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또는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한국어 글쓰기 강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고종석의 문장1, 2'의 부제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깜박깜박하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글쓴이의 내적 독백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을 읽게 될 누군가를 고려하여,

또는 내면의 읊조림을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며, 쓰여지는게 아닐까 싶다.

때문에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라는 것은,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필이 충만하여 쓴 글이거나,

읽는 사람이 전후사정이나 자신의 감정이나 추억을 약간 가감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난 심미안은 아닌지라,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보다는 약간 어긋나고 허술해야 숨통이 트이고 편안해지는,

아름다움보다는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족속이다보니,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라는 말에 혹해서 강좌를 듣거나 책을 읽을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 했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난 쌍꺼풀 짙고 촉촉하고 큰 낙타눈은 '느끼남'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글에서도 사르륵 사르륵 모래바람이 날리는게 아니라 찐득찐득함이 묻어나는 늪일 것 같아서 고려대상이 아니었는데,

그 넘의 책베개에 홀려 넘어갔다~--;

 



고종석이라고 하면,

글 잘쓰기로는 내로라하는 사람이고,

이 책이 글쓰기 강연을 활자로 풀어 놓은것이기 때문에,

설정이나 마케팅 상, 글쓰기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려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권 겉표지의 

'모든 뛰어남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겁니다. 음악이나 수학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수학이나 음악과는 다릅니다.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라는 돌출 글이나,

그 내용을 본문 중에 다시 한번 강조한 걸로 보나, 

글쓰기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려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ㅋ~.

 

난 세상의 많은 것들이 훈련이나 연습 등 '엉덩이의 뚱뚱함=엉.뚱.함'이 좌우한다는데 긍정적이지만,

이런 예술적인 분야는 '엉.뚱.함'말고도,

오감외에, 예감이나 영감이라고 부르는 육감, 또 다른 말로 '촉'이라고 하는 그것을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후에 '엉.뚱.함'까지 갖추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요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 같은 추세로 미루었을때,

일일이 글로 옮기느니 잘 편집하여 동영상 강의 따위로 만드는게 접근성이나 효용성 면에서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낸 걸 보면,

책 뒷표지의 그것처럼 고종석이 '당대의 문장가'란 사실을 이용한 마케팅 전략의 승리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다.

 

고종석은 이 글쓰기 강연을 통하여 자신이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더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강연의 완성도나 강연을 들은 이들의 만족도 또한  높았나 보다.

 

난 책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그들을 통해서 내가 모르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걸 즐긴다.

파리 생활이 그의 이력과 사고 방식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독특하게 느껴졌고,

그 낯선 어색함, 글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을, 박학다식함으로 착각했었나 보다.  

그의 전작 '자유의 무늬'를 예로 드는데,

앞부분에 많은 것들이 집중 포진되어 있어 몰입이 잘되는 반면, 중반부로 넘어가면서는 여백도 많아지고 내용도 성글어지고,같은 내용이 되풀이된다.

 

강의를 직접 들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직접 글을 써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고,

첨삭을 하는 등 실제 자신의 글쓰기에 적용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책으로 읽다보니,

초반부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만들었던 그 매력이 감소하고 나니, 그의 강의가 일반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백이 너무 많고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지루하게 늘어지는 책일 수밖에 없다.

 

규칙이나 공식이 있는 것은 그 규칙이나 공식을 나름 적용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 같은것,

언어감각을 키워야 할 것마저 규칙이나 공식으로 만들어서 틀에 넣다보니,

강의를 하고 들을 때는 폼나고 이해도 빠른것 같지만,

글쓰기는 규칙이나 공식으로 해결안되는 부분도 있고,

그리고 규칙이나 공식이 적용되는 그 부분 마저도,

세월이 흐르면서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규칙이나 공식을 쉽게 외우는 방법을 만들어 전수한다 한들,

실제 적용해 보지 않고서는, 언어감각이 향상되거나 할 리가 없다.

 

그러면서 필사가 별로 도움이 안 되니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고종석은 책 내용을 보니 강의 중에, 은연 중에 자기 스타일을 강요하고 있다.

언어규칙과 공식에 관해서라면 그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국어학자나 언어학자의 수만큼 많은 이견이 분분할 것이다.

