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종 데트르 - 쿨한 남자 김갑수의 종횡무진 독서 오디세이
김갑수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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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쿨하지 않은 남자 김갑수의 쿨한 책읽기. <나의 레종 데트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 의한 독서 편력기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우리는 ‘나’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순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 그것이 삶이 아닌가 싶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가족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대체로 책 속에서 새로운 만남을 갖는다.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부터 괴짜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책을 읽는다.

  내가 알고 있는 쥐꼬리만한 지식과 세상에 대한 인식의 틀은 모두 책 속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차적으로 나를 키워준 부모님과 내 가족과 학교 교육과정과 직업에서 기인하는 정체성은 표면적으로 사회적 ‘나’를 말해준다. 하지만 나는 책을 통해 인격을 형성하고 세상을 알았으며 삶의 태도와 방법을 배웠고 생의 의미를 깨달았다.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관점을 통해 내 존재 의미를 생각하고 내일을 꿈꾼다. 거창한 꿈을 꾼 적도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그러나 책은 어쩌면 또 다른 욕망의 블랙홀과도 같다.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책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고 책 속에서 절망한다. 또 다시 끊임없는 상상을 통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나 스스로를 간서치라고 명명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책 읽는 인간은 현실을 조금 먼 거리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게 나만의 착각일까. 투명한 유리벽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책은 내 삶의 도구이고 길잡이며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배설구이다.

  음악 듣고 책 읽는 사람 김갑수의 <나의 레종 데트르>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갈피들은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것들이다. 그가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비슷하거나 거의 동일한 생각들을 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눈빛으로 빛났을 것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그가 분명히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책도 일이 되면 힘들고 지겹기도 할 것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즐거움을 감출 수는 없다.

  이 책은 대체로 태어난 지 10여 년 언저리를 넘나드는 책들과 고전들이 뒤섞여 있는 변주들이다. 하나의 주제 혹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엮어 책의 내용들을 소개하고 특징을 잡아내며 해석을 보태고 있다. 읽었던 사람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연관된 책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호기심과 관심을 유도한다.

  전체 1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교로 시작해서 민족주의의 그늘로 끝난다. 시작은 다분히 자극적이지만 소개된 책과 그것을 분석하는 내용은 오히려 슬프다. <카사노바 나의 편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악마>, <나도 때론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나는 솔직하게 살고 싶다>, <문학으로 보는 성>, <사랑은 진할수록 아름답다>가 첫 번째 채널에 소개된 책이다. 면면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성에 대한 담론을 중심에 두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돌아본다. 나와 우리를 살펴보는 것은 책을 통한 세상 읽기이다. 솔직하고 돌발적인 발언들이 조심스러움으로 포장되어 있다.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문장이나 적극적이고 계몽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감성적인 인간의 책읽기가 빚어낸 이성적인 글쓰기가 독자들에게 적당한 자극과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한 채널에 예닐곱 권이 소개되어 있으니 줄잡아 백여 권이 소개되어 있다. 재미나는 인생, 멜로디를 넘어서, 소설, 고전의 미로, 영혼의 문제, 사람들, 운명 등 특별히 계통성 있게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자유롭고 즐거운 책읽기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심각하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읽은 책은 요약적이거나 교훈적이다. 하지만 그의 책읽기는 목적이 없는 유목이며 공허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처방전과 같다.

  휴가철이나 방학이 되면 추천도서 목록이 넘친다. 책읽기가 취미라니! 일년에 잠시 여유 시간이 있을 때만 독서를 즐기는 사람은 책을 화려한 파티복이나 보석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책읽기는 본질적인 독서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제부터 책읽기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책읽기에 관한 책이나 김갑수의 <나의 레종 데트르> 한 권을 권하고 싶다.

