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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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겨울방학에는 어머니가 가끔 고구마를 쪄주셨다. 동치미 국물 혹은 잘 익은 김장김치와 함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드셨던 맛 그대로인지 알 수 없으나 옛날에는 구황작물인 감자, 고구마가 끼니를 대신했으리라. 자라면서 김동인의 감자를 배웠고,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존, 가난, 죽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역사였음에도 관찰자, 방관자의 위치에 선 자들의 게으름은 내내 부채감으로 남는 법이다. 폴란드가 가해자(나치)와 피해자(유대인) 사이에서 관찰자 혹은 방관자로 남은 것처럼.

 

폴란드의 근현대 단편소설을 모은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아프게 읽힌다. 18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120여년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기쁨과 행복의 코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잔혹한 전쟁은 위정자들의 세력 다툼일 뿐이다. 국가의 경계, 민족의 구분 따위는 어느 동물 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분열 도구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하지만 인간은 그저 스스로 만든 상상의 공동체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유발하라리는 상상 속의 질서를 통해 협력하고 사회적 규범과 공통의 신화를 창조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환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표방하면서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 그 범위를 확대하고 온 인류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요원해 보인다.

 

편역자 정병권과 최성은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2차 대전 이후의 문학까지 시대별로 문제작을 엄선해 번역했다. 거의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여섯 명의 작가, 열 작품을 선보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헨릭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부터 마렉 흐와스코의 노동자들까지 중, 단편이 뒤섞여 있지만 대체로 호흡이 길다.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를 읽다가 우리나라의 등대지기를 검색하니 경쟁률이 상당한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도와 싸우는 일, 혼자 견디는 일이 낭만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원하는 사람이 그리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등대지기는 거의 죄수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는 표현처럼 당대의 등대지기와 지금 등대지기의 생활이 같을 수는 없지만 색다른 일임에는 틀림없다. 폴란드의 국민시인을 통해 모국어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작품이 낯설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 뿌리내리지 못한 삶의 고통이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주진 않는다. 디아스포라 문제는 오늘도 계속된다. 미국 대사관 이전 문제로 인한 유혈 충돌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 트럼프의 역할이 새삼스럽다. 북미회담 성사여부, 결과와 무관하게 핵폭탄을 손에 쥐고 너는 갖지 말라는 오만함,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국가들의 역할과 국제관계가 이론적 모순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으나 폴란드처럼 동서 유럽의 교량적 위치에 있는 국가의 역할은 한반도와 유사하다. 전쟁, 외침, 가난, 죽음, 개혁 등 문학적 자양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눈물과 고통을 먹고 자라는 소설의 속성상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블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 모직조끼에 이어 마리아 코노프니츠카의 우리들의 조랑말로 넘어가면서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움푹 꺼진 그의 뱃속에는 허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우리들의 조랑말, 마리아 코노프니츠카, 180)는 단순한 문장의 여운이 길다. 1920년대 한국문학의 키워드인 가난과 죽음이 폴란드의 단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우리들의 조랑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더없이 투명하게 드러낸다. 단순히 가난이 주는 고통의 크기를 그려내기보다 한 가족의 겪는 일상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느껴진다. 끝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는 3형제의 모습이 훈훈하지만 슬픔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의 빌코의 아가씨들자작나무숲은 폴란드의 전통을 잘 묘사한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다루고 있으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빛깔과 향기는 제각각이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과 갈등은 세계문학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동생 스타시를 바라보는 형 볼레스와프의 속내는 복잡하다. 아내를 자작나무 숲에 묻은 상태에서 시한부 동생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소설을 읽는 동안 인제의 자작나무 숲이 떠올랐다. 사유지를 가꾼 사람은 무엇으로 그 시간을 견뎠을까. 막국수의 시원한 국물이 떠오른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표제작 타데우쉬 보로프스키의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프리모 레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떠오르게 한다. 인류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한 유대인 학살은 불가해한 사건이다. 수많은 제노사이드 중에서도 유독 아우슈비츠가 도드라지는 이유는 그 원인과 방법과 결과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지만 언제나 새롭다. 영화 더 리더를 최근에 다시 보았다. 한나는 마이클을 사랑한 적이 있을까. 한나와의 만남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마이클과 달리 한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일상적 직업 공간이었다. 읽을 줄 모른다는 건(읽지 않는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한나는 현상을 파악하고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하며, 감각을 통해 인지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무지와 침묵의 동의어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이익을 따라가는 사람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역겹다. 입으로는 가치를, 일상은 이익을 따라간다. 그걸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페르소나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이중적 태도는 혐오감을 불러온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않느냐는 변명, 세상은 다 그렇고 그렇다는 핑계도 지겹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책이 있는 구석방 밖은 이불밖 보다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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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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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당 문고에서 나온 독일 문학 단편선(제목은 정확하지 않다)을 기억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지와 사랑(골트문트 운트 나르치스) 그리고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유일하게 다른 전공을 고민하게 한 책들이었다. 다시 접한 독일 단편소설은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열 일곱편의 독일 단편 소설은 한편, 한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며 읽었다. 괴테, 토마스 만, 헤쎄, 브로흐, 하인리히 뵐, 잉에보르크 바흐만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괴테의 정직한 법관, 토마스 만의 루이스헨, 헤쎄의 짝짓기,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당대 사회를 이해하는 우회적 방식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은 작가의 중요한 의무였다.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는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일상적 현실에서 미래를 고민하며 일하고 돈 벌고 누군가를 만나고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소설은 이 현실을 다분히 과장하거나 비틀어 부각하지만 독자는 이를 통해 반면교사로 삼는다. 자기 삶의 오늘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기능하는 소설은 여전히 중요하다. 자각은 변화에 선행한다.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지금은 또 언제인가.

