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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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예창작 고등학교, 인문학 특성화 고등학교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요즘 특목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말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고등학교가 있나 싶다. 과학 영재를 위한 과학고를 시작으로 외국어고, 자립형 사립고 등이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모 대학이 2009학년도 2학기 수시전형에서 보여준 무원칙, 무논리, 무소신은 대학의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하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들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현 정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대한민국의 교육 과정은 대학 입시를 정점으로 맞추어져 있다. 초, 중,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교육은 명확하다. 내 자식만 원하는 대학에 보내 달라. 그러기 위해서 사교육이 필요하고 학교는 부화뇌동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 교사들도 소신 없이 복지부동하거나 승진을 위한 점수 따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모든 것이 점수로 환산되어 수치로 나타난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 경쟁은 온 국민에게 내면화되고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기능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우습게 여겨진다. 대기업의 이름을 따서, 재벌의 이름을 붙인 건물들이 들어서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 인간이 배출된다. 단 한 순간도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러하다. 대략.

  이런 현실에서 인문학을 거론하는 것은 때로 철지난 유행가를 부른다고 생각하거나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크 C. 헨리의 <인문학 스터디>는 강유원 외 편역자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분야별 참고 도서 목록을 선정하고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에 대해 적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나는 어쩌면 매년 대학 신입생의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도대체 세상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이며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상황은 어떠하며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올 해도 계속될 것이다. 가장 적절한 안내서 한 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150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보잘 것 없는 안내서로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미국대학 교양교육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핵심과정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정리한 이 책을 강유원을 비롯한 편역자들은 한국적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고 있다. 특히 영역별로 수록되어 있는 도서 목록과 참고도서들은 앞으로 책을 선택하고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데 대단히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 같다.

  작년에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를 통해 한 수 배웠던 공부에 대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래서 강유원이나 남경태 등 몇몇 사람들의 책은 저자 혹은 번역자의 이름만 믿고 사도 후회하는 법이 없다.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운 책을 오랜만에 만나 기쁘다.

  이 책은 문학 · 예술, 철학 · 정치, 역사학, 기독교 사상 등 크게 네 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A Student's Guide to the Curriculum)이다. 미국의 일반 대학에서도 고전과 서구문명을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 실정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과 무관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편역자들을 이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편집하여 이 책을 만들어냈다. 적절하고 고마운 부분이다. 책꽂이에 두고 책을 구입할 때마다 참고할 만하다.

  <아이네이스>가 가진 커다란 장점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잘못된 관념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투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 P. 40

  이런 식으로 고전이 지닌 의미나 해석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충고하기도 하며,
 
  문학 공부에서 초심자가 접하는 가장 심각한 오류가 있다. 전문적인 강의에서 교수의 텍스트 해석이 학생들을 압도해버린 나머지, 학생들이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각자 견해가 있으면서도 학생들은 교수의 해석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텍스트의 여러 다른 번역판을 참조하면서 거기에 실린 해제들을 읽는 것이다. - P. 41

  철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은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바로 플라톤의 저작이다. 플라톤에 관해 쓴 다른 저자의 책, 즉 2차 문헌을 거치지 말고 먼저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 P. 72

  동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차이를 찾아내려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초인적 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근대의 인간은 다양한 시각과 통로로써 세계를 보려 하였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대체로 ‘이성 중심주의’로 귀결된다. - P. 76


  이와 같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주의 사항을 지적하기도 하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하기도 한다. 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대할 때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야 한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궁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를 위한 안내서가 필요한 사람이나 고전이나 서양 문화의 기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두께와 표지, 디자인이 아니라 책은 여전히 꼼꼼하게 그 내용을 살피고 구입하고 아껴두고 읽고 싶어야 한다.

