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들, 사랑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4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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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들, 사랑 이야기>는 197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Isaac Bashevis Singer 1902~1991)의 대표작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싱어는 '해방된 유대인들마저 멸시하는 언어'인 이디시어로 글을 씀으로써, 이디시어를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을 세운 작가이다. 1935년 그의 나이 33세의 나이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 50여년을 미국 시민으로 살지만, 동유럽 유대인들의 언어, 망명자의 언어인 이디시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싱어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디시어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디시어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디시어는 순교자들과 성자들, 그리고 몽상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였으며, 그 속에는 인류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기억과 풍부한 유머가 담겨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디시어는 지혜롭고 겸손한 언어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언어, 즉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류 전체의 언어입니다." (노벨 문학사 수상 연설 중, p.305)


<원수들, 사랑 이야기>는 1972년 출간된 작품으로, 1940년대말 뉴욕을 배경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에서 뉴욕으로 건너 온 헤르만 브로데르와 그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꽤나 심각하고 우울한 상황인데, 작가의 문장이 유머로 가득차 있어 슬프다가도 웃기고 주인공이 한심하다가도 애처로워 보이기를 반복하게 된다. 


어느 부유한 랍비의 대필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헤르만은 과거 자신을 목숨 걸고 나치로부터 숨겨줬던 순박한 폴란드 시골여인 야드비가와 독일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온 후, 결혼하여 부르클린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브롱스(Bronx)에 사는 마샤라는 여인과 불륜 관계이다. 마샤는 폴란드 게토, 강제 수용소를 거쳐 역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데, 헤르만은 아내 야드비가에게 책을 팔러 다른 도시로 출장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샤와 함께 밤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치에게 처형 당해 죽은 줄 알았던 첫 아내 타마라가 나타나고 설상가상으로 마샤는 임신을 했다며 결혼을 요구한다. 


헤르만이라는 남자는 우유부단하며 '쯧쯧...'소리가 나올 정도로 한심하고 답답한 사람이다. 야드비가와의 결혼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 뿐 사랑은 없다. 그가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은 마샤인데, 촌뜨기와 이혼하고 자기랑 결혼하자는 그녀의 요구를 야드비가가 불쌍해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대필 작가로서 수입은 빠듯한데 주제 넘게 두 집 살림을 해야하니 그 쩔쩔매는 모습은 애처롭다가도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 타마라까지 나타나니 헤르만의 삶은 단순히 복잡함을 넘어서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다. 


'헤르만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한심하게 살까' 싶지만 전쟁 때 헤르만의 삶을 돌아보면 정상적으로 살기가 힘들어 보인다. 잠에서 깰 때마다 여기가 미국인지 수용소인지, 3년 동안 숨어 지내던 건초 더미 다락인지 헷갈린다. 나치들의 고함 소리, 나치들이 총검으로 건초 더미를 푹푹 찔러 대는 꿈을 꾼다.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치가 뉴욕에 쳐들어올 경우에 대비하여 끊임없이 은신처를 물색'하고, 목욕을 하면서도 자신은 지금 나치가 뉴욕을 점령하여 화장실에 숨어있다고 상상한다. 

헤르만에게 이 세상과 인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곳이기에 그에게 삶은 피로함 그 자체이다. 그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마샤와 사랑을 나눌 때뿐이다. 그는 '자살 직전의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숙명론적 쾌락주의자'(p.40)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종교는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철학은 처음부터 무력한 것이었다. 진보라는 이름의 헛된 약속은 모든 시대의 희생자들을 모독하고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 스스로 삶을 끝맺을 용기도 없는 자들이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기억을 질식시키고 마지막 한 가닥 희망마저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p.40,41)


헤르만 뿐만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너무 많이 두들겨 맞으면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p.53)고 말하는 마샤의 어머니 시프라 푸아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린다. 또한 게토와 수용소에서 죽은 가족들을 애도하기위해 늘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신경과민에 히스테릭한 마샤는 늘 악몽을 꾸고, 헤르만의 부인 야드비가를 향한 증오와 질투심은 병적이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대며 쉽게 화를 내지만 헤르만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매력과 미모의 소유자이다. 두 모녀에게 대학살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며 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나치에게 두 발의 총을 맞고 극적으로 살아난 헤르만의 첫 부인 타마라. 그녀의 왼쪽 골반에는 여전히 총알이 박혀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정상적인 사람같지만 그녀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많이 상실했다.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그녀는 "바람에 날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모래 한 알은 자기가 지나온 곳이 어디어디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야." 라고 헤르만에게 말한다. 

