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의 '취향'이란 지난번 글을 보더니,
'아무거나','아무데나'를 남발하는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냐고...한마디 한다.
나는 그저 '헤헤~'거리며 웃고 말았다.
내가 그 누군가 앞에서 '아무거나', '아무데나'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이미 내 취향이라는 얘기지만,
대놓고 '당신이 이미 내 취향이다, 고로 당신은 이미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거나', '아무데나' 를 남발하여 날 수더분한 줄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글쎄...실은 좀 까칠하다.
단지 내가 까칠함을 발휘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나의 까칠함을 아는 이들의 분석에 의하면, 알아서 협조하고 더러워서 피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의 경우 수더분한 걸 좋아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는거다.
똑 부러지게 자기 취향을 얘기하는 쪽이 좋다.
야무지고 맛깔스럽게 얘기했는데 그 취향이 나랑 같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라는 거지,
뜨뜻미지근하게 이래도 저래도 '흥~' 천안삼거리에 걸린 능수버들처럼 다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사람도 싫다.
나도 독특하고 유니크한걸로는 한 몫하기 때문에, 다른사람까지 과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1.
내가 일하는 곳은 2층이다.
며칠 전 퇴근 무렵 한 남자가 다리를 절며 들어 왔다.
오기 전날부터 다리 바깥쪽이 심하게 아파 발을 땅에 딛을 수가 없었단다.
"왜 아프세요?"
"그걸 알면 내가 이 다리로 2층까지 기어올라왔겠어요?"
"다치거나 삐끗하신 기억이 없으시냐는 얘기죠?"
"없어요."
"여기 이 멍은 뭐예요?"
"그거 별거 아녜요."
"ㆍㆍㆍㆍㆍㆍ?"
"아픈 거랑 상관없는 거예요."
"상관 있고, 없고는 제가 판단할 문제고요."
"걸어가다가 골프공에 맞았어요."
"걷다가요, 뛰다가요?"
"그딴게 왜 중요합니까?"
"걷는데 사용되는 근육이랑 뛰는데 사용되는 근육이랑 약간 달라요."
"살살 뛴거 같아요, 몸 풀기 정도로ㆍㆍㆍㆍㆍㆍ.
 근데 골프공에 맞은 건 무릎 안쪽 윗부분인데, 내가 지금 아픈 건 무릎 바깥쪽 아랫부분이라구요."
"골프공 맞는 순간 무릎관절을 축으로 지렛대 원리에 의해서 충격을 받은 부분이 생겨났어요.
 골프공 맞은 부위는 위 무릎 안쪽이지만,
 무릎관절 대칭으로 본인 몸무게가 힘으로 작용을 해서 아킬레스건에 무리를 줬다고 보시면 돼요."
인체와 그 주변에 힘이 작용하는 원리를 그에게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achilles tendon, iliosacrum, T-M joint 등을 건드리자 자지러진다.
"어제부터 아프신거라는 거짓말, 정말이예요?"
"골프공에 맞은 건 일주일 됐어요~ㅠ.ㅠ"
partial rupture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고는 테이핑과 E.B.로 둘둘 말아서 고정시켜 보냈더니,
못 믿고 가서 MRI까지 찍어 확인을 한 모양이다. 

그 후 180도 태도 돌변, 내 말을 무조건 믿는 순한 양 같은 남자가 되어버렸지만, 통통 거리는 맛이 없어 재미는 없다. 

 

2.
어제 집에 갔더니 택배가 와 있었다.
정말 이렇고 저런 책들이랑 음반들이 너무 쌓여...
다 못읽고 다 못듣고 헤쳐만 놓고 해를 넘기고 말것 같아 정중히 사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서운했었나 보다.
책이면 어쩌나 하고 열어보니,
예쁜 플라스틱 폴더 속에 볼펜과 수첩과 포스트잇과 각종 스티커 등의 문구 류와 다이어리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학창시절엔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듯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된후론, 판촉물로 나와 굴러 다니는 걸 주워 썼었던지라...
내 기호나 취향이랑은 전혀 관계없었다.

하나 하나 쓸어 보고 만져 보면서 '어머, 어머, 어머머~'를 연발했었는데...
세상에 내 안에 들어와 보고, 나를 훔쳐본 것처럼...하나같이 다 맘에 드는거다.
가만 있어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해시시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눈치 채고 이런 걸 보내준 것일까?
난 분명,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지 못할테지만 이런 그가 한없이 고맙다.

 

3.

 

 

 

 

 

 

 

 

 칼과 황홀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그런 의미에서 음식에 관한 얘기는 성석제가, 요리는 산당 임지호가 등장 했으면 좋겠다.

 

한때 성석제를 엄청 좋아했었다.

'이야기 박물지' 때도 느낀거지만, 잡다한 지식이 거의 만물박사 수준인데다가,
게다가 적당히 배부르고 술기운 오르면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맛깔나기도 하다.

 

그래서 '칼과 황홀'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그의 문장 벼리는 재주만큼 음식 벼리는 재주도 남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문장 벼리는 재주와 음식 먹는 재주는 몰라도 음식 벼리는 재주는 영 신통치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음식을 벼리는 '음식 철학'은 산당 임지호의 그것쯤이라야 겠다.

 

하긴, 음식을 먹는 재주도 옛날엔 별 볼 일 없었는지...돼지고기도 못먹는 채식주의자단다.
엄마가 해주시는 김치볶음밥을 아주 맛있게 먹던 그가,
김치볶음밥을 만드는데 돼지기름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을 하는데, 그게 내 어릴 때의 모습이랑 흡사하다.

그와 밥 한끼 같이 안먹어 본 내가,
그가 문장을 벼리는 재주만큼이나 음식을 먹는 재주도 남다를 거라고 미루어 짐작을 하게 한 문장은 다음 문장이다.

원하는 게 많던 시절이었으나 채워지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게 훨씬 더 많던 때였다. 그 냉면은 세끼 밥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정신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평양이나 함흥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비밀스러운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주인의 손맛과 기분에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그 냉면이 내 냉면 이력의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기껍다. 그 냉면이 뒤이어 내가 섭렵하게 되는 모든 냉면의 기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88쪽)

'의인화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고 하려다가,
나도 아스팔트가 벌러덩 일어나고, 전봇대가 내게 걸어와 입맞추었던 경험이 있는지라...글을 쓴 성석제와 내 욕구가 겹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나서 간신히 지하철역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지하철에 타자 더럽기 짝이 없는 전동차 바닥이 벌떡 일어나 그날 저녁 귀한 음식을 연속으로 먹은 내입에 제 입을 쩍 하고 맞추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깨보니 종착역도 아닌 차량기지였다. 차량 한 칸에 한두 명씩 나 같은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며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샛별을 바라보며 철로를 따라 걸어 나왔다. 자갈이 밟히며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에 이제 나도 어른이 되는 건가 싶었다.(115쪽)

그는 의인화로는 부족했는지, 이것저것 이름 붙여 중독자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난 라면이나 MSG는 좋아하지 않는고로 글루탐산중독자는 아닌 것 같고, 엔도르핀 중독자는 비껴갈 수 없겠다.
매운걸 먹으면 속뿐 아니라 얼굴까지 뒤집어지는데도, 가끔 매운 걸 의무적(?)으로 먹는다.

