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잘 하는 것은 언제나 내 로망이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야말로 노력이 필요한 것이므로. 나는 사실 노력에는 큰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잘하고 싶다는 욕망만 있지 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해, 항상 외국어 공부할거야! 라고 마음 먹고 흐지부지 또 외국어 공부 안하는 내가 되고야 만다. 

얼마전에는 프랑스어를 읽어보는 것 만이라도 하고 싶어 프랑스어 교재를 샀다. 스프링분철로 주문해서 받은 뒤,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한달째 방치되고 있다. 책상 위 프랑스어 교재를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것인가, 이거야말로 돈지랄이 아닌가 싶다.. 그래놓고 이거 다 보고 다른 언어도 기초만 좀 해보겠다며, 보관함에 스페인어, 베트남어 교재를 넣어둔 터다. 오오, 나란 인간. 욕심은 똥구멍까지 찼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러나!

줌파 라히리는 나와 다르다. 나와 다른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아아, 줌파 라히리여, 원래 글도 잘 쓰는 데 이사람은 세상에,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더니, 숫제 이탈리아어로 글도 쓰기 시작했다. 아,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진단 말입니까. 세상 멋있네. 그냥 외국어만 잘해도 멋진데, 외국어로 에세이를 쓰고 소설을 쓴다!


이 책을 읽은 총평에 대해 얘기하자면, 나의 경우,


기존 그녀의 소설들이 훨씬 더 좋지만, 그러나 역시 줌파 라히리다!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싱글이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한 동네 사는 친구 남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사십대 중년' 이다.  이 정체성에서 나랑 두 가지 정도가 겹치는데, 오호라, 바로 이런 구절을 만난다.



마흔다섯 살 이후,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던 긴 행운의 시기를 보내고 나서 난 몸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알 수 없이 이곳저곳이 아프고 이상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눈 안쪽에 계속 안압이 있고, 팔꿈치가 몹시 쑤셨으며, 얼굴 한 부분이 한동안 마비되는 듯했다. 복부에 퍼진 붉은색 둥근 반점들이 심한 가려움증을 일으켜서, 한번은 응급실에 가야 했을 정도다. 결국 연고로 충분했다. (p.34)




나야말로 작년부터 병원에 부쩍 자주 가기 시작했다. 나로 말하자면 주변에서 건강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나는 감기도 안걸려'라며 으스대는 사람이었다. 몇 년간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던 나지만, 요즘엔 몸에 이곳 저곳에 이상이 나타나 자주 병원을 찾게 되는 거다. 이번해 3,4월만 해도 병원을 자주 들락거려, 돈벌어서 병원비 하기 바쁘다고 투덜대는 참이었다.


어제는 복부초음파와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약 들어갈 길을 터준다고 간호사선생님이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계시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왜 한숨이냐 물으셨고, 


"저는 감기 한 번 안걸리는 사람이었는데 올해 병원을 너무 자주 와요" 


했다. 선생님의 연배도 나와 비슷해 보였는데, 선생님은 정말 공감된다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2주전에는 에이형독감에 걸려 타미플루를 처방받았고 우울의 끝까지 다녀왔는데, 어제 검사 결과 담석에 용종까지 붙어 있어 수술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나만큼은' 수술과 거리가 멀거라고, 아픈 것과는 거리가 멀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아아, 역시 사람 일은 한 치앞도 모르는건가. 어떻게 이렇게 병원에 자주 가게 되었나 우울해하는데, 여동생이 내게 그랬다. 그간 언니가 그렇게 언니 몸 잘 사용해온 것에 대해 몸에 감사하라고. 그런데 줌파 라히리가 말한다.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던 긴 행운의 시기' 라고.


나야말로 내 몸에 감사하고, 그 긴 행운의 시기에 감사해야 하는 거구나. 겸손해진다. 지금 내 몸이 아프다고 우울해질게 아니라, 그간 잘 지내준 내 몸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거였어. 감사하고, 좀 더 살펴야겠구나.



