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인상주의 편 -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진중권의 서양 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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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에게 빚이 있다세상에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그렇겠지만진중권은 나의 미술 선생님이다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 동안 뭔가 그리고 만들고 외웠으나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내 발로 미술관을 찾기 시작한 건 라루스 서양미술사』 일곱 권을 꼼꼼하게 읽은 다음부터가 아니었을까시작은 미학 오딧세이를 접하고 난 후의 일이겠지미술관에는 혼자 오는 여자들이 많지만 혼자 오는 남자는 거의 없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이미 3권이 완간되었다. ‘고전예술 편’, ‘모더니즘 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이 그것이다이번에 나온 인주주의 편은 고전과 모더니즘 사이를 잇는 보론이다중간에 비어있는 시대를 채워야하지 않았겠나이밖에도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교수대 위의 까치현대미학강의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책은 누구에게나 어떤 작가든 다른 이미지를 심어놓고 떠난다같은 책도 독자마다 다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경우는 작고한 경우와 또 다르게 받아들여진다오롯이 책의 내용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그의 개인사언행도 수용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논객으로서 진중권은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에 나온 인상주의 편은 앞선 저작보다 명쾌하다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를 거쳐 신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에 대한 흐름을 명쾌하게 전달한다진중권의 가장 큰 장점이다분명함상대적으로 약점이 될 수 있으나 이 책은 이미 존재하는 시대구분을 최대한 활용하고 대표적인 화가와 그림을 제시하며 독자의 머릿속을 모눈종이처럼 정확하게 획정한다이래도 정리가 안 되느냐는 듯이여전히 아쉬운 건 한국어 문장에 대한 노력 부족비문은 아니나 거친 문장과 번역투옛스러운 문장 구조가 난무하여 자꾸 신경이 쓰였다여기다 문장 지적질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신경 쓰지 않는 건 같아 한마디 보탠다
  
중세의 장인들이 세계를 아는 대로’ 그리려 했다면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사실주의 화가들은 있는 대로’ 그리려했다인상주의impressionism 화가들은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 즉 인상impression을 그렸다자연스럽게 빛과 색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가시적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가시적 세계에 대한 순간적인 분위기가 우선이다형태는 지워지고 빛과 색만 남는다사실주의와 라파엘전파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어느덧 마네의 올랭피아를 들여다보고 있다수많은 전시회를 돌며 한번쯤 들여다본 그림들과 익숙한 화가들의 계속 등장한다새로운 그림과 화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없다다만 모더니즘 이전 시대의 미술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차분함으로 충분했다
  
나는 모네보다 고흐의 그림 앞에서 훨씬 오래 머물렀던 기억을 떠올렸다수동적인 인상주의 보다 적극적인 표현주의expression가 마음에 든다예술가의 작품 활동이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어차피 고독한 자기만의 길이 아닌가그래서 뭉크의 절규가 뭉클한 감동을 준다상징주의를 넘어 모더니즘으로 넘어가기 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그림은 역시 시대를 앞선 느낌이다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이야기로 넘어오면 현실이 보인다
  
두 개의 보론과 마지막에 잘 정리된 모더니즘을 향하여는 그대로 미술관에 가기 전 벼락치기 공부로 읽어두면 좋다요즘은 미술관에 가면 대부분 오디오 가이드를 받는다도슨트 시간을 맞추기도 하지만 손쉽게 이어폰을 꽂고 안내를 받는다그러나 그림이나 조각대신 설명에 집중하다 보니 주관적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느낌과 감동도 노력이 필요하다간략한 미술사에 대한 지식과 각 유파와 화가에 대한 지식을 얻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그림을 이해하는데예술을 즐기는데 필요한 건 사실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관심이다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미술관이 있고 놀랄 만큼 자주 전시회가 열린다통장의 잔고는 부러워하면서도 예술적 감수성은 부럽지 않을까돈으로 살 수 없는 감동과 두근거림과 여운을 주는 그림 하나음악 한 곡의 위대함.
  
