 그는 분명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성폭력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여자들의 남자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종속적인 이성애 관계 안으로 들어가 남자에게 감정적, 성적, 가사적 무보수 노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박혜정, 해설) - P28

한편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한편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면, 가부장제는 기름칠 잘 한 기계처럼 남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게 되어 있다. 여자 계급이 피억압 계급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지배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게 되므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이 매우 효과적으로 차단되는 셈이다. (박혜정, 해설) - P28

6장은 여자들이 계속 남성 폭력을 경험하며, 서로로부터 사상적.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탈출할 수도 없고, 남자의 사소한 친절에 기댄채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의 인질 심리(사회적 흐톡홀름 증후군)를 바꿀 수 있을지를 다룬다. 지배나 복종이 아닌 상호성에 기반을 둔 관계만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런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머리말) - P41

정혈: 여자가 주기적으로 자궁에서 피를 흘리는 현상. 남자가 배출하는 체액은 깨끗하다는 뜻의 ‘정액‘ 이라고 부르면서, 여자가 배출하는 체액은 더러운 것처럼 ‘생리‘, ‘그날‘, ‘월경‘등으로 돌려 말하는 문화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 P57

웨셀리어스와 데사르노는 두 번째 인질 피해자만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이 피해자가 인질범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긍정적인 접촉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인질들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반면 이 피해자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감금 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피해자에게 스토골름 증후군이 나타났다는 근거로는 "그가 인질범에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점, 외부에 있던 책임자들에게 분노했다는 점, 인질이 죽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인질범이 실제로는 악취를 풍기고 행색이 초라했음에도, 인질범이 말쑥하고 매력적이었다고 묘사한 유일한 피해자였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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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5월, 여자는 인질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9-04-29 07:53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여자 디제이는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이라면 전혀 달랐겠지만, 대학시절 사귀었던 첫사랑 남친에게 왜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르겠다고. 심지어 그 남자는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 매달리고 고가의 지갑까지 선물로 주었었다는 거다. 같이 방송하던 게스트도 왜그랬냐고 하고, 디제이 역시도 왜그랬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나 역시도 의문이었다.'왜 그랬을까?'바람을 피운 건 나를 배
  2. [여자는 인질이다] 바람남은 바람남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9-05-07 11:27 
    어제 늦은밤. 컵라면에 밥을 먹고 홍콩에서 돌아온 짐을 풀며 틀어둔 티비에서는 <연애의 참견>을 방송하고 있었다. 사연 속의 여자는 남자와 일년 가까이 연애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던 중, 남친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복수를 결심한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든 뒤에 보란듯이 빵 차주겠어!' 하며 D-day 를 50일 뒤로 잡는다. 그렇게 남자의 집에서 다른 여자의 흔적을 찾아 확보하던 중, 까페에서 남친이 다른 여자와
 
 
단발머리 2019-04-09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밑줄긋기 해주신 옮긴이의 말, 해설만 따라 읽어봐도 어마무시하네요.
<혁명의 영점>의 ˝우리는 하녀이자 매춘부이고 간호사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45쪽)˝의 문단급 폭풍 감동이 예상되요.
다락방님의 친구라면 봄날의 선물인 이 책에 대해 큰 기대를 갖게 될 거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부럽부럽^^

다락방 2019-04-09 11: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혁명의 영점 그 문구 떠올렸어요. 와, 이 책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책이에요. 읽는데 막 너무 후려치고 아파요. 단발머리님, 단단히 각오하셔야 해요. 저는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인질들이 인질범과 약혼한 거 읽고 너무 망치로 머리 맞은 것 같았어요. 힘들어요 ㅠㅠ

단발머리 2019-04-09 14:12   좋아요 0 | URL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하시니 진짜 각오는 필요할 것 같아요.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인식이 있는 여자가 이 세상을... 남성 위주의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전 없다고 봐요.
저를 포함해 많은 여자들이 타협하고, 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야만 생존이 가능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테니까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처럼요 ㅠㅠ
다락방님께 망치로 맞은듯한 충격을 주는 책이라면 저도 꼭 읽어봐야하는 책이었네요.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합니다.

