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의 '취향'이란 지난번 글을 보더니,
'아무거나','아무데나'를 남발하는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냐고...한마디 한다.
나는 그저 '헤헤~'거리며 웃고 말았다.
내가 그 누군가 앞에서 '아무거나', '아무데나'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이미 내 취향이라는 얘기지만,
대놓고 '당신이 이미 내 취향이다, 고로 당신은 이미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거나', '아무데나' 를 남발하여 날 수더분한 줄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글쎄...실은 좀 까칠하다.
단지 내가 까칠함을 발휘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나의 까칠함을 아는 이들의 분석에 의하면, 알아서 협조하고 더러워서 피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의 경우 수더분한 걸 좋아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는거다.
똑 부러지게 자기 취향을 얘기하는 쪽이 좋다.
야무지고 맛깔스럽게 얘기했는데 그 취향이 나랑 같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라는 거지,
뜨뜻미지근하게 이래도 저래도 '흥~' 천안삼거리에 걸린 능수버들처럼 다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사람도 싫다.
나도 독특하고 유니크한걸로는 한 몫하기 때문에, 다른사람까지 과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1.
내가 일하는 곳은 2층이다.
며칠 전 퇴근 무렵 한 남자가 다리를 절며 들어 왔다.
오기 전날부터 다리 바깥쪽이 심하게 아파 발을 땅에 딛을 수가 없었단다.
"왜 아프세요?"
"그걸 알면 내가 이 다리로 2층까지 기어올라왔겠어요?"
"다치거나 삐끗하신 기억이 없으시냐는 얘기죠?"
"없어요."
"여기 이 멍은 뭐예요?"
"그거 별거 아녜요."
"ㆍㆍㆍㆍㆍㆍ?"
"아픈 거랑 상관없는 거예요."
"상관 있고, 없고는 제가 판단할 문제고요."
"걸어가다가 골프공에 맞았어요."
"걷다가요, 뛰다가요?"
"그딴게 왜 중요합니까?"
"걷는데 사용되는 근육이랑 뛰는데 사용되는 근육이랑 약간 달라요."
"살살 뛴거 같아요, 몸 풀기 정도로ㆍㆍㆍㆍㆍㆍ.
 근데 골프공에 맞은 건 무릎 안쪽 윗부분인데, 내가 지금 아픈 건 무릎 바깥쪽 아랫부분이라구요."
"골프공 맞는 순간 무릎관절을 축으로 지렛대 원리에 의해서 충격을 받은 부분이 생겨났어요.
 골프공 맞은 부위는 위 무릎 안쪽이지만,
 무릎관절 대칭으로 본인 몸무게가 힘으로 작용을 해서 아킬레스건에 무리를 줬다고 보시면 돼요."
인체와 그 주변에 힘이 작용하는 원리를 그에게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achilles tendon, iliosacrum, T-M joint 등을 건드리자 자지러진다.
"어제부터 아프신거라는 거짓말, 정말이예요?"
"골프공에 맞은 건 일주일 됐어요~ㅠ.ㅠ"
partial rupture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고는 테이핑과 E.B.로 둘둘 말아서 고정시켜 보냈더니,
못 믿고 가서 MRI까지 찍어 확인을 한 모양이다. 

그 후 180도 태도 돌변, 내 말을 무조건 믿는 순한 양 같은 남자가 되어버렸지만, 통통 거리는 맛이 없어 재미는 없다. 

 

2.
어제 집에 갔더니 택배가 와 있었다.
정말 이렇고 저런 책들이랑 음반들이 너무 쌓여...
다 못읽고 다 못듣고 헤쳐만 놓고 해를 넘기고 말것 같아 정중히 사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서운했었나 보다.
책이면 어쩌나 하고 열어보니,
예쁜 플라스틱 폴더 속에 볼펜과 수첩과 포스트잇과 각종 스티커 등의 문구 류와 다이어리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학창시절엔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듯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된후론, 판촉물로 나와 굴러 다니는 걸 주워 썼었던지라...
내 기호나 취향이랑은 전혀 관계없었다.

하나 하나 쓸어 보고 만져 보면서 '어머, 어머, 어머머~'를 연발했었는데...
세상에 내 안에 들어와 보고, 나를 훔쳐본 것처럼...하나같이 다 맘에 드는거다.
가만 있어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해시시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눈치 채고 이런 걸 보내준 것일까?
난 분명,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지 못할테지만 이런 그가 한없이 고맙다.

 

3.

 

 

 

 

 

 

 

 

 칼과 황홀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그런 의미에서 음식에 관한 얘기는 성석제가, 요리는 산당 임지호가 등장 했으면 좋겠다.