현실 너머를 꿈꾸지 않는 사람에게 난 늘 연민을 느낀다자기 세계가 좁은 사람은 감옥에서 산다는 사실을 모른다어느 철학자는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했지만 미학적 안목은 또 다른 세계의 한계를 보여준다넓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간지러운 감상주의가 아니라 통찰력 있는 안목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중세의 장인들이 세계를 ‘아는 대로’ 그리려 했다면,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그리려 했다. 중세의 장인들이 그림을 ‘신학적 관념의 표현’으로 여긴 것과 달리,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그것을 ‘가시적 세계의 재현’으로 여긴 것이다. 이들이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려 한 것은 물론 그 세계가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세인들은 현세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 19쪽

거칠게 말하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양식, 1830년의 시민혁명이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양식으로 표현되었다면, 사실주의는 1848년 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 71쪽

‘사실주의’라는 말도 크게 세 가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먼저 ‘대상의 사실적 묘사’라는 의미. 이 경우 사실주의는 사실상 자연주의의 동의어가 될 것이다. 둘째는 ‘당대 사회의묘사’라는 의미. 사실주의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모던’의 사회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법으로서 자연주의와 뚜렷이 구별된다. 셋째는 ‘현실의 비판적 묘사’라는 의미. 사실주의의 바탕에는 종종 부당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정신이 깔려 있다. 물론 어떤 것이 사실주의 회화라 불리기 위해 이 세 조건을 모두 갖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현실의 변혁’이라는 의미다. 이미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자들은 예술을 사회변혁의 정치적 무기로 여겼다. - 72쪽

인상주의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외광을 쫓아서 야외로 나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재가 아니라 빛의 효과였기에, 그들은 현장에서 신속하게 스케치를 한 후 바로 채색에 들어가곤 했다. 이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해준 것은 1840년대에 발명된 튜브 물감이었다. 튜브 물감이 없던 시절에는 원하는 색의 물감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채색을 화실 안에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119쪽

고흐는 노랑을 좋아했다. 노랑이 감정적 진실의 상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235쪽

상징주의는 사실주의․인상주의․과학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한 운도응로,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세속화로 뿌리를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한다. 대도시의 환경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이들이 냉혹한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정신적 피정을 떠난 것이다. - 272쪽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형태는 기능에서 나온다. 기능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이 새로운 미감을 우리는 ‘모더니즘’이라 부른다. -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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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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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140

 

이 문장은 마치 1755년 루소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를 내다본 것 같은 예언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란 논문에서 그는 존재가 아닌 소유를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모은 인간이 평등했던 원시 시대는 역사적 차원의 시대 설정이 아니었다. 이는 개념적 차원에서 악, 도덕, 평등이란 개념조차 필요 없었던 시기를 말한다.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세습과 유산 상속이 가능해지자 자연스럽게 권력과 계급이 만들어졌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모든 인간은 불평등에 시달리며 산다.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던 루소는 사회계약론에밀로 유명하다.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고 불우한 말년을 보냈으나 루소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를 앞섰다. 학문과 예술의 발달과 더불어 도덕이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사상에 반기를 들었던 그는 경제와 계급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가 인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군주제와 귀족제 그리고 민주제가 가진 불평등의 요소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보자. 세습된 왕 혹은 소수의 귀족 혹은 선출된 대표자. 무엇이 다른가. 대한민국은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을까.

 

권력은 경제로 넘어갔다는 대통령도 있었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국가를 수익모델로 생각한 대통령도 만났다. 멍청한 꼭두각시를 믿고 맡기기도 했으나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정치 제도의 문제일까? 개헌을 하면 세상이 달라질까? 패배주의와 정치 혐오 발언이 아니다. 260년 전 루소의 말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잣대로 활용될 수도 없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평등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그 원인과 대책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하는 게 아닐까.

 

그것은 사회 계층 구조를 허물고, 경제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선언적 의미와 다르다.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 사회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목적지의 문제다. 어디를 보고 어떻게 흘러가는가. 권력과 권력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경제 시스템과 기업의 목적을 다르게 해석하고 분배의 정의에 합의하지 못하며 서로 다른 복지 개념을 가진 자들의 쟁투가 우매한 유권자의 판단을 흐린다.

