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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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과 서양의 구분과 영역은 명확하지 않다. 굳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빌려오지 않더라도 동양은 서구 중심의 용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유럽에서 볼 때 우리는 동쪽에 위치한 중동을 포함해서 일본까지 모두 동양이 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과 미국은 물론 서양이 된다. 방향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어는 많은 것을 규정한다.

  미국인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는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정작 동양의 모태가 되었던 중동, 즉 이슬람 문화권은 빠져있다. 어쨌든 곁가지를 모두 잘라내고 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동양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양념으로 들어간다. 서양은 유럽을 포함한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통상적인 방법으로 구분한 동양과 서양을 들여다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이다.

  그러나 기준과 전제가 불문명하고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심리학자들의 실제 실험들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우가 수가 존재하고 실험의 목적과 과정 자체가 완벽하게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인식 상태와 사고 구조에서 객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주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객관성을 위한 노력들과 서로 상반된 두 개의 관점을 인정할 만하는 것이다. 2004년 4월에 나온 책을 2007년 1월에 22쇄를 찍었으니 엄청나게 팔렸다.

  많이 팔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과 흥미 있는 내용, 간결하고 쉬운 문장 등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 <생각의 지도>는 이런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중심에 ‘사람’을 놓았다. 사람들의 생각과 심리적 차이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텍스트가 된다. 더구나 저자인 니스벳 교수에게 지도받은 역자 최인철은 사회심리학자로서 전문가답게 적절하고 쉬운 설명으로 번역한 책이 지니는 어색한 문장이나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들을 잘 다듬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동양(사람)은 도를 중시하고 더불어 사는 삶과 전체를 보는 시야, 상황론, 동사와 경험을 중심으로 한다. 이에 반해 서양은 삼단 논법을 중시하고 홀로 사는 삶, 부분을 보는 시각, 본성론, 명사와 논리를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책은 8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이것들을 각각 비교하고 실제 실험을 통한 결과들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지막에 동양과 서양에서 벌어지는 사고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그리고 누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필자의 견해가 덧붙혀져 있다.

  컵은 옆에서 보면 사각형 위에서 보면 원형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을 놓고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나 프랑스 영화 <라 빠르망> 등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 중의 하나인 서로 다른 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과 위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의 지도는 정확하게 칼로 잘라 낼 수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선입견의 벽은 무섭다.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접근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소한 것이 큰 차이를 만든다.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화법의 주인공들에게도 유효한 책이다. 동서양의 차이나 문화의 다양성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대한 교훈까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가볍게 그러나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권해줄만한 <생각의 지도>는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기도 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차별과 평등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늘 우리들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과 노숙인과 동성애와 여성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북한과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07041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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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4-1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멋지게 쓰신 리뷰를 보니 반갑습니다.
22쇄의 힘에는 분명 대학교재의 공이 크겠지만 22쇄 찍힐 만큼 많은 사람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짱꿀라 2007-04-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얾음장수님처럼 저도 잘 읽고 갑니다. 저 또한 읽은 책인데 많은 도움을 받았답니다.

sceptic 2007-04-2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장수님이나 santaclausly처럼 제게도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 심설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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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소설이 전하는 위력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알 수도 없다. 문학에서 소설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은 논란이 있겠지만 문학을 단순히 소설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소설이 현실 세계에서 갖는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클수도 있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만큼 많다.

  소설 무용론을 주장했던 과거의 조선 시대 선비들도 있었지만 서사 구조가 탄탄한 소설의 매력은 여전하며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의 내용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소설이다. 인간이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는 쾌락 욕구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서 소설을 읽는다는 견해를 밝힌 비평가도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설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력과 꿈을 심어주기도 하고, 비참한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소설을 통해 울고 웃었던 많은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920년에 발간된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소설의 역할과 의미를 짚어낸 고전이다. 문학이론을 다룬 책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이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책이다.

  하지만 용어 자체가 낯설고 문장의 구성과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편을 번역했던 반성완의 85년도 번역본으로 역자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역자 스스로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음을 군데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 독일어 원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문학 전공자들이나 철학 전공자들도 반쯤 읽다가 던져버린다는 책의 소개가 무색하다.

  문학을 전공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철학적 관점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은 또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며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지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루카치가 이야기했던 소설 특유의 구체성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우매한 독자로서 시대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확인했다.

삶이란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하듯 스스로를 넘어서 있는 일체의 초월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상대적인 독자성과 그러한 초월적 구속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불가피성과 필요불가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P. 50

  하지만 이렇게 소설과 무관하게 삶에 대해 선언하는 부분들이나 그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작가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만한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예술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지만 역사와 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소설은 여전히 제멋대로 혹은 이 모든 것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버텨내고 있다.