 

정직한 법관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욕망과 도덕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괴테는 품격 있고 고양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는다. 토마스 만은 루이스 헨에서 이를 위악적으로 비틀어버린다. 짝짓기에서 헤쎄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빨간 페터를 화자로 내세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인간의 자유를 출구로 치환한다. 삶의 조건이 어떠하더라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는 자유로운 삶이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로움이나 높은 직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누군가에게 억지로 웃지 않을 자유, 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주워온 자식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인간과 인간의 신뢰 문제를 다룬다. 타인의 말 한 마디, 세속적 욕망 때문에 의심과 증오를 넘어 죽음에 이르는 사건 사고는 매일 접하는 일상이다. 문학의 보편성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서 확보된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통찰은 인간과 세계를 바로 보게 한다. 화려한 포장지를 찢고 나면 추악한 형상만 남는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겸손을 갖추지 못한 태도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거창한 담론, 그럴듯한 가치를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기적 욕심과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하지만 포장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에서 태어난 일에 대한 죄스러움에 통탄한다. 자기 존재에 무작위성, 우연에 기댄 삶의 조건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찾기는 힘들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날 모양이다. 한국전쟁 종전 65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는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의 현실은 동서독의 통일 이전과 이후를 살펴보면서 지혜를 조금 얻을 수도 있겠다.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 지크르피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등은 대한민국의 분단문학과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상처와 삶의 현실을 드러내는 수작이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 가족 이기주의에 함몰된 우리 현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책무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등등 운운하는 위정자들을 속내들을 들여다보면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개 짖는 소리를 통해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개 짖는 소리는 환청에 불과하다. 요르단 노파의 삶은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어머니의 역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한 여성의 삶을 폭넓게 대변한다. 남녀차별, 성평등의 지난한 과정을 성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개별 소수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문제의 해결은 연대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증오와 혐오의 언어를 쏟아내는 소수자는 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고립과 비난을 초래할 뿐이다. 불특정 다수를 적으로 돌려세울 때는 목숨을 건 투쟁과 당당함이 준비되어야 한다.