몸이 자주 아프기 시작하면서 내 친구는 서럽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했다. 나는 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럽고 외로운 것. 어쩌면 이것도 이즈음의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느낌인걸까. 



이 여인은 동행자가 없다. 요양보호사도, 친구도, 남편도 없다. 나 역시 이십 년 뒤 어떠한 이유로 이 여인처럼 병원 대기실에 있게될 때, 곁에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그녀가 눈치챌까 두렵다. (p.37)




친구들과 항상 건강하자고, 건강하게 지내자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얼마만큼 와닿는 얘기일까. 나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제일이라고, 건강해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내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어왔지만, 몸 안에 돌이 자라고 있는 걸 내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거기 돌이 있는 줄 미처 몰랐지. 거기에 돌이 있다니, 게다가 그렇게 크게 있다니. 나는 그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 



조셉 고든 래빗이 주연한 영화 [50/50] 에서, 주인공은 건강하게 오래 잘 살기 위해서 술과 담배를 안하고 매일 운동을 한다. 마약도 하지 않고 원나잇섹스도 하지 않으며 신호가 항상 초록색일 때만 길을 건넌다. 이 모든 걸 철저하게 잘 지켜오는 사람이었지만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는다. 주인공은 대체 저것보다 무얼 더 할 수 있었을까? 건강하기 위해,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해 주인공이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 누구보다 노력했다. 그런데 암이라니. 뭘 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 때는 건강이 최고야, 건강을 지키자, 라는 말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러려고 햇어,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어.


아, 인간 뭘까. 건강이란 뭘까. 결국 삶은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인생..뭘까.....





책 속 여자는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친구는 아이와 남편과 함께 했는데, 여자는 친구의 남편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친구는 왜 저런 남자와 결혼한걸까? 여자도 친구의 남편에게 호감을 갖지 못했지만, 그건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책장, 내 일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모든 책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 책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날 짜증스럽게 한다. 아내가 소변을 눠야 하는 딸애에 신경이 팔린 동안 남편은 ㅐㄱ 하나를 골라 펼치더니 한 문단을 읽는다. 일요일 중고 시장에서 발견해서 오랜 가격 흥정 끝에 산 절판된 시집이다.

"재미있나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오래전 이 작가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두 페이지 읽고 나서 그만뒀어요. 더는 읽을 수가 없더군요."

"전 좋아해요, 제 생각에는 훌륭한 작가예요."

"책을 빌려줄래요?"

요청이라기보다 일방적 주장이다. 난 주저 없이 대답한다.

"죄송합니다만 당신들은 여행중이잖아요. 언제 다시 만날지 몰라서요."

그는 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반박하지 않는다.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는다. 쩨쩨하게 느껴지지만 내 책을 이런 사람에게 빌려주기 싫다. 절대 그럴 수 없다. (p.89-90)




나는 이 장면이 너무너무 좋다. 여자가 예민한 장면, 까탈스러운 장면. 내가 어렵게 구한 책인데, 감히 여행중인 사람이 어떻게 뻔뻔스럽게 빌려달라고 말하지? 아마도 거절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평가가 나쁘게 날까 걱정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상대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이걸 안빌려줄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게될 것이다. 어쩌면 결국은 내키지 않지만 빌려줬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여자는 아니, 너네 여행중이잖아, 나 언제 받으라고, 하며 빌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빌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빌려주지 말아야 한다.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고 빌려준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너무 못할 짓이다. 그 후에 돌려받을 때까지 마음을 쓰게 될것이고, 그 시간동안의 스트레스가 다 누구몫이람. 사람은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빌려주지 말아야 한다.

이거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스스로에 대한 룰이다.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빌려주지 말자.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라고 당당히 말하자. 그게 뭐가 쩨쩨해. 그 후에 내가 싸가지없다는 평가를 듣게될 지언정, 어디서 누군가 나를 나쁘게 평가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아니, 싫다면, 싫다고 하자. 괜히 빌려주지 말고, 내 방 책장에 얌전히 꽂아두고 내가 원할 때 읽자. 


