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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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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기말과 신세기의 구분은 의미 없다. 하지만 인간은 늘 무엇인가 정리하고 구분짓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다.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따로국밥이다. 20세기가 끝났다고 해서, 21세기가 시작됐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그것은 분명 심리적인 문제일 것이고 하나의 계기를 만들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일 것이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고 매주 다시 맞이하는 월요일에 대한 반복적인 시간 패턴에 적응하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늘 대화는 필요하다.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내가 비쳐지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공존과 대화보다 대립과 갈등이 심했다.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보충하자는 전략적 제휴도 아니고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와는 다른 대화가 진행되어 왔다.

  비판적 지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주장하는 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 도정일과 안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기초가 된다는 신념을 가진 동물사회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만남이 <대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특별한 만남도 아니고 출판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지만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생각의 방식과 사물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는 즐거움은 덤으로 얻는다. 우리는 늘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물들에게 무심한 눈길을 보내고 선택적 관심과 고정된 시선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인문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자연과학적 관점과 시선이 누구보다도 부족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방식과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세상에 대한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전제하에, 많이 안다고 해서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믿을 수도 없다. 호기심과 끊임없는 앎에 대한 욕망은 사람을 때로는 지치고 힘들게 한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 사람의 긴 대화를 읽어가면서 결국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회귀했다. 문득, 누군가 내게 위선보다 위악이 더 나쁘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유전자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과정과 방법은 실로 경이롭다. 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조차 본질적으로는 아름답고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과학적으로, 아니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속성과 이해가 필요하듯 인문학적 인간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성향을 지닌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

  박학다식한 두 석학의 지적 유희와 번지르르한 말장난을 우려하지는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도정일은 폭넓은 자연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최재천은 문학 소년이었던 시절을 말할 만큼 인문학과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인 동물들의 사회생물학을 전공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불꽃 튀는 논쟁과 첨예한 대결은 찾아볼 수 없다. 시종일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고 상이할 것 같은 두 학문 분야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의미 있을 뿐이다. 서로 놓치거나 구멍이 뚫려버린 부분들을 비추어 주고 중첩되는 부분에 대해서 공유하는 방식은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해석과 대안에 일정부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학부제가 운영되는 취지가 제대로 살려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학문과 전공의 교육과정이 이렇게 철저하게 분과주의로 흐른 원인도 고민해보고 앞으로의 길도 모색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진정한 교양인으로 길러내기 위한 노력을 대학이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지,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사회의 ‘능력있는 공부기계’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검도 필요하다. 효율과 결과에 집착하고 경제성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반성도 절실하다.

  21세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불투명했다. 인간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두 학자의 말에서 찾아본다.

  저는 21세기의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합니다. 2003년 1월에 모리 전 일본 총리의 초?받아서 일본에 갔다가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폴리티구스이기도 하지만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간이기도 하는 내용이었어요. - P. 593
  남미의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도 공생의 지혜와 철학을 끊임없이 이야기했어요. 일리치는 인간이 가진 대표적인 ‘공생의 도구’로 자전거, 도서관, 그리고 시(詩)를 꼽았습니다. - P. 596(최재천)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지점도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이곳인 것 같습니다. - P. 597(도정일)


060116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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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 공감 - 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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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별성 안에 보편성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정혜신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개별적 경험이 세상의 진리라고 굳게 믿는 행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과 사회 일반에 관한 이야기들은 결국 개별적 특성을 통한 일반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혜신의 <삼색 공감>은 특별한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짤막한 단편들이 모여 있어 긴 호흡으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은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로 상쇄된다. 한겨레를 통해서 최근에 접한 칼럼도 포함되어 있지만 지나간 이야기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우선 ‘사람, 관계, 사회’라는 이 책의 편집이 제목이 되어 버렸다. 삼색은 분명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어주는 관계의 모습.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 색깔과 관점을 가지고 뚜렷한 목소리를 내거나 일관된 흐름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신과 의사가 바라보는 세상은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책을 읽는데 방해 요소가 된다. 직업과 학력, 출신과 성분은 상대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직업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다만 정혜신은 직업과 전공을 병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일반들의 이해를 돕는데 사용하고 있어 부담스럽거나 주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칼럼의 특성상 잘난 척하거나 전문가로서의 충고를 잊지 않으려는 시혜적 태도를 버리기 어려운데 비해 비교적 설득력 있고 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매 꼭지마다 일상에서 만나기 쉬운 일화나 비유를 사용해서 평이한 목소리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하고 싶은 말들을 군더더기 없이 적확하고 명료하게, 때로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에 공감하게 된다.

  짧은 글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 모범이 될 만한 형식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시사 문제와 직결된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으나 발표된 지면의 특성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주관을 배제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혜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과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되어 있다. 그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냉정하고 차분하며 설득력 있다.