  이 책은 나에게 의미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 다시 힘내고, 가열차게 달아오를 준비를 해야겠다.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준 책이다. 대학 신입생 수준에서 교양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된 책이겠지만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학 졸업자의 비애를 확인한 책이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조차 전공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더 깊어만 간다. 얄팍한 이 한 권의 책에서 이 한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지적 균형감각은 교양교육을 받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열매다. - P. 123


09021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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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비타 악티바 : 개념사 4
이재유 지음 / 책세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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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을 모토로 한 현대 사회에서 계급이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기 쉽다.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신분 사회가 철폐되면서 계급도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계급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신분증의 역할을 한다. 명확한 증거와 분류가 어렵게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숨어 있는 구분선이다.

  사회학자들은 다양한 방법과 기준으로 계층이론을 제시한다. 경제적 수준이 기준이 되는 계층 이론과 달리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계급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원시 공동체 사회이후 소유 관계가 형성되면서 인류에게 계급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문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계급사이의 모순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늘 계급 모순이 해결된 상태를 갈망해 왔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계급에 대한 관심은 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자유로운 관계와 행복한 삶을 위한 길찾기이다. 이재유의 <계급>은 이런 과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아내서 역할을 한다. 계급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계급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계급 이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을 계급 문제에서 찾고자 하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답고 행복한 삶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계급 문제를 인식하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책장을 열게 한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를 거쳐 봉건제 사회를 지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의 형태가 변화한 것은 생산수단과 소유의 관계로 귀결된다. 수많은 사회 경제 학자들이 명멸했지만 또 그것을 분석해 냈지만 완전한 대안이나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진행형인 역사에서 그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이후에 대해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다면 계급 문제 역시 논의가 쉽게 풀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만만치 않은 문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적 관점에서 계급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일궈온 사회와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와 해결 방안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게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거창한 문제의 시작이다.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 경제제도로서 자본주의가 세계사의 주류로 자리잡은 현재 시점에서 계급 문제는 미래를 위한 가장 치열한 담론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진보진영의 모임이긴 하지만 ‘세계 사회 포럼’은 브라질에 모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로 인한 자본주의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 흐르는 무의식의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변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것 뿐이다. 지금 이대로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이 축적된다면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용산 철거민 사태는 명백한 국가 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이다. 고통 받는 다수가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 그것은 남의 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일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되거나 자식들의 학벌에 올인하는 현실 인식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근면한 일벌레가 찬양되고 휴식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노동하는 인간을 미화했다. 내면화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조정한다. 자본의 모순이 계급의식을 만들어내지만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한다.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의 분석과 대안들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수자와 소수자의 개념을 재정립했고 신베버주의는 중간계급에 주목했지만 토대의 변화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여겨진다.

  우리는 늘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희망찬 미래를 가슴에 품는다. 변희재는 우석훈의 세대론에 물타기를 시도하고 조중동은 시민사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지식인이 아니라 그람시가 제시한 ‘유기적 지식인’이 우리에겐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억압적인 교육제도와 보이지 않는 자본의 헤게모니는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이것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인가?

  계급의식의 싹은 가사 노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족으로 얽매인 우리의 생존 문제는 연대와 참여, 배려와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계급은 어떻게 내면화되었으며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답게,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지금-여기에 서 있는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내 생각과 행동은 그에 맞는 의식을 담보해내고 있는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행간을 건너뛰는 저자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린다.


09013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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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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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은 스스로 속한 양반 집단에 대해 객관적이었을까? 특히 조선 사회를 살아가는 선비로서 그게 가당키나 했을까? 가끔 드는 생각이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이 문제라는 것은 단순하게 그 사람의 지적 능력이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잘못 됐다는 말은 아니다. 다양한 관점과 총체적인 시선은 훈련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대개 이런 능력을 철학적 관점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면 철학자들은 저절로 통찰하는 눈이 생기는 것일까?