 

표제작 알렉산더 클루케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게르만민족의 트라우마 아우슈비츠에 대한 우화다. 실제 실험을 바탕으로 했으나 이 짧은 소설은 우화에 가깝다. 이 밖에도 인상 깊은 단편 소설로 가득 한 독일 단편 소설 선집은 역자 임홍배의 해설과 더불어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훌륭한 앤솔로지로 탄생했다. 점점 더 책을 고르고 읽기 어려워진다. 사람도 세상도 변하니 자연스런 변화일 수 있으나 책이 가진 미덕과 가치는 변함없이 소수자가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에 치우친 생각, 좁고 얕은 안목, 맹목적 믿음, 이미 정해 놓은 정답을 향해 오늘도 개미방아ants mill를 돌 것인가. 언제나 선택은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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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원점
다카노 에쓰코 지음, 전화윤 옮김 / 테오리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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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빛바랜 사진, 연필로 쓴 낡은 엽서, 바늘이 LP을 긁을 때 나는 지지직 소리 이런 저런 흑백 추억은 누구나 한 두 장쯤 마음속에 지니고 산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지만. 스무 살이 그런 나이가 아닐까. fernweh!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이 동경했던 그것처럼 스무 살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민을 통해 성장한다. 뜨거운 열정과 충동에 휩쓸리며 자기모순에 괴로워하고 불합리한 세상에 돌을 던지는 시기다.

 

우울도 소비되는 세상이다. 외로움도 돈이 된다. 공감과 배려는 특효약이다. 개와 고양이가 인간이 줄 수 있는 위로와 행복을 대체한 지 오래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상처와 고통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시태그를 달고 하트를 눌러 공감을 표시하며 온라인에서 받는 위로는 관련 상품 구매로 이어지고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러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스무 살, 다카노 에쓰코는 시대의 우울을 견뎌야 했다. 내적 갈등과 자기 모순에 괴로워하고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는 스무 살이다. 수없이 흔들리고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아주 조금씩 배워갈 수 있을까. 스무 살의 원점의 시작 부분이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내가 너무 미숙한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 물정을 안다는 말에는 체제에 순응하며 뻔뻔하게 살아간다는 의미가 어느 한쪽에 존재한다. ‘미숙하다, 바보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에쓰코, 그 무엇도 비하하지 마. 너 자신을 아껴야 해. 너는 서투르지만 무슨 일든 성실하고 진지하게 하잖아. 다른 사람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잖아. 물론 네게도 단점은 있어. 자기 주장이 강하고, 아니 그것보다는 제멋대로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잘 다스리지도 못하고, 자존심도 아주 강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

나는 길들여지는 인간이 아니라 창조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다카노 에쓰코가 되고 싶다. TV, 신문, 주간지, 잡지, 모든 것이 나를 길들이려 한다. 나는 내 의지로 결정한 일을 할 것이고, 모든 것에 부딪혀 있는 힘껏 버둥거리고, 노래를 부르고, 못 그리는 그림도 그리고, 웃고 울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3

 

미숙하고 불합리한 자신을 발견하고, 모순된 세상에 눈을 뜨는 성장통을 겪지 않으면 스무 살은 무슨 의미일까. 학점과 스펙, 취업과 재테크가 20대를 점령한 세상은 끔찍하지 않은가. 밥벌이의 숭고함을 깨다는 일도 중요하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민하지 않는 스무 살은 남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에쓰코는 미숙하고 불안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스무 살이다. 이 책은 그 아름답고 숭고한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196912일에 시작된 일기는 622일에 끝난다. 이틀 후 기차에 뛰어든 다카노 에쓰코. 30년 전에 살았던 스무 살 여대생의 6개월치 일기를 훔쳐보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어린 딸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잠 못 들던 사춘기의 밤이 먼저 떠올랐다. 창가에 기대 슈바빙의 파란 새벽이 밝아오는 장면을 따라하려고 시험 마지막 날 처음 밤을 새우고 새벽을 맞은 기억도 생생하다. 다카노 에쓰코의 스무 살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에 대한 갈등으로 가득하다. 나카무라와 스즈키에 대한 관심과 사랑보다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에 대한 고민이 스무 살 여대생을 흔든다. 시대정신은 한 개인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기도 하는 법이다.

 

일기 형식으로 쓴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기장에 사유리라는 이름을 지어 줄 정도록 각별한 일기장은 다카노 에쓰코 사후 그대로 출간된다. 60대 후반 일본의 학생 운동 상황을 객관적 자료로 살펴보는 일은 스무 살 여대생의 일기와 비교할 수 없다. 마치 6.25 전쟁을 기록으로 검토하는 것과 하근찬의 수난이대나 윤흥길의 장마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시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서브 자료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 아니다.