헤르만의 생명의 은인 야드비가는 또 어떤가...헤르만을 사랑하고 헤르만만 믿고 미국으로 따라와 헤르만의 아내로 성실히 생활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여자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헤르만도 가끔은 너무나 착한 야드비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비록 바람을 피울지언정 그녀를 버리지 않는 걸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헤르만같이 무능력하고 바람피며 거짓말만 해대는 남편을 둔 야드비가가 책을 읽는 내내 안스럽게 느껴져 '헤르만!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야드비가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외치고 싶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 저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행운이고 대단한가. 남은 생은 마음껏 먹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편히 살겠지...' 이런 것이었다. 

물론 생존자들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은 알고 있었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들이 빼앗겼던 소중한 삶을 이제라도 누리며 살기를,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거 같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너무나 쉬운 생각이었음을 이 소설을 읽고 깨달았다.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 삶은 정상적일 수가 없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견뎌내야 하는 상처와 고통은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헤르만의 생각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각자의 외로움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p.106)일지도 모른다. 

헤르만은 브롱스 동물원에서 갇혀있는 동물들을 보며 '스스로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자의 절망'을 마주한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이곳으로 끌려와 끝없는 고독과 권태에 시달리고'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며, 그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의 슬픈 현실이다. 

이들에게 '나는 누구일까?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p.134)라는 질문은 공허하기만 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가장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생존자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죽을 구덩이를 파야했던, 가족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을 봐야만했던, 부모와 자식의 시신을 화장장에서 태워야했던, 가축용 수송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족과 헤어져야했던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의지해 살 수 있을까? 


요 전에 읽었던 <소피의 선택>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소피와 정신병이 있는 네이선이 섹스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서로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관계로 묘사되는데, 이 책에서도 주인공 헤르만이 유일하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는 순간은 마샤와 함께하는 밤이다. 야드비가가 아무리 착하고 헤르만을 잘 챙겨줘도 마샤와의 사랑을 뛰어 넘지 못한다.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겪은 이들에게는 사랑도 믿을 수 없기에 그토록 광적으로 집착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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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6 17:2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문장 하나 하나가 주옥같아요. 쿨캣님 글도 좋고 *^^*영혼도 너무 두들겨맞으면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 ㅠㅠ 참 슬프네요. 이 책 찜입니다 *^^*

coolcat329 2021-11-16 17:26   좋아요 6 | URL
이디시어로 쓴 소설인데 참 웃기면서도 슬프고 따뜻하면서 춥고 ...뉴욕의 겨울 무지 춥거든요ㅠ
꼭 읽어보셔요~감사합니다 😊

scott 2021-11-16 17: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작가의 유머 좋아 합니다!
작품이 한국에 많이 번역 되지 않아서 아쉽지만

그레이스 페일리 작가의 단편들속에 아이작 싱어의 부조리 같은 유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뉴욕은 가을이 쵝오!!

coolcat329 2021-11-16 21:25   좋아요 2 | URL
네 번역된 작품이 많진 않더라구요. 그레이스 페일리는 모르는 작가인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1-11-16 18:0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에 다른 책을 통해 이디시어의 존재를 알았어요. 용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았어도 트라우마가 그 뒤의 인생을 지배할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유대인들의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저력이 대단해 보여요^^
아이작 싱어의 유머도 궁금합니다**

coolcat329 2021-11-16 21:38   좋아요 3 | URL
휴 저도 살았으니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만 했지 그 후의 삶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거 같아요. 웃기고 슬프고 또 이 난관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 하려고 저러나 싶고...ㅋ 재밌습니다~