아, 이 예민한 장면 진짜 너무 좋아! 




이 예민한 여자는 그러나 일상의 것들에 행복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면은 또 내가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면이며 또 내가 스스로 갖고 있는 면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나는 나의 이런점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책 속 여자도 그렇다! 이것은 모두가 가진 특성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바,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좋고 그래서 이 여자가 좋다!



난 공짜나 마찬가지인 빵 값을 지불한다. 엉덩이를 붙일 곳을 찾다가 놀이 공원에 앉는다. 밤에는 텅텅 비지만 이 시간에는 아이들, 부모들, 강아지들, 나 같은 외로운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자신을 표현하고 섦여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는 우리의 충동에 난 새삼 놀란다. 믿어 마지않는 소박한 빵맛에 또 새삼 놀란다. 햇살에 몸을 녹이며 빵을 먹는 동안 성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이 동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안다. ( p.85-86)



이렇게 페이퍼를 쓰기 위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가 다 떨어져가니 다시 주문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마침 식탁 위에는 빵도 있다. 빵과 커피를 먹다 보면 이 흐린 날의 오전이 또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내게는 읽을 책이 무지 많아!


이 책을 읽는 동안 굉장히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친구가 선물해준 느낌. 내가 이 책을 샀는데, 사고나서 며칠 뒤 친구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온 거다. 줌파의 신간이 나온 걸 알고 있었냐, 그거 사주고 싶다, 고. 나는 이미 샀다고 고맙다고 말했는데, 친구는 그렇다면 다른 책이라도 꼭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다른 책을 선물받게 되었는데, 친구는 내게 줌파를 너 때문에 알았고, 그래서 줌파의 책을 보면 항상 네 생각이 난다, 고 말하는 게 아닌가. 크- 이렇게 근사한 작가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하고, 신간이 나오니 당연히 사주고 싶어한다니.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뷰티풀 월드.... 역시 친구중에 제일 좋은 친구는 술친구와 책친구인가 하노라....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선물받아 읽은 기분이었다.



아, 얼른 페이퍼 쓰기를 마치고 커피와 빵을 먹어야지. 일요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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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9-04-1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이랑 친해지는 건 정말 싫은 일이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해요.... 담석, 통증 겪기전에 의사 말씀 따르시되, 다른 병원도 꼭 가보세요. 의견이 같으면 수술하셔야 하지만, 아닐수도 있으니깐요.... 줌파, 넘 사랑스럽죠!

다락방 2019-04-14 11:18   좋아요 1 | URL
아, 이건 반드시 떼내야 한대요. 돌도 크지만 용종이랑 붙어 있어서 이걸 떼내지 않으면 담낭암이 된다네요 ㅠㅠ 어쨌든 씨티 찍고 큰 병원 의뢰서 써주기로 했어요. 큰 병원 가면 또 말이 있겠죠 ㅠㅠ

줌파 너무 좋아요. 너무 대단하고, 저는 이렇게 섬세한 감정을 잘 짚어내는 작가가 너무 좋아요! >.<

비연 2019-04-15 09:21   좋아요 0 | URL
아... 담낭에 용종이 있고 돌 있으면 떼내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요즘은 로봇이나 내시경으로도 많이 해서 금방 회복되니 넘 걱정하진 마시구요.
살다보면, 건강이 급 나빠지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 속도 안 좋고 안 걸리던 감기에 몸살에..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던 긴 행운의 시기... 마음에 파팟 와닿는 구절이에요.

2019-04-14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5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4-14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던 긴 행운의 시기.
정말 딱 맞네요. 저도 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서 그저 행운만을 누리려 했던 1인...
타미플루를 처방받는 후에야 그걸 깨닫는ㅠㅠ

다락방 2019-04-15 11:44   좋아요 0 | URL
네, 병원에 가지 않던 행운의 시기를 저는 행운인줄 모르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이젠 그 행운에 감사하고 또 겸손해져야 겠어요.