 

한때 성석제를 엄청 좋아했었다.

'이야기 박물지' 때도 느낀거지만, 잡다한 지식이 거의 만물박사 수준인데다가,
게다가 적당히 배부르고 술기운 오르면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맛깔나기도 하다.

 

그래서 '칼과 황홀'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그의 문장 벼리는 재주만큼 음식 벼리는 재주도 남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문장 벼리는 재주와 음식 먹는 재주는 몰라도 음식 벼리는 재주는 영 신통치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음식을 벼리는 '음식 철학'은 산당 임지호의 그것쯤이라야 겠다.

 

하긴, 음식을 먹는 재주도 옛날엔 별 볼 일 없었는지...돼지고기도 못먹는 채식주의자단다.
엄마가 해주시는 김치볶음밥을 아주 맛있게 먹던 그가,
김치볶음밥을 만드는데 돼지기름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을 하는데, 그게 내 어릴 때의 모습이랑 흡사하다.

그와 밥 한끼 같이 안먹어 본 내가,
그가 문장을 벼리는 재주만큼이나 음식을 먹는 재주도 남다를 거라고 미루어 짐작을 하게 한 문장은 다음 문장이다.

원하는 게 많던 시절이었으나 채워지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게 훨씬 더 많던 때였다. 그 냉면은 세끼 밥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정신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평양이나 함흥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비밀스러운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주인의 손맛과 기분에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그 냉면이 내 냉면 이력의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기껍다. 그 냉면이 뒤이어 내가 섭렵하게 되는 모든 냉면의 기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88쪽)

'의인화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고 하려다가,
나도 아스팔트가 벌러덩 일어나고, 전봇대가 내게 걸어와 입맞추었던 경험이 있는지라...글을 쓴 성석제와 내 욕구가 겹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나서 간신히 지하철역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지하철에 타자 더럽기 짝이 없는 전동차 바닥이 벌떡 일어나 그날 저녁 귀한 음식을 연속으로 먹은 내입에 제 입을 쩍 하고 맞추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깨보니 종착역도 아닌 차량기지였다. 차량 한 칸에 한두 명씩 나 같은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며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샛별을 바라보며 철로를 따라 걸어 나왔다. 자갈이 밟히며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에 이제 나도 어른이 되는 건가 싶었다.(115쪽)

그는 의인화로는 부족했는지, 이것저것 이름 붙여 중독자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난 라면이나 MSG는 좋아하지 않는고로 글루탐산중독자는 아닌 것 같고, 엔도르핀 중독자는 비껴갈 수 없겠다.
매운걸 먹으면 속뿐 아니라 얼굴까지 뒤집어지는데도, 가끔 매운 걸 의무적(?)으로 먹는다.

"아주 간단해. 이건 고추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 효과를 이용한 것뿐이야. 매운 걸 먹으면 땀이 나고 눈물 나고 재채기 나고 하면서 몸에 안 좋은 게 배출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되거든. 땀 흘리고 나면 시원하고 눈물 흘리면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은 거야. 매운맛은 맛이 아니고 통증이거든. 아프다고 하는 느낌이 뇌에 전달이 되면 안 아프게 천연 진총제 엔도르핀을 분비하게 되고 엔도르핀이 필요 이상으로 분비되면 기분이 그 전보다 좋아지게 되어 있다고. 매운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엔도르핀 중독자란 말이지."(178쪽)

암튼, 그의 문장을 벼리는 재주로 미루어 음식을 먹는 재주를 짐작할 수 있고, 음식을 먹는 재주를 짐작하는 것 만으로는 요리를 잘 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다음 문장으로 미루어 영혼을 벼리는 재주도 지녔을 것 같다.

들끓는 젊음은 해장국집에서 언제나 평온을 찾았다.ㆍㆍㆍㆍㆍㆍ시래기와 된장, 제철에 나는 채소들을 넣어 전날 밤부터 오래도록 끓여내는 해장국의 맛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들어가 편히 누울 수 있는 맛이다. (208쪽)

그를 보면서 음식과 관련한 취향은 식성을 가지고 얘기하는게 아니라,
인간과 삶의 근간을 이루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얘기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방랑식객
 SBS 스페셜 방랑식객 제작팀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식성에서, 아니 음식에 대한 취향에서 확장시켜,
음식에 대한 예의, 인간과 삶에 대한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으로는 임지호를 들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그 감이 떨어지면 고양이부터 개미까지 모두가 골고루 그 맛을 보았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햇볕과 바람이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감이었다.(40쪽)

 

까치밥으로 남겨 놓았던 감 하나에서 햇볕과 바람을 만들어내고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