 

이 책은 감수성 예민한 스무 살 여대생의 일기로 읽으면 충분하다. ‘인간은 불합리한 존재다.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청춘을 잃으면 인간은 죽는다. 질질 끌려가며 타성에 젖어 살 필요는 없다. 서른이 되면 자살을 고민해봐야겠어.’, ‘자기창조를 완성할 때까지 나는 죽지 않겠습니다.’, ‘얻어맞으면 한 대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를 가질 것.’과 같은 내적 고백과 다짐이 가득하다. 우리가 통과했을 그 여리고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날 것 그대로 배어나오는 문장들이다.

 

죽기 직전 6개월 동안 다카노 에쓰코를 괴롭힌 건 현실이다. 남자, 대학, 사회, 권력, 자본……. 부조리한 세상에 차츰 눈떠 가며 사람들은 흔히 현실과 타협을 택한다. 성공을 위해 달리고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가 설치한 욕망의 덫을 피하지 못하고 더 많은 권력과 더 높은 지위를 열망한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을 배운다. 다카노 에쓰코도 이기적인 욕망과 세상의 환멸에 혐오감을 느낀다. 섬세한 감정의 떨림과 내적 갈등의 원인은 전공투와 민청의 갈등도, 나카무라와 스즈키 사이의 고민도, 언니와 가족과의 싸움도 아닐지 모른다.

 

“‘혼자라는 것’, ‘미숙하다는 것’, 이것이 내 스무 살의 원점이다.”(26)라는 고백처럼 인생은 절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히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 아닐까. 1949년에 태어나 1969년까지 꼭 스무 해를 살았던 일본의 대학생 다카노 에쓰코은 이 책으로 여전히 숨쉬고 있다.

 

그녀가 남긴 아픔과 고통이 여전히 공감을 얻는 이유는 스무 살의 보편성때문이 아닐까.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힘겨운 과정을 겪었던 시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유사한 경험이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충분히 고민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생각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게 된다. 부디 이 책이 보다 많은 20대에게 읽히기를.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고통의 근원을 끝까지 사유하는 도구가 되기를. 50년 전 스무 살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당부일 것이다.

 


인간은 불합리한 존재다.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다.
육체는 합리성만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
육체를 떠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생명이 있다. - 19쪽

‘혼자라는 것’, ‘미숙하다는 것’, 이것이 내 스무 살의 원점이다. - 26쪽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는 것은 가짜 현실이고,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는 것이 진짜 현실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비로소 주체성이 생기고 살아갈 현실이 생긴다. - 63쪽

청춘을 잃으면 인간은 죽는다. 질질 끌려가며 타성에 젖어 살 필요는 없다. 서른이 되면 자살을 고민해봐야겠어. 그런데 앞으로 십 년 동안 살아봐야 뭐가 될까? 지금처럼 아무 자극도 열정도 없는 상태에서 산다 한들 뭐가 될까? - 173쪽

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 걸까? 권력과 투쟁해봐야 어차피 허무한 저항밖에 더 되나? 왜 살아가는 걸까? 삶에 어떤 미련이 있는 걸까? 죽을 수가 없다. 왜! 사는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추하고 죄 많고 수치스러운 동물들이 서로를 행햐 꿈틀거리는 이 세상! 무슨 미련이 있다고. - 223쪽

침묵은 금
마음속으로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 것.
나는 나의 역사를 찾아 나서자. - 245쪽

자기창조를 완성할 때까지 나는 죽지 않겠습니다. - 267쪽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며 항의의 의미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만큼 몰주체적인 자만이 없다. 자살은 사람들에게 패배라는 단 한 마디로 전해질 뿐이다. - 303쪽

산다는 건 타협의 연속인가? 중요한 건 어느 지점에서 타협의 접점을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다. - 313쪽

얻어맞으면 한 대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를 가질 것. -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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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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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급진적이고 문제적인 근대 철학자는 니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그는 인간관 세계를 비틀어본다. 도덕의 계보학을 읽는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은 구조와 틀을 깨는 사고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였다. 수없이 명멸했던 철학자들의 개략적 흐름과 특징을 이해한 다음에는 개별 사상가의 변곡점이 궁금하다. 차근차근 벽돌을 쌓듯 선대의 업적을 공부하며 나름의 독창적인 생각을 만든 경우도 있으나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통해 사고의 전환을 이루듯 특별한 전환점이 생기기도 한다. 바그너와의 만남도 니체의 생애주기에서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만남이나 영향을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이 아닌가. 기존의 사유 체계를 뒤흔들고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구조 너머를 기웃거리는 기질은 타고 나는 것일까.