Falstaff 2021-11-16 19: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셨네요! ㅎㅎㅎ 반갑습니다.
저도 무척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그래 곧바로 이이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헌책이나마 <쇼샤>도 읽었는데 그것도 이 책만큼 재미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쇼샤>도 기억을 해두세요. 아름다운 책입니다. ㅋㅋㅋ
저도 분명히 이 책 읽고 독후감 올린 거 같은데 우째 없습니다. 기껏 올려놓고 술 마시고 지웠을까요? 아, 오리무중. 오리 고기 먹으면 중량이 나가지 않는다, 즉 살찌지 않는다? ^^

잠자냥 2021-11-16 20:55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 님 알라딘 서재 난리났을 때 사라진 거 아닌가요? 저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coolcat329 2021-11-16 21:41   좋아요 3 | URL
사실 이 책 폴스타프님이 예전에 쓰신 열린책들 추천 리스트에서 알게 되어 찍어둔 책이에요~
<소피의 선택>읽다가 이 책이 생각나서 이번에 읽었는데 저도 다 읽고 싱어의 작품 다 찾아봤답니다. <쇼사>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11-16 20: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작가인데 처음들어보는 작가에요 😅 부인이 그럼 세명인건가요? 헐~ 과거 홀로코스트의 충격적인 경험이 현재를 압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야기인가 봐요~ 이디시어로 쓰였다니 인상적이네요. 왠지 웃기면서 슬플거 같아요~!

coolcat329 2021-11-16 21:43   좋아요 3 | URL
네 ㅋ 부인이 세 명 ㅋㅋ 돈도 없는데 말이죠.
여자들이 이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한 남자를 또 좋아한답니다. 새파랑님 좋아하실거에요~^^

얄라알라 2021-11-1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쿨캣님 이 리뷰 읽을 땐, 이디시어의 (낮은) 위상과 이디시어의 존엄을 보여주고 지키는 노벨상 수상작가! 이렇게 정리되었다가

댓글 좌르륵 읽다보니 폴스타프님 추천 기억하셨다가 쿨캣님 읽으셨구나,

그런데 무서운 기억이 시간이 갈수록 몽롱하게 흐려지는 게 아니라, 선명해진다고 하신 부분이 리뷰 다시 읽었을 땐,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게 작은 위안이겠는데, 도리어 무서운 기억이 선명해지다니...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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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1 2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리뷰대회로 뜨거운 중심에 있던 이 책, 저도 오늘 <전쟁과 농업> 다시 읽는데 반 페이지를 할애해 소개되었길래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될 책이겠군. 했는데 쿨캣님께서 밑줄긋기로 다시 자극해주시네요^^
 
소피의 선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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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선택>은 미국 버지니아 출신의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 1925~2006)의 대표작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1980년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수상했다. 또한 이 소설은 1982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 되어 주연을 맡은 메릴 스트립(1947~ )에게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영화 역사에 있어 손에 꼽히는 명연기로 알려져 있다. 


1947년 뉴욕,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의 22살 청년 스팅고는 맨해튼에 있는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그는 브루클린으로 거처를 옮긴다. 스팅고는 새로 이사한 하숙집에서 이상한 이웃을 만나게 되는데,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폴란드 출신 소피와 그의 연인인 유대인 남성 네이선이다. 


하숙집에서의 첫날, 스팅고는 윗층에서 '광포한 야생동물들처럼 섹스를 하는 두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던 '마라톤 섹스'가 끝나고 샤워하면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남자의 욕설과 여자의 애처로운 흐느낌, 유리 깨지는 소리,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거칠게 열고 나가는 문소리와 함께 싸움은 끝난다.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이 기이한 행위에 스팅고는 화가 나면서도, 그토록 격정적인 사랑이 어떻게 한 순간에 분노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커플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끼며 다음날 코니 아일랜드로 놀러도 가는 등 가까운 사이가 된다. 지적이고 재미있는 네이선도 호감이 가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소피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에 살던 소피는 아픈 엄마를 위해 몰래 고기를 들여오다가 검문에서 체포당하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된다. 유대인이 아니기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향하진 않았지만 강제수용소에서 지내면서 나치의 대량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전쟁이 끝나기 5개월 전에는 아우슈비츠에서 멀지 않은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로 옮겨져 극심한 굶주림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는 위기의 순간 우연히 네이선을 만나 도움을 받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 소설은 소설가로 나름 성공한 스팅고가 30년이 흐른 후(1977년으로 추정), 과거 소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회상하며 쓴 이야기이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소피와 네이선. 그러나 거의 발작에 가까운 네이선의 분노와 변태적인 폭력, 폭언으로 세 사람의 관계에는 균열이 오고, 혼자 남은 소피는 그때마다 스팅고에게 자신의 가슴 아픈 전쟁의 경험을 들려주게 된다. 그 가운데 조금씩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읽는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며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게 한다.


