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의 막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구별되는 환상을 꿈꾸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일까?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280일간 태초에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익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모든 민족이 가지고 고유의 신화들 간에 공통성과 놀라운 유사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면 실제로 바벨탑이 세워졌고 언어가 달라지기 전의 기억들을 지금도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구 저편에 사는 장 보드리야르의 부고가 오늘 신문에 실렸다.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호접지몽’과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이 현실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과연 원본 없는 환상과 실체 속에서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셉 캠벨은 신화에 일생을 바쳤다. 한 사람의 일생을 매료시킬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단순하게 신화의 아름다움이나 구조와 체계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비교 신화학을 통해 각 민족이 지닌 신화의 속성이나 공통적 특질들을 찾아내고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물음들은 신화와 현실을 연결시켜야 하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현실 속에 상상의 빌미를 제공한다.

 도대체 신화는 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지 궁금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불러일으킨 신화에 대한 이상 열기는 단순히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신화에 대한 무지를 탓할 일도 아니지만 신화가 지닌 힘을 과대 평가하기도, 간과하기도 어렵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가 나눈 대담을 엮은 <신화의 힘>은 신화학자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과 현실 세계의 원형들을 보여준다. 빌 모이어스의 깊이 있는 질문과 캠벨의 적절한 답변들이 대화 형식으로 풀어져 있기 때문에 신화에 대한 개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 이야기를 듣다가 캠벨 자신이 ‘인생’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 P. 133

 인생은 개선한 사람이 없다는 단언에 절망한다. 이보다 나아지지도 않는단다. 이 부정적 현실 인식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같은 현상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놀랍고 굉장한 사건들의 연속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환상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거나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연구한 학자는 이렇게 현실조차도 신화와 같은 환상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캠벨은 죽음 저편에서 신화 속으로 들어갔을까?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P. 375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대한 감탄이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고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처럼 여겨진다. 꽃이 예뻐보이면 나이를 먹어가는 증거라는데 해 지는 저녁 무렵 한참동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마치 종교의 그 무엇처럼 경건해지는 상태를 신의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화의 어려움은 결국 모든 장면과 환상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데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신화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해 왔지만 언어의 한계 혹은 이미지의 한계는 신화가 전하고 싶은 내용의 저편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맥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선승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영역에 신화는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신화의 한 부분은 아닌지.

모이어스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벨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 그래서 결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P.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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