  나는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아주 쉽게 일반화해버리는 사람들이 미덥지 않다. - P. 77

  개인적 경험에 객관과 통찰이 더해지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진보는 ''경험적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의 ''밝은 눈''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 P. 77

  본능은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본능이란 정교하고 미세한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존재 이유'' 그 자체에 의해 움직이는 힘이다. - P. 91

  자신의 경험들과 개인적 통찰력을 ‘경험적 문제의식’으로 바꿀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정혜신도 본능처럼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 고민들이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측면까지도 담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활동가나 선동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기본임은 물론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목에 핏대 세우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폭넓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P. 101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 P. 102


  정신과 의사라는 ‘지적 권위’나 논리성의 메마름이 아닌 부드러운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정혜신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약 조절보다 그 설득과 생각의 편린들을 전달하는 방식들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적 권위주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그의 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06012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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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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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상을 꿈꾼다.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공상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즐긴다. 자끄 라캉이 구분해 놓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혼동은 휴머니즘과 진보를 모토로 출현한 모더니즘의 연상선상에 놓여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도 여기에 속한 범주로 이해하면 개념이 혼동일지 모른다. 내게는 그렇게 읽혔으니 바로잡는데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변과 경계를 즐기는 버릇은 책읽기에도 곧잘 반영된다. 현실과 환상의 핵심에서 벗어나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를 기점으로 모더니즘이 출발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지금, 여기’의 실체에 대한 역설을 반복한다. 전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이 책은 끝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개념으로 활용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전도서

  벤야민이 말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의 개념과 홀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부터 비롯하여 기계기술의 발달과 현대 사회의 왜곡된 현상들을 해석하는 보드리야르의 시각과 해석은 독특하다. 그의 개념에 동의하느냐 문제는 별개다. 현대사회를 통찰하는 시선의 낯선 방향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시뮬라트르’가 참된 것이라는데.

  시뮬라시옹은 환상과 허구다. 그러나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조작된 현실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지도 결국 실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감추고 변형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혼동 속에서 대중은 실재보다 이미지에 집착하고 현혹된다. 때로는 실재의 부재를 감출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박제된 현실 속에서 환상과 이미지를 찾아 떠나는 피곤하고 긴 여행중인 현대인들의 나른한 일상을 비추어 볼수 있는 프리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시뮬라시옹’은 아닐까.

  텔레비전과 ‘홀로코스트’, 영화와 ‘충돌’이 빚어내는 시뮬라크르는 역사와 현실은 넘어선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모방된 이미지와 개념을 오히려 현실이 따라야 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끝임없는 쏟아지는 광고와 자본은 인류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딘가를 어떤 모습으로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집단 환각제를 마신 것같다. 실재계와 상징계는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치환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 왔고, 그 속에서 헐떡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모방된 현실과 가상 현실은 인간관계도 변화시켜 버렸다. 네트웍과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보드리야르가 바라본 이미지와 실재의 괴로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미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 : 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 - P. 252

  이 책의 마지막이다. 무의미와 허무의 유혹만큼 강렬한 환각은 없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유혹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다. 모호한 언술로 대중을 농락하는 철학자의 말장난이 아니라 뒤돌아보지 않고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경종을 귓가에 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의 실존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론 측면에서, 혹은 사회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개념과 논의들은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모습이다. 안다는 것만으로 부족한 2%는 우리 모두가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무질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질서’가 가져오는 소외와 폭력적 외로움을 전하는 듯한 브레히트의 말이 오히려 가슴에 오래 남는다.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곳, 이것은 질서 : 브레히
트 - P. 241


  윤난지의 <현대미술의 풍경>을 읽다가 개념이 잡히지 않아 읽게 된 책이다. 변죽만 울리고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인용과 재인용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는 책들과 개념들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하이퍼링크 책읽기’의 즐거움이다.


06021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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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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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아니 자주 나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다. 물론 그것에 대한 답이 될만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를테면 사회경제적 지위로 볼 때 당연히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띠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보면서 기사의 방향과 논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착각하는 비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오래된 숙제처럼 대중들의 비합리적 정치 성향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모순은 풀리지 않았다.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그 의문부호에 확신에 찬 답변을 던져준다. 1933년에 출판된 이 책이 많은 부분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히 사상의 정수를 선보인 것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만하다. 단순하게 사회와 정치를 보는 거시적 안목에 대한 탁월함이나 뛰어난 통찰력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의 기원을 분석해내는 방법과 논리는 명쾌하다. 프로이트와 동시대 인물로 정신분석학 연구소에 일했을 만큼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한계를 느끼고 독특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인간정신의 심리구조를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향을 극복하고 거시적 관점인 역사적, 사회적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맑스다. 맑스의 노동과 사회학적 관점이 라이히 사상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라이히는 ‘성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이 이론의 정수가 바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고 볼 수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극에 달한 시점에서 쓰여진 이 책은 이후 3차례의 개정 증보판을 내게 된다. 그린비에서 이번에 번역된 책은 1942 8월에 쓴 라이히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붙어 있다. 라이히는 이후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소를 세워 연구활동을 하던 중 미국 정부에 의해 연구 성과가 파괴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6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옥사한다.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 후 출판된 이 책은 그의 이론의 독특성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차피 정치는 개인의 성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시대를 반영한다. 파시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혔던 라이히가 대중심리의 비합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프로이트와의 인연으로 인간의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정치적으로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입장에서 대중들의 모순된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억압하며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당당히 현실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라이히의 고민에 공감이 간다. 이런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를 자연스러운 성의 신비적 왜곡과 억압된 오르가즘에 대한 열망 그리고 가부장적으로 구조화된 사회경제적인 억압에서 찾고 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라이히는 노동자들을 계층별로 세분화하고 그들의 정치 성향을 비교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개인의 성적 억압과 가족내에서 구조화된 가부장적 억압구조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지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라이히가 생존했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지닌 현대 사회는 그 특징을 쉽게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인류는 이미 정보 사회로 접어들었드며 인터넷의 발달과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삶의 형태와 의식 구조가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대중들의 정치적 성향과 변화 주기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중들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통제하거나 묶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류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변하지 않는 대중들의 심리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불어 성적 억압구조나 가족 지상주의, 언론과 정보 사회의 극단적 포퓰리즘 등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경제적 계급구조는 더욱 모호해져가고 있다. 아니 모호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라이히의 지적대로 물질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성향 사이의 균열의 원인이 항상 소시민들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논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현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사회의 구조와 경제적 토대가 어떤 형태로 변화될 지 알 수 없으나 라이히의 주장은 상당부분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 많다. 전공자가 아니라서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관점과 이론적 토대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생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원인을, 혹은 그 연결고리를 ‘가족’으로 보았던 라이히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상황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면 그 다양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정치 협잡꾼이 아니라 소시민계층이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통해 바로 잡아야할 문제다. 이 책의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히의 말 한마디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인간 존재의 원천이다. 또한 이것들이 인간 존재를 지배해야 한다!" - P. 496