 

도덕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에 대한 의식 체계다. 니체를 이를 권력관계가 발생한 생각과 행동으로 분석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력적 역학 관계로 환원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고귀한, 귀족인, 고상한 정신적으로 고매한 기질은 좋음이고 비열한, 천민적인, 저급한은 나쁨이다. 이러한 도덕 계보학에 관한 본질적인 통찰은 훗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진다. 물론 푸코는 계보의 권력의 역학 관계를 설명하는데 계보학이라는 방법론만을 차용한다.

 

니체가 주장하는 도덕은 운명에 맞서 의연한 자세를 취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억압이라고 분석한다. 도덕의 기준은 공리성과 양심이다. 도덕은 주체성이 결여된 인간에게 선악과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장구한 역사에서 선과 악은 인간의 삶에서 기초적이고 지배적인 원리였다. 하지만 좋음과 나쁨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설명한다. 사제와 귀족은 물리적 힘이 다르다. 각각 내세우는 가치도 차이가 난다. 니체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인정하지만 교회를 문제 삼는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의 독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인간의 자유정신이 어떻게 노예도덕으로 전락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고상한 가치 평가방식이 잘못 다루어지면 현실에서 를 짓는 일이다. 이는 개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괴로움과 고통의 근원은 각자의 기준과 가치가 아니라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기 위한 종속적 태도 때문은 아닐까.

 

좋음공리적, 합목적적이라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공리성이 증명된 것이 가치 있는 것,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개인의 이익과 공리성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벌어질 때 개인을 위한 선택은(이것이 공리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쁜 것인가? ‘고귀한, 귀적인, 정신적으로 고상한, 고결한, 정신적으로 고매한 기질의, 정신적인 특권을 지닌’...좋음인가? 반면에 소박한schlicht, 단순히schlechtweg, 완전히schlechterdings’ 같은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은 나쁨에 해당하는가? 자연과학과 생리학은 도덕 계보학에 관한 본질적인 통찰로부터 자유로운가? 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읽는 동안 떠오른 질문들이다.

 

’, ‘양심의 가책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은 책임에서 발원한다. 니체는 양심이라는 개념의 배후에는 이미 장구한 역사와 형태의 변화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종교를 비롯하여 고통의 기억술로 인해 고정 관념을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은 고정된것이다. ‘schuld’라는 주요한 도덕 개념이 부채schulden’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보복이라 할 수 있는 형벌의 형태로 각인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니체는 “‘’,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는 이 영역, 즉 채권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세계의 시작은 지상의 모든 대 사건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철저히 피로 물들여졌다. 그런데 저 세계는 실은 피와 고문의 냄새를 다시 완전히 씻은 적이 없다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병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라는 도발적 선언은 기존의 지배권력, 종교적 교리에 도전하는 명백한 반란이다. 니체는 이를 몰아(沒我), 자기부정, 자기희생과 같은 모순되는 개념들 속에 내재된 아름다움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문제는 그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아름다운 희생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까. 도덕적 가치로 내세워지는 비이기적인 것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반전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행복한 이기주의자 말하고 또 누군가는 개인주의자 선언을 외친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생각과 행동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죄의식과 양심은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이기적인 행동이며 어디까지가 개인주의로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일까. 가족 공동체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의 계보학은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고 근원을 안다고 해서 생각의 변화,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니체는 진리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은유며 그 자체가 삶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자 권력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진리와 학문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 그것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표현했다. 도덕의 계보학 또한 유사한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죄책감을 수천 년에 걸쳐 주입당한 인간이 자유롭고 주체적인 행위의 주체로 거듭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죄나 의무에 관한 종교적 개념일 뿐 도덕과 권력의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뭘 해 준 게 있나 묻기 전에 당신이 국가를 위해 뭘 했는지 돌아보라는 말 같잖은 소리가 이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채무자가 아니다. 길들여진 동물적 인간의 운명은 그 자체로 비참하다.