 

남이 해주길 바라는 대로 남에게 행하라마태복음의 말씀을 듣고 신자들의 행동이 달라졌을까. 그들이 만든 세상은 어떠한가. “타인의 불행을 되도록 적게 하여 너의 행복을 이룩하라는 말씀을 인용한 루소의 생각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논박하고자 한 것은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낸 정치체제와 인간들의 속성이다.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며 발언하고 행동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 쉽게 끓는 냄비처럼 유행을 타고 시류에 영합하며 함께 손가락질하고 뉴스를 소비한다. 손바닥처럼 뒤집어 같은 논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기는 싫고 모든 영역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싶지도 않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적 증오는 불가능하다. 거시적 관점으로 구조를 바꾸고 판을 흔들자는 선언들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찧고 까불다 이내 지쳐 나뒹굴고 손톱만큼의 손해라도 생길 것 같으면 외면하고 제 잇속만 차리는 건 정치인이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을 자연법이 적용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본 홉스와 대척점에 서 있던 루소는 왜 그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과거로의 회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선언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당대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추악한 욕망과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한 사자후가 아니었을까.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제대로 읽어낼 사상가도 논객도 부재한 현실이 답답하다, 아니 한심하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자유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정치가들은 철학자들이 자연 상태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궤변을 곧잘 늘어놓는다. 그들은 보이는 사물을 가지고 아직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사물을 판단한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들이 노예 상태를 참아내는 것을 보고는 인간에게는 예속에 대한 자연적인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유란 순결이나 미덕 같은 것으로서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것에 대한 취미도 곧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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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극장 -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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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됐다.’

아버지는 생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당신 수고 많았다.” - 413

 

인생이란 고칠 수 없는 단 한 번의 연극이라는 비유는 식상하지만 그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도 어렵다. 노명우의 인생극장을 읽는 동안 몇 번 코가 시큰했고 눈물이 고였다. 2015년과 2016년에 잇달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노명우처럼 2017년 봄에 아버지가 떠나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공감은 유사성에서 기인한다. 이해할 수도 상황, 상상해 본적 없는 감정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감동을 받은 책이 아니라 공감한 책이다. 감동과 공감은 다르다.

 

1924년생 노병욱 요셉과 1936년생 김완숙 세실리아는 사회학자 노명우의 부모다. 살아계셨다면 80, 90대 노인이다. 그분들은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아버지, 어머니라는 일반명사로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저 그런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명우가 시도했듯 1917년생 영웅박정희가 걸었던 삶의 궤적과 확연히 구별된다. 박정희도 모자라 그의 딸까지 모셨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두 분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회학자의 눈에 비친 두 분의 삶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사회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미래다.

 

염려했던 대로 아들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애잔한 마음과 지극히 주관적인 언사가 군데군데 집중력을 떨어뜨렸으나 지나치진 않았다. 메마르고 객관적 시선으로 서술하는 방식 또한 공감을 덜어냈을 테니까. 노병우 요셉은 충남 공주에서, 김완숙 세실리아는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노명우는 파주 광탄면 신산2리에서 인생극장의 막을 올렸다. 아들 사회학자가 부모자연인으로 바라보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선명해서 조금 불편했다.

 