  무슨 책을 어떻게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은 김갑수식의 종횡무진 책읽기를 권한다. 주제별로 유사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좌충우돌 읽은 책들의 한줄 꿰기. 만만한 작업도 쉬운 방법도 아니지만 책 자체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더디지만 가장 행복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바쁜 세상에 정처 없이 길을 나서는 일이 어디 쉽지 않겠지만 사랑하는 이유를 말할 수 없듯이 책을 읽는 이유를 말하기도 어렵다.

  김갑수가 적극 추천했던 아직 못 읽는 책들, 읽었지만 기억 속에 가물거리는 책들이 또 다시 도서목록에 오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책 읽기과 사람읽기, 세상읽기의 안내자가 되어준 사람들의 목록을 한번 적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내게는 그들이 삶의 나침반이고 길잡이며 고마운 스승이다.


090803-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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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 9색 청소년에게 말걸기 - 생각하라 경험하라 반응하라
김용규 외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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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이라 명명된 나이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일은 힘들다. 단순한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 때문이다. 상황과 입장이 다르고 성장과정과 경험의 차이 때문이다. 세대 간 소통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에게 항상 희망을 건다고 말한다. 그들이 우리들의 미래이기 때문이지만 기대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기성세대들은 미래의 주역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들의 밝은 미래를 제공하지는 못하고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다.

  반면에 청소년들 입장에서는 대부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지고 있으며 국영수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를 깨뜨리기 힘들다. 일단 대학에 입학하거나 졸업 후에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거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너무 늦다. 나 자신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세상을 알아가며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내가 살아가야할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9인 9색 청소년에게 말걸기>는 여러모로 얄팍하지만 필요한 책이다. 우선 두께가 얄팍하고 내용과 깊이가 얄팍하다. 반면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재미와 무관한 내용이기 때문임을 감안할 때 적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른보다 바쁜 청소년들에게 잠시 짬을 내어 읽어보도록 권할 만큼 적당한 분량이다. 이렇게 작은 시도들이 거듭되고 한두 번씩 고민의 단초를 제공하고 생각을 자극하는 일은 기성세대의 몫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거론되는 인사들의 이름도 중요했으리라 짐작된다. 검증된 저자들을 통해 안전하게 기획되었고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지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읽힐지 모르겠다. 당장의 점수도 중요하다. 대입제도 개선 없이는 초중고의 공교육은 개선될 수 없고 사회적 합의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구조적인 변화 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거나 끊임없는 경쟁 구도 속에 아이들을 마냥 밀어 넣을 수만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런 종류의 책들은 청소년들에게 자꾸 읽혀야겠다.

  철학, 인권, 과학, 고전, 가치관, 환경, 독서, 여성, 문화라는 아홉 가지 주제를 김용규, 박홍규, 김동광, 정민, 안철수, 안철환, 이권우, 권인숙, 김동식이 풀어냈다.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고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저자들은 해당 분야에 관해 청소년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왜 필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책은 입문서에 불과하다. 지독하게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고민에서 비롯된 책으로 보인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이나 읽는다 해도 소설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아이들에게 권해줄 만한 책이다. 길쭉한 판형과 간단한 삽화로 지루함을 덜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고육지책이라도 좋으니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고 기성세대들도 필요성을 절식하게 인식했으면 좋겠다.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미래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손놓고 현실주의자로만 살아갈 수도 없다. 보다 나은 미래와 희망을 제시하고 다양성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다. 청소년들은 기성세대들의 거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행태와 생각을 보고 배운대로 자신들의 행동과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청소년들이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사회, 자연 환경은 고스란히 미래의 후손들에게 돌아간다. 반성적 차원에서 기성세대의 고백도 필요하고 그들이 알아야 할 과거도 소개해야 한다.