"아주 간단해. 이건 고추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 효과를 이용한 것뿐이야. 매운 걸 먹으면 땀이 나고 눈물 나고 재채기 나고 하면서 몸에 안 좋은 게 배출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되거든. 땀 흘리고 나면 시원하고 눈물 흘리면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은 거야. 매운맛은 맛이 아니고 통증이거든. 아프다고 하는 느낌이 뇌에 전달이 되면 안 아프게 천연 진총제 엔도르핀을 분비하게 되고 엔도르핀이 필요 이상으로 분비되면 기분이 그 전보다 좋아지게 되어 있다고. 매운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엔도르핀 중독자란 말이지."(178쪽)

암튼, 그의 문장을 벼리는 재주로 미루어 음식을 먹는 재주를 짐작할 수 있고, 음식을 먹는 재주를 짐작하는 것 만으로는 요리를 잘 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다음 문장으로 미루어 영혼을 벼리는 재주도 지녔을 것 같다.

들끓는 젊음은 해장국집에서 언제나 평온을 찾았다.ㆍㆍㆍㆍㆍㆍ시래기와 된장, 제철에 나는 채소들을 넣어 전날 밤부터 오래도록 끓여내는 해장국의 맛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들어가 편히 누울 수 있는 맛이다. (208쪽)

그를 보면서 음식과 관련한 취향은 식성을 가지고 얘기하는게 아니라,
인간과 삶의 근간을 이루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얘기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방랑식객
 SBS 스페셜 방랑식객 제작팀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식성에서, 아니 음식에 대한 취향에서 확장시켜,
음식에 대한 예의, 인간과 삶에 대한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으로는 임지호를 들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그 감이 떨어지면 고양이부터 개미까지 모두가 골고루 그 맛을 보았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햇볕과 바람이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감이었다.(40쪽)

 

까치밥으로 남겨 놓았던 감 하나에서 햇볕과 바람을 만들어내고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갯벌요리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을 거쳐 켜켜이 쌓여온 생명의 역사, 바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소금과 갯벌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를 맛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귀하다, 천하다 이름을 지어 생각의 벽을 만들어서 보니까 못 보는 것이다. 그 벽만 없애면 갯벌은 얼마든지 식재료로 쓸 수 있다. 우주의 별을 구성하는 성분과 내 몸을 이루는 성분이 같듯이, 갯벌을 이루는 성분도 내 몸을 이루는 성분과 같다. 그렇게 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59쪽)

소금에서 갯벌을 불러들이고, 갯벌에서 貴賤을 분별하고, 우주와 별들과 갯벌과 내 몸의 성분을 아우르는 것도 대단했으며,
산을 올라 산의 기운을 받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옮겨놓는 일을 한다고 하는 호기도 멋졌다.

 

ㆍㆍㆍㆍㆍㆍ산에 있으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겐 숲속이 놀이터이자 침대였다. 요즘도 생활에 지쳐 맥이 빠질 때 산에 오르면 힘이 솟는다. 방전된 힘이 충전되고 다시 아이처럼 생기발랄해진다. 그게 산, 자연이 주는 에너지다. 그렇게 산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나면, 그 좋은 기운을 마음에 실어와 다시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주곤 한다. 그러면 그이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어도 그 기운을 그대로 먹을 수 있다. 나는 자연을 옮겨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65쪽)

맛을 보지 않고 요리를 한다는 부분은,
환자가 하는 말과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라, 환자가 하는 말과 말 사이의 행간과 동작과 동작의 연결 부위 사이에서, 또는 미묘한 손 끝의 palpation만으로 환자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읽어내야 하는 상황을 닮았다.

"왜 맛을 보지 않고 요리를 하는 거요?"
"원래 맛의 수행은 맛보지 않고 하는 거예요."
기분에 의해, 몸의 상태에 따라 혀로 느끼는 맛은 기복이 심하다. 혀에 의존하지 않고 냄새와 색, 질감과 같은 다른 감각으로 맛을 보는 것 또한 훈련이다. 몰입할수록 맛보지 않고도 제 맛에 근접해간다. 수행하듯이 맛있다, 맛있다는 생각을 심으면 그 생각이 음식에 녹아든다.(95쪽)

 

신기하고 재밌어 보여 해보고 싶었던 레시피는 '낙엽소스, 낙엽차 만들기'이다.
하긴 기분이 우울할 때 은박 도시락에 낙엽을 모아놓고 태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커다란 통에 낙엽과 물을 넣은 다음 물의 양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끓인다. 끓인 낙엽 국물에서 낙엽을 걸러낸 다음 조선간장과 요리술을 넣고 끈적끈적한 소스가 될 때까지 오랫동안 조린다. 이 낙엽 소스를 나물 무칠 때나 떡이나 과자를 만들 때 쓰면 좋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맛이 위장을 편안하게 해준다. 나는 낙엽을 끓여 차를 마시기도 한다. 낙엽만으로 끓인 차는 가슴을 뻥 뚫어주면서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낙엽차만한 게 없다.(222쪽)

 

음식이 맛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음식에 담긴 마음이 있어서 더욱 감동적이고 맛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음식이 가진 사랑의 힘이고 치유의 힘이란다.(156쪽)
이것이 내가 식성을 취향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과 삶으로까지 확장시켜 넘나들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냅 둬, 이렇게 살다 죽게." 하는 자조인지...
"내버려 둬, 저렇게 살다 죽으라고..."하는 타성의 꾸짖는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취향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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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2 10:3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장,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인데,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권 다 땡기네요. 이래서 서재글들을 읽기가 무서운 겁니다. ㅎㅎ 마음 속으로 체크만 해 두고~
그 환자, 진짜 재밌어요. -순해지니까 오히려 재미없다는 양철님도 재밌구요.

2011-12-22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은 그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드러난 자취지요. 그린 이만 그런 게 아닙니다. 보는 이도 그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그립습니다. 그래서 공감합니다. 공감은 그린 이와 보는 이의 욕구가 겹칠 때 일어나는 작용이겠지요.(9쪽)


감상이란 공감이나 소통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글, 음악, 춤 그 밖에 사소하게 보이지만 마음을 담아내는 창작활동이라면 그림과 마찬가지 아닐까?
(자연의 이치나 과학적 언어로 얘기하는 글을 제외하고)
서로 그리운 거,
그래서 공감하는 거,
이건, 손철주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림을 그린 이와 보는 이의 욕구가 겹칠 때,
글을 쓴 이와 읽는 이의 욕구가 겹칠때,
노래를 부르는 이와 듣는 이의 욕구가 겹칠 때,
춤을 추는 이와 즐기는 이의 욕구가 겹칠 때,
서로 그리워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손철주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림, 글, 음악, 춤 그 밖의 창작활동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리움이 걷히고 욕구가 해소되는 게 아니라,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욕구가 겹치는 누군가를 만났을때,
서로 그리워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用, 女爲悅己者容)`는 말이 나온게 아닌가? 아님, 말고~ㅠ.ㅠ
암튼, 나는 내 리뷰나 페이퍼에 공감과 추천과 댓글을 남겨주는 이들 덕에...내 허름한 일상을 끄적거릴 수 있는거다.
그게 눈물나게 고마운거다, Thank you.

 

 

 

 

 

 

 

 

 다, 그림이다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다, 그림이다> 이 책은, 각기 다른 삶과 개성을 가진 이들에 의해서 씌여지다 보니,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갖고 있는데도,
글에서 느껴지는 공감과 욕구의 정도, 즉 몰입할 수 있는 정도가 달랐다.


한사람은 모두 비워내고 공허하게 웃고 넉넉하게 풀어낸다.
`색즉시공(色即是空)`과 `빙심(冰心)`을 넘나든다.


다른 한사람은 새침떨며 움켜쥐고는 어쩔 줄 몰라한다.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돈과, 아이와 남편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 독립된 방`을 얘기한 `버지니아 울프`를 예로 드는가 싶다가는,
그녀의 불우한 결론을 정당화시키지 못하고,
`영혼의 자유를 위해 사람들은 또 다른 구속을 끊임없이 선택합니다.`라며 얼버무리는 듯 하다가,
이내 `현실에서 보헤미안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하며 그 선택마저 다른 이에게 넘겨버리고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인용하는데,

누구라도 알 수 있지, 내게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쨌든 바람이 부니까요.