다락방 2019-04-10 10:2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여자 전쟁도 또 여자는 인질이다도 읽게 되시면 틈틈이 글 남겨 주세요.
저 어제 여자 전쟁 2장 읽었거든요. 아르헨티나 할머니. 또 여러가지로 마음이 복잡했어요. 휴..
여자들은 계속 강했는데 왜 세상은 ‘여자는 약하다‘는걸 그토록이나 주입하려 한걸까요. 마치 남자가 지켜줘야 되는것처럼.
저는 틈틈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힘겨운 책들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수 로이드 로버츠'는 이 책을 마무리 하기 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 책의 <들어가며>는 저자의 딸인 '세라 모리스'가 썼다. 




세라에게,

질문: 우리가 너희 가족이 겪는 참담한 슬픔에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수가 누렸어야 마땅할 생을 너무 일찍 마감했다는 점을 계속 괴로워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녀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용기를 줬던 수의 놀라운 삶을 기리는 게 나을까? (들어가며, p.10, 수 로이드 로버츠가 사망한 뒤 그녀의 딸에게 도착한 메세지)



최고의 언론인이면서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수 로이드 로버츠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억하고 기리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들어가며 를 읽는 순간부터 코끝이 찡해진다. 새삼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가도 실감했다. 나는 공공연하게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해왔는데, 어느틈에 시간은 나를 '여자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지금으로 데려다 놓았다. 열심히 분노하고 열심히 싸우는 여자들이 이렇게 세계 곳곳에 있다. 감사와 응원과 연대의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아이쿠야, 이 책의 1장은 무려 할례에 대한 이야기다. 읽기 전부터 벌써 기운이 딸리는 느낌.



수 로이드 로버츠는 감비아에서 할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한 여성을 인터뷰한다. 그걸 하기 싫어서, 다른 어린 여자아이들의 성기를 자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조국으로부터 도망온 여자. 그녀는 곧 영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감비아로 가 '이맘(이슬람교 교단의 지도자로서 학식이 뛰어난 이슬람 학자에 대한 존칭 p.27)' 을 만난다.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살아본 적이 단 일 분도 없으면서 그러나 여성의 성기에 대해 아주 잘도 지껄인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이것이 이슬람 문화권에서 받아들여져온 이유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는 이유, 또 그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배석한 남자들이 동의의 뜻을 담아 연신 끄덕거리는 분위기에 취해, 이맘은 말을 계속했다. "FGM은 여성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할례할 때 잘라내는 것은 매우 가려운 부위예요. 너무나 간지러워서 그걸 완화하려면 철수세미로 문질러야 할 정도라고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말이죠, 할례를 하지 않은 여자는 축축한 분비물이 나와요. 의자에서 일어날 때마다 옷이 잔뜩 젖을 지경이라 공공장소에 있다면 정말 망신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이쯤 되자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자로서, 약간의 분노를 담아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클리토리스를 가진 채 6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당신은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좀 다른가보죠."

앞선 무식한 주장보다도 이 웃음에서 더 이상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어린 여성들의 성기 절제가 신의 섭리이고, 여성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웃지 않았으리라. 그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 자체가 성기 절제는 오직 여성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28-29)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일이었다면 이맘이여, 당신이 당신 고추를 먼저 잘랐겠죠. 그러나 니 고추는 제자리에 잘 붙어있지, 온전한 형태로?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도 가해지는 할례에 대한 부분을 읽는 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몇 번이나 쉬었다 읽어야 해서.  



수 로이드 로버츠가 인터뷰한 감비아의 '마이무나'는 할례자가 될 운명이었고, 그것이 싫어 고국에 자신의 아이들을 둔 채로 도망쳤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싶지만 아이들을 보러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가면 할례를 해야할테고, 그것은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못할 짓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립지만 참아야 한다고. 마이무나가 사는 곳에서 할례자는 반드시 정해져있고, 그 사람으로부터 할례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마이무나가 없는 지금 그곳은 몇 년째 할례가 중지되어 있다. 