단발머리님도 타미플루 처방 받으셨나요? 저도 2주전에 이미 먹었다능 ㅠㅠ 아아, 우리의 육체여, 건강하라... ㅠㅠㅠ

2019-04-14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5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9-04-15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술하시는군요! 저런... ㅠ-ㅠ 나이 드니까 건강검진하면서 조금씩 추가로 뭘 더 검사해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덜컹하더라고요. CT도 잘 찍으시고... 수술도 잘 하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다락방 2019-04-15 11:4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남일인 줄만 알았던 수술이 제 일이 되기도 하네요. 저도 그저 인간1에 불과한데 제가 저를 너무 과대평가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뭐그리 특별하다고.. 이순간 겸손을 배웁니다.

네, 건강 잘 챙겨야지요.
잠자냥 님, 건강 잘 챙기고 우리 오래오래 책 읽고 글 쓰고 이야기 나누도록 합시다.

목나무 2019-04-1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가을, 겨울의 저를 보는 것 같네요. --;;
저는 작년에 충수염 수술에 독감을 연달아 앓으며 게다가 유방암 조직검사까지... 병원 신세를 꽤 졌네요.
제가 수술한 병원에서도 담낭제거 하는 사람들 많더라구요. 심각한 수술 아닐테니까 미리부터 너무 걱정하지 말구요.
수술도 잘 하고 회복도 잘 하고 면역력도 잘 챙기셔요!

다락방 2019-04-16 16:08   좋아요 1 | URL
아이고, 고생 많으셨네요, 설해목 님.
저는 이번 해에 병원을 줄기차게 다니면서 제가 그간 제 몸에 대해 너무 자신만만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까지나 건강할줄로만 알았나봐요. 좀 더 제 몸을 들여다보고 또 그간 잘 지내준 것에 감사해야겠어요.

네, 심각한 수술 아니라는 거 알고 잘 있다가도 갑자기 울컥 하기도 하고 그래요.
수술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것 같아서 다음주에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아보려고 해요.

면역력 잘 챙기도록 할게요. 설해목 님도 건강 잘 지키셨으면 좋겠어요!

보물선 2019-04-1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시간내서 <50/50>을 봤어요.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내서 오히려 슬펐어요. (엉엉 울었네ㅋㅋ) 해피엔딩이라 그나마 위로가 되었네요.

다락방 2019-04-16 16:09   좋아요 1 | URL
오, 그 영화 보셨군요!
저는 그거 보면서 진짜 인생 뭘까, 삶과 죽음이란 뭘까.. 싶더라고요. 내 몸조차 내 뜻대로 안되는 것 같고요. 그 영화가 그 영화의 스태프 중 한 명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거라고 자막이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해피엔딩이라 좋았어요.

2019-04-20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0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추... 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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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4-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꽤 있지만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락방 2019-04-14 10:10   좋아요 0 | URL
이 주제에 대해서는 듣고 싶은 말이 꽤 있지만 듣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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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준비해 꾹꾹 눌러쓴 이야기. 경애의 마음에서 드러나는 김금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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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실려 있었고, 국어를 좋아하거나 아니거나 그 소설만큼은 모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소나기 바로 뒷편에 실린 소설은 내 기억에 의하면 '헤르만 헤세'의 <나비>였는데, 소나기 뒤에 배워서인지 그 시절 되게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소설을 지금 다시 읽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거다. 얼핏 기억나는 장면은 마지막, 소년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나비를 바스라뜨리는 거였는데, 일단 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어떤 심리적 갈등이라든가 하는 것이 매우 잘 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 것. 어쩐지 지금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다. 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제목이 나비가 맞는지, 작가는 헤르만 헤세가 맞는지, 헤르만 헤세의 나비, 라고 기억하는 거 보면 맞을 것 같긴한데, 내 기억이 과연 정확한건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래서 오늘 헤르만 헤세 나비 를 넣고 검색해봤더니 이런 책이 나왔다.


