서구의 문화 세계는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의 불가피성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논쟁적 태도 이외의 방법으로 이들 구조에 마주 서서 대항할 능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 P. 166

  서구 사회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논쟁적 태도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문화적 토대와 학문의 성향이 달라서일까?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진다는 ‘학계의 금기’를 넘어서는 일도 중요해 보이지만 그들과 다른 우리 소설의 구조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외연과 내용을 확장시킬만한 동력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건과 역량을 갖춘 많은 작가들을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독자로서의 욕심만은 아닐 것이다.

  루카치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예술과 삶의 관계는 쉽게 말해질 수 없다. 애증의 관계로 이별할 수 없다면 항상 사이 좋은 연인관계일 수는 없지만 그들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 일탈일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그 모든 이론들을 잊어버리고 술에 취하듯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닐까?
 
예술은 삶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의 태도를 취한다. - P. 77


07033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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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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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속 위반 스티커와 부고의 공통점은 상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현실 속으로 날아든다. 과속이나 주차 위반, 버스 전용차로 위반의 경우 과거의 기억 속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내지만 부고는 훨씬 강한 충격으로 삶을 순간적인 혼돈에 빠트린다.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를 헤매다가 현실로 돌아오거나 메트릭스 밖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친구의 부음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전해졌다. 오늘 오후에.

 죽음은 종교만큼이나 숭고하거나 거룩한 삶의 종착점이다. 연속적인 세계관에서 생각하면 죽음은 생의 연장이며 또 다른 삶의 형태일 수 있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의 마감이며 존재의 소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야말로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질 때의 고통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한다. 나 살아 있다고, 그 사람이 죽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불교에 대한 오해와 종교 일반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은 불신과 갈등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와 무관하게 종교에 대해 올바로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불교도 우리에게 오해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다. 호국 불교, 기복 불교로서 오로지 현실에서의 복덕과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경우 그 종교는 반드시 왜곡된 형태로 중생을 미혹하게 한다. 불교를 올바로 알고 이해하는 일은 종교인으로서 기본적인 자세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허와 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당위가 생긴다. 왜냐하면 종교는 현실의 도피처도 아니고 종교와 현실이 종속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역사는 물론 서양의 역사에서 종교가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 종교인의 자질 문제, 종교를 이용한 정치의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어찌됐든 현실 세계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승불교와 대승 불교에 관해서는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이 좋은 안내서가 된다.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숭산의 글이 객관적일 수는 없다.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을 엿볼 수 있는 입문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에 비해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는 불교의 핵심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진수를 선보인다. 여러 판본과 원전의 철저한 해석과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설픈 전문가는 맞대거리 하기가 힘든 것이 도올 저작들의 특징이다. 이 책 또한 해박한 도올의 설명이 특유의 어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지나쳐 요설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해석은 주관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기독교 교리와의 공통점 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한 기본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비판적이고 냉정한 분석과 논리적인 주장은 새겨 들을만하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 - P. 401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선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있어도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생에 대한 집착과 외물에 대한 유혹은 쉽게 벗어버릴 수도 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곧 해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 방법과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곳에 열반은 자리한다. 어떤 형체나 음성으로도 여래를 감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불상들과 목탁 소리에도 여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을 사는 인간과 영원을 꿈꾸는 종교는 여전히 불협화음으로 불화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이 낳은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종교들이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 제대로 알고 바르게 믿을 수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나도 종교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07031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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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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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막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구별되는 환상을 꿈꾸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일까?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280일간 태초에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익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모든 민족이 가지고 고유의 신화들 간에 공통성과 놀라운 유사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면 실제로 바벨탑이 세워졌고 언어가 달라지기 전의 기억들을 지금도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구 저편에 사는 장 보드리야르의 부고가 오늘 신문에 실렸다.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호접지몽’과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이 현실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과연 원본 없는 환상과 실체 속에서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셉 캠벨은 신화에 일생을 바쳤다. 한 사람의 일생을 매료시킬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단순하게 신화의 아름다움이나 구조와 체계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비교 신화학을 통해 각 민족이 지닌 신화의 속성이나 공통적 특질들을 찾아내고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물음들은 신화와 현실을 연결시켜야 하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현실 속에 상상의 빌미를 제공한다.

 도대체 신화는 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지 궁금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불러일으킨 신화에 대한 이상 열기는 단순히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신화에 대한 무지를 탓할 일도 아니지만 신화가 지닌 힘을 과대 평가하기도, 간과하기도 어렵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가 나눈 대담을 엮은 <신화의 힘>은 신화학자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과 현실 세계의 원형들을 보여준다. 빌 모이어스의 깊이 있는 질문과 캠벨의 적절한 답변들이 대화 형식으로 풀어져 있기 때문에 신화에 대한 개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 이야기를 듣다가 캠벨 자신이 ‘인생’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 P. 133

 인생은 개선한 사람이 없다는 단언에 절망한다. 이보다 나아지지도 않는단다. 이 부정적 현실 인식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같은 현상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놀랍고 굉장한 사건들의 연속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환상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거나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연구한 학자는 이렇게 현실조차도 신화와 같은 환상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캠벨은 죽음 저편에서 신화 속으로 들어갔을까?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P. 375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대한 감탄이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고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처럼 여겨진다. 꽃이 예뻐보이면 나이를 먹어가는 증거라는데 해 지는 저녁 무렵 한참동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마치 종교의 그 무엇처럼 경건해지는 상태를 신의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화의 어려움은 결국 모든 장면과 환상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데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신화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해 왔지만 언어의 한계 혹은 이미지의 한계는 신화가 전하고 싶은 내용의 저편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맥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선승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영역에 신화는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신화의 한 부분은 아닌지.