더 정리가 잘 되고 간결한 글쓰기 책도 많을 것이다.

 

그는 글쓰기 테크닉을 넘어서, 인문교양과 언어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 기품있는 글쓰기로,

논리가 있는 명확한 아름다움과 수사학적 아름다움, 아울러 한국어 지식을 얘기하고 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기품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좋은 글쓰기란,

맞춤법이나 어법의 정오에 연연하기보다는,

글쓰는 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치장하지 않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쉽고 편안해서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안해서

숨쉬듯 읊조리듯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글을 쓰는 사람의 숨결과 개성이 녹아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일상의 잔잔한 재미가 녹아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고 말이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옮아가,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읽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적어도 누군가가 글을 읽어주길 바라며 쓰여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기품이라는 것, 품격이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과 읽는 사람의 마음이 어느 한곳 만나는 지점에서, 소통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사람과의 사귐과 닮았다.

자신의 스타일을 테크닉이라는 이름으로, 내지는 빨리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하여, 은연중에 강요하는 그런거 말고,

자신의 어느 한부분, 한지점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과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본질과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고종석의 문장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고종석의 문장 2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9월

 

 



암튼 그렇다고, 고종석의 꿀꿀함을 '라면송'으로 달래겠다는 나는 뭐람~(,.)

뭐긴 속물이지~!

속물이 뭔지 모르겠고,

속풀이엔 라면이 그만이던데,

 

라면송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상에
쉬운것은 하나도 없지

힘이 들고 지쳐갈땐
천국에서 라면으로 속을 달래봐

 

엊저녁 '세상 쉬운 일 하나도 없지.'어쩌구 저쩌구 하며,

'이럴땐 술집에서 안주나 축내는것도 좋은데'라고 어물쩡 넘어갔다.

그런데, 언어적 기품이 다르다보니,

'술집에서 양주나 축내는것도 좋은데...'라고 알아듣고는 '레알?'하며 되묻는것이다.

'라면송', 이 노래를 일찍 떠올렸다면 '레알?'소리를 들어가며 재차 확인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말이다, ㅋ~.

 

 

 

내츄럴 (Natural) - Special Album
 내츄럴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8년 12월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를 읽고나서 필(feel) 충만하여 '1.4킬로그램의 우주, 뇌'를 집어들었다.

'신경 의학에서 뉴로 마케팅까지 융합 뇌과학의 현장'이라는 겉표지의 소 제목을 본 터라 쉬울거라고 생각은 안했었지만,

첫강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카이스트 명강'이란 타이틀을 달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용, 정재승, 김대수 이 세분들은 강의가 깔끔하기로 유명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강의를 이해 못하면 다른 누가 강의를 해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이다.

 

 

 

 

 



 

 1.4킬로그램의 우주, 뇌
 정재승.정용.김대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7월

   

하물며 소싯적에 해부학이란 걸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해부학 용어로 등장하는 의학 용어가 중구난방이어서 못 알아먹는다는 것은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난 그동안 한글을 제법 사랑하고 잘 사용한다고 자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의 반도 알아먹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시작부터 기가 죽어 책을 덮어버릴 수도 없고, 낭패였다~--;

위 사진 속의 글을 뇌에서 인체 전반으로 의미를 확장시켜 슬쩍 문맥에 맞게 바꿔 본다면,

소싯적에 해부학 책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이렇게 해부학 용어를 두고 잘 몰라서 한참 들여다 보게 된 까닭이,

많은 사람들이 인체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부학계에서 한글단어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글쎄, 정작 한자어로 해부학을 공부했던 세대들이 혼란스러움을 겪는 한글단어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체에 대한 이해는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그동안 해부학에서 사용되었던 한자어가 대부분 일제의 잔재이고,

그래서 일제 잔재를 한시바삐 청산하기 위하여 한글 이름으로 바꾸는것이라면,

실용성이나 접근성 등의 측면에서 설득력이 없더라도,

우리가 북한처럼 한글을 잘 살려쓰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걸 부끄러워 하며,

한글이 다의어여서 의미전달이 모호하여 불편하더라도,

한글 단어로만 이루어진 해부학 용어 사용에 대한 타당성은 인정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동안 한자어로 쓰여진 해부학적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한글단어가 어떻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글이 다의어여서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 풀어쓰거나 설명을 하게되면 용어가 한없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위해서 한글 단어로 바꾼 것이라면,

설명을 위해 풀어쓰다보니까 길어지는 부분은 간결성이라는 면에서 위배된다.