책 소개를 보면 헤르만 헤세가 나비에 관심이 있었고 이 책에 나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데(다른 '나비' 책도 마찬가지), 리뷰를 보려고 해도 리뷰도 없어.. 자, 여러분.


이 책은 제가 아는 바로 그 소설이 실린 책이 맞습니까? 혹시 아시는 분 계시다면 대답 좀..

만약 아니라면, 제가 기억하는 그 소설은 어떻게 하면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밑줄긋기 보니까 이 책이 내가 찾는 책 같다. 그런데 위의 책과 같은 책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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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09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나비‘ 맞고요. 아래 책에 실려 있는 것 같네요. 락방 님 말씀처럼 주인공 소년의 심리가 매우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이니까 입다물게요. ㅋㅋㅋ

다락방 2019-04-09 10:11   좋아요 1 | URL
그러면 아래 책을 사야겠군요. 후훗. 감사합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하니 엄청 좋은 작품일 것 같더라고요. 감사드려요, 잠자냥님! :)

잠자냥 2019-04-09 10:17   좋아요 2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6622476
이 책에는 <공작나비>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기도 하네요.

다락방 2019-04-09 10:19   좋아요 1 | URL
오, 링크 주신 책이 좀더 최근에 나온 거고 더 읽고 싶게 생겼네요. 저기 나비 크게 그려진 건 딱히 읽고 싶게 생기질 않아서.... 하핫

별족 2019-04-10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래미가 웹툰을 보다 말고, ‘헤르만 허세‘가 누구냐고 물어서 와하하 웃은 기억이 ^^ 왜 한 권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안 나는지-_-;;;

다락방 2019-04-10 10:23   좋아요 0 | URL
헤르만 허세 ㅋㅋㅋㅋ

저도 이 댓글 읽고 나는 뭘 읽었지, 읽은게 있나 싶어 헤르만 헤세 넣고 검색했더니,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읽었네요. 한 15-20년 전에 읽은 거라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아요. 음...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집에 있는 것 같은데.. 음.....

비연 2019-04-10 12:40   좋아요 0 | URL
댓글 보다가 빵터진..ㅎㅎㅎ 헤르만 허세..ㅎㅎㅎ 아 넘 귀여운...
전, <수레바퀴 아래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이런 거 읽었고 <유리알 유희> 읽다가 집어치웠고... <싯다르타>는 펴보지도 않았고... 흠... 그리고 정원에 관한 에세이 하나 읽은. 헤르만 헤세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오히려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내가 왜 싫어하지? 하면서.. 근데 여전히 저랑 잘 맞지는 않더라구요. 이 책 <나비>는 좀 흥미가 돋긴 한데...

다락방 2019-04-10 15:30   좋아요 0 | URL
오, 비연님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읽고 싶어서 사놓고는 여태...뭐 그런 책이 한두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비는 읽고 싶은데 제가 나비만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사지는 않을것 같고 도서관에 있으면 빌려서 나비만 읽어 봐야겠어요. 그당시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지금 읽으면 너무도 다른 느낌을 줄 것 같다는 확신이 있거든요. 후훗.
 
















동호회 사람들은 좀더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플롯이 있었어야지, 액션도 있고 대화도 있고, 음악도.

"나는 그 영상을 아주 솔직하게 찍었어."

조용히 듣던 E가 반대는 하지 않고 다만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

그러면서 E가 사람들 몰래 경애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기 때문에 경애는 그 말을 할 때의 E를 더 선명히 기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다는 말. (p.67-68)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의 술자리에는 남자1이 끼어있었다. 끼어있다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함께 만났다, 고 하는 것이 맞다. 그 날 우리는 함께 만났다. 그러니까 남자1과 내가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만났고, 그래서 함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친구였고 대부분 공통된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맥주를 마셨고 치킨을 먹었다. 그리고 어떤 대화중에 우리는 각자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그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의 한 손이 내 한 손을 폭 감쌌다가, 미처 내가 반응을 보일 틈도 없이, 놓았다. 아무도 그 순간을 보지 못했고, 다만 내가 알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내 손을 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꼭 그 남자의 눈빛을 보고 싶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써 피했다.