마이무나의 운명은 할례를 집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할머니와 그보다 앞선 선대부터 그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의무를 다해왔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어떤 교육도 받지 않았고 여성 성기 절제Female Genital Mutilation(FGM) 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이 마을에 오기도 훨씬 전인데, 어린 소녀들에게 그토록 무참한 고통을 가하고 성기를 절단하는 짓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p.21-22)




나는 항상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 마이무나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 마이무나가 태어난 곳에서 할례가 멈춰있고, 그러나 마이무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그녀를 인터뷰하고 기록해 이렇게 책으로 내는 수 로이드 로버츠나 그런 곳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한 마이무나 모두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은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변하고자 하는 사람들 덕에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할례에 대한 1장을 다 읽었는데, 2장은 그나마 좀 수월하게 읽힐까. 오늘은 그저 1장 읽는 걸로 마치련다. 기운없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훔친 이래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여성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고 경고해왔다. - P29

클리토리스에 대한 설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묘사는 [뉴욕 타임스]의 과학 전문 기자이자 작가인 내털리 앤지어Natalie Angier가 쓴 문장이다. "클리토리스는 목적이 분명하다. 신체에서 순수하게 쾌락만을 위해 설계된 유일한 기관이다. 클리토리스는 단순한 신경 다발, 정확하게는 8000개의 섬유질 뭉치다. 손가락 끝, 입술과 혀를 포함해 신체의 그 어느 곳보다 고밀도의 신경섬유를 갖고 있으며, 남성의 음경과 비교해도 두 배 가량 된다. 자동소총을 갖고 있는데 권총이 왜 필요하겠는가?" 여성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클리토리스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할 만도 하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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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4-09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맘.. 좀 패고 싶은데요..
고추를 자르지 않은 남자는 여자를 볼 때마다 발기를 해요. 바지 겉으로 드러날 지경이라 공공장소에 있다면 정말 망신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그러니 잘라요!
라고 하고 싶네요

다락방 2019-04-09 08:0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수시로 발기하는 그 해로운 고추나 떼낼 것이지 어디 달고 살아본 적 없는 여자 성기에 대해 말하는건지, 원. 아 정말 징글징글해요.

블랙겟타 2019-04-0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읽기시작하셨네요. 저도 곧 따라갈께요.

앞 선 책 <가부장제의 창조>에서나 이 책 1장에서 보듯 종교에서도 여지없이 남성의 눈으로 멋대로 여자들을 평가하고 마음대로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죠.....ㅜ

다락방 2019-04-10 07:36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 저 어제는 2장 아르헨티나 할머니들 읽었어요.
납치된 자식들을 찾기 위해 시위를 하고 조직을 구성한 것도 다 여자들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나 여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여왔는데 왜 세상은 남자들이 다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요?

네, 곧 따라오세요. 저도 천천히 기다리며 읽겠습니다!
 















나는 비어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내 안에 있다. 그 강박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독서이다. 나는 재미있어서, 흥미로워서 책을 읽지만, 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이 모든 빈 시간을 메꾸는 데 어찌나 효과적인지 모른다. 친구를 기다리는 까페 안에서, 출퇴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서. 나는 그 시간들을 책으로 채운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길라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 책을 읽을까이다.


김진영이 입원을 해야 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그 시간동안 책을 읽어야지, 라고 내가 되어 생각했다. 내가 입원한다면 병실 안에 내내 혼자 있을테니, 책을 엄청 많이 읽을 수 있겠네! 라고, 애도 일기를 읽으면서 부끄럽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죽음을 앞에 둔 철학자의 가만한 내면 일기를 읽으면서, 입원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은 또 얼만한 크기였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있겠구나, 한것이다. 이 병의 크기를 무시한채로. 아, 나란 인간..