그렇다면 해부학 용어를 한글단어로 바꿀게 아니라, 한글 사용법을 익히는게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글은 다의어여서,

글이나 말 만으로는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 될 수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래서 글에서는 한자어를 병기하는 걸로 설명을 대신 했었고,

그래서 글이나 말 등의 문자 외에도 음의 고조나 장단 ㆍ 음색ㆍ어조나 어투 ㆍ몸짓 ㆍ얼굴 표정이나 분위기 등 의미의 전달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노병사'가 삶의 과정이지만,

병은 그냥 병일 뿐이지만, 의학에서는 이를 더 세분해서 질병, 증후군, 질환, 장애 이렇게 네가지로 구분(90쪽)하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어떤 병에 증후군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애기는 원인을 아직 잘 모른다는 뜻이란다~--;)

 

바뀜과 변화는 필요한 걸까?

아니면 늘 한결같아야 할까?

세상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늘 한결 같아야 할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걸 가르는 데는, 다시말해 구분하는 데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기준과 방향점이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답보가 되거나 편견 또는 선입견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는 고집이나 아집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요즘 '신영복'님의 '강의'를 다시 읽고 있는데,

거길 보면 '역易'을 '주역'의 '계사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쪽)

처음 주역을 읽을때는 역(易), '변화'에 치중을 하였다면,

그다음 읽을때는 구(久), '오래지속된다'에 연연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역이 64괘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삶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인간의 마음 또한 그렇게 바뀌고 변하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변덕이고 변절인 것처럼 폄하하였다.

 

고인 물은 썪는다고 오래 지속되거나 머무르면 안된다고도 생각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한결같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은 퇴보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쯤에서,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겠다.

 

성격이 좋게 말하면 까칠하고 나쁘게 말하면 더러워서,

매사에 흑백 논리가 분명하게 살려고 했던 내게,

역(易)과 구(久)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이 돌아왔다.

역(易), '변화'의 속성에서 본다는 것은 순간순간을 치열하고 가열차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구(久), '오래지속된다'라는 것은 '영원한 도돌이'와도 같은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변하지 않는다가 될 수도 있고,

한발 떨어져서,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변화가 아주 조금씩 천천히 눈곱만큼씩 이루어져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종교 따위는 없는 내가,

먼 이국 땅의 말도 안통하는 교황의 말한마디에서 깨달았다고 하면 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교황은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때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지만,

이 모두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이건, 종교고 과학이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치이다.

다시말해, 종교고 과학이고, 정치고 이념이고 간에,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은... 없다.

 

 

암튼,

새로운 의학 용어를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해가며 툴툴거리고 구시렁거리며 변명할 생각만 하는 나,

어쩔 것인가 말이다~(,.)

 



 



 
 
하늘바람 2014-08-20 01:38   댓글달기 | URL
해부학까지 섭렵하시니넘 우러러볼 뿐이어요

양철나무꾼 2014-08-26 18:25   URL
섭렵이 아니라 들여다 봤을 뿐이라는~--;
다치셨다는 무릎은 좀 어떠세요?
빨리 나으시라고 제가 '호오~=3'해 드릴게요~^^
 

난 그러니까 고상하게 말하자면, 싫증을 잘 느끼고,

평상시 나의 언어 습관대로 편하게 얘기하자면,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언젠가  어떤 책을 읽는데,

'심리학자들은 "아름다운 외모에서 생겨난 사랑의 유통기한은 1~2년"라고 입을 모은다. 길게 잡아 2년이 되면 배우자의 외모보다는 정신세계가 더 중요해져서 외모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2년이상을 견디어 내면 되는건가 하는 마리앙토와네트 같은 생각을 잠깐 했었다.