Anyone can see, nothing really matters to me. Anyway the wind blows.

 

내가 한마디만 하자면, anyone은 everyone이 아니라는 거다.


처음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너무 다르게 얘기해서,
내가 그 둘을 한꺼번에 감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을때는 버거웠었는데,
(감상은 공감이나 소통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는 위에서 얘기했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행인것 같다.
공감이나 소통이라는 건, 다시 말해 감상이라는 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둘의 것이 서로 일치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 둘의 것이 모범 답안이어서 우리의 것이 그것에 일치여부에 따라서 O나, X가 매겨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는데,
그게 어떤 이의 욕구와 마침 겹쳐 공감과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이의 욕구와는 어긋날 뿐인 것이다.
감상이란, 공감이나 소통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다.

 
먼저 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한사람은,
`전부를 볼 수 있는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눈과 다름없어요.`라고도 하고,

`삶인가 싶은데 죽음 같기도 하고, 이것인가 했는데 저것을 말하기도 하는 그림들에, 또 그러한 삶의 모습에 저의 눈길이 머뭅니다.`라고도 한다.
어찌보면 이건 경계 없음, 즉 초월이나 해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한 자의 그것은 혼돈에 다름 아니다.

 

다른 한사람은, `이인상`의 `와운`을 혹애한다며 예로 든다.
화가는 취필이라며 얼버무리는 그림에서,
비길 데 없는 생애의 고통을 읽어내고는,
슬픔을 노골화하지 않고 눌러담는 화가의 심정을 못내 애처롭고 아름다워 한다.
먹구름은 잔뜩 물방울을 머금고 있다가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햇살을 보려면, 먹구름을 참고 견뎌야 한다.
비장미(억눌러서 장한 아름다움)-이것이 그가 삶을, 그림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움이 되면 시선과 입장의 차이가 좀더 명확해진다.

한사람의 그리움은 기다림이 되고,
그게 깊어지면 怨이 되거나 恨이 된다.
원한, 원망으로 뭉친 그리움은 서글프고 안쓰럽다.
당연 가슴 설레는 그리움도 있고, 헛된 기다림도 있다.
모진 기다림 끝에 병을 앓기도 한다.

 

다른 한사람의 기다림은 가녀린 달빛이거나 야윈 달이다.
잡을 수 없는 꽃잎, 텅빈 풍경이기도 하다.

`트로이 전쟁`의 전설과 관련된 고흐의 `아몬드꽃`,
어느날 아침 신문에서 보았던 어느 부녀의 어릴 적 사진,
첫사랑을 찾으러다니는 영화 `김종욱 찾기` 등
설렘과 떨림과 오랜 기다림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하고,
더 이상 곁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애틋한 것들에 대해 얘기한다.

다시말해,
한사람의 그것들이 직접 몸으로 체험해보고 앓아본 사람의 그것이어서 쉽게 와 닿았다면,
다른 한사람의 그것들은 자신도 경험해본적 없어 책이나 신문이나 영화를 인용하는 간접 경험이다.

"끝까지 가면 뭐가 있는데요? 끝을 내지 않으면 좋은 느낌 그대로 두고두고 남잖아요. 그래야 마음이 놓여요." 언젠가는 빛바래질까 봐, 또 행여 끝이 보일까 봐 두려워서, 도저히 사랑을 지속할 용기가 없는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사랑하기를 멈추어요. 마치 벚꽃이 가장 찬란한 순간에 꽃잎을 모두 떨어뜨려 흔적더 없이 공중에 흩어 버리듯 말입니다. 시꺼멓게 시들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으려고 생살을 잘라내듯 아까운 꽃잎들을 바람에 내맡겨 버리는 것이지요. 더 이상의 머뭇거림은 상처가 될 지도 모르니까 떠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비겁한가요.(48쪽)

 

사랑과 마찬가지로 상처란건 직접 겪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도, 무뎌질 수 없음을 아마 모르나 보다.

 

유혹에서도 두사람의 입장은 차이가 난다.

한사람은 유혹을 치명적이나 너그럽고 또 슬픈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한사람은 아예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빗대어서 시작한다.
`가끔, 특히, 정말, 문득, 아주, 바로, 늘, 모든, 너무` 등의 부사를 남발하여,
(부사가 하는 일은 주로 용언을 수식하는거지, 주어를 수식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용언으로 표현되는 감정들이 아니라, 주어인 그를 과장되게 수식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나마 그 부사의 남발로도 감정 표현을 제대로 못했는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은 편지를 쓸 때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꽃이나 풀을 말려 편지지에 붙이곤 했는데, 편지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라도 집집마다 꽃말사전 하나쯤은 기본으로 있어야 했다`고 얼버무리는 겁쟁이다.
꽃보다는 과일이 좀 더 농염한 성적 유혹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고,
바쿠스의 포도주를 권하며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말고 본능대로, 감정가는대로 살라고 얘기는 하지만, 글쎄...
실천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말뿐이다.

 

성공과 좌절 부분부터 다른 한사람이 하는 얘기도 들리기 시작한다.
성공이나 좌절 같은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고서라도,
나도 넘어질 수도  있고, 또 넘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지 얼마되지 않았다.
성실함으로 답이 찾아지지 않는데도, 계속 성실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황은 또 다른 내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감상이 공감이나 소통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
공감이나 소통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 내면에 묻고 답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한사람은 자화상과 초상화를 보면 그 인물의 마음 밑바닥까지 짐작할 수 있다는 걸로 미루어,
자신 또한 내면의 밑바닥에 이미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한사람은 `아직 제 마음속의 자화상을 찾지 못했다`고 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얘기가 뜬구름 잡는 식이다.

나이 관련하여,
한사람은 사람의 한평생을 70쪽으로 나누고 앞 40쪽은 본문, 뒤 30쪽은 `주석`이라고 얘기한다.
이 부분에서 강윤후의 시 `불혹 혹은 부록`이 생각났다.
한사람은 나이 듦의 씁쓸함을 넘어 해학 또는 해탈을 얘기한다.
신선놀음쯤으로 승화시킨 것 같다.
다른 한사람은 노인의 탐욕과 추함을 앞에 내세운다.
이쯤되면 나이 듦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는 젊음과 나이듦,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대조를 통하여...
젊음의 발산과 늙음의 그냥 다 써버리고 모두 내어주는 순수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어찌 좀 억지스럽다.

 

일탈취미와 취향 묶어서 얘기할 수 있겠다.
옛사람의 일탈은 일탈이라기보다는 유머감각에 가까웠나 보다.
기껏해야 술을 빙자한 술탈 정도.

하지만, 예술이 일탈에서 태어난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는다.

고치기 힘든 취미를 `벽癖`이라고 하는데, 일탈의 연장선 상에서 얘기할 수 있겠다.
옛글을 보면 `아름다운 옥일수록 흠집이 많고, 뛰어난 사람일수록 벽이 많다`고 해서 이 벽을 기특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단다.  
중국의 문인 장대張岱는 이런 글도 남겼단다.

 `사람이 벽이 없으면 사귈 수 없다. 깊은 정이 없기에 그렇다. 사람이 흠이 없으면 사귈 수 없다. 참된 정이 없기에 그렇다.`  (207쪽)

그동안 벽이 있다거나  취향이 독특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공감하거나 소통하기 힘들다는 얘기처럼 들려서 좀 그랬는데...
이제는 옛글과 장대의 문장을 들이밀어야겠다, ㅋ~.