스팅고는 소피로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들으면서 소피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던 1943년 4월 1일, 자신은 그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들춰낸다. 그는 해병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몸무게를 늘리려고 미친 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던 것. 

스팅고는 당시 아우슈비츠는 커녕 나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고, 전쟁에서의 적은 일본군이었음을 고백하며 같은 시간을 살았음에도 어쩌면 그렇게 다른 시간을 산 거 처럼 모를 수가 있었는지 평론가 스타이너의 말을 빌어 "의사소통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존재하다는 개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1권-p.388)라고 말한다. 


1,2권 합쳐 9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할 틈이 없이 푹 빠져서 읽었다. 전쟁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소피의 삶을 통해 전쟁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하며 인간의 존재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며, '절대적인 악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한 인간을 마비시킬 수 있는지'(2권-p.259)를 보여준다.

'소피는 과거의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궁금한 가운데, 그것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알게되는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는 슬프면서도 그런 상황을 만든 역사의 광포함에 치를 떨게 만든다. 


다만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 당황한 점은 화자인 스팅고의 주체할 수 없는 성적 호기심과 집착이 너무 과하게 나와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이 작품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22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 제대로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면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웃어 넘겼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노골적인 표현과 묘사는 혼자 읽으면서도 낯 뜨거워 혼났다. 


<소피의 선택>은 소피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몇 차례에 걸쳐 스팅고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소피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쟁의 광기와 비극뿐아니라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 인종차별도 스팅고의 입을 통해 고발함으로써 인류가 겪은 또다른 역사의 비극을 다룬다. 

소피가 숨기고 있는 과거는 무엇인가? 소피의 선택은 무엇인가?

궁금하시면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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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08 01: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900여 페이지를 전혀 지루할 틈 없이 읽으시는 쿨캣님^^ 스팅고가 커플에 관심갖게 된 에피소드며, 스팅고의 바나나로 체중 늘이기와 소피의 death camp경험이 같은 날, 다른 공간에서 이뤄졌다는 상상을 하니 이 소설 정말 재미있을 것 같네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coolcat329 2021-11-08 07:43   좋아요 4 | URL
네 참 재밌습니다. 노골적인 성에 대한 묘사, 표현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요.

hnine 2021-11-08 04: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조금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공감하며 복습하고 갑니다 ^^

coolcat329 2021-11-08 07: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토리 공개를 최대한 자제해야할 책이라 어디까지 써야하나 고민하다보니 글이 좀 부족한데 복습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11-08 09: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전 영화가 좀 더 재미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명화보고 스트립의 팬이 안 되면 이상한 인간일 겁니다. ^^

coolcat329 2021-11-08 11:44   좋아요 3 | URL
네~영화 찾아서 꼭 보려구요~
소피를 어떻게 연기했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잠자냥 2021-11-08 09: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능 읽어야겠습니다!

coolcat329 2021-11-08 11:46   좋아요 3 | URL
네~이 책 사셨죠? ㅎ
잠자냥님은 수영장 도서관으로 단련이 되었을테니 이 책에 나오는 야한 묘사는 싱거우실거에요.
저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

새파랑 2021-11-08 10: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은데 우주점에는 상태가 좋은게 없더라구요 ㅜㅜ 페이지도 벽돌책이고 ㅎㅎ 노골적인 표현이 많다니 더 궁금한 책 ^^
같은시대를 살았더라도 다른 시간을 경험했다니~