 

언젠가도 얘기했었지만, 나의 사랑의 선택하는 기준은 좀 독특하여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재력이나 신분도 아니었고,

아름다운 외모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 사람의 글씨체였으니,

글씨체야말로 그사람의 모든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구태여 따지자면, 외모와 정신세계 둘다라고 할 수 있겠다, ㅋ~.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언제였던가, 이명옥의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를 보면서도,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다 말에 공감을 할 수가 없어서 구시렁거리는 날 보고 사람들은 정말 사랑을 해보기나 한거냐면서 놀려댔었다.

난 그때, 사랑을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것 아무런 대책이나 준비가 없이,

무방비 상태에 있다가...맞이하게 되는 그런 것이어서,

본인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고, 어쩌지 못하겠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이명옥은 이일호의 글과 그림 '화염경'을 빗대어서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견에 살을 입히고 확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갔었다.

 

형체가 없는 영혼은 늘 자신의 몸을 그리워한다. 제몸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몸과 포개져야 한다. 사람은 영혼의 빈틈을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영혼의 빈틈에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고, 살과 살 사이에서 두려움과 환희가 대립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과 살 사이의 빈틈을 없애려고 맹렬하게 요동친다. 하늘에서 백만 송이, 천만 송이, 억만 송이의 장엄한 꽃비를 내리게 한다. 내 몸이 네 몸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의 구별조차 할 수 없는, 남녀간의 사랑은 영겁회귀를 노래하는 화엄세계의 춤인 것이다.(이일호의 '화염경' 부분, 183~4쪽)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뜬금없이 웬 공부?'하면서 손사래부터 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공부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 인격을 완성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 있는 매 순간이 기적이며 축복임을 절감하는데 사랑 만한 스승은 없을 테니까.(185쪽)

 

그때는 숟가락으로 떠넣어 주어도 몰랐던 걸 좀 알겠는건,

이 책 '사랑의 역사'가 제대로 된 학습서여서 인지,

아니면 그 사이 내가 사랑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ㅋ~.

 

사랑을 만나게 되거나, 빠지게 되는 건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옛날에는 '사건의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었었고,

그래서 공부 따위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다면,

지금은 '사랑을 하다'라는 행위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꾸준히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이 사랑을 몸소 경험했느냐는 물음에는...'모르겠다~(,.)'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지만,

한동안 참 많이 아팠고 지금도 아프다.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 다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감성이 풍부하다보니,

이렇게 저렇게 마음 아플 일이 많았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마음'은 항상 죽 끓듯 끓고 있으니 관심을 가졌었지만,

육신 또는 육체라고 표현되는 몸은 쥐죽은듯 고요하니, 나를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임을 간과했었다.

햇빛이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해가 떠있을땐 중요성을 잊고 지내듯이,

나의 거죽을 이루는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몸이 아파, 몸의 어느 특정 부위가 아파서,

그 부위가 도드라져서 나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이 들고나서야,

그제서야 날 이루고 있는 부분 중,

항상 이렇게 저렇게 들끓고 있는 마음만이 아닌, 잠잠한 육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돌아보게 되었고,

'그동안 날 잘 다독거리고 데리고 살아줘서 고맙다~'라며 무한 땡큐를 날릴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공부한다는 건 자신의 온몸으로 통과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아프다는 것과 닮았다.

주체가 자신이어야 하고,

비록 아프더라도 자신의 온몸으로 오롯이 통과하고 났을때,

한뼘쯤 성장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사랑의 역사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그동안의 난,

이 나이에 창피한 얘기지만,

'남미영'의 <사랑의 역사> '프롤로그'를 빌리지 않더라도,

나또한 공부에 방해가 된다거나 엉덩이에 뿔난다는 생각에...사랑을 지레짐작하였고,

사랑은 위험한 것이라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거나 사랑에 베여 피 흘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랑 없는 삶 속으로 숨어 들지는 않았었나 돌이켜 보다가는,

책속의,

우리가 사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제대로 알지 못해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믿고, 사랑인 것은 사랑이라고 믿은 결과지요. 사랑은 탐구할 가치가 아주 높은 학문이며, 배우고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공부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ㆍㆍㆍㆍㆍㆍ

세상에는 사랑을 이야기한 수많은 소설이 있지만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탄이나 미화 혹은 한탄으로 균형감각을 잃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런 작품은 사랑을 보는 우리의 판단을 흐려놓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이야기 하되, 비판과 질문과 탐구의 시선을 잃지 않은 작품을 골랐습니다.(6~7쪽) 