하루종일 주워담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을 하고 또 들어야 하지만, 그 말들은 어느 하나 내 안에 머물지 못하고 허공을 빙빙 맴돈다.
말은  하면서도 마음은 주고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춥고 등이 시려운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혹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혹시 내가 편견이나 원칙을 사람보다 앞에 두고, 의심과 이기심으로 소통을 방해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화가가 그려놓은 동그라미를 가지고,

"원이요."
"해님이요."
"無요."
"마음이요."
답도 없는 해석에 연연하여 소통을 방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김훈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젊은 날엔 말이 많았다.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구별되지 않았고 말과 삶을 분간하지 못했다.
 말하기의 어려움과
 말하기의 위태로움과
 말하기의 허망함을 알지 못했다.
 말이 되는 말과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언어의 외형적 질서에 하자가 없으면 다 말인줄 알았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강허달림 1집 - 기다림, 설레임
 강허달림 노래 /

 씨제이 이앤엠 (구 엠넷)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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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12-17 13:04   좋아요 0 | URL
두 사람의 수준이 좀 비슷했다면 더 감동을 얻을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었죠.
그래도 선물받은 책이었어서, 설레어 가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

숲노래 2011-12-17 16:28   좋아요 0 | URL
내가 좋아하는 대로 그림을 좋아할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해요.

누구든 내 삶에 따라
그림을 읽을 테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그림을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2011-12-17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dsky 2011-12-18 15:51   좋아요 0 | URL
처음엔 상당히 흥미롭게 봤었죠. 특히 글의 구조쪽 측면에서요. 하지만 갈 수록 뭔가 두분의 글이 안맞아 간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쉽게말하면 동문서답같은.. 그래도 뭐 괜찮은 책이었던듯..

비로그인 2011-12-18 22:40   좋아요 0 | URL
아..저도 이책 읽었는데..다시 새록 새록 생각이 나는구요.. 잘봤어요 ^^

마녀고양이 2011-12-19 17:55   좋아요 0 | URL
말과 삶이 구별되지 않았다는, 김훈님의 글이 더 와닿네...

자기의 리뷰를 볼 때, 나도 자기랑 똑같이 느끼지 싶네, 한분은 맘에 와닿고 한분은 허공에 날리고, 머 그런.
고로............ 나는 안 읽겠다눈... ㅋ
아, 춥다 추워. 넘 춥다... 글치,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고 치료해야한다는 문구의 말, 난 참 좋아. 그렇게 살고싶어.
 

 














이 책은 나랑 책 읽는 취향이 거의 비슷한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보고 혹하여 주문하였다.
책의 앞표지엔 `주기율표에 얽힌 광기와 사랑, 그리고 세계사`라는 문구가,
책의 뒷표지엔 `올리버 색스의 풍부한 일화와 말콤 글래드웰의 대중성을 갖췄다.`라는 문구가 유혹적으로 박혀 있었다.
`주기율표`라는 문구에서 `프리모 레비`를 떠올렸고,
`올리버 색스`라는 이름에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편두통`의 자상한 예제를,
`말콤 글래드웰`에서 `1만시간의 법칙`을 얘기했던 그 필력을 기대했었나 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기대에 한참 못 미쳤으나 재미없는 책은 아니었다.
난, 프리모 레비를 알고 좋아했던 터라 `주기율표`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그의 책 `주기율표`에서 21가지 원소들을 삶에 대입시켜 회상하고 어루만지고 가다듬어,
화학적 연금술사 마냥 반짝이는 문장으로 만들어냈던 게 기억났었을 뿐이다, 아웅~ㅠ.ㅠ

암튼, 이 책 `사라진 스푼`의 저자 `샘 킨`은 어떻게 보면 `프리모 레비`를 닮았다.
`프리모 레비`가 화학자이면서 글을 썼듯이, 물리학도이면서 글을 쓰겠다는 열정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의 그것이 아무리 반짝거리더라도, 프리모 레비의 그것처럼 두루 골고루 넉넉하며 적당한 온기까지 갖고 비추지는 못했다.

`사라진 스푼`의  재료가 되는 원소는 `갈륨`이다.
갈륨은 실온에서는 고체지만 29.`C에서 녹기 때문에, 화학 전문가들이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고 싶을 때 선호하는 물질이란다.
갈륨으로 찻숟가락을 만들어 내놓고는, 찻잔에 담근 찻숟가락이 사라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실은, 갈륨이라는 원소를 나는 다른 의미로 알고 있었다.
갈륨 결핍이 뇌암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를 어디서 보았었다.
이것은 운동을 과다하게 열심히 하는 것은 뇌암을 예방하기는 커녕 위험도를 높인다는 얘기이다.
그 이유로 땀을 흘릴때 60여 가지의 필수 미네랄을 모두 함께 내보내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80년 동안 흘릴 땀을 운동 선수들은 30년만에 다 흘려 버린다.
이때 갈륨만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셀레늄이나 기타 다른 미네랄도 함께 내보내게 된다.
요즘 나오는 영양제 중 발빠른 몇몇 실버 제품들은, 이렇게 부족하기 쉬운 미네랄을 보충해주고 있다.
 
얼마전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을때 눈물이 나고 살이 찢어질 듯 아팠던게 생각이 났다.
이 책엔, 최루액의 성분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던 내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듯 자세히 나와 있었다.
처음 브롬(브롬민)으로 시작한 이 최루가스는 프리츠 하버에 이르러 질소를 이용하게 된다.
질소를 암모니아로 만들게 되면서,
퇴비 대신 인공 비료의 선구자가 되어  세계 인구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공이지만, 
독가스, 질소 폭발물 등을 만들어 위력적인 살상무기로 만든것도 바로 그 `프리츠 하버`이다.
결국 그는 질소로 암모니아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 수십만 명을 살상케하고 수백만 명을 공포로 몰아넣은, 화학전을 주도한 혐의로 국제전범으로 기소되기도 했었다.

그런 `질소`를 프리모 레비는 `주기율표`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여인의 입술을 치장하게 될 알록산이 닭이나 뱀의 분비물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화학자라는 직업은 불필요하거나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은 혐오감들을 극복하라고, 아니 무시해버리라고 가르친다(내 경우 이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으로 더욱 굳건해졌다). 재료는 재료일 뿐, 귀할 것도 불쾌감을 줄 것도 없으며, 무한한 변형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그것의 처음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질소는 질소다. 그것은 공기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우리 인간에게로 기적적일 정도로 순환된다. 우리 몸속에서 질소가 그 기능을 다하면 우리는 그것을 배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질소는 무균상태로 무해하게 남아 있다.

1981년 NASA에서 우주선 모의실험을 하던 기술자들이 질소에 질식사를 하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질소에 의한 질식사가 보고 되고 있다.
이걸 프리모 레비가 알게 되었더라도 `무해하게 남아있다`고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 모든 유해함을 뒤로 하고 질소는 우리생활의 곳곳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웃음가스라고도 불리우는 `이산화질소`는 `마취제`로,
이산화질소는 강력한 산화제와 로켓연료로,  
질소 기체는 식품의 선도 유지 - 과자봉지의 충전제로,
액체 질소(-196℃)는 식품의 냉동제와 시료의 동결 보관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원소가 있는데, 그게 `베릴륨`이다.
베릴륨은 설탕맛이 나서 `미각을 속이는 원소`라고 불리운다.
나는 베릴륨을 스피커의 떨림판이나, 방진 마스크에 사용되는 재료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치과 크라운으로 한때 사용되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설탕맛이 나면 오히려 좋을텐데 왜 지금은 사용되지 않을까 궁금하던 차에,
베릴륨 가루에 노출되면 폐질환이 치명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치과 크라운 뿐만 아니라 고급 스피커의 떨림판과 방진 마스크 용도로 다 사용 금지되어야 하겠다.