다만 사회학자의 눈에 비친 당대의 모습과 그 시대를 살아왔던 이 땅의 모든 그저 그런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게도 일부 겹쳤기 때문에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폭이 넓었다.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박정희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가 이젠 망자가 되거나 노년에 접어든다. 시대를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노명우는 영화를 선택했다. 실제 당시의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 강좌 덕에 만든 책이지만 영화의 내용을 소개하는 내용도 흑백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재밌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인데도 이제는 아주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린다. 그만큼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얘기겠지만. 텍스트는 여전히 소수만 공유하는 세계다. 성인 104명은 전혀 텍스트를 접하지 않는다는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의 결과가 오히려 놀랍다. 어쨌든 6명은 읽는다는 말이니까.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1959년부터 2014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이에 비해 노명우의 인생극장1924년부터 1960대를 주로 다룬다. 이후의 이야기는 후일담에 해당한다. 1966년생 막내 아들이 바라본 부모님의 삶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역사학자라면 그분들의 삶은 그대로 미시사 연구의 사료로 사용되기에 충분했으리라. 다만 노명우도 부모님이 남긴 자료와 흔적이 많지 않아 동시대의 영화, 통계 자료로 갈음한다. 레인보우 클럽에서 무지개 다방으로 바뀌는 과정은 우리의 근현대사의 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부모가 공무원이나 회사원이었다면 노명우는 이 책을 쓰지 못했으리라. 식민지 시대부터 6.25 전쟁 그 이후의 삶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한 편의 소설보다 파란만장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읽어내는 객관적인 기록이면서 지극히 사적인 고백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한창 상영 중인 영화다. 어서 빨리 엔딩 크레딧을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고 이제 막 클라이맥스를 찍고 있는 사람도 있다.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도 있고 비참하고 우울한 사람도 있을 터. 그러나 곧(?) 막을 내린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기 영화의 스토리를 바꿔보고 싶다면 용기와 변화가 필요하다. 아무도 시나리오를 써주지도 고쳐주지도 않는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손가락질의 방향을 돌려야하지 않을까. 모두 내 탓이라는 낮은 자존감도 문제지만 자기 영화의 스토리를 남에게 맡기는 사람도 문제다. 노명우의 말대로 우리 모두 인생극장의 주인공이다. 조연인척 하지 말자. 감독이나 작가를 욕하면 달라질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와 그토록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멀리 가고 나서야 비로소 정체가 드러나는 그 무엇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그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재인용,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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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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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 진실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오래된 영화 속의 대사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도서 선정도, 책을 읽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제. 그래서 영화 다시 보기, 책 다시 읽기는 충분한 사이가 필요하다. 진실이 고통스런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 진실일까.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 진실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러나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천착하면 정답보다 분명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과학자의 사회학이다. 인문학과 달리 과학의 눈은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내놓는다. 질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의학 분야가 역학epidemiology이다. 그러나 원인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부터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스스로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밝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의 원인을 흔히 스트레스라고 한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역학 연구들은 원인의 그물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당신은 그물을 만드는 거미를 본 적이 있는가? 질병의 사회학과 정치적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의 몸은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그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흔들린다. 생물학적 나이를 제외하면 모든 삶은 그대로 몸에 반영된다. 체질과 음식은 물론 관계, , 날씨, 지역, 정치, 경제, 문화까지 우리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증거다. 김승섭은 과학적 합리성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데이터에 기초한 사고다. 둘째는 지식의 생산과정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는 근거의 불충분함이 변명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계다. 1부 말미에 제시한 지극히 개인적인김승섭의 기준에 무한 공감했다. 과학적 진실은 인문학보다 객관적이라는 비교 우위가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적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질병 치료와 무관하다. 질병의 원인을 찾는다. 김승섭은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176)라는 말로 이 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낙태 금지, 삼성반도체 직업병,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생존자,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사건, 사고가 매일 인간 삶의 일부를 이룬다. 이런 사회 현상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질병으로 이어진다. 인상적인 사례는 이런 사회적 현상 뿐 아니라 절약형질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도 몸에 남겨진 태아의 경험은 시간의 간격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내기조차 힘들다. 모르면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발명하고 신을 만들어낸 것일까.

 

의학 지식을 나열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책이라면 읽다가 덮었을 것 같다. 제목 때문에 의사가 쓴 에세이라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책모임 대상도서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좋은 책을 만났다. 저자의 첫 책이다. 과학자는 인문학자와 달리 과학적 합리성을 토대로 한다. 세상에는 많은 책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양념과 포장을 뜯어내면 반복되는 이야기가 절반. 그 중에 절반은 노하우와 실용적 방법론을 전한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책, 조금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책,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책을 더 만나고 싶다. ‘쉽고 재밌게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다. 사회역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작가로서 눈여겨 볼만한 김승섭을 환영한다. 다음 책도 기대된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 303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 53쪽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 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 오토 노이라트 재인용, 83쪽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 176쪽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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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 빅뱅부터 전쟁과 혁명까지
김서형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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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먹과 찍먹 사이

 

짬뽕과 짜장면, 물냉과 비냉 사이의 갈등은 이해하나 탕슉을 부먹이나 찍먹이냐로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전혀 다른 음식, 서로 다른 맛을 넘어 이제는 같은 음식 같은 맛이지만 식감의 차이를 따질 만큼 우리는 배가 부르게 산다. 졸업식 날 온가족이 짜장면을 먹던 기억에 대한 언급은 꼰대질이다. 음식 문화가 변했다는 건 단순히 경제생활의 향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트렌드는 문화가 되고 생활이 된다. 생활의 변화는 생각을 바꾸고 습관과 행동 그리고 운명을 조정한다.

