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들, 사랑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4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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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들, 사랑 이야기>는 197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Isaac Bashevis Singer 1902~1991)의 대표작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싱어는 '해방된 유대인들마저 멸시하는 언어'인 이디시어로 글을 씀으로써, 이디시어를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을 세운 작가이다. 1935년 그의 나이 33세의 나이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 50여년을 미국 시민으로 살지만, 동유럽 유대인들의 언어, 망명자의 언어인 이디시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싱어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디시어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디시어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디시어는 순교자들과 성자들, 그리고 몽상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였으며, 그 속에는 인류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기억과 풍부한 유머가 담겨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디시어는 지혜롭고 겸손한 언어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언어, 즉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류 전체의 언어입니다." (노벨 문학사 수상 연설 중, p.305)


<원수들, 사랑 이야기>는 1972년 출간된 작품으로, 1940년대말 뉴욕을 배경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에서 뉴욕으로 건너 온 헤르만 브로데르와 그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꽤나 심각하고 우울한 상황인데, 작가의 문장이 유머로 가득차 있어 슬프다가도 웃기고 주인공이 한심하다가도 애처로워 보이기를 반복하게 된다. 


어느 부유한 랍비의 대필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헤르만은 과거 자신을 목숨 걸고 나치로부터 숨겨줬던 순박한 폴란드 시골여인 야드비가와 독일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온 후, 결혼하여 부르클린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브롱스(Bronx)에 사는 마샤라는 여인과 불륜 관계이다. 마샤는 폴란드 게토, 강제 수용소를 거쳐 역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데, 헤르만은 아내 야드비가에게 책을 팔러 다른 도시로 출장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샤와 함께 밤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치에게 처형 당해 죽은 줄 알았던 첫 아내 타마라가 나타나고 설상가상으로 마샤는 임신을 했다며 결혼을 요구한다. 


헤르만이라는 남자는 우유부단하며 '쯧쯧...'소리가 나올 정도로 한심하고 답답한 사람이다. 야드비가와의 결혼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 뿐 사랑은 없다. 그가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은 마샤인데, 촌뜨기와 이혼하고 자기랑 결혼하자는 그녀의 요구를 야드비가가 불쌍해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대필 작가로서 수입은 빠듯한데 주제 넘게 두 집 살림을 해야하니 그 쩔쩔매는 모습은 애처롭다가도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 타마라까지 나타나니 헤르만의 삶은 단순히 복잡함을 넘어서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다. 


'헤르만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한심하게 살까' 싶지만 전쟁 때 헤르만의 삶을 돌아보면 정상적으로 살기가 힘들어 보인다. 잠에서 깰 때마다 여기가 미국인지 수용소인지, 3년 동안 숨어 지내던 건초 더미 다락인지 헷갈린다. 나치들의 고함 소리, 나치들이 총검으로 건초 더미를 푹푹 찔러 대는 꿈을 꾼다.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치가 뉴욕에 쳐들어올 경우에 대비하여 끊임없이 은신처를 물색'하고, 목욕을 하면서도 자신은 지금 나치가 뉴욕을 점령하여 화장실에 숨어있다고 상상한다. 

헤르만에게 이 세상과 인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곳이기에 그에게 삶은 피로함 그 자체이다. 그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마샤와 사랑을 나눌 때뿐이다. 그는 '자살 직전의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숙명론적 쾌락주의자'(p.40)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종교는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철학은 처음부터 무력한 것이었다. 진보라는 이름의 헛된 약속은 모든 시대의 희생자들을 모독하고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 스스로 삶을 끝맺을 용기도 없는 자들이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기억을 질식시키고 마지막 한 가닥 희망마저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p.40,41)


헤르만 뿐만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너무 많이 두들겨 맞으면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p.53)고 말하는 마샤의 어머니 시프라 푸아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린다. 또한 게토와 수용소에서 죽은 가족들을 애도하기위해 늘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신경과민에 히스테릭한 마샤는 늘 악몽을 꾸고, 헤르만의 부인 야드비가를 향한 증오와 질투심은 병적이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대며 쉽게 화를 내지만 헤르만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매력과 미모의 소유자이다. 두 모녀에게 대학살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며 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나치에게 두 발의 총을 맞고 극적으로 살아난 헤르만의 첫 부인 타마라. 그녀의 왼쪽 골반에는 여전히 총알이 박혀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정상적인 사람같지만 그녀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많이 상실했다.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그녀는 "바람에 날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모래 한 알은 자기가 지나온 곳이 어디어디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야." 라고 헤르만에게 말한다. 

헤르만의 생명의 은인 야드비가는 또 어떤가...헤르만을 사랑하고 헤르만만 믿고 미국으로 따라와 헤르만의 아내로 성실히 생활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여자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헤르만도 가끔은 너무나 착한 야드비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비록 바람을 피울지언정 그녀를 버리지 않는 걸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헤르만같이 무능력하고 바람피며 거짓말만 해대는 남편을 둔 야드비가가 책을 읽는 내내 안스럽게 느껴져 '헤르만!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야드비가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외치고 싶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 저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행운이고 대단한가. 남은 생은 마음껏 먹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편히 살겠지...' 이런 것이었다. 