 

 

0604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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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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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지凌遲’는 죄인의 살갗이나 살점을 칼로 도려내는 형벌로서, 가능한 한 죄인을 살려둔 채 며칠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하는 형벌이다. 능숙한 집행자는 한 사람에게서 2만 점까지 도려낸다고 한다. 이 끔찍한 형벌은 인간의 폭력과 잔혹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무색케하는 이 형벌은 문명이전의 야만과 광기의 산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형벌이 많이 존재한다. 삶아죽이기도 하고 궁형에 처하기도 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방법이 동원된 형벌의 역사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론과 설명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충격이다. 1905년 4월 10일 북경에서 찍힌,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 속 주인공은 푸추리라는 28세 남자다. 조르쥬 바타이유가 평생 간직했으며 생전의 마지막 저서인 <에로스의 눈물> 마지막 장에 실었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적이다. 양팔이 이미 잘려 나갔고 칼로 다리 살을 베어내는 장면이다. 가슴 부분의 살갗이 이미 베어져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있는 사진으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살아 있고 하늘을 바라보는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P. 166

  인간이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러난 결국 개인에게 있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추정 내지 유추 정도가 될 것이다. 무관심과는 다르다. 도움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수천명이든 수만명이든 학살과 일방적인 잔혹 행위가 진행되는 과정을 외면했다는 비난과 반성을 외칠 수는 있지만 미디어를 통한 전쟁은 이제 일종의 흥미와 오락거리가 되어 버린다. 94년 걸프전 당신 아침을 먹으며 미국 전투기의 야간 폭격 장면을 마치 오락기의 프로그램처럼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CNN으로 중계됐던 그 장면은 이제 전쟁의 개념도 뒤바꾸어 놓았다. 현대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와 미디어와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전달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기나긴 야만의 시간에 대한 반성과 자책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100년전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인간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집단의 광기와 살육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명 국가를 건설하고 살아가는 유럽과 미국에 의해 자행되거나 묵인되는 상황들을 돌아보면 대답은 분명해지는 듯하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나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2003년에 나온 이 책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 바라본다. 미국의 비판적 지성인 수잔 손택의 관점은 분명하다. 최근의 전쟁과 그로 인한 고통의 원인과 전달 방식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양차 대전과 이후의 국지전들은 여전히 지속된다. 종군 기자로 참여한 사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쟁의 참상과 죽음에 대하여 전달받는 타인들, 그리고 그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잔혹함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진’이라는 은유의 방식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변화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닐까 싶다. 전쟁에 대한 허다한 논의들을 짚어보는 대신 ‘고통’이라는 주제로 ‘나’와 ‘우리’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방식은 전쟁과 참상을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인다.

  화가 고야의 ‘더 이상 안돼’라는 제목의 책 표지 그림은 이 책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나무에 목이 매달린 남자를 턱을 고이고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대중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와 상관없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책 한 권을 통해 내 삶의 자세와 인류애적 도덕성을 일깨우자는 유아적 발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면 인간이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라면 국가든, 민족이든 갈등과 전쟁을 통해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상징되는,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전달되는 과정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인들의 반응은 지금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내 것이 아닌 모 것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과 내가 겪지 않은 고통들을 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기심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이 우리 삶의 방식이다. 대부분 그렇게 산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현퓽岵막?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이 방식이 되어 버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이미지로 ‘재구성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극명한 간극을 보여준다. 그것은 현실의 허구성을 주창하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현실의 비극적 인식을 철저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하는 손택의 현실 인식 방법이다. 나는 우선 그녀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 먼저 ‘재현된’ 현실부터 확인했다.


060417-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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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49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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