하숙집에서 음식을 재활용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방사성 납을 살포했다가, 이튿날 `굴라쉬`라는 수프에 방사능 탐지기를 갖다대본 기지도 재미있다.


납이야말로 죽음의 금속으로 제격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납은 죽음을 가져다주고, 그 무거운 성질은 추락하려 함인데 추락은 바로 죽은 자가 하는 것이고, 그 색깔도 핏기 없는 죽음의 색이며, 이 모든 것은 납이 행성들 중에서 가장 느린 죽음의 행성인 `투이스토`의 금속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ㆍㆍㆍㆍㆍㆍ
암튼 주기율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방사성원소처럼 지극히 정치적 잇속이 개입되어 있는 원소들도 있고,
돈으로 쓰이는 지독히 자본주의적인 원소들도 있다.
돈과 얽힌 원소들이 더 오래되고 긴밀한 것 같다.

과학에서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주기율표에서 발견하는 대칭성과 반복성에 환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기율표의 아름다움에는 추상적인 것만 있는게 아니란단다.
예술적인 원소들은 온갖 형태로 변장하여 예술에도 영감을 준다.
금과 은과 백금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우며,
카드뮴이나 비스무트 같은 원소는 물감의 안료로 나타난다.
새로운 원소 합금으로 강도나 유연성을 높임으로서 디자인을 기능적인 것에서 경이로운 것으로 변화시킨 예로 휴대용 라이터, 만년필, 타자기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리튬처럼 다른 의미로 예술적인 영향을 미친 원소들도 있다.

리튬은 뇌에서 기분을 변화시키는 많은 화학 물질에 영향을 미치며, 그 효과는 복잡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리튬이 신체의 일주기 리듬, 즉 생체 시계를 재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리튬을 복용하게 되면 활력을 잃거나 마음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고 얘기한다.
다시말해, 리튬은 예술가에게 건강을 준 대신 예술을 위축시킨다.
광기 어린 천재를 평범한 인간으로 만드는 원소인지도 모르겠다.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예술을 위축시키는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강'이라고 보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 탄소 ;
탄소가 우리들 속에 들어 있다.

이리저리 이동하다가 신경세포의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세포의 일부분인 또 다른 탄소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 세포는 뇌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뇌,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뇌다. 문제가 된 세포, 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문제의 원자는, 아무도 묘사하지 않았던 엄청나게 섬세한 놀이인 내 글쓰기에 속해 있다. 지금 이 순간 미궁처럼 목잡한 줄거리를 벗어나 내 손으로 하여금 종이 위의 어떤 여정을 따라 달려가며 기호들의 소용돌이를 그리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세포다: 위로, 아래로, 두 차원의 에너지 사이로 이중 도약을 한 이 세포는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


* 아연 ;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충동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 인 ; 인은 감정적으로 중성이 될 수 없었다.

* 금 ;
그것의 토대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다른 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배를 불리고, 생각할 줄 알고 파시즘에 굴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었고, 체계적이고 계산적인 거짓말이었다.

* 바나듐 ;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게 아니다.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덜 정돈되어 있으며, 더 거칠고 덜 원만하다. 그것이 같은 차원에 놓여 있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암튼 똑같은 주기율표에서 출발하지만,
프리모 레비의 그것이 자신이 경험했던 비극의 역사가 세상을 향한 외침이 되도록,
자신의 인생을 관통했던 사건들을 원소와 더불어 끄집어 냈다면,
샘 킨의 이 책 `사라진 스푼`은,
프리모 레비 이후로도 발견되고 발전되어온 주기율표의 빈칸을 채워가는 현대과학의 나머지 이야기들을 수다스럽게 들려주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그것이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한다면,
샘 킨의 그것은 무한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미래를 꿈꾸며 열려 있다.
우리가 간과한 칸을 찾아보는 정도를 지나서, 주기율표의 한계를 벗어나는 확장에 대해서도 얘기하다.
그러면서 주기율표의 변화를 주어 류트처럼 생긴 것, 프레첼처럼 생긴 것, 피라미드처럼 생긴 것, 뫼비우스의 띠 모양 등을 애기하고 있다.
세상에나~!
삼차원 팝업 주기율표도 얘기한다.

암튼, 과학은 인간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주기 의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모 레비가 되었건 샘 킨이 되었건 간에, 풍요와 편리를 앞세우다가 `인간`이 간과되어서는 안되겠다.

난 아무래도 미래를 내다보기 보다는 과거에 연연해 하는 사람인가 보다.
프리모 레비의 이런 표현들을 아직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을에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냄새가 난다. 낙엽, 휴식하는 대지, 불타는 나뭇가지 더미, 즉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끝나가는 것들에게서 나는 냄새 말이다" 
하늘에서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 아침, 쌓이기도 전에 녹는 눈을 보며 무슨 청승인가 모르겠다.

오래전 나에게 프리모 레비를 권했던 그대여,
그러니 내가 그 책을 거절했다고 하여 그대의 마음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음을 이쯤에서 충분히 알아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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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12-09 11:44   좋아요 0 | URL

 

 


pjy 2011-12-09 14:40   좋아요 0 | URL
오~~~~~~홋, 한참 내용을 읽고, 알고보는대로 완젼 신기합니다^^

마녀고양이 2011-12-09 12:56   좋아요 0 | URL
헉, 이 책 기대에 못 미쳐?
그런데 리뷰는 왜이리 유혹적이야? 아우, 이거 읽으려고 사놨는데 먼저 읽었군... 에휴휴.
난 언제쯤 책을 읽을건지, 지금은 페인트칠이나 잘 해야징, 끙.

2011-12-09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1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4 00:17   좋아요 0 | URL
흠. 이 책과 함께 `그대의 마음`은 양철님에게 머물러 있군요.
+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매력적입니다.
 

한미 FTA 관련, 외교통상교섭부는 트윗을 통해 6일 "한미FTA 의료 민영화를 경제자유구역에는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약값 상승, 영리병원 허용 문제, 의료민영화에 따른 의료비 상승 문제 등이 괴담 수준을 넘어 걱정과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제 음식물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던 원시 공동체 사회처럼, 아픈 몸도 스스로 돌보아야 하는 시대가 오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본다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선조가 허준에게 명하여 짓게한 의서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보통 작가나 책이 너무 좋으면 아프지마라, 병들지마라 염원하게 된다.
하지만, 고미숙의 이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다 읽고난 지금...이분이 아프셨던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셨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실 수 있으셨을테고,
그러다보니 고전평론가답게 '동의보감'에 관심을 갖게 되셨을테고,
그래서 '리라이팅 클래식015-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멋진 책이 탄생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그동안 고미숙님의 책은 제법 챙겨서 읽었다.
요번 책은 '의학적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의학서가 아니라 인문학적 관점에서 읽는다'는 전제가 달린다면,
이분의 것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문학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책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읽으면 인문학책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동의보감'은 판형과 해제를 달리하여 참 여러번 읽었었다. 아니, 외웠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번 보면서도...동의보감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겠다는 생각은 고미숙님의 이 책'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다시 말해, 무작정 외웠을 때는 참 어렵기만 한 책이었어서...
'동의보감'의 원래 취지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쓰여진 것 같지 않아, 섣불리 누구에게 권할 수 있을 것 같지않았는데,
인문학 책이다 생각하고 고미숙 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니,
어느 순간 문리가 트인 듯...다양한 관점에서 여러가지 것들이 보여 참 쉽고도 재밌어서 누구에게든 침튀기며 권할 수 있겠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임금 선조도 백성을 사랑하사...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도록 '동의보감'같은 의서를 편찬하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의 2MB께서는  한미 FTA 비준안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의료민영화를 가속화하여, 돈 없는 국민들이 어쩔 수 없이 아픈 몸을 스스로 돌보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하는 꼴이니 아이러니컬하기 그지없다.