한 번 든 생각은 쉬이 사라지질 않아서 자꾸만 자라났다.

입원하면 하루종일 병실에 있으니 책을 많이 읽겠지, 그렇다면 그 책을 다 어떻게 마련하나. 일단은 집에 있는 책들을 좀 가져갈 수 있겠지만, 입원 시간이 길어진다면.. 병실로 책 배송을 시키면 안되겠지? 그러면 내가 가져온 책을 다 읽으면... 누구한테 가져다달라고 하지? 엄마 아빠는 무거운 거 들고 다니시면 안되는데.

남동생? 남동생한테 야, 오면서 내 방에 들러 이 책 저 책 가져와, 라고 해야할까?

친구들? 친구들이 온다고 하면, 친구야 책 좀 사다줘, 해야할까. 헌 책이라도 좋으니 책 좀 사다줘, 해야할까.

병실에 오기전에 연락해 친구들아.


어쩌면 병원 근처에 서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잠시 외출해서 여러권 사가지고 와야지.

편의점이 있다면, 그렇게 읽은 책들 차곡차곡 중고샵에 팔고 또 서점 가서 책 사오고, 책 사오고...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입원하는 상황이면 몸이 무척 아플 거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아, 돌아다니고 책을 하루종일 읽을 수 있으려면 도대체 입원은 왜 한거냐, 그걸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입원한 거 아니냐, 하고... 나여.....




그러고보면 책만 있으면 혼자 있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다.

<나는 자연인이다> 보면서 '나도 자연인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그 산 속으로 책만 잔뜩 가져가면 지내는 데 별 문제 없지 않을까, 한 것. 물론 밤에 자는 건 다른 문제..그거슨 초큼 무서울 것 같아. 그래도 낮에는 해를 벗삼아 비를 벗삼아 산새소리를 벗삼아 책을 읽으면 혼자 산 속에서 지내는 것쯤은 해낼 수 있을 듯.

그렇지만 별로 자연에서 살고 싶진않다...



원래도 책이 좋았지만 점점 더 좋아진다.

이런 일은 되게 드물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조카가 자라는 걸 계속 보면서,

와, 어떻게 어제보다 더 사랑할 수가 있지..라는 신기한 감정을 경험했었는데,

칠봉이랑 연애하던 시절에,

와, 어떻게 어제보다 더 사랑할 수가 있지..라는 감정에 스스로 벅차했었는데,

책이 그렇다.

어릴 때도 책이 좋아서 읽었지만 요즘에는 책이 진짜 더 좋다. 책 읽는 거 진짜 너무 좋아. 책 만만세다.


그리고,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뒤적인다. 부끄럽고 괴롭다. 그의 고통들은 모두가 마망 때문이다. 마망의 상실 때문이다. 그의 고통들은 타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인가. 그건 오로지 나 때문이다. 나는 나만을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 어리석은 이기성이 나를 둘러싼 사랑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실 나는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이미 상실했다. 그러나 내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한다. 나는 그들을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된다. (p.254)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면,

당신 자신을 잘 보살피라는 문자메세지를 따뜻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당신 자신을 잘 보살피도록 해요.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 P046

내 안의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랑들, 미친 듯이 자기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 그것들은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제 또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걸까. 무엇으로 이 텅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 P144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
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 - P182

나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고 그래서 사랑받을 자격이 충만함을 알게 하고 경험케 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 - P226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말,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 그게 다 기도란다-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또 타자들을 위해서 ……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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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쁜 소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그러한 소설은 창조의 결실이 아니라, 미리 짜맞춘 일련의 ‘형식‘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진실석(복합적이다)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런 복제품은 단순화(거짓이다)를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호기심만을 달래줄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결국 그런 책에서는 작가도, 작가가 보여주겠다고 하는 현실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해진 틀에 짜 맞춰져 우리까지도 덩달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p.208)