  한국인을 국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평가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탁석산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지금-여기’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로서 우리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매일 부대끼고 마주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나 특징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는 일은 어색하기만 하다. 나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진 속의 모습이나 녹음된 목소리, 동영상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처럼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이런 논의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목울대가 꺼이꺼이 소리를 낸다. 아프고 상처받은 역사에서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은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 속에서 지금의 우리들을 만들어 낸 것은 한국인 고유의 특성들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추상적 작업은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특히, 한민족의 명명된 민족 국가 단위의 총체적 집단을 설명하는 일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개인들의 특성을 몇 가지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아무리 거칠게 특징들을 잡아낸다고 해도 정상분포 곡선에 나타나지 않는 블랙스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소수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맥락들을 대표하기도 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순된 말이지만 한 집단의 특성은 대다수의 모습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다수는 평범성을 특징으로 한다.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며 행동이나 말을 통해 대표성을 띨 수도 없다. 이렇게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의 ‘한국인’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나간다. 그 주장이 때로 지나친 면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면도 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하기에는 충분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대체로 최근 100여년에 맞춰져 있다. 구한말 이후, 그러니까 조선과 한국을 구별하고 있다는 말이다. 봉건적 전근대 사회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들의 변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숱한 외침에 의해 이미 지배 세력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었고 민중들의 저항이 극에 달했지만 통치권력에 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타율적인 힘에 의해서였다. 시민혁명을 거쳐 스스로 권력을 창출한 경험이 없는 우리의 비참한 현대사는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 사회적 변화 속에서 대중은 스스로 정중동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현실과 타협하며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탁석산은 그것을 투표에 의한 정치권력의 이양으로 표현했고 임지현의 ‘대중독재’를 비판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대다수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에 의해 정권은 창출되지만 그 과정과 의식 속에 자리 잡은 파시즘에 대해 저자는 깊이 고민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성과 견고한 현실의 벽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생존-생활-행복-의미’의 시대를 살아왔다고 지난 100년을 회고하는 저자는 정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쉽게 말하면 최근 100여 년간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근현대사의 절망과 희망들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의미’를 찾고 있는 시대라는 말인데 과연 그런가? 자본에 종속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행복의 진정한 의미나 삶의 의미를 축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는 아닌가? 비판적 관점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관점과 논의는 건강한 사회와 현실의 모습을 돌아보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현세주의와 인생주의 그리고 허무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한국인을 분석하는 것은 적당한 기준과 관점이라는 평가보다 실용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말이 흥미롭다. 현실 생활을 하는 동안 실용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먼저 살펴보고 사상적 배경을 논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실용주의는 철저한 이기주의와 맞물려 있다. 그것은 배타적 가족주의의 위험성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혈연과 지연과 학연으로 견고하게 맞물린다. 그것조차 한국인의 특성이겠지만 탄력적인이고 유연한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라져야한다고 믿으면서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이중적 기준과 시각은 극복해야 할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저자의 관점과 논의가 분명 재미있고 대단히 현실적이어서 시원스럽다. 점잖은 척 하거나 간접화법으로 돌려 말하지 않는 점은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저자 특유의 화법이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단숨에 읽힌다. 때로 한숨 쉬고, 때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는 한국인이다. 이 단순한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극(?).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실존적이고 철학적 삶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지금-여기’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는 첫 번째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090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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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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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보다 하늘을 사랑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세상 혹은 사람들과의 유리벽을 절감하면서부터였을까? 나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그때부터 책이 내게로 온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은 왜 먹어야만 살 수 있는거지? 난 왜 사는 걸까?

  아마도 이 많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한 건 사춘기가 겪는 자연스런 변화가 아니라 책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알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생겼을 의문들이지만 답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지도 모른다.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책을 통해 찾아낸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막연한 의문과 불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책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었다.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답을 찾으려 한 적도 없었지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종횡무진 영역을 넘나들며 길을 찾아 헤매고 절망하고 때로 공감하며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가장 정확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 숨은 진실 찾기 게임은 나에게 주어진 몫이었지만 결코 두렵거나 힘겹지 않았다. 즐길만한 고통이었고 절망이었으며 현실에서 찾아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익힌 것은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진짜 중요한 것들은 선생님에게 배울 수 없었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책을 통해서 가능했다. 개인적인 불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러했다. 책은 내게 참 스승이었고 무엇보다 숭고한 대상이었다. 그런 책도 어쩌면 하나의 세계에 불과할 것이고 책들이 모여 이룩한 거대한 왕국도 허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인식의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만한 즐거움을 주는 일도 아직 찾지 못했다.