  어른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충고와 조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시대에 청소년들에게 스승이나 선배로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자. 주체적 인간으로 가치관을 세우고 지혜를 쌓는 일이 지식의 양을 늘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우리는 그들을 대입 중심의 교육제도 안에 통조림처럼 밀어 넣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인생을 깎고 다듬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들의 꿈과 분노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일이 우선이다.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들려주고 삶의 지혜를 후배들에게 전해 주는 일, 그것이 선배들의 의무이자 역할이다. 올바른 가치관과 비판 정신을 소유한 어른들을 소개해 주는 일이라고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모쪼록 훌륭한 아홉 명의 인생 선배들에게 삶의 지혜를 배우고 생각의 화두를 하나씩 얻어갈 수 있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청소년들은 그들에게서 보다 넓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받고 넓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각의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길들이기’가 왜 위험한 것인지 그것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반성도 해보고 비판도 해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끝없는 보살핌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생각을 재단하고 하나의 틀 속에 가두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른들부터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른들부터 읽고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실천하지 않으면서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080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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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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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예창작 고등학교, 인문학 특성화 고등학교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요즘 특목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말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고등학교가 있나 싶다. 과학 영재를 위한 과학고를 시작으로 외국어고, 자립형 사립고 등이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모 대학이 2009학년도 2학기 수시전형에서 보여준 무원칙, 무논리, 무소신은 대학의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하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들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현 정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대한민국의 교육 과정은 대학 입시를 정점으로 맞추어져 있다. 초, 중,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교육은 명확하다. 내 자식만 원하는 대학에 보내 달라. 그러기 위해서 사교육이 필요하고 학교는 부화뇌동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 교사들도 소신 없이 복지부동하거나 승진을 위한 점수 따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모든 것이 점수로 환산되어 수치로 나타난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 경쟁은 온 국민에게 내면화되고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기능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우습게 여겨진다. 대기업의 이름을 따서, 재벌의 이름을 붙인 건물들이 들어서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 인간이 배출된다. 단 한 순간도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러하다. 대략.

  이런 현실에서 인문학을 거론하는 것은 때로 철지난 유행가를 부른다고 생각하거나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크 C. 헨리의 <인문학 스터디>는 강유원 외 편역자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분야별 참고 도서 목록을 선정하고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에 대해 적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나는 어쩌면 매년 대학 신입생의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도대체 세상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이며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상황은 어떠하며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올 해도 계속될 것이다. 가장 적절한 안내서 한 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150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보잘 것 없는 안내서로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미국대학 교양교육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핵심과정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정리한 이 책을 강유원을 비롯한 편역자들은 한국적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고 있다. 특히 영역별로 수록되어 있는 도서 목록과 참고도서들은 앞으로 책을 선택하고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데 대단히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 같다.

  작년에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를 통해 한 수 배웠던 공부에 대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래서 강유원이나 남경태 등 몇몇 사람들의 책은 저자 혹은 번역자의 이름만 믿고 사도 후회하는 법이 없다.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운 책을 오랜만에 만나 기쁘다.

  이 책은 문학 · 예술, 철학 · 정치, 역사학, 기독교 사상 등 크게 네 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A Student's Guide to the Curriculum)이다. 미국의 일반 대학에서도 고전과 서구문명을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 실정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과 무관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편역자들을 이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편집하여 이 책을 만들어냈다. 적절하고 고마운 부분이다. 책꽂이에 두고 책을 구입할 때마다 참고할 만하다.

  <아이네이스>가 가진 커다란 장점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잘못된 관념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투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 P. 40

  이런 식으로 고전이 지닌 의미나 해석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충고하기도 하며,
 
  문학 공부에서 초심자가 접하는 가장 심각한 오류가 있다. 전문적인 강의에서 교수의 텍스트 해석이 학생들을 압도해버린 나머지, 학생들이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각자 견해가 있으면서도 학생들은 교수의 해석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텍스트의 여러 다른 번역판을 참조하면서 거기에 실린 해제들을 읽는 것이다. - P. 41

  철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은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바로 플라톤의 저작이다. 플라톤에 관해 쓴 다른 저자의 책, 즉 2차 문헌을 거치지 말고 먼저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 P. 72

  동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차이를 찾아내려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초인적 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근대의 인간은 다양한 시각과 통로로써 세계를 보려 하였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대체로 ‘이성 중심주의’로 귀결된다. - P. 76


  이와 같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주의 사항을 지적하기도 하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하기도 한다. 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대할 때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야 한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궁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를 위한 안내서가 필요한 사람이나 고전이나 서양 문화의 기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두께와 표지, 디자인이 아니라 책은 여전히 꼼꼼하게 그 내용을 살피고 구입하고 아껴두고 읽고 싶어야 한다.