잠자냥 2021-11-08 10:45   좋아요 5 | URL
상태 좋은 건 제가 다 가져갔습니다! ㅋㅋㅋㅋ

새파랑 2021-11-08 10:53   좋아요 3 | URL
어쩐지.....이번달에는 부지런히 검색해봐야겠군요 ㅋ
중고책 장바구니에 넣어둔게 계속 품절되던데 왠지 잠자냥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coolcat329 2021-11-08 11:48   좋아요 4 | URL
저도 이 책 구하기 힘들어 따로따로 구입했어요~~
저는 책 깨끗하게 안봐서 상태 안 좋아도 이제는 그냥 구입하네요 ㅎ

scott 2021-11-08 11: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영화에 한 표! ☝ 쿨켓님 리뷰에 공감합니다. ^^

coolcat329 2021-11-08 11:49   좋아요 5 | URL
그쵸? 이 책은 영화가 참 유명하더라구요. 공감~~감사합니다 😄

미미 2021-11-08 12: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 영화도 보고 소설도 꼭 읽어야겠어요~♡ 프렌치키스의 케빈 클라인도 나오는군요!

coolcat329 2021-11-08 20:44   좋아요 4 | URL
이 영화는 꼭 봐야할 거 같아요. 케빈 클라인이 소피의 연인 네이선~

scott 2021-12-09 15: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이달의 당선 추카! ^^

coolcat329 2021-12-09 17:2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

mini74 2021-12-09 16: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리뷰 보고 소피의 선택 읽고 있어요 집에 있더라고요 ㅠㅠ ㅎㅎ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12-09 16:28   좋아요 3 | URL
저도 축하드려요
저도 갖고 있는데...;;

scott 2021-12-09 17:30   좋아요 4 | URL
영화도 추천합니다 ^^

coolcat329 2021-12-09 17:30   좋아요 3 | URL
오~읽고 계시군요! 즐독하셔요~감사합니다.

coolcat329 2021-12-09 17:30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 이 책 많이 갖고 계시네요~술술 잘 읽히니 읽어보셔요~

쎄인트saint 2021-12-09 17: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coolcat329 2021-12-09 17:3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09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늦었지만 진심을 담아 축하드러요~!!
 
문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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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금테 안경>으로 처음 알게 된 작가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

그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바사니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페라라에서 보내는데 그의 작품 대부분이 페라라를 무대로 하고 있어 일명 '페라라의 작가', '기억의 작가'라고 불린다.

<문 뒤에서>는 페라라를 배경으로 한 연작 소설 중 하나로 1964년 출간되었다.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불행했다' 라는 음울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문 뒤에서>는 이탈리아 페라라의 한 유대인 소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유독 암울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일학년, 한창 예민한 시기의 10대 소년들이라면 응당 겪기 마련인 우정과 동경, 열등감, 미묘한 경쟁심과 같은 심리적 갈등이 소설 시작부터 내밀하게 펼쳐진다.

어느 날 문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소년, 그가 마주치는 삶의 실체는 유난히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수치이자 모욕으로 다가오고, 소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김과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꿔놓는다.

생의 이면에서 새어나오는 '악취'를 알게 된 것...


이 소설이 유독 슬픈 이유는 사건 자체보다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찢고 나오지 못하고 그 상처 안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리라...다짐한 것이다.

영원히 문 뒤에 숨어 '단절과 적대감이라는 타고난 운명'에 사로잡혀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금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p.159)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면서 그 상처 속에 숨어 살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바사니는 '기억의 작가'가 맞다. 이 소설은 특히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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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0-22 10: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꺄~ 이 책 읽으셨구나. 제가 음청 좋아하는 책! 바사니는 ‘기억의 작가‘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coolcat329 2021-10-22 10:48   좋아요 3 | URL
네~~이 가을이 가기 전 바사니를 읽고 싶었습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도 구입하려고요~
잠자냥님 좋아하시는건 알았는데 음청! 좋아하시는군요. ☺

미미 2021-10-22 1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 일단 집에있는 <금테안경>찾는 중ㅋㅋㅋㅋ

coolcat329 2021-10-22 10:50   좋아요 1 | URL
아~~미미님 이 가을 금테 안경 꼭 찾으셔서 읽으셔요.

페넬로페 2021-10-22 11: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은
‘저것은 소설속에서의 일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의 지인들중에도ㅡ그분들의 가정은 별로 문제가 없거든요ㅡ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이 왕따를 당하고 자해를 하고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리뷰 읽고 드는 생각이 소설은 정말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읽고 싶네요^^

coolcat329 2021-10-22 12:33   좋아요 4 | URL
가장 예민한 시기, 청소년들만의 그 미묘한 심리가 너무나 잘 묘사된 작품이에요. 저 또한 중고딩때 생각이 나면서 아! 우리반에도 저런 애가 있었지...소름이 돋기도 했습니다.