  책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에 목숨을 거는지. 도대체 책의 매력은 무엇인지.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앎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집착에 가까운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게 도대체 책은 무엇인가. 왜 읽는가, 무엇을 얻었는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김열규의 <독서>는 책을 통해 쓰여진 자서전이다. 열혈 독서가들의 모임에서 우수 회원이 될 법한 그의 삶을 독서의 이력으로 풀어냈다. 70이 넘은 노교수의 이야기는 어깨에 힘을 쫙 뺀 상태에서 바람이 나부끼듯 펜을 휘두른 느낌이다. 억지스러움이 없고 편안한 문장으로 책을 이야기 한다. 유년시절 할머니와 어머니의 듣기에서 출발한 그의 생은 문화 자본 자체가 풍부했다. 자연스럽게 말과 글에 눈을 뜨고 낭독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몰입의 즐거움을 일찌감치 경험한 소년은 책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얻는다.

  신체적으로 허약해서 놀림감이 되고 책 속에서 고독과 깨달음을 얻는 <토니오 크뢰거>를 자화상으로 삼는 저자는 병적으로 책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유년과 성장 과정에서 그 열등감은 책을 통해 자신감의 세계를 구축한다. 듣기에서 노년의 책 읽기까지 한 생애를 정리한 저자는 본격적으로 읽기의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꼼꼼하게 읽기, 클로즈 리딩, 속독과 숙독, 삼단뛰기와 장애물 경주 등의 비유를 통해 다양한 읽기 방법을 소개한다. 필요와 목적에 따라, 글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읽는 방법과 태도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과정과 방법들을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거침없고 막힘이 없다. 힘주어 강조하거나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다. 적당한 강약으로 편안하게 독서를 이야기한다.

  방법 뿐만 아니라 내용에 따라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요령도 적고 있다. 게임을 하듯이, 물고기를 잡듯이, 이를 잡듯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사금을 캐듯이. 비유는 어떤 이론보다 쉽게 스며든다. 특별한 법칙을 세우거나 번호를 붙이거나 단계를 말하지 않고 편안하게 풀어간다는 말은 상대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시와 소설 그리고 논설문을 읽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저자의 독서 이력을 수필처럼 편안하게 펼쳐놓은 1부와 책읽는 방법을 풀어쓰고 있는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인생의 황혼녘에 자신의 독서 이력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있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의 문제는 독자에게 있는 듯하다.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네듯이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독서에 관한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도 좋을 만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저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은 새롭기만 하다. 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야 어디 한 둘일까마는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독서>가 취미가 되고 일이 되고 삶이 되는 과정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지독한 책벌레들과 함께 해 온 인류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책을 던져 버리고 총을 든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될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사회와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더딘 발걸음이더라도 말이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연말이지만,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지만, 정치와 역사는 거꾸로 가고 있지만 손놓고 앉아 망연자실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war of position)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은 개인적인 판단이다. 책을 통해 현실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황당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하고 행동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책의 역할이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타령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으나 저자의 이런 종류의 책들은 일단 사람들을 <독서>의 세계까지 끌어들이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풍찬노숙을 견디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안온한 온실 속의 평화가 아니라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강철같은 정신을 단련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론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야 작은 길을 만들고 물줄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책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가 없다.