  이 책은 나에게 의미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 다시 힘내고, 가열차게 달아오를 준비를 해야겠다.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준 책이다. 대학 신입생 수준에서 교양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된 책이겠지만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학 졸업자의 비애를 확인한 책이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조차 전공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더 깊어만 간다. 얄팍한 이 한 권의 책에서 이 한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지적 균형감각은 교양교육을 받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열매다. - P. 123


09021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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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비타 악티바 : 개념사 4
이재유 지음 / 책세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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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을 모토로 한 현대 사회에서 계급이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기 쉽다.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신분 사회가 철폐되면서 계급도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계급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신분증의 역할을 한다. 명확한 증거와 분류가 어렵게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숨어 있는 구분선이다.

  사회학자들은 다양한 방법과 기준으로 계층이론을 제시한다. 경제적 수준이 기준이 되는 계층 이론과 달리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계급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원시 공동체 사회이후 소유 관계가 형성되면서 인류에게 계급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문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계급사이의 모순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늘 계급 모순이 해결된 상태를 갈망해 왔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계급에 대한 관심은 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자유로운 관계와 행복한 삶을 위한 길찾기이다. 이재유의 <계급>은 이런 과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아내서 역할을 한다. 계급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계급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계급 이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을 계급 문제에서 찾고자 하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답고 행복한 삶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계급 문제를 인식하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책장을 열게 한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를 거쳐 봉건제 사회를 지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의 형태가 변화한 것은 생산수단과 소유의 관계로 귀결된다. 수많은 사회 경제 학자들이 명멸했지만 또 그것을 분석해 냈지만 완전한 대안이나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진행형인 역사에서 그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이후에 대해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다면 계급 문제 역시 논의가 쉽게 풀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만만치 않은 문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적 관점에서 계급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일궈온 사회와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와 해결 방안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게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거창한 문제의 시작이다.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 경제제도로서 자본주의가 세계사의 주류로 자리잡은 현재 시점에서 계급 문제는 미래를 위한 가장 치열한 담론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진보진영의 모임이긴 하지만 ‘세계 사회 포럼’은 브라질에 모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로 인한 자본주의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 흐르는 무의식의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변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것 뿐이다. 지금 이대로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이 축적된다면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용산 철거민 사태는 명백한 국가 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이다. 고통 받는 다수가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 그것은 남의 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일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되거나 자식들의 학벌에 올인하는 현실 인식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근면한 일벌레가 찬양되고 휴식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노동하는 인간을 미화했다. 내면화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조정한다. 자본의 모순이 계급의식을 만들어내지만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한다.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의 분석과 대안들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수자와 소수자의 개념을 재정립했고 신베버주의는 중간계급에 주목했지만 토대의 변화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여겨진다.

  우리는 늘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희망찬 미래를 가슴에 품는다. 변희재는 우석훈의 세대론에 물타기를 시도하고 조중동은 시민사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지식인이 아니라 그람시가 제시한 ‘유기적 지식인’이 우리에겐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억압적인 교육제도와 보이지 않는 자본의 헤게모니는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이것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인가?

  계급의식의 싹은 가사 노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족으로 얽매인 우리의 생존 문제는 연대와 참여, 배려와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계급은 어떻게 내면화되었으며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답게,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지금-여기에 서 있는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내 생각과 행동은 그에 맞는 의식을 담보해내고 있는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행간을 건너뛰는 저자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린다.