새파랑 2021-10-22 13: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기억의 작가라니 왠지 느낌이 좋네요. 어떤걸 마주쳤는지 완전 궁금증이 생기네요~!!

coolcat329 2021-10-22 17:13   좋아요 2 | URL
책이 얇으니 궁금증 금방 풀리실거에요~☺

레삭매냐 2021-10-22 13: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소설 그 자체보다 리뷰가
더 쩌릿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기억에 갇힌 주인공의 모습
이 그저 안타깝네요.

coolcat329 2021-10-22 17:15   좋아요 3 | URL
네...분명 현실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페크pek0501 2021-10-30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는 넘어져서 더 단단한 사람이 되는가 하면,
누군가는 넘어져서 다시 못 일어나는 사람이 있어요. 슬픈 이야기입니다.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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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나무는 자라서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지. 비록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일부는, 땅 속에 조금이나마 뿌리를 뻗고 있는 일부는 계속해서 잎과 꽃을 피우는 거야. 나무는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면서도 결코 비통해하거나 자신을 동정하는 법이 없어. (p.274)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반전문학으로 유명한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1970) 가 1954년 발표한 소설이다. 

레마르크는 1898년 독일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던 중 징집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이 체험을 바탕으로 1929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발표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나치와 전쟁을 비판하는 그의 작품들은 불태워지고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이주, 1939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가던 2차 세계대전 막바지,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고 악취를 풍기는 죽음'으로 가득찬 러시아의 독일군 전선에서 주인공 에른스트 그래버는 2년 만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고향은 연합군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어있고 부모님의 생사도 알 수가 없다. 폐허 더미에 둘러싸인 도시는 더 이상 자신이 그리워하던 고향이 아니었다. 


'나는 폐허들을 수없이 보아 왔어. 하지만 진짜 폐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늘에서야 진짜를 본 거야. 바로 이 폐허를. 이것은 다른 폐허들과는 달라.' (p.123)


그래버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어머니가 치료를 받았던 크루제 박사를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박사의 딸이자 같은 학교를 다녔던 엘리자베스를 만나게 된다. 크루제 박사는 독일의 승리를 의심했다는 누군가의 밀고로 수용소로 끌려간 상태이고, 엘리자베스는 애국단 일원인 리저 부인의 감시 속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치는 전쟁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고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살 수밖에 없으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습에도 대비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고 있다. 


한편 그래버는 한동안 보지 못한 동급생들도 우연히 만나는데 그들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무릎 위를 절단한 친구, 팔꿈치 아래로 두 팔을 잃은 친구, 이미 죽은 친구들, 미쳐버린 친구 등의 소식은 그래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과거 동창생 알폰스 빈딩은 잘나가는 돌격대 대장이 되어 전리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자신의 권력에 취해있고, 그가 어울리는 수용소 소장 하이니는 자신이 친위대 보안부에 있었을 때 자행한 집단 살육의 체험담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래버는 알폰스에게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묻지만 알폰스는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면 되는 거야. 책임 같은 건 없어."(p.238)라고 말한다. 


그래버는 강제 징집과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했지만 자신이 늘 진실을 회피해 왔음을 깨닫는다. 정의감과 연민은 '이기주의와 무관심과 불안감에 부딪혀 언제나 난파하기 마련'이라는 사실과 함께 자신도 간접적으로 이 범죄에 얽혀 있음을 깨닫는다.

배신당하고 기만당한 자신의 삶을 깨달은 그는 스승 폴만을 찾아간다. 폴만은 학교에서 파면당하고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 숨어지내고 있는 상태로 그래버는 폴만에게 간절하게 묻는다. 


"저는 지난 십 년 동안의 범죄에 제가 어느 정도 관계되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미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건 정부와 당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일으킨 인간들이 권력을 좀 더 연장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그 결과 더 많은 불행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일선으로 가고, 그것을 알면서도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해야 할까요?" (p.247,248)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전쟁, 그러나 거부하면 총살을 당하고 철통같은 감시 속에서 탈영도 불가능하며 부모님에게도 보복이 가해질 것이다. 스스로 몸을 불구로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거의 언제나 발각이 되고 역시 처형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스승이라도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자네를 대신하여 결정할 수가 없네."(p.251)


그러나 다음의 말도 잊지 않는다. 