처음 접근하기까지의 장벽이 두터워서 그렇지, 일단 접근하고 나면 책이 술술 읽힌다.
그 옛날, 의학이란 것이 '누구든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지침서여야 한다'는 깨어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이지만 말이다. 
선각자 허준은 "고인들이 처방에 넣은 약재의 양과 수가 너무 많으니 가난한 집에서 어찌 이것을 감당하겠습니까?"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약의 양과 수는 대폭 줄이고 약효는 최대로 끌어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콩나물, 도라지, 파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물을 약재로 활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 중국,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친 동의보감이지만, 실상 그 시대엔 일반백성에게까지 파급력이 미치지 못했나보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연암 박지원의 경우 은 닷냥이 없어 이 책을 사지못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동의보감을 얘기할때 '삼교회통三敎會通'이니, '동양의학사의 방대한 산맥'이니 따위의 말들을 하지만...
그건 의학적 접근을 할때나 필요한 부분이고, 고미숙님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하였다. 

그 당시 의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의서라서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았다.
이 얘긴 바꾸어하면, 중국의 질병엔 중국의 약재를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실정에 맞는 것이고,
우리의 질병엔 이땅의 약재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에 맞는다는 것이리라. 

이땅에서 지지고 볶고 몸 보대껴 살아가는 우리에겐,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땅의 자연과 풍광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농수축산물이 우리의 실정과 섭생에 잘 맞을 것이다.

made in USA 농수축산물을 먹고 병이 걸리면, 경제자유구역 안에 있는 made in USA 의사에게, made in USA 약을 지어 먹고 나야하는 것인가?
그럼 국적은 USA인가 KOREA인가? 

암튼, 이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읽는다는 건...
'아픈 몸을 스스로 돌본다'에서 '아픈'이 아니라 '스스로'에 무게가 실리는 것 일게고,
스스로 돌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끄러미 객관화시키고 타자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것 일게다.
타자화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얘기 일게다.

* 사람들은 보통 두려움의 대상이 외부에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 두려움의 원천은 어디까지나 자신이다. 약간만 마음에 틈이 생기면 순식간에 이기심과 사악함이 침투하여 온갖 망상을 짓고 그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물어뜯어 버리기 때문이다. 고로, 경계하고 경계해야 마땅하다.(97쪽) 
* 색에 빠진 자가 잃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성은 금기의 대상이 아니라 쾌락의 활용과 관련된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양생술이란 특정 질병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포괄할뿐더러, 외부적으로 주입되는 의술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삶의 기술'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소통의 지혜이자 자기배려로서의 기술인 것.(139쪽)
* 그런데 타자는 바깥에만 있지 않다. 내 안에도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다.(182쪽) 

이런 알쏭달쏭한 얘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 자연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지 않지도 않다. 자연은 본원적으로 미추의 경계를 떠나 있다. 봄에는 살리지만 가을에는 죽인다. 여기에는 가차가 없다.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 자연에 있어서는 죽임과 살림이 다르지 않다.(123쪽)
* 잘 산다는 건 아플때 제대로 아프고 죽어야 할때 제대로 죽는것, 그 과정들의 무수한 변주에 불과하다.(430쪽) 

알쏭달쏭한 얘기의 정점은, 선과 악의 개념을 얘기할때이다.
선과 악이 적대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언제든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전화할 수 있단다.
선과 악은 '기의 분배'를 가지고 나누는데...가볍고 맑은 것이 선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이 악이 된다.
잘 통하면 선이고, 꽉 막히면 악이다.
막히면 집착에 빠지고 통하면 사방과 연결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의 분배, 기의 순환이라고 했을때는 좀 어려운 것 같지만...
'기'의 자리에 눈에 보이는 '돈'을 대입시켜 보면 한결 이해가 쉽다.
하지만, 이런 얘기의 최종 단계는 당연히 '마음'의 순환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마음'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순환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

여기서 가지를 뻗어나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이다.
사실상, 모든 병원에서는 사람들을 아프지 않은 상태(不痛)-태과와 불급의 중간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에만 집중할 뿐...
그 이상에는 관심이 없다.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아프지 않으려고'가 아니라 '나으려고' 병원에 간다고 얘기하지만,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건, 근본치료(원인치료)라기 보다 대증치료(증상치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 무릇 의사란 '신명과 통하고 조화를 부려 요절할 사람을 장수하게 할 수 있고 장수할 사람은 신선이 되게'해야 한다.(137쪽)
* 죽어야 할 때 잘 죽게 하는 것도 의사의 소임이다. (300쪽) 

이런 알쏭달쏭한 얘기를 한가지 더 하자면, 꿈은 사라져야 한다. 

꿈은 아름답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꾸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라.
You can do it! 
Boys, be ambitious!

이때 꿈이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할 것이다.
지금 현재의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내가 도달하거나 이루어야 할 목표를 바라보는 것인데...
꿈을 이루지 못하면 자기비하가 커질 것이고,
꿈을 이루면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것이다.
결국 현재를 충실히 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옛 진인들은 잘 때 꿈을 꾸지 않았다. 잘 때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신(神)이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행이 높아지면 자면서도 깨어 있게 되는데, 이 말은 불면증이라는 뜻이 아니라 잠을 잘 때도 무의식이 청정하게 살아 있어서 일체 망상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좋은 꿈과 나쁜 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은 그 자체로 몸과 마음의 병리적 표현인 셈이다. 따라서 건강하고 청정한 삶을 위해서 꿈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생리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표상의 단위에서도 그러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희망이란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그것으로 인해 현재가 망각될 때 희망은 비전이 아니라 망각이 된다. 그럴 경우, 점차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그 희망 때문에 삶이 추락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일찍이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루쉰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희망은 허망하다, 절망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므로 희망에 대한 집착이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면 그런 꿈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지나간 것에 매달려서도 안 되지만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당장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박노해) 우리가 대체 이토록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다. 꿈을 꾸지 않는 잠이 가장 건강하다는 건 그런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의학적 지혜다.(192쪽) 

하지만, 난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갖지 말라고는 못하겠다.
꿈을 꿀 수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때론 절벽 끝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ㅠ.ㅠ 

'꿈'과 더불어 내가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버거워하는 건, '이미 익숙해진 것들과의 작별'이다.

우리의 몸 또한 마찬가지다. 건강의 지표는 식스팩이나 롱다리가 아니다. 가장 먼저 소화가 잘 되는가? 그리고 똥오줌이 잘나오고 있는가? 그리고 이미 익숙해진 것들과의 작별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는가? 핵심은 거기에 있다. 어디 생리현상만 그러하랴. 인생살이 또한 마주침과 결별의 끊임없는 연속이 아니던가. 낯선 존재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시에 익숙해졌을 때 기꺼이 결별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 이떤 잉여도 남기지 않을 때 '지금, 여기'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똥오줌을 비롯한 내 안의 타자들이 전해주는 메세지다.(219쪽)

한미 FTA 의료 민영화 관련, 고미숙님도 상당히 걱정스러웠나 보다.
이런 재치있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좋은 병원이란 명의가 있는 곳이 아니라, 첨단의 장비를 갖춘 곳을 지칭한다. 이 장비의 천문학적 비용을 감당하려면 검진과 수술을 일상화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환자의 몸을 보는 궁극적 척도는 '자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검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예전에 대책없이 무당을 찾아가던 때랑 비교해도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다. '많이, 비싸게, 자주'할수록 건강해질 거라는 믿음. 우리시대가 앓고 있는 새로운 미신이다.(300쪽)

* 덤으로 일상에서 간과하기 쉬운, 소리를 잘 다스리기 위한 생활규칙 몇 가지.
1. 해가 진 뒤에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2. 식사할 때는 말하지 말 것.
3. 누운 채로 크게 말하면 안 된다.
4. 길을 걸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말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멈춰선 후 말을 해야 한다.