 

언젠가 사랑과 경멸을 품은 구원의 인간은 올 것인가. 130여 년 전에 신을 부인하는 자인 차라투스트라에게만 허용된 권한이라던 니체의 생각은 지금 어떤가.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의 고독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 몰입하고 파묻히며 몰두해 있는 것이며 이상이 현실에 부과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여기에 적용될까.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제3논문의 주제다. 금욕적 이상은 철학자, 학자에게 금욕은 높은 사유 능력을 위한 직감이나 본능 같은 것이지만 예술가에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소환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가장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예술이며 심연으로부터 끄집어낸 계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음악가는 신탁을 전하는 자이며 사제이니 음악이 곧 형이상학이다. 철학자들에게 금욕적 이상의 가치는 현혹되지 않으려는 태도다. 금욕적 이상은 세 가지 커다란 슬로건은 청빈과 겸손과 순결이다. 진리를 위해 고통 받는 걸 견디라는 말인가. 높은 정신성에 도달하기 위한 금욕죽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니체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시대는 맥락이 다르다. 세계를 지배하던 암묵적 합의, 전통의 권위가 무너졌다. 신과 공동체의 질서보다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라고 권유하는 시대다.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나 제3논문은 감흥이 별로 없다. 금욕적 사제가 삶의 가치를 결정하고 도덕의 계보학을 잇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당대에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겠으나 지금은 다르다. 니체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시대를 뛰어넘는 혁명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정신을 소유한 채 기존의 것을 깨트리고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을까. 25세에 시험과 논문 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니체는 성공에 취한 대가 바그너의 오만과 군중의 속물근성을 보고 그와 결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충분이 자신도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건 아닐까.

 

니체가 말하는 천민이란 신분적 의미에서의 천민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창조를 못하는 인간, 즉 권력, 명예, , 쾌락을 좇는 노예가 된 현대인을 말한다. 그리고 대통령이든 재벌이든 지식이든 개인의 내면에 귀족과 노예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자나 고귀한 자는 스스로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인간을 말하지 신분적인 의미에서의 귀족이나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센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우리의 일반 상식과 달리 권력과 부, 지식을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지배자를 강자로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본다. - 해설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의 삶과 작품’, 254

 

홍성광의 해설 부분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박근혜/이명박와 이재용/조현민을 떠올렸다. 권력과 자본의 중심에 우뚝 섰으나 그들은 결국 노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저들의 삶을 욕망한다는 것. 그 주변에 파리떼처럼 기생한다는 것. 끊임없이 자기 삶과 아이들의 미래를 저쪽으로 밀어낸다는 것.

 

니체가 말하는 도덕의 계보학은 결국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려고 한다…….”는 말을 증명한다. 가치의 전복을 시도하는 철학자에 대한 오해도 많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우리가 노예도덕이 아닌 주인 도덕을 지닌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며 위대한 모습으로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충고다. 노예 도덕을 부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노력과 실천은 언제나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 번도 탐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날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난단 말인가? - 11쪽

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권에 대한 자부심, 이 진기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러한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깊디깊은 심연에까지 내려가서 본능, 지배적인 본능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이 지배적 본능에 걸맞은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그러나 그 주권적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을 자신의 양심이라 부를 것이다……. - 77쪽

그러므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는 이 영역, 즉 채권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세계의 시작은 지상의 모든 대 사건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철저히 피로 물들여졌다. 그런데 저 세계는 실은 피와 고문의 냄새를 다시 완전히 씻은 적이 없다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 - 84쪽

‘진보’의 정도는 그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 모든 것의 양에 의해 측정된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보다 강한 개별 인간 종족의 번성을 위해 희생된다는 것 ― 이것이 진보일지도 모른다…… - 103쪽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병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임신이 하나의 병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병이다. - 118쪽