우리가 손을 잡은 것이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너무 손을 잡고 싶어, 갖은 핑계를 대다가, 내 말을 하도 못알아쳐먹어서, 그냥 손을 잡아 달라고 내가 말을 했었더랬다. '손 잡아줘요' 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쓰다보니까 너무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내가 너무 좋다. 역시 나는 짱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그 날, 손을 잡고 싶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데, 바보같이, 내 마음도 모르고! 이 빵꾸똥꾸 같으니라고!


그 일이 있고나서 처음 만나는 거였나, 그건 잘 모르겠다. 아 숨막혀서 못쓰겠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그 호프집에서 그는 그렇게 내 손을 꽉, 잡았다 놓았고, 정말이지 짧은 순간이었고, 아직도 나는 내 한 손이 그의 한 손에 쏙- 들어가던 느낌을 기억하고, 그 날, 내 표정으로 누군가 눈치채지 않을까 너무 두근거렸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가 헤어지기까지 그런 순간이 한 번쯤 더 올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중략)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 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p.88)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을 읽는데, 와-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안에서 하필이면 그 날의 그 호프집이 떠올라, 그의 손 안에 들어갔던 내 손이 기억나, 와 마음이 덜컹, 거렸다. 경애는 E 에게 손 잡힌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날의 기억을 그저 떠올렸을 뿐이고, 사람들이 여럿 있던 곳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았던 순간에 대해 얘기했을 뿐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 내 손을 잡았던 그 일이 떠올랐고, 그 때 내가 덜컹거렸던 그 순간의 감정까지 떠올라버려서, 더이상 독서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니 경애여.. 왜 그런 일을 떠올렸어요, 왜. 그러니까 나까지 그 순간을 떠올렸잖아요. 기억 속 저 멀리 묻어버렸던 것인데.. 왜 갑자기 떠오르게 만들었어요. 흙흙. 아침부터 심장이 덜컹, 마음이 덜컹 했잖아요. 어휴, 심장이야 ㅠㅠ 어이고 마음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


마음아, 진정해, 진정해야 해. 지금은 고작 월요일일 뿐이야, 어쩌려고 그래, 어쩌려고. ㅠㅠㅠㅠㅠㅠㅠㅠ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은 고작 70페이지까지 읽었을 뿐인데 참 좋다. 김금희를 처음 만났던 <아주 한낮의 연애>보다 훨씬 좋다. 70페이지까지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아, 여성작가의 글을 읽는 건 이래서 좋다, 이래서 소중하다' 느꼈는지 모른다. 여성 작가들이여, 응원합니다, 더 많이 글을 써주세요! 게다가 아주 한낮의 연애로 나는 김금희를 기억할만한 이름에 올리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경애의 마음으로는 좋으니 뭔가 작가의 발전같아서 그것도 좋고, 한 줄 한 줄 아주 맛있게 읽고 있다. 다만... 이, 어떤, 김금희의 뭐랄까, 버리지 못하는 그 어떤 클리셰.. 라고 해야하나.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경애도 그렇고 다른 인물들도 잘 만들어내다가, 왜, 어째서 '상수'가 여성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게 했는지, 게다가 그것은 왜그다지도 인기가 좋은 걸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게 꼭 필요했나, 대체 이런 설정을 왜한걸까 싶었다. 내가 이십대 후반이었나, 소설 쓰고 싶다고 이것저것 구상했을 때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온라인 고민사이트 만들어서 인기 끄는 주인공에 대한 거였는데, 김금희의 소설에 딱, 그런 남자가 나오는 거다. 아주 한낮의 연애에서도 맥도날드 씬에서 흐음, 너무 전형적이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째서, 왜, 온라인 고민상담으로 인기 많은 등장인물을 만들었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게 어떤 역할을 더 하게될지, 굳이 이런 설정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오오, 경애의 마음은 다르다, 좋구나, 하면서 읽다가 그 부분에서 삐끗- 했다. 소설을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많이 읽어온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러니까, 김금희는 욕심을 좀 버려도 되지 않을까,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아무튼, 아침부터 덜컹거렸다. 크-

그 때, 좋았었지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어.....