자기 나름대로 독서의 한 단계를 거치고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다른 책을 쥐여준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겪었던 성장 과정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결국 아이와 우리 사이에 깊은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언젠가 아이 스스로 판에 박힌 책들을 단호히 집어 던지면서 느낄 그 비할 데 없는 뿌듯함을 배앗아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 당장은 그 상투적인 책들 때문에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듯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청소년 시절과 화해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그맘때의 우리가 어떠했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부정하거나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그것 자체가 성장기를 무슨 몹쓸 병인 양 치부하는 미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p.212)




하아-

다니엘 페나크가 굳이 나쁜 책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어도, 나는 '청소년 시절과 화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한국 소설 <남자의 향기>가 생각났다.

나는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 숱한 할리퀸 시리즈와 성인 로맨스물을 읽었다는 사실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데, 남자의 향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실은 몹시도 부끄럽다. 너무너무 부끄럽다. 그 책이 아마 세 권짜리였던 것 같은데, 줄거리 자체도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억나는 대로 써보자면, 고아인 소년이 부잣집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그녀의 보디가드가 되는데,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그녀와 커플이 될 수 없고, 그녀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변호사(?)와 결혼하게 되지만 불행하다..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남주가 그녀를 지키는 보디가드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어마어마하게 싸움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냥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했다. 그는 주인공이니까.  하아..

그 당시에도 같은 반 아이가 깡패를 미화한다고 이 소설 싫다 그랬는데, 아아, 나는 재미있다고 답했다. 아아, 그 때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다니엘 페나크는 그 시절의 나와 화해하여야 한다지만, 나는 도무지 화해가 안된다 ㅠㅠ 용납이 안돼.


어떤 책들은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궁금해지지만, 남자의 향기에 대해서라면 다시 읽지 않아도 너무 허접한 소설이었다 ㅠㅠ 그걸 지금 너무 알겠어. 대략 떠오르는 내용만으로도 이미 너무 잘 알겠다. 부끄럽다. 아아, 나의 청소년기 너무 부끄럽고..


게다가 너무 기억나는 게, 그 때 그 부잣집 소녀가 자신의 처녀성을 이 보디가드한테 바치는(?) 맡기는(?) 장면이었다. 아마 작가가 남자였을텐데(그러니 그런 소설이 나왔겠지), 보디가드는 너무너무 이 여자를 사랑해서 그여자랑 관계를 하는데, 하고나서 그녀가 '이렇게 하면 되는거야?' 라고 해서 남자 가슴을 후벼놨던 것. 그러니까 여자는 그를 사랑해서 섹스한 게 아니라, 섹스란 걸 어떻게 하는지 알기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었다. 진짜 부끄럽기 짝이없게도 그 때 나는 그 남자의 가슴아픔에 얼마나 이입했던가.


아아, 과거의 나여, 청소년기의 나여... 부끄럽다..


그렇지만 다니엘 페나크가 그 때의 나를 경멸하지 말라고 한다. 흙흙 고마워요 다니엘 페나크 아저씨. 저 경멸할라 그랬어요.

그렇지만 다니엘 페나크가 그 때의 나를 증오하거나 부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흙흘 고마워요 다니엘 페나크 아저씨. 저 그 때의 저를 증오하고 부정하고 싶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남자의 향기 재미있다고 외치고 다녔던 열일곱살의 나여, 내가 너를 증오하고 경멸하고 부정하려 했어. 미안해. 화해하자. 사실..화해가 조금 힘들기는 해. 지금이라면 누가 공짜로 줘도 안읽을 소설을 그때는 니가 재미있다고 읽었잖아. 그렇지만... 그 때의 나...가 지금의 나...가 된 것이지. 화해하자. 물론 쉽지는 않아.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를 부정하고 싶어.



나여..

오,

나여......


왜그랬니,

나여?



나여..

아아,

정녕 내가 그랬단 말인가.



부끄럽다.

숨고싶다.


그렇지만..

화해하자.

쉽지 않지만.

화해하자.