라는 구절을 보면서 '그랬었다'로 이런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한가지 더,

피 흘리지 않기 위해 사랑없는 삶으로 숨어들었던 그 선택 때문에,

난 언젠가 사랑이라는 그 위험한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깨달음과 배움이 그렇듯 너무 늦은 때란 없다, ㅋ~.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소설들은 나에게 다양한 느낌을 주는데,

감히 내가 토를 달 수 있는 건 없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흔히 고전이라는 것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책이 담고 있는, 작가가 전달하려는, 작품세계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하여도,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서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을뿐더러,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서른네 개의 작품 중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도 제법 되는데,

어느 것 하나 이 책에서 얘기하는 그런 의도로 읽었던것 같지는 않다.

작품이란 보는 시점이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관점이 바뀔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그저 편한 상대가 좋다.

서른네 개의 작품 중, 이런 나의 취향에 가장 부합한 책을 꼽으라면 '제인에어'다.

 그 후로 그는 미녀도 아니고 키도 작고 어린애처럼 왜소한 체격이지만 자기 앞에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 아는 게 많고 자신의 생각을 짧은 문장 안에 담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아가씨, 자신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은 가정교사 제인을 좋아하게 된다.

 

  난 당신을 보면 이상한 기분을 느껴요. 내 왼쪽 늑골 밑의 어딘가에 실이 한 오라기 달려 있어서 그게 당신 작은 몸의 같은 곳에 똑같이 달려 있는 실과 풀리지 않게끔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ㆍㆍㆍㆍㆍㆍ. 그래서 당신이 먼 곳으로 떠나버리면 그 실이 끊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체내에 큰 출혈이 일어날 것 같소.(148쪽)

 

또 한가지,

이 책에 언급된 서른네 개의 작품들과 관련하여,

사랑을 공부하거나 배우는 건 책이나 독서를 통하여서가 아니고,

우리가 몸으로 경험한 것만이 그렇더라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배우는데 있어서, 머리가 아닌 몸의 법칙이 적용되는 몇 안되는 예이다.

하지만, 모든 배움이 그렇듯 너무 늦은 때란 없다, ㅋ~.

  

난 그동안 배움이랑 관련된 사람의 기억력은 머리와 연관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가 직접 경험해보니,

사랑을 배우는 것과 관련하여선 후각이나, 청각, 촉각, 내지는 공감각 등의 예민한 감각도 아니었고,

사랑을 하는 것과 관련된 몸이었다.

온몸 구석구석이었다.

난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사랑을 배웠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더라.

암튼 사람의 기억력은 머리와 연관된 것만은 아니라는걸 몸소 체험했다.

그러니, 사랑의 유통기한도 기억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싫증을 잘 느끼고,

평상시 언어 습관대로 얘기해서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깜박깜박한다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기억은 몰라도,

몸으로 하는 기억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일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다.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인지,

아니면 육체적 관계에만 탐닉하면 된다 인지~(,.)

 

근데, 정말 편안한 관계는...

힘들게 다다르게 되는 육체적 합일에서 느끼게 되는게 공감이나 소통에서 오는게 아니라,

그런 관계를 지나고 난 후에 느끼는 충만함 속의 텅빔, 가득참 속의 성김에서 불현듯 느껴지는 허허로움이 아닐런지, ㅋ~.

 

같이 엮일 얘기는 아니어서 망설였는데,

알라딘 서재의 달인이기도 하신 '된장' 님이 책을 내셨나보다.

매번 책을 받기만 하고 게을러 리뷰를 올리지 못해, 마음의 빚이 크다.

부디 판에, 쇄를 더할 수 있도록 대박나시길 빈다, ㅋ~.