‘법’이란 오랫동안 하나의 금지vetitum였고, 하나의 불법행위였으며 하나의 혁신이었다. 그것은 폭력으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치욕으로 느꼈을 뿐이다. - 159쪽

무(無)에의 의지, 삶에 대한 반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 그러면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려고 한다……. -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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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창비시선 419
박라연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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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해석은 평론가의 몫이고 독자는 말놀이를 즐기면 그뿐이다. 한국어의 감각을 일깨우고 소설처럼 선명하진 않아도 나름의 이미지를 창조하며 감수성을 자극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길을 걷다 서점에 들러 박라연의 시집 표지를 보았다.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를 기억한다. 조금 늦은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의 언어는 응축된 의미보다 현란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는 일보다 말을 부리는 일이 더 어렵다. 생각과 표현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각자의 몸부림이 있을 테지만 박라연에겐 그 고통이 즐거워보였다. 어린 시절에 읽은 시집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라 시간의 이편과 저편을 오갔으나 회한이 느껴지진 않았다. 시인도 독자도 딱 그만큼 세월을 견뎠을 테고 시간은 계속 흐를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읽는 박라연의 시집 서시는 시간에 대한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이 눈부신 줄도 모르고 흘려보낸 시간들. 혹자는 그 시간 속에 있을 테지만 지나고 나야 겨우 깨닫는 그런 시간들.

 

 

아름다운 너무나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시간은 인간을 옹색하게 만든다. 연륜과 혜안은 저절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세월 사이로 빠져나간 눈부신 청춘과 뜨거운 열정에 값하는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다.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일하고 끊임없이 또 다른 욕망에 절망하고 가진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삶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순하고 감각적이다. 인간의 삶은 다 그러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무너지면 사람 혹은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게 된다. 불면의 원인은 근심과 걱정이 아니다. 스트레스와 집착도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잠이 들면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의 증상이 불면이다.

 

 

불면이 뭐라고 생각하나?

잘 죽지 못하는 거

단번에 죽지 못하는 거

 

잠이 뭔가?

죽는 연습

 

모두가 조용히 빈틈없이 죽고 없는 시공에

혼자 남아

죽다 깨다를 반복하면 어쩌지?

 

 

잠이 죽는 연습이라면 불면은 죽음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연습조차 거부하는 생의 집착. 과연 그런가? 박라연의 이번 시집에는 타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의 모습도 감춰진 듯싶다. 귓가에 속삭이듯 보이지 않는 천사가 이야기를 건네듯 목소리가 낮다. 감정의 기복이 없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건조하다. 감정을 배제한 축구 해설가의 따분한 목소리처럼.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누가 썼든 시는 특히 독자마다 다른 의미로 읽히는 것이 좋다. 개별 독자의 삶이 다르고 감정과 생각이 같지 않은데 시인의 말이 똑같이 전해질리 없다. 뜨거운 봄날 도심 한복판에서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는 문장을 보니 헤어진 이름은 떠오르지 않고 태양이 원망스러웠다.

 

 

 

고민,이란 친구에게 밥과 잠을 넘겨주면서

너의 허리는 얼마나 가늘어져야 했는지

두 눈은 또 얼마나 퀭해져야 했는지

 

분노와 슬픔으로 저녁을 짓고 뿌리내리던 주인들에게

감히 부탁해도 될까

 

누구의 고통이든

산 자들의 세끼들인데 화면을 확 돌려버리듯

외면하려 한 죄 용서해다오

살아서 펄떡이는 심장에서만 반짝이는 금모래빛

 

너의 빛으로 나의 내일을 뜨개질해다오

뼛속까지 휘파람 불게 해다오

 

 

봄날은 간다. 몇 번이나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지만 계절은 가고 또 다른 계절이 온다. 온도와 습도 태양의 뜨거움에 맞게 꽃도 나무도 그리고 사람도 자라고 익어간다. 봄은 기쁨과 아니라 분노와 슬픔이다. 뼛속까지 휘파람 불 일이 없으니 천연덕스럽게 해다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시인에게 봄날이 어떠하든 잔인한(?) 4월이 가고 화려한(?) 5월도 지나가리라. 두 눈이 퀭해지는 밤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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