아니야,

시간을 조금만 주겠니.

화해가 그렇게 금세 되는 건 아니잖니.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줘.

결국은 화해에 이르도록 할게.

흙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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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4-0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때의 다락방님도 오늘의 다락방님하고 화해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예요??

다락방 2019-04-05 07:47   좋아요 0 | URL
제가 쇼님의 이 댓글 읽고 앗차 싶어 그때의 나에게 물었더니, 딱히 화해할 생각 없는 것 같아요. 고집이 세서... 어휴... 제가 저 때문에 힘드네요.... 킁.

syo 2019-04-05 12:27   좋아요 0 | URL
뚜드리패세요 ㅋㅋㅋㅋㅋ 전 말 안 듣는 어릴 적 syo를 종종 뚜드리팬답니다.

다락방 2019-04-05 12:57   좋아요 0 | URL
잉 ㅜㅜ 그러면 아프잖아요, 그 때의 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안돼 ㅜㅜㅜㅜㅜㅜㅜㅜㅜ 고집세지만 그 아이도 소중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카알벨루치 2019-04-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의 향기 , 저도 읽었더랬는데 ㅎㅎㅎ

다락방 2019-04-05 07:47   좋아요 1 | URL
그 당시에 아마 베스트셀러였을 겁니다. 윽-

감은빛 2019-04-05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스토리를 보니 저도 당시에 그 책 읽었었네요.
근데 어떻게 제목을 기억하고 계신건지 신기하네요.
아, 같은 반 친구와 책에 대한 대화까지 기억하고 계시니, 제목을 기억하시는 건 당연하겠네요.

저는 어릴때 야하고 폭력적인 쓰레기 무협 소설을 읽던 내가 별로 부끄럽다 여겨지진 않아요.
그걸 읽을 당시의 저는 그걸로 꽤나 재미를 느꼈다고 기억하거든요.
재미로 읽는 소설이었으니 그럭저럭 재미있었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싶어요.

다락방 2019-04-05 08:18   좋아요 0 | URL
당연히 제목 기억 못했죠! 다만 그것이 인기 있어 한은정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라는 건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네이버에 한은정 넣고 검색했어요. 그랬더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적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 전혀 못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제가 어릴 때 숱하게 로맨스 소설을 읽었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로맨스 소설이라면 지금도 열심히 읽는 편인데 이상하게 남자의 향기는 부끄럽습니다. 그 당시에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도 부끄러워요. 그래서 그때의 나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ㅠㅠ
 
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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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소설들은 어째서 그토록 빨리 읽을 수가 있을까? 읽기 쉬워서? '읽기 쉽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가 읽기 쉽다고? 『죄와 벌』이 읽기 쉽다고? 『이방인』보다도, 『적과 흑』보다도? 결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들이 학교 교과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시칠리아 미망인을 비롯하여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된 이른바 '교양 필수 권장 도서' 따위는 으레 '고리타분'할 것이라고 속단한다. (p.173)



아주 어릴때부터 이웃집에 놀러가면 그 집 책장 앞에 가 책들을 구경하고 또 빼서 읽었더랬다. 놀러간 내 형제들이나 혹은 친구들이 수다를 떨며 다른 놀이를 즐길 때 나는 꼭 그렇게 혼자 책들을 구경하고 읽곤 했다. 고모네 집에 가면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오빠의 국어책을 꺼내 읽었다. 소설을 다룬 부분만 읽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재미있었던 거다. 나보다 아홉살 많은 이모네 집에 가면 이모가 없을 때에도 아무 책이나 꺼내 읽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아직 어린 내가 읽지 말아야할 책들도 더러 껴있었다. 아니, 대부분 그랬다. 이모는 집에 오고 나서 '그건 니가 볼 책이 아닌데... '했다. 그렇다고 이모는 내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여동생이 친구로부터 빌려온 <스타킹 훔쳐보기>시리즈를 하루 꼬박 몰아 읽었더랬다. 마침 시험기간이었던지라 여동생은 도대체 왜 공부를 안하고 책을 읽는 거냐며 내게 잔소리를 했다. 그래서 너는 전교 일등 나는 일등 한 번 못해본 사람...이었던 건가보다.