모이어스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벨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 그래서 결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P. 415


07030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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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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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능력과 말하는 능력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이 많은 선생과 잘 가르치는 선생이 다르듯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글을 쓰는 능력은 사유의 폭과 넓이, 상상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플러스 알파가 전제마저도 무력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진중권의 글은 적어도 내게 흡인력이라는 면에서 손 꼽을만하다. 숟가락을 허공에 든 채 만화 영화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어린 아이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이론과 예리한 시선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공허하게 들린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현실적인 공감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코미디 프로 보다 더 낄낄거리며 읽었다. 예를 들어 ‘포토샵, 일주일만 하면 황우석만큼 한다’는 인용문을 보고 대략 2분간 미친듯이 웃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전달하는 방식이 새롭다.

 근대화에서 전 근대성 그리고 탈근대가 아닌 미래주의라는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인간개조에서 된장남과 된장녀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한국 사회를 요리한다. 독일에서 유학했던 경험이 이 책에서는 진중권의 제3자로서의 시각으로 돋보인다. 이 후 한국 사회에 돌아와 한국 사회의 특수성과 개성들을 날카롭게 그리고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국은 이래서 안된다’는 유의 책들과 다르고 ‘한국인은 이래서 뛰어나다’는 민족적 우월성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차분하지만 예리한 칼날로 단면을 드러낸다.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들춰내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드러내는 날카로움은 저자 특유의 글솜씨로 마무리된다. 강준만의 <인간사색>과 비교해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은 아니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화상을 그려내는 데 서투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거울의 역할을 한다. 라캉의 말대로 거울을 통해 자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발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리고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대중적인 글쓰기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라서 다양한 측면의 분석과 해석은 미흡하고 지나치게 주관적인 관점으로 서술되는 아쉬움은 상쇄될 만하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군대다’라는 책이 나올만큼 기계화된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의식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다.

창의성이 생산력이 되는21세기에 대한민국은 자신의 미래를 군대 훈련소에서 찾고 있다. 모자라는 상상력을 사디즘으로 보충하는 변태들이 너무 많다. - P. 37

 거침없는 표현과 실날한 비판의 메스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독자에게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넘어 우리들의 자화상을 어떤 모습으로든 새롭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저자의 시선 속에서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우리들의 모습 사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국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단편적인 이슈와 거시적인 담론의 틈바구니에서 마주치는 이 책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전해준다.

같은 달력을 사용한다고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 P. 110

 갈등의 근본 원인 중 하나를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진단은 정확해 보인다. 같은 달력을 사용하면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내용은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하늘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 일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할 때가 있다. 코레아니쿠스의 축소된 자아가 나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나는 아니라고 외치는 대신 큰 거울을 들여바 보는 일도 의미있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제 거울을 들여다 보았으니 어쩐다. 머리를 빗을까? 아니면 화장을 할까?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릴까? 너는 누구냐고 외쳐 볼까? 각자의 몫이다.

07012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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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1-3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진중권의 책은 인기가 많군요...리뷰 잘보고 보관함에도 넣었습니다.지금 당장 읽을 것은 아니지만.진중권이 그동안 냈던 -미학책을 제외한-책들 또는 계간지들에 올렸던 글들과 유사할 듯 합니다.갈등의 원인을 한국사회의 근대와 전근대의 병존으로 보는 것은 여러차례 썻던 글인가 같기도 합니다.엘리아스와 푸코의 예를 들면서 그 둘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단계론적 방식에 대한 거부. 근대와 전근대,탈근대가 공존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기때문에 비단 한국 사회에만 적용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저자의 지적이 정확하다기 보다는 '8월에 물조심하라'말 만큼 보편적이라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럼에도 진중권의 책을 읽는것은 재미있습니다.

sceptic 2007-01-3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에 물조심하라'는 비유가 적절합니다. 이 책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방식을 제 나름대로 읽어낸 거니까 진중권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겠지요. 관점이 새롭거나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드팀전님의 지적대로 저자의 지적이 정확하다기보다 말하기 방식이 재미있지요. 읽는 맛은 별미에 해당하니 저로서는 잘 참아지지 않습니다. 대리만족이든 대리배설이든 일단 시원하니까요. 대안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겠죠. 누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