* 언급된 책 중 좋았던 책

 

 

 

 

* 언제부턴가 박노해는 읽지 않았는데, 박노해가 계속 언급된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고...그냥 싫다~ㅠ.ㅠ
 '발바닥 사랑'이라는 시는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마라라>시집 속에 있나 보다.
 
* 이한철의 '안아주세요'라는 곡이 언급되었는데, 난 10cm의 '안아워요' 이곡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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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12-01 18:29   좋아요 0 | URL

잘잘라 2011-12-01 18:51   좋아요 0 | URL
예전에 대책없이 무당을 찾아가던 때랑 비교해도 훨씬 더 심각한 수준.. 동감. 의료 민영화 하면 그나마 '좋은 의사' 더 만나기 어려워지겠죠? 음.. 오랜만에 페이퍼, 저도 사서 쟁여둔 책이라 반가웠는데, FTA.. 의료민영화.. 갑갑~하네요. ㅠㅠ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blanca 2011-12-01 22:59   좋아요 0 | URL
이 책 몇 번이나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빼곤 했는데 양철나무꾼님의 글을 읽으니 결국 읽어야 겠네요. 고미숙씨의 책을 읽어보지 못해서 망설였거든요. "죽어야 할 때 잘 죽게 하는 것도 의사의 소임이다" 참 와닿아요. 요새는 이것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2011-12-02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12-02 10:20   좋아요 0 | URL
원래 이 나라가 '각자도생'의 정책을 펴는 나라지만,
의료 하나는 탄탄하다고 하던데, 이제 그게 무너지면 돈없으면 죽는 시대가 오겠군요.
보험 탄탄하게 들지 못하면 병원 문앞을 전전하다 죽는다는 뉴스를 듣는 시대가...
그게 내 일이 될 수도 있고요...

Shining 2011-12-02 17:34   좋아요 0 | URL
똑부러진 말투와 적확한 표현, 매력적인 책에 대한 매력있는 소개.
좋은 리뷰,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란 걸 문득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한 자 한 자, 공들여서 또박또박 잘 읽고 갑니다.
고마워요 양철나무꾼 님. 이런 글을 써주셔서, 읽게 해주셔서요-_-*

숲노래 2011-12-03 00:09   좋아요 0 | URL
병원이 병을 고치지는 않잖아요.
밥을 내가 내 몸에 맞추어 장만하고 차려서 먹듯
병도 내가 내 몸을 살피어 알맞게 다스려야 맞아요.

요리사나 영양사가 시키거나 가르쳐야
밥을 차릴 수 있지 않아요.
의사나 약사가 가르치거나 시켜야
내 병을 내가 알아채지는 않는답니다.

무얼 먹고 무얼 입으며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내 몸이 아픈지 튼튼한지 달라져요.

프레이야 2011-12-03 21:35   좋아요 0 | URL
고미숙님의 이 책 장바구니로 담아가요.^^
 

아침 손석희를 듣는데, 기상 캐스터가 첫눈이 내렸다고 전한다.
일순간 '아웅~'하면서 김이 빠졌다.
나이를 먹었어도 첫눈을 기다리는 설레임은 이맘때쯤 여자들의 로망 아닌가 말이다.
그때 손석희가 툭 한마디 던졌다.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흑~멋지다, 손석희~!^^

아직 첫눈 오는 날 들어 줄 음악도 듣지 않았는데 말이다. 



 "형은 혹시 형 안에 무언가 잃어버린 게 있다고 느껴본 적 있어?" 동생이 말했다. "그게 뭔지는 몰라. 공처럼, 또는 돌덩이처럼, 쇠붙이일 수도 있고 솜이나 풀, 그런 거일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내 안에 있는 거야. 불이나 분노 같은 건 아니야. 그냥 커다란 공이야. 그리고 도저히 그걸 찾을 수가 없는 거야." 동생은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슴 왼편을 두드렸다. "여기 있어. 바로 여기."

언젠가 이 책을 읽다가 '찌리릿' 전류에 감전되는 듯 했었다.
내 안에 늘 자리하던 감정이었지만 언어화 할 수 없어 표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 사람은 마치 내 안에 들어왔었던 것처럼 그려내듯이 표현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이런 구절은 처음 읽을 때부터 거슬렸다.

"고통스럽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고통은 주는 거지, 받는 게 아니거든." 

한번 좋아하거나 내 안에 들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찌리릿 한 책에 등장하는, 찌리릿 날 감전시킨 주인공이 하는 말이니까...왠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어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움란,
몸의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통각수용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걸 요즘의 내 일상에 대입시켜 보자면, 고통을 티끌로 주고 태산으로 받는 격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좀 무덤덤해지거나 무뎌질 필요가 있겠다 싶었고...
그래서 되지도 않는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모든 비밀을 안다고 생각하면 모든 치유법도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코리건이 헤로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다지 크게 놀랍지 않았다. 동생은 항상 그들이 했던 것을 최소한은 하곤 했으니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고집스러운 주문이었다. 동생은 자신이 땅을 디디며 걷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발걸음 소리를 듣고자 했다. 거기서 도망치는 일은 없었다. 더블린에서도 그랬었다. 그 무모함이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하긴 했지만, 그는 그가 떠난 현실 세계의 좁은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동생은 약에 취하지는 않고 그저 그들과 수준을 맞추는 정도인 것 같았다. 동생은 고통과 친숙했다.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면 고통을 받아들였다. 동생이 헤로인을 맞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같은 공포 속에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75쪽) 

이 책의 고통 이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실은,
이  책의 동생 코리건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순간...현실에서 또 한명의 코리건을 순순히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엊그제 일요일.
남편은 자기 동생, 즉 서방님의 '안수 집사 취임식'이 있으니 온가족이 가서 축하해 주자고 했는데...싫다고 하였다.
미리 초대받지 못한데다가,
그 안수 집사라는 것이 되기 위하여 무리한 헌금으로 살림이 쪼들려 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서방님의 그 종교라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거기엔 거만함이 있었다. 그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을 탈때 거만함은 생존이 된다. 그때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는 때로 자기가 스스로를 미워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발을 없애 버려. 이 발가락도. 이 장딴지도. 움직임이 없는 곳을 찾아. 그가 이러는 것의 대부분은 잊어버림이라는 오랜 치유에서 연유한다. 자신에게 익명의 사람이 되는 것, 자신의 육신이 자신을 흡수해 버리는 것. 하지만 중복되는 현실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동시에 그의 마음이 그의 육체가 편안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마치 바람과 섹스를 하는 것 같았다. 복잡하게 엉켰다가 기쁨에 들뜨게 한 후 가만히 떨어져 나가 다시 그의 주변에서 부드럽게 맴돈다. 줄은 아픔이기도 하다. 아픔이 늘 거기 있으면서 그의 발을 파고든다. 장대의 무게, 바짝 마른 목 안, 욱신거리는 팔, 하지만 그 아픔이 사라져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을 때 그것은 환희였다. 그의 호흡 역시 그랬다. 그는 그의 숨결이 줄로 들어가 그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라지는 이 감각. 모든 신경이. 모든 피부 층이. 그는 타워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논리가 풀려났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지점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의 몸은 그 바람을 몇 년 앞당겨 미리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409쪽)


덩그러니 혼자 남아, 어떻게 해야 서방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리 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방님의 그 종교라는 것이 육체의 고통 쯤은 극복할 수 있게 하는 runner's high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책의 '애.정.남'은 그걸 '종교'가 아닌 '결혼'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휴우~=3=3=3
 
나는 잠시 후 클레어의 남편이 다시 그녀와 함께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잠시 있은 것만으로도 그가 누그러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런 것이 결혼인지도, 결혼이었는지도, 또는 결혼일지도 모르겠다. 가면을 벗게 만드는 것. 피곤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것. 몸을 기울여 함께한 세월에 입 맞추는 것, 그 세월들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것이기에.(538쪽) 


그동안 종교 서적을 많이 읽지는 않았어도...전혀 안 읽은 건 아니었다.
당장 생각 나는 것만 옮겨 보자면,
김규항의 <예수전>
이현주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예수의 죽음><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오강남의 <장자><도덕경><예수는 없다><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등이 있다.