내가 공부보다 소설 읽기를 즐겨한 데는 그것이 교과과정이 아니라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읽는 책이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스타킹 훔쳐보기를 열과 성을 다해 읽는다고 해서 내 성적이 오를 리가 없다. 아니, 떨어지겠지. 내가 2년 위의 사촌 오빠 국어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의 나의 교과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없다. 예습도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재미있어서 읽었다. 나는 소설 읽기가 재미있었다. 교과과정이 아닌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책 마다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들이, 다른 인물들의 삶을 읽는 것이 정말 좋았다. 책 좀 그만 읽으라는 소리를 들어도 도무지 끊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누가 왜 소설을 읽냐고 물어보면 '재미있어서'가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사실 그것말고 다른 이유는 어린시절에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아니 왜?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데 책을 왜 안읽지? 안읽어봐서 재미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닐까?



나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좋았지만, 내가 이야기 자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책마다 품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좋다고 늘 생각했으면서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게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놀랐다.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p.151)



나는 위의 문장을 읽고 내게 몇 번이나 물었다. 내가 정말 이야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던 거야? 나는 이야기 그 자체를 좋아했던 거야? 늘상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말해왔지만, 나는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 이기 때문에 좋아했던거야? 이야기? 이야기란 대체 무엇이지? 물론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의 나열은 아니지만, 거기엔 작가 고유의 문체라는 것도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런데, 어쨌든,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 나는 이야기에 목마른 자란 말인가?



묻고 묻고 또물었는데 답은 '그렇다' 였다. 왜냐하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으니까. 소설은 이야기였으니까. 소설이란 무릇 이야기이니까. 작가의 고유한 문체가 그 안에 들어있고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들어있다해도, 작가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다해도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야기였구나.


아,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어. 이 사람의 저 이야기, 저 사람의 저 이야기.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그렇다면 말이 된다. 그래, 말이 돼. 내가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 연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 모두가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었어.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 그 안에는 인간들이 저마다 품고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어. 내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소설을 계속해서 읽어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었다. 그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좋아하기에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였어.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사는 존재니까.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이 작은 책의 절반쯤을 읽을 때까지는, 그러니까 책 읽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게다가 청소년에게 책을 읽게 만드는 책이라면, 이 책보다는 '김소영'의 《어린이책 읽는 법》이 이천오백배쯤 낫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간을 지나면서부터, 그러니까 좋지 않은 학교의 열등생들, 자신들이 공부도 못하고 책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두꺼운 책을 이해할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을 책에 빠져들게 만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책은 반짝거리며 빛이 난다.


서른 다섯명의 아이들, 도통 책 읽기엔 흥미가 없을 뿐더러 그런건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어느 책의 첫 구절을 읽어주면서부터, 그 때부터 갑자기 독서란 너무나 재미있고 아름다운 행위가 된다.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을 궁금해한다. 그러니까 그 다음의,




아.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이렇게 다시 이 자리로 나를 불러오는 힘이 있다. 이제 아이들은 선생님이 읽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책의 책장을 넘긴다. 읽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책들의 책장을 넘기고, 저마다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전하기에 바쁘다. 아, 이 과정이야말로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닌가. 너무 좋아 ㅠㅠ

책이란 나랑 안어울려, 라고 생각하다가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렇게 책을 읽게 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읽은 책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이 작은 책 한 권은 그렇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한다.