"공범! 공범 관계라고 하지만 자네가 무엇을 알고 있나? 자네는 아직 어렸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도 전에 거짓으로 중독되었던 거네.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그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네! 무엇 때문에? 나태한 마음? 무관심? 이기주의? 혹은 절망이라고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 그런 페스트가 만연하게 되었을까? 자네는 내가 이 일을 날마다 외면한 채 지낸다고 생각하나?" (p.252)


그래버는 폴만 선생의 집을 나온 후, 광장의 커다란 보리수 나무를 보며 강한 생명의 힘이 자신의 내부로 밀치고 들어옴을 느낀다. 살아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마침내 살아있음을 느끼며 남은 이 주간의 휴가 동안 폭격에 뿌리가 뽑혀나가도 꽃을 피우는 나무처럼 자신의 생명의 힘을 믿기로 결심한다. 


그래버는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와 마지막일지 모를 소중한 시간들을 보낸다. 

휴가가 끝나면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래버는 생각한다.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인가?' 그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나를 지탱해주는 닻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버는 우린 곧 헤어져야 하지만 결혼하면 덜 외로울 거라며 청혼을 한다.


그동안은 살아도 죽어도 별 차이 없는 삶이었지만 엘리자베스에게 닻을 내린 그래버는 삶에 애착을 갖고 희망을 품게 된다. 두 사람은 시립학교 체육관에서 결혼을 하고, 너무나 짧은 신혼생활을 뒤로 한채 그래버는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   


<피에 젖은 땅>을 읽고 2차 세계대전에 관심 생겨 읽게 되었는데, 연합군이 아닌 독일병사와 독일 국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의 참상을 그려 다시 한번 전쟁은 누구에게나 비극임을 느끼게 되었다. 

레마르크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 생명,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인간에게 너무나 소중한 그것들이 전쟁에 의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3주 휴가 동안 사랑하고 삶의 애착을 느낀 그래버는 살아있음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다시 죽음이 판치는 전장으로 가야했다...

이 작품의 원제는 'Zeit zu Leben und Zeit zu Sterben' 으로 '살아있을 때와 죽을 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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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0-20 19:34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두 말이 필요없는 명작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쿨캣님!!

coolcat329 2021-10-20 19:37   좋아요 6 | URL
이런 작품은 좀 일찍 읽어도 좋았을텐데요...ㅠㅠ
폴스타프님이 서부전선이 번역이 좀 그렇다하셔서 고민입니다.

Falstaff 2021-10-20 19:43   좋아요 5 | URL
아, 정말 아쉽군요. 서부전선은 일찍이 토마스 만 학회 회장을 역임한 홍성광 번역하고, 범우사, 역자 미상의 홍신문화사밖에 없네요. 홍성광 씨 번역은, 근데 그게 번역 말고요, 우리말 문장이 개판, 개떡 무인지경입니다.
아효... 그거 얼른 다른 사람이 번역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홍성광 씨도 참. 자기 이름으로 책내고 한 번도 거들떠 보지 않은 거 같아요. 명성에 흠집을 내다니, 아이고....

coolcat329 2021-10-20 19:55   좋아요 4 | URL
아이고 😭 제발 훌륭한 번역으로 꼭 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mini74 2021-10-20 19: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전 읽어본 게 개선문 , 서부전선은 영화로 본 거 같아요 ~ 이 책 무지 끌립니다. 저도 찜 *^^*

Falstaff 2021-10-20 20:01   좋아요 6 | URL
아효, 이 책은 필독섭니다! ㅎㅎㅎ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coolcat329 2021-10-20 20:19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님 추천이 너무너무 흥이납니다🤗
필독서 맞는거 같아요.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조금 억울했지요. 저는 개선문을 구입하려구요~^^

Falstaff 2021-10-20 20:22   좋아요 5 | URL
개선문, 좋습니다!
전 삼중당 문고부터 시작해서 한 서너번 읽은 거 같아요. 물론 사춘기 시절의 격동적이었던 정서가 실제보다 더 감동을 먹게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개선문은 제 인생책입니다!
ㅋㅋㅋㅋ 별꼴이야, 나이가 몇 갠데 인생책? 그죠?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10-20 21:27   좋아요 2 | URL
오~~인생책! 😍더욱 기대가 됩니다. 인생책은 젊은 시절에 오는거겠죠? 저는 인생책이 없지만 모든 책들이 그냥 다 좋으니 다 인생책입니다~!