잘 지내나요?





경애는 언제나 어찌 되었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 P24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 P27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산주와 경애는 뻔뻔하게 로맨스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것마저 관계의 숙명처럼 느껴지던 시절은 오히려 로맨스의 과정이었고 한쪽이 결혼을 한 상황은 확실히 그것의 정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식장에 가서 무슨 오기인지 50만원을 축의금으로 내고 계단식 연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평소에 신지도 않던 펌프스 때문에 발가락의 찌릿찌릿한 통증을 참아가며 식당에 가 잔치국수를 먹는 일. 관계의 변화는 그렇게 등 떠밀리듯 왔다. 우리 헤어져, 하는 선언이나 다 관둬, 하며 뒤도는 동작이 아니라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가 남들이 다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 절차를 기꺼이 밟으며 그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는 것이었다. - P60

경애는 그 말들을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였고, 미유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소개팅 자리를 만들면 선선히 나가서 앉아 있었다. 미유 말대로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이 남자들은 어디서 뭘 하며 괜찮게 있다가 자기 앞에 나타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야 했고 자라야 했고 먹어야 했고 사고를 피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불운을. 불운이라고 말하면 대체 피할 수 있는 건가 싶은데, 적어도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 P62

경애는 철봉에 기대서 어떤 기대호 희망도 없지만 여전히 뛰는 사람들의 표정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같은 것을 지켜보았다. 그대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산주였다. 오늘은 뭐 하니, 하는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아무것도 안해, 라고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날이 이렇게 좋은데 왜 아무것도 안하니, 라고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다. 경애는 그냥, 이라고 문자를 쓰면서 혹시 만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 육칠초간은 너무 길었고 오늘의 어느 순간보다도 경애를 마음 졸이게 했는데, 그래 좋은 하루 보내, 하는 답장이 도착했다. - P92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 옥수수뿐이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 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 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고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 P97

그뒤로 경애는 산주와 자주 만났다. 살아 있지만 더이상 가까이 있을 수 없기에 죽은 사람처럼 여겨졌던 누군가가 다시 일상으로 들어온다는 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산주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는 자신이 두려워지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도 괴물 같은 데가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애정의 허기를 채우려는 욕심을 버리지는 못했다. 경애는 산주의 일상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서 오늘은 산주가 점심에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물건을 사고 몇시에 잠이 들었는지에 관해 아는 것이 당연한 상태를 맞았다. 마치 둘이 여전히 연인이었을 때처럼 전화를 받자마자 ㅇ보세요, 라든가, 선배 혹은 경애야, 하고 부르지도 않고 응, 가는 길이야, 왜, 밥 먹었어? 하면서 곧장 일상적인 대화로 들어가는 것이, 헤어질 때는 내일도 또 볼 테니까 아쉬움이나 대단한 안녕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 P110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으니까 상수에게는 그리 힘든 기다림도 아니었다. 경애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아니고 19세기 브론테 자매의 소설 속 인물도 아니며 브로마이드 속에만 존재하는 히로인들도 아니었다. 경애는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주 복합적인 실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상수에게는 너무나 뚜렸했으므로 상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언니들의 마음을 보듬는 진짜 언니가 될래요" 하는 낯간지러운 제목 아래 기사가 실리면 순식간에 달리는 ‘그럴 바에는 x 없애라‘ ‘변태일 듯‘ 같은 댓글 속에서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했다. - P349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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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4-1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닥콩닥

다락방 2019-04-14 10:11   좋아요 1 | URL
저도 읽으면서 콩닥콩닥 했어요. 히히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