09013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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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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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은 스스로 속한 양반 집단에 대해 객관적이었을까? 특히 조선 사회를 살아가는 선비로서 그게 가당키나 했을까? 가끔 드는 생각이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이 문제라는 것은 단순하게 그 사람의 지적 능력이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잘못 됐다는 말은 아니다. 다양한 관점과 총체적인 시선은 훈련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대개 이런 능력을 철학적 관점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면 철학자들은 저절로 통찰하는 눈이 생기는 것일까?

  한국인을 국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평가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탁석산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지금-여기’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로서 우리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매일 부대끼고 마주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나 특징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는 일은 어색하기만 하다. 나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진 속의 모습이나 녹음된 목소리, 동영상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처럼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이런 논의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목울대가 꺼이꺼이 소리를 낸다. 아프고 상처받은 역사에서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은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 속에서 지금의 우리들을 만들어 낸 것은 한국인 고유의 특성들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추상적 작업은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특히, 한민족의 명명된 민족 국가 단위의 총체적 집단을 설명하는 일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개인들의 특성을 몇 가지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아무리 거칠게 특징들을 잡아낸다고 해도 정상분포 곡선에 나타나지 않는 블랙스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소수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맥락들을 대표하기도 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순된 말이지만 한 집단의 특성은 대다수의 모습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다수는 평범성을 특징으로 한다.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며 행동이나 말을 통해 대표성을 띨 수도 없다. 이렇게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의 ‘한국인’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나간다. 그 주장이 때로 지나친 면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면도 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하기에는 충분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대체로 최근 100여년에 맞춰져 있다. 구한말 이후, 그러니까 조선과 한국을 구별하고 있다는 말이다. 봉건적 전근대 사회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들의 변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숱한 외침에 의해 이미 지배 세력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었고 민중들의 저항이 극에 달했지만 통치권력에 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타율적인 힘에 의해서였다. 시민혁명을 거쳐 스스로 권력을 창출한 경험이 없는 우리의 비참한 현대사는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 사회적 변화 속에서 대중은 스스로 정중동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현실과 타협하며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탁석산은 그것을 투표에 의한 정치권력의 이양으로 표현했고 임지현의 ‘대중독재’를 비판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대다수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에 의해 정권은 창출되지만 그 과정과 의식 속에 자리 잡은 파시즘에 대해 저자는 깊이 고민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성과 견고한 현실의 벽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생존-생활-행복-의미’의 시대를 살아왔다고 지난 100년을 회고하는 저자는 정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쉽게 말하면 최근 100여 년간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근현대사의 절망과 희망들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의미’를 찾고 있는 시대라는 말인데 과연 그런가? 자본에 종속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행복의 진정한 의미나 삶의 의미를 축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는 아닌가? 비판적 관점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관점과 논의는 건강한 사회와 현실의 모습을 돌아보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현세주의와 인생주의 그리고 허무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한국인을 분석하는 것은 적당한 기준과 관점이라는 평가보다 실용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말이 흥미롭다. 현실 생활을 하는 동안 실용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먼저 살펴보고 사상적 배경을 논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실용주의는 철저한 이기주의와 맞물려 있다. 그것은 배타적 가족주의의 위험성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혈연과 지연과 학연으로 견고하게 맞물린다. 그것조차 한국인의 특성이겠지만 탄력적인이고 유연한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라져야한다고 믿으면서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이중적 기준과 시각은 극복해야 할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저자의 관점과 논의가 분명 재미있고 대단히 현실적이어서 시원스럽다. 점잖은 척 하거나 간접화법으로 돌려 말하지 않는 점은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저자 특유의 화법이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단숨에 읽힌다. 때로 한숨 쉬고, 때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는 한국인이다. 이 단순한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극(?).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실존적이고 철학적 삶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지금-여기’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는 첫 번째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090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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