페넬로페 2021-10-20 21:55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에는 삼중당 문고로 읽었어요^^

막시무스 2021-10-20 20:0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표지만으로 별5개 먹고 들어가네요! 내용도 좋아보이고, 거기에 팔스타프님 보증이면 장바구니 직행인듯요!ㅎ

Falstaff 2021-10-20 20:09   좋아요 6 | URL
아오, 이 책은 읽은지 꽤 오랜 모양입니다. 독후감 써놓은 것도 없네요. 이럴 수가...
ㅋㅋㅋㅋ 명작 맞습니다. 일독을 미루지 마세요!!!

막시무스 2021-10-20 20:11   좋아요 5 | URL
넵! 조만간 후기 보고 올리겠습니다!ㅎ 저는 이제 퇴근해서 오징어회에 쏘주 투하하면서 오징어게임 모드 들어갑니다!ㅎ 팔스타프님도 언제나 맛술하십시요!ㅎ

coolcat329 2021-10-20 20:16   좋아요 3 | URL
아! 오징어회 소주 오징어게임 ㅋㅋㅋ
우와~~부럽습니당!

잠자냥 2021-10-20 20:5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춘기 시절의 폭풍 감동의 쓰나미 작품입니다. 애들이 데미안, 데미안할 때 속으로 바보들, 독일 책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야! 하고 외쳤습죠.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고 싶지만 그때의 감흥이 깨질까 두려워 섣불리 다시 못 읽는 그런 책입니다.

coolcat329 2021-10-20 21:24   좋아요 5 | URL
아~~ 그 마음 정말 알거같습니다. 저도 그 시절 읽었더라면 아마 엄청 가슴앓이하며 친구들에게 추천했을거 같아요~

붕붕툐툐 2021-10-20 22:43   좋아요 4 | URL
어쩐지 오늘 A가 자냥이가 자기한테 바보라고 한다고 샘한테 얘기하러 왔던데, 이 얘기였구나!

페넬로페 2021-10-20 21:4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등학교때 제 2 외국어로 독어를 배운 덕분에 레마르크 작가를 좋아해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었거든오.
사랑할때와 죽을때 읽고 그야말로 감동 먹어서 가슴이 벅찼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먼 훗날 만나니 넘 반가워요^^

coolcat329 2021-10-21 07:10   좋아요 2 | URL
아 독어를 하셨군요. 저는 불어를 했어요~~
역시나 이 책은 좀 더 일찍 읽었어야 했습니다.

새파랑 2021-10-20 22: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극찬에 폴스타프님 보증이시면 이건 뭐 무조건이네요 ^^ 전 첨들어본 작가인데 읽어봐야 겠습니다. 표지도 완전 멋진데다 반전문학이라니~!@

coolcat329 2021-10-21 07:13   좋아요 3 | URL
네~그냥 노골적인! 반전문학이에요.
그래서 더 찾아 읽고 싶은 작가입니다.

붕붕툐툐 2021-10-20 22:4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쟁, 2차 세계대전 이런 얘기만 나오면 두뇌에 셔터가 내려가는 느낌이에요~ 근데 다들 극찬하시니 약간 솔깃~ㅎㅎ
<피에 젖은 땅> 읽으시고 연계하여 읽으시는 거 멋져용~👍

coolcat329 2021-10-21 07:20   좋아요 3 | URL
두뇌에 셔터가 내려가는 느낌...은 😱 이런 느낌인가요? ㅎㅎ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

페크pek0501 2021-10-30 1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으려고 검색해 보니 560쪽. 깩!!!

coolcat329 2021-10-31 09:35   좋아요 0 | URL
너무 잘 읽혀서 두께는 상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