게다가 책이란 것에 실려있는 사연, 그러니까 책이 품고 있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드웨어적인 것으로서의 의미, 누군가와 얽힌 사연에 대한 것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또한 책에 대한 느낌도 우선은 가장 소중한 이에게 먼저 전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감정이란 원래 책읽기의 욕망처럼 무엇 무엇을 더 좋아한다는 속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 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쥐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p.110-111)



누군가가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읽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든 우리는 책에 대해 다른 누군가와 하나의 사연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더러 하게 되지 않나. 이 부분을 읽는데 가슴 속에 봄이 오는 기분이었어. 크-




다니엘 페나크는 물론, 나쁜 책도 있다고 말한다. 나쁜 책을 흥분하면서 읽었던 때도 분명 있었을 거고,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을 거라고. 동시에 책을 읽지 않아도 되고, 건너뛰며 읽어도 되고,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고, 다시 읽어도 된다고, 아무 데서나 책을 읽고, 군데군데 골라 읽고, 소리 내서 읽고, 읽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모든 권리가 책 읽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책 읽는 사람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자유로움이 우리를 계속해서 책을 읽게 하는거겠지. 자, 읽고 읽고 또 읽자. 이야기를 만나고 또 만나자.


아,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우린 정말로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어찌나 걱정스러운지 시도 때도 없이 내 아이를 또래의 다른 아이와 시시콜콜 비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둔 친구 아무에게나 …… 가 아닌, 학교 성적이 뛰어나며 죽어라 책만 읽는다는 아이를 둔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다.
귀가 잘 안들리나? 난독증이 아닐까? 아예 학교에 안가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학습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았다. 청력 검사에서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 언어 치료사도 안심해도 좋단다. 심리 검사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둔해서일까?
단지 둔해서일 뿐이라고?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와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이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 P58

열두 살인가 열세 살 때(열세 살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난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여름 방학의 초입부터 형(앞서 말한 『계절풍』을 읽던 형)은 그 두꺼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럴 때 형의 눈빛은 고향 생각을 오래전에 잊은 탐험가처럼 아련해지곤 했다.
"형, 그렇게 재미있어?"
"응, 무지."
"무슨 얘긴데?"
"으응,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다, 결국은 세번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얘기야." - P196

더욱이 한밤중에 50명의 친구가 코를 골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기숙사 방 한가운데서, 이불을 텐트처럼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비추어가며 책을 읽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감시 초소를 지척에 두고도, 언제나 나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을 얻느냐 마느냐뿐이었다. 당시 내 손에 쥐여 있던 그 책의 두께며 무게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 P198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쁜 소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그러한 소설은 창조의 결실이 아니라, 미리 짜맞춘 일련의 ‘형식‘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진실석(복합적이다)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런 복제품은 단순화(거짓이다)를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호기심만을 달래줄 뿐이기 때문이다. - P208

무엇보다도, 결국 그런 책에서는 작가도, 작가가 보여주겠다고 하는 현실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해진 틀에 짜 맞춰져 우리까지도 덩달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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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토록 부끄러운, 남자의 향기
    from 마지막 키스 2019-04-04 16:50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단발머리 2019-04-04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 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p.110-111)

저번주에 친구에게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했어요. 그저께 <질의응답>을 선물받았구요.
책이 저와 친구, 저와 언니 사이에 있어요. 확, 들어와버린거죠.
너무 좋아요, 이 글!! 다락방님, 하트뿅뿅!!!

다락방 2019-04-05 14:5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께 제가 받은 하트의 정확히 두 배 돌려드립니다.

저도 제가 받았던 어떤 특별한 책들에 대해 떠올렸어요. 또한 특별하지 않고 내보내고 싶었던-순전히 그걸 준 사람 때문에-그런 책도 떠올렸고요. 책은 그 안의 내용으로도 소중하지만 그걸 선물한 사람때문에 특별햊기도 하는 것 같아요. 선물이란 게 물론 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성질의 것이지만, 책은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잖아요. ‘아, 이 부분 때문에 줬구나‘, ‘어떤 이유로 내게 이 책을 준걸까?‘ 같은 거요. 그래서 더 유심히 읽게 되는.

저도 이 공간에서 단발머리님과 끊임없이 책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읽고 때로는 책을 선물로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행복합니다, 단발머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