 

 

 

 

 

 

 

 책빛숲, 아벨서점과 배다리 헌책방거리
 최종규 글.사진 / 숲속여우비 /

 2014년 7월

 

 

 

 

 



 
 
루쉰P 2014-07-11 11:06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사랑이 참 좋은 거 같아요.
그게 꼭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의 사랑일 수도록 있지만 정신적인 서로의 소통도 사랑일 수 도 있고 말이에요.
ㅎㅎㅎㅎ 뭐 제가 남녀 간의 사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많이 공감하는 글이에요.
아무런 준비 없이 다가가면 놀라는 것이 사랑인 것 같아요.
하~ 사랑이라 ㅋ

양철나무꾼 2014-07-17 18:19   URL
여기서 '밑줄 쫙'쳐야할 부분은 '자기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예요.
교주님,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랍니다.
자기 자신도, 타인도, ㅋㅋㅋ~.
 

주말 저녁, 감기가 들어 맥을 못추는 아들녀석을 북돋워준답시고 온가족(이래봐야 남편, 아들, 나 3명)이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쇼파에 옹기종기 앉아 텔레비젼을 보았다.

아마 선거 홍보용인거 같은데, 개그맨들이 나와서 그 프로그램을 앞으로 10년간 이끌어갈 메인 MC를 뽑는 선거를 하기 위한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근데, 참 이상도 하지, 개그맨들의 그것이었는데, 재밌다거나 웃기기 보다는 안습이어서 난 보다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아침, 방현주의 라디오 북클럽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소개받았다.

그동안, 자신의 소신이나 주장을 한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던, 이권우가 자신의 그것을 드러낸 것도 멋있었고, 앗싸~^^

책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책을 읽은 사람이,

다시말해 책을 읽고, 책을 통하여 깨달은 사람이 그걸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하여야 하는지,

설득과 감화의 적절한 예를 보여준것 같아서 좋았다.

에효, 나 참 말 어렵게 한다, 이권우의 언변에 엄청 감동받았다. 한마디면 될 것을~ㅠ.ㅠ

 

오늘 소개된 책은 '주대환'의 '좌파논어'였는데, 난 제목을 듣는 순간 '김규항'의 '좌판'을 연상했다.

 

 

 

 

 

 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김규항의 좌판
 김규항 지음 / 알마 /

 2014년 4월

 

저자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좌파'와 '논어'의 조합이 가당키나 한것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일단은 그를 믿고 닥치고 읽고 볼 것이고,

그런 후에라야, 이 책과 주대환을 이해할 수 있고,

이권우를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설레발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실패와 실수는 용납되지도 용서되지도 않을 것처럼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요즘의 현실을 놓고봤을때,

공자와 논어를 새로운 시선으로 봤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그걸 주대환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공자가 당대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존경과 추앙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다가 상처받기도 했다. 비난보다는 경멸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권력과 힘을 가지면 사람들이 뒤에서 욕할지언정 함부로 대놓고 경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잠시 권력과 힘을 가져보았고, 그 효과를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갖기를 간절하게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 자주 쓸데없는 헛발질을 하고, 정치적 오판(誤判)으로 비웃음을 샀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비난과 비웃음,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 이런 것들을 2천500년 전의 공자도 겪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공간은 지금이나 당시나 비슷하지 않았을까? 나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알라딘 책소개'인용)

 

그걸 이권우는 다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핵심은 그대로인데, 가는 방법이 진보적이다.

그러자 방현주가 묻는다.

"극과 극은 통해서 일까요?"

이렇게 안물었으면 어쩔뻔 했나? 이토록 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현주 무한 땡큐다.^^

"진정성이겠죠."

 

이쯤에서 끝났다면, 내가 이권우를 향하여 설레발을 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진보주의와 진보정당의 문제점과 대안을, 주대환의 이 책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논어는 연대(連帶)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고 격려하는 '연대의 언어'다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하자.

부모에게, 형제에게, 동지에게, 잘하자.

 

그러면서, '우월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덜됐다'라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못하면서 연대를 이땅에 뿌리 내리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나 하는,

초로의 한국 진보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는 말로 맺는다.

 

내가 오늘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되 배려하지는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의식해야 할 주체는 자기자신이고, 배려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되는 것인데,

이게 바뀌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을 사는게 아닐까 하는 것.

가장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틈틈이 스스로를 위해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린다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든, 주대환의 해석이든 아니면 이권우의 그것이든 내가 설레발을 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읽은 '살아가겠다'의 '고병권' 같은 경우도 철학자나 인문학자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를 보면, 철학이나 인문학이야말고 무엇보다 삶과 밀접한 실천의 학문인것 같다.