내가 읽은 어느 책에서도 무리한 헌금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럼,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건가 싶어 택한 책이 '오강남'의 <종교, 심층을 보다>이다. 
이 책에서 '애.정.남'은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정리한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종교에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가 있단다.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은 종교가 달라도 서로 통하기 때문에 상대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단다.
표층 종교, 심층 종교의 구별을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타인 중심주의,신 중심주의로 넘어가는 깨달음으로 표현했다.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심층 종교의 그것으로 봤다.
그렇다면 표층종교,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논리로, 지극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내가 불안하여 들추게 된 책이 '알랭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이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무신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역시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그는 책에서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여전히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랑, 믿음, 관용, 절제 등 종교의 미덕을 배우고 실천하자고 제안한다.
'최근 서구사회에 공격적인 무신론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 책은 공격적 무신론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며 '완전한 무신론에서 종교를 존중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개인적 여정을 담은 책'이라고 말한다. 

암튼, '애.정.남'을 빌려 몇가지 정리해 보자면...
첫눈은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누구는 종교의 힘으로, 누구는 결혼의 힘으로 극복한다.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아직은'긍적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등이다.

 

 

 

 

 

 

 

 누구는 종교의 힘으로, 누구는 결혼의 힘으로 극복하는...그 '고통을 극복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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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22 15:02   좋아요 0 | URL
아, 세종대왕, 옥동자, 엽기토끼, 애정남. ^^

양철나무꾼 2011-11-22 17:18   좋아요 0 | URL
ㅎ,ㅎ...애매한 것을 정리해 주는 남자(일명 애정남)이기도 하고 진짜 애정남이기도 하네.
눈이 작은데...웃으면 더 작아져서 진짜 '마시마로'로 불리웠을 것 같지?
엽기토끼로 불리우면 심통낸다니까, ㅋ~.

아이리시스 2011-11-22 16:44   좋아요 0 | URL
눈왔구나.. 여기선 딴 세상 얘기. ^^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가 저 선에 있는 이야기인 줄은 몰랐어요.
김규항의 [예수전] 읽어보고 싶어요, 오래전부터.
아아, 진짜 제 게으름은 으뜸이거든요. 이래놓고 한 5년 있어야 읽을 거예요, 아마도.

양철나무꾼 2011-11-22 17:21   좋아요 0 | URL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를 저 선에 밀어넣은 사람은 저예요.
하지만 저 선에 있을 자격있어요, 훌륭한 책이예요.
안 읽었음 꼭! 꼭! 꼭! 읽어 보세요.
제가 보내 드려요? 김규항 예수전이랑 같이.
사는 곳이 부산이었던가요?^^

아이리시스 2011-11-22 22:27   좋아요 0 | URL
네, 여기 부산.
광안리 옆동네.

아, 그러면 저 아이가 영재 아니, 천재 소년인가요?
안 적혀있어서 제가 센스가 없었죠?ㅋㅋㅋ
음, 선물은 제가 보내고 싶어요.ㅜㅜ

2011-11-24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11-22 17:48   좋아요 0 | URL
애정남, 그거 요새 무지하게 재미나던걸요.
나무꾼님 밝게 돌아오신 것 같아 기분 좋아요.
다행이에요. 잘 나으신거죠? 와락~

양철나무꾼 2011-11-24 02:14   좋아요 0 | URL
애정남, 그쵸, 재밌죠~?^^
네, 덕분에요~
근데, 다시 감기가...쿨럭~ㅠ.ㅠ

이진 2011-11-22 17:53   좋아요 0 | URL
우와 역시 손석희 교수님입니다ㅠㅠㅠ 쌓이지 않았기에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너무도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하, 종교관련 서적도 많이 읽으셨군요... 저도 아이리시스님 못지않은 게으름으로... 언제 인문쪽을 읽을수나 있을까요 ㅋㅋㅋ

양철나무꾼 2011-11-24 02:1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정말로 중3이시라면...게으른게 아니시죠~
울 아들도 중3인데...울 아들 소이진님이 읽는 책들, 쓰는 글의 1/10도 못 따라 간다는~ㅠ.ㅠ

전호인 2011-11-22 19:05   좋아요 0 | URL
접힐내용은 "훈남의 포스"로 합쬬.ㅋㅋ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결국 추구하는 가치는 자비, 사랑, 仁(덕으로 합시다) 등으로 상대에 대한 베품입니다.
베풀기 위한 수행이고 깨달음이죠. 그런데 대부분은 나와 나의 주변인물이 잘되기 위한 수단에 국한되잖아요. 그것이 욕심을 생성하게 되고 상대 종교를 공격하거나 배척할 이유가 없음인데도 그렇게 하게 되는 듯 해요. 버리고 지우고 비워서 맑음을 채우다보면 깨달음에 도달되겠죠? 그 넘의 욕심, 떽끼.ㅋㅋ

양철나무꾼 2011-11-24 02:20   좋아요 0 | URL
ㅎ,ㅎ...댓글 내용이 넘 심오하여 못 알아먹겠고요~
'그 넘의 욕심, 떽끼.ㅋㅋ'만 눈에 들어와요.

전호인님, 도인하세요~^^

무스탕 2011-11-22 20:47   좋아요 0 | URL
나, 손석희 교수님 좋아해요~♡
(여기서 뭔 고백이람. ㅋㅋㅋ)

양철나무꾼 2011-11-24 02:22   좋아요 0 | URL
어머, 저도 그런대요~♡
ㅋㅋㅋㅋㅋ

2011-11-23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4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0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4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케 2011-11-23 13:53   좋아요 0 | URL
오강남 선생이 아마 한국어로 신학책을 쓰는 이 중에 제일 윗질이라는 생각입니다.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 신학자.

접힌 부분을 펼치니 아니 !!

양철나무꾼 2011-11-24 02:30   좋아요 0 | URL
극도하셨죠, 아니 거듭났다고 해야 하려나, ㅋ~.
저는 이 분의 '도덕경'과 '장자'로 '노장사상'의 체계를 잡아놔서요.^^

책가방 2011-11-24 10:11   좋아요 0 | URL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개콘을 꼭 봐야겠더라구요.
어제 고소후 첫 녹화를 했다죠.
기대돼요..^^

접힌부분... 내렸어도 기억속엔 선명한걸요.^^
눈만 가리면 완전 꽃미남이던데...
제가 살만 빼면 완전 예쁜것처럼...(뭐라는거야..ㅋ)


yamoo 2011-11-27 15:48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예수전은 어떻게 보셨나요??

오강남의 장자와 도덕경 번역은 날림이라고 해서 다른 본으로 구매하려고 대기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