물론 생존자들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은 알고 있었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들이 빼앗겼던 소중한 삶을 이제라도 누리며 살기를,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거 같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너무나 쉬운 생각이었음을 이 소설을 읽고 깨달았다.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 삶은 정상적일 수가 없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견뎌내야 하는 상처와 고통은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헤르만의 생각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각자의 외로움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p.106)일지도 모른다. 

헤르만은 브롱스 동물원에서 갇혀있는 동물들을 보며 '스스로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자의 절망'을 마주한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이곳으로 끌려와 끝없는 고독과 권태에 시달리고'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며, 그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의 슬픈 현실이다. 

이들에게 '나는 누구일까?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p.134)라는 질문은 공허하기만 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가장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생존자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죽을 구덩이를 파야했던, 가족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을 봐야만했던, 부모와 자식의 시신을 화장장에서 태워야했던, 가축용 수송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족과 헤어져야했던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의지해 살 수 있을까? 


요 전에 읽었던 <소피의 선택>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소피와 정신병이 있는 네이선이 섹스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서로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관계로 묘사되는데, 이 책에서도 주인공 헤르만이 유일하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는 순간은 마샤와 함께하는 밤이다. 야드비가가 아무리 착하고 헤르만을 잘 챙겨줘도 마샤와의 사랑을 뛰어 넘지 못한다.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겪은 이들에게는 사랑도 믿을 수 없기에 그토록 광적으로 집착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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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6 17:2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문장 하나 하나가 주옥같아요. 쿨캣님 글도 좋고 *^^*영혼도 너무 두들겨맞으면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 ㅠㅠ 참 슬프네요. 이 책 찜입니다 *^^*

coolcat329 2021-11-16 17:26   좋아요 6 | URL
이디시어로 쓴 소설인데 참 웃기면서도 슬프고 따뜻하면서 춥고 ...뉴욕의 겨울 무지 춥거든요ㅠ
꼭 읽어보셔요~감사합니다 😊

scott 2021-11-16 17: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작가의 유머 좋아 합니다!
작품이 한국에 많이 번역 되지 않아서 아쉽지만

그레이스 페일리 작가의 단편들속에 아이작 싱어의 부조리 같은 유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뉴욕은 가을이 쵝오!!

coolcat329 2021-11-16 21:25   좋아요 2 | URL
네 번역된 작품이 많진 않더라구요. 그레이스 페일리는 모르는 작가인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1-11-16 18:0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에 다른 책을 통해 이디시어의 존재를 알았어요. 용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았어도 트라우마가 그 뒤의 인생을 지배할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유대인들의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저력이 대단해 보여요^^
아이작 싱어의 유머도 궁금합니다**

coolcat329 2021-11-16 21:38   좋아요 3 | URL
휴 저도 살았으니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만 했지 그 후의 삶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거 같아요. 웃기고 슬프고 또 이 난관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 하려고 저러나 싶고...ㅋ 재밌습니다~

Falstaff 2021-11-16 19: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셨네요! ㅎㅎㅎ 반갑습니다.
저도 무척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그래 곧바로 이이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헌책이나마 <쇼샤>도 읽었는데 그것도 이 책만큼 재미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쇼샤>도 기억을 해두세요. 아름다운 책입니다. ㅋㅋㅋ
저도 분명히 이 책 읽고 독후감 올린 거 같은데 우째 없습니다. 기껏 올려놓고 술 마시고 지웠을까요? 아, 오리무중. 오리 고기 먹으면 중량이 나가지 않는다, 즉 살찌지 않는다? ^^

잠자냥 2021-11-16 20:55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 님 알라딘 서재 난리났을 때 사라진 거 아닌가요? 저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coolcat329 2021-11-16 21:41   좋아요 3 | URL
사실 이 책 폴스타프님이 예전에 쓰신 열린책들 추천 리스트에서 알게 되어 찍어둔 책이에요~
<소피의 선택>읽다가 이 책이 생각나서 이번에 읽었는데 저도 다 읽고 싱어의 작품 다 찾아봤답니다. <쇼사>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11-16 20: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작가인데 처음들어보는 작가에요 😅 부인이 그럼 세명인건가요? 헐~ 과거 홀로코스트의 충격적인 경험이 현재를 압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야기인가 봐요~ 이디시어로 쓰였다니 인상적이네요. 왠지 웃기면서 슬플거 같아요~!

coolcat329 2021-11-16 21:43   좋아요 3 | URL
네 ㅋ 부인이 세 명 ㅋㅋ 돈도 없는데 말이죠.
여자들이 이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한 남자를 또 좋아한답니다. 새파랑님 좋아하실거에요~^^

얄라알라 2021-11-1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쿨캣님 이 리뷰 읽을 땐, 이디시어의 (낮은) 위상과 이디시어의 존엄을 보여주고 지키는 노벨상 수상작가! 이렇게 정리되었다가

댓글 좌르륵 읽다보니 폴스타프님 추천 기억하셨다가 쿨캣님 읽으셨구나,

그런데 무서운 기억이 시간이 갈수록 몽롱하게 흐려지는 게 아니라, 선명해진다고 하신 부분이 리뷰 다시 읽었을 땐,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게 작은 위안이겠는데, 도리어 무서운 기억이 선명해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