주대환도 경험을 벼리어 글로 써서 그랬지만, 고병권 또한 현장에서의 목소리를 글로 옮겨서 생생하다.

 

 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를 보지만 모두가 신기루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던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11쪽, '책을 내며'중에서, '살아가겠다')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몸이 기억하는 것, 날것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날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로 와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를 꾸준히 계발, 적어도 유지할 수 있도록 수혈, 내지는 급수, 내지는 에너지 공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 길지만 같이 되새겨보면 좋을것 같아 옮겨보았다.

 

플라톤이 '철학하는 왕' 프로젝트에 실패하고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철학의 지헤란 홀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면 온갖 마찰이 생긴다. 그 마찰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돌멩이를 부딪치면 그렇듯, 우리의 부대낌은 열을 만들어내고 때로 불꽃을 튀게 한다. 그 불꽃이 영혼의 램프에 옮겨 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지혜가 아닌가. 나는 노년의 플라톤이 쓴 이 비유가 참 좋다. 서로 다투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때로 열이 나고 불꽃이 튀는 곳에서 우리는 영혼의 램프를 밝힐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불을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위대한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나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계속 기름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불은 금세 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쉼없이 가꾸어감으로써만 우리 영혼의 램프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참 멋진 학문이 아닌가.(29쪽, '살아가겠다')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언더그라운드 니체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연휴기간동안 서해안 고속도로가 도로 위 주차장이 된 걸 본 누군가는 나들이 차량이 아닌 효에 방점을 찍었다가 빙점을 찍은 꼴이 되었다고 자평을 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는 5월이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그리고 스승의 날 등을 소소하게 챙기는 그런 '동방예의지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23장)

영화 '역린'을 보았다.

영화 '역린'은 '중용'23장으로 시작해서 중용 23장으로 끝난다.

 

'중용'을 도올의 그것으로 읽을라치면,

 저 23장 한장만 비교해 보더라도 내용은 차치하고, 해설을 볼것 같으면,

일본의 20세기 사상사를 연구했는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사람과 헤겔이 등장해 주시고,

중국역사의 답보 상태가 어쩌구, 주자학의 해체가 어쩌구, 하는 얘기를 한참하다가,

성실하다는 뜻이 보수적인 중용이 아니라 끊임없이 화化를 이룩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게 엉뚱하기가 짬뽕공이나 메뚜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던터라,

저렇게 근사한 구절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역린'의 내용을 '네이버 지식백과'를 통하여 검색해 보니,

"용은 성질이 유순하므로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거꾸로 솟은 비늘[逆鱗(역린)]’이 있으니, 용을 길들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를 죽인다. 군주한테도 역린이 있은즉, 군주를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역린을 건드리지 않아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영화를 이해하기가 좀 부족하다.

아니, 나는 좀 부족했다.

지난주엔가 '라디오 북클럽, 방현주입니다' 에서,

영화 '역린'의 모티브가 됐다는 소설 '역린'의 작가 '최성현'이 나왔었다.

그런데 방현주 아나운서가 게스트의 긴장을 풀기 위하여 '방송전에 이렇게 많은 물을 마시고 시작하시는 분은 처음입니다'라고 하는데,

난 최성현을 이현세의 '버디버디'의 스토리작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유명작가도 긴장을 하다니, '신선한걸, 오홀~^^'하면서 흘려 듣고 말았다.

아직 2권은 출간 전이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뒷힘이 부족한 스타일인가 보다.

난 영화는 충분히 재밌게 보았다, 부디 건투를 빈다.

 

[세트] 역린 세트 - 전2권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역적의 아들, 정조
설민석 지음 / 휴먼큐브 /

2014년 5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완간 세트 -

 전21권 (본책 20권 + 조조록 사전 + 가계도 + 브로마이드)
 박시백 글.그림 /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난 영화의 이해를 위하여,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빵빵하게 전질로 갖추어 놓았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해 주시고,

설민석의 '역적의 아들 정조'를 훑어 보았는데,

쉽고 재밌게, 설명과 요점 정리가 되어 있어서,

나처럼 국사, 역사에 기초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난, 설민석의 '역적의 아들 정조'를 읽기 전까지는,

정조를 조선시대 성군의 한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지,

그가 그렇게 불우한 유년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매사는 겉보기와는 같지 않다고,

겉으로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학문에 힘쓰는 문예부흥에 앞장선 인물처럼 보였었다.