 

사소한 차이에 시간이 결합하면 그 결과는 놀랍다. 스키 바인딩을 적절히 조절하면 큰 부상을 방지할 수 있지만 조절에 실패하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빅히스토리는 136억년 넘어에 놓인 빛과 어둠에서 출발한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시간의 흐름 속에 현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부먹과 찍먹의 바삭거림 차이가 아니라 탄생-성장-소멸을 가늠하는 존재론적 차이다.

 

김서형의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는 두 가지 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우선 신선함이다. 그림으로 빅히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어 어느 한 쪽만 이해한 사람에게는 낯선 영역과의 결합을 보여준다. 물론 일관성 있게 전체적인 구성과 히스토리가 치밀하게 엮이지는 못했다. ‘우주와 생명의 탄생’, ‘인류의 빛과 그림자’, ‘혁명과 전쟁으로 우주와 인류의 빅히스토리가 모두 담길 수는 없다. 그래도 친숙한 그림에 담긴 과학, 신학, 역사, 사회, 전쟁, 근대화 이야기가 풍부하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국인이 쓴 쉽고 적절한 설명이다. 번역서로만 접했던 빅히스토리를 우리글로 읽으니 더 쉽고 재미있다. 경어체를 사용한다고 해서 청소년용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책이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읽힐 필요도 없지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예술빅히스토리를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을 덜어내고 지식과 정보를 간명하게 전달한다.

 

 

재벌과 학벌 사이

 

초등학교 시절, 눈밑을 벌에 쏘인 적이 있다. 한쪽 얼굴이 부풀어 올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선생님들의 기상천외한 체벌에 시달렸다. 자로 손등을 때리거나 부러진 눈밑을 꼬집거나 부러진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종아리를 때리거나 구레나룻을 쥐어뜯거나……. 그때 그 시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재벌을 알게 됐다. 학문 영역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학벌 체제로 굴러가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재용 2심 판결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승복한다고 해도 36억 아닌가! 누군가 공무원에게 36억의 뇌물을 주고 풀려날 수 있을까? 재벌공화국의 오명은 대통령이 바뀐다고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견고한 기득권의 시스템과 그보다 더 단단한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찌 하루아침에 무너지겠는가.

 

동종교배는 열성인자를 낳는다. 대통령의 권력이 국민을 무시하는 세상은 교수의 권위가 새로운 학문적 도전을 배척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학벌 사회의 견고함은 학문의 동종 교배에서 비롯된다. 선생님의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생각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대학은 발전이 없다. 교수 자리를 탐하는 학자, 승진에 목숨 거는 공무원, 이익에만 집착하는 기업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재벌가의 몸종이 되지 못해 한이 되고 학벌로 줄 서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세상에서 우리들의 빅히스토리는 쓰일 자리가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빈센트 반 고흐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로 시작해서 모네와 고갱, 클림트, 루벤스, 김호도, 들라크루아, 윌리엄 터너, 조지 럭스의 헤스터가로 이어지는 스물 한 작품은 예술적 완성도 뿐 아니라 풍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나하나에 얽힌 우주의 신비, 생명의 탄생, 지구의 모습, 인류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한다. 분과 학문에 매몰된 학교 교육을 넘어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는 공부는 가능한가.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생각과 도전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가능한가. 재벌과 학벌이 아니라 상상력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변화와 공존은 가능한가.

 

혼자 꿈을 꾸면 공상이지만 다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훈데르트바서의 말은 선언적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치고 깨져도 소수의 가진자와 힘센자가 아니라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가진자와 힘센자가 되려는 노오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발상의 전환과 각자의 빅히스토리가 필요하다.

 

 

팝핑[popping] : 재미를 보태고_대중성

1. 호모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5.11.24

2.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명주 역, 김영사, 2017.05.19

 

펌핑[pumping] : 외연을 넓히며_동질성

1.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이덕환 역, 까치글방, 2003.11.30

2. 빅히스토리, 신시아 브라운, 이근영 역, 바다출판사, 2017.12.04.

3. 시간의 지도, 데이비드 크리스천, 이근영 역, 심산, 2013.05.20.

 

점핑[jumping] : 깊이를 더해서_연계성

1.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까치글방,2010.10.06

2. 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역, 사회평론,200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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