08122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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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모색 -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시대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에서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든 사람을 떠나서 불가능하다. 역사가 인물 중심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결과물이 우리들의 역사라는 말이다. 역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낸다. 그 결과물들이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법과 제도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대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인간의 지적 토대위에 미래를 설계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보편성과 일반성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특수한 계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을 꼬집었다. 결국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은 이러한 자기 계급의 모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적 지식인이 필요하고 그 지식과 실천의 방향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디에 그 지식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이 시대의 지식인이 아쉽다.

  존경할 만한 지식인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축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회의 역량과 토대에서 길러지는 지식인의 수준은 단순한 주입식 교육이나 물적 토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비상하기 위해서는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잠을 깨어야 한다. 잠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또 절망적인가.

  모든 시대는 혁명을 배태하고 있으며 그 선택은 다수에게 있지 않았다. 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소수였으며 그것을 추동할 수 있는 저력은 성찰과 신념으로부터 비롯된다. 통찰력은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과 고통이 필요하다.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고통과 절망의 얼굴과 대면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대에 <전환의 모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시대에 전환을 모색해 왔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방법과 태도가 아닐까.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전환은 시작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어불성설일 뿐이다. 아니, 이전시대로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전환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기준 자체가 흔들린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전환은 전환이니 말이다.

  인권은 축소되고 기업가는 살만하며 부자는 세금을 돌려받는다. 생각의 전환은 사물을 보는 방향과 목적부터 달라지게 한다. 과연 우리 시대는 전환인 필요 하느냐는 질문부터 마땅히 시작되어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대담집 <전환의 모색>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한심한 투정부터 나온다. 그들(?)의 눈에 전환이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도 궁금하다는 말이다.

  ‘온생명’ 사상을 주장하는 장회익, 민주주의는 곧 부패할 것이라고 말하는 최장집, 시장 유일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도정일, 인간 실존의 구체성과 보편성을 탐구하는 김우창 등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분들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몰라서 실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과 실천적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합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때 이미 배운 것들에 대한 덧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학문적 관점에서 그들의 사상과 의식의 흐름들을 살펴보는 일은 즐겁다. 대담자로 나선 분들도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충분한 학문적 성과를 일구어 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이 네 분을 이어갈 만한 지식인이라 불리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단순한 학력과 지식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힘, 실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이 시대는 영웅보다 작더라도 주변을 바꾸어나가는 리더가 많이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보는 위치 곧 기준좌표의 전환에 따라 사룸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를 분명히 구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좌표변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내게 보이는 것만 옳고 남이 다른 위치에서 달리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 59(장회익)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고 나는 좌표변환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식 차원의 좌표변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직 멀었다는 자괴감. 당연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 좌표변환의 힘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오랜 버릇이 내 안에 있다.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그 기준과 가능성에 대해 한참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상황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정치,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사유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인은 이것을 쉬운 말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이다. 권력과 지위를 얻고 개인적인 이익과 특수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식인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불러 마땅하다. 그 기준과 잣대를 분명히 하고, 실천적 지식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태도가 정착된다면 함부로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권력의 부나비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정치와 지식인의 관계, 권력에 복종하는 지식인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가장 효율적인 현실 개혁의 방법으로 선택한 선한 의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개혁의 목적과 방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네 사람의 대담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육성을 듣는 효과와 대담 형식의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집중력이 흐려지고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지만 깊이 있게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다루지 못한다는 당연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회오리같은 대선 정국이었던 2007년에 이루어진 대담이라는 시기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전환을 모색했지만 현실은 눈뜨고 볼 수 없어진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리’를 ‘나’로 바꿔놓고 읽으니 막막하기만 하다. 걷고 있지만 저 멀리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은 이 시대에도 기묘하게 적용된다.

“답은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 P. 293(김우창)

  답을 구하고 싶은 시대가 아니라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제를 들고 뛰어나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외치고 있으며 그 목소리를 외면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우리의 모습은 쨍한 겨울 하늘처럼 차갑기만 하다. 대담은 대담으로 끝났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답을 구해 볼 밖에. 답을 구하기 전에 문제부터 만들어보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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