김탁환 소설 '열하광인'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백탑파가 등장하던 소설을 보게 되면 정조는 서얼들을 차별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등용하는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사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참신한 문체는 문체반정이라고 하여 탄압하는 것이 아이러니컬 했었다.

 

분노가 가장 참기 어렵나니

사람이 드러내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분노가 가장 심하다. 이를테면 분노가 막 치밀어오를때, 사리를 살피지 않고 먼저 소리를 지르고 성질을 부리면, 분노가 더욱 치밀어 일을 도리어 그르치고 마니, 분노가 사그라진 이후에는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비록 깊이 성찰하는 공부는 없지만, 늘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어쩌다가 분노가 치밀어오르면, 반드시 분노를 삭이고 사리를 살필 방도를 생각하여, 하룻밤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일을 처리하니, 마음을 다스리는 데 일조가 되었다.

                                                                                     (『홍재전서』중에서, 설민석의 역적의 아들 '정조')

 

우리는 가문이나 혈통이나 출신 성분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다.

난 이런 얘기가 나올때마다 광분하는데,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아무리 죽을 똥 살 똥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의 부모를, 가문이나 혈통이나 출신 성분 따위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을 해서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모두,

팔자나 운명으로 돌려 버리고 퍼질러 앉아 버린다면,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것 없이 그냥 주저 앉아서,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날 수 있도록 그 누군가에게 팔자나 운명 따위를 점지해 달라고 기원만 하면 되는 것이지,

죽을똥 살똥 열심히 살려고 노력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흔히, 관점 차이나 입장 차이라는 말을 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또 비교를 할때는, 기준이나 조건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

 

그동안 난 영조, 사도세자, 정조에 이르는 죽음과 왕위 계승의 과정을,

보통 부자간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평민으로 살다가 왕이 된 영조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그 사건의 전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가만히 있으면 넌 별일 없을 것이다.'의 그 말뜻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정조의 암살 계획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게 아닐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살수집단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게 아닐 것이다.

정조를 암살할 살수는 정조의 주변 곳곳에 오랫동안 쭈욱 포진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23장을 다시한번 떠올려줄 필요가 있겠다.

 

오랫동안 사람 주변에서 사람의 저런 사람됨을 겪게 된다면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게 한나라의 임금이라면 어떠할까?

작은 일은 더 사소한 일로 여겨질 것이고,

그렇게 사소한 작은 일에까지 최선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게 한두번이 아니라 오랜동안 지속된다면,

그런 감동이 살수라는 사람을, 삶을, 그리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책은 조선시대 서책을 담당하고 관리하는 내시를 일컫는 호칭이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대책을 얘기하기도 한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할 정도의 인물이고, 조선시대 문예부흥기에 우뚝 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장용영이라는 군대를 설치하고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할 정도로 군사력도 소홀히 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문과 무의 조화, 말과 행동의 조화, 즉 '중용'의 묘를 알았던 성군이 아니었나 싶다.

 

가만 보니, 오늘 우리의 그분께도 적용되어야 할 논리가 아닐까 싶다.

 

부디, 당신께서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하여 감화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공부가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테고,

그리하여 중용이 학문으로 그치지 않고, 통치 이념이자 덕목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난 큰 인물이나 큰 그릇이 될 위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작은 일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중용 23장의 첫구절을 그대로 따를려고 꾸준히 노력은 하건만,

그 다음 구절로 단계를 밟아 넘어가지 못하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김수영'마냥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고 옹졸해져 가는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하는 것인지, 원~--;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차트랑 2014-05-09 14:54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으로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
하여 중용을 誠論이라 하는가 봅니다...

말씀만 들어도 감동적이니, 이를 어쩝니까...

양철나무꾼 2014-05-10 02:39   URL
댓글도 잘 안달고 방치해 두는 게으른 서재에 왕림하셔서,
이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영화를 보시고, 책으로 읽으시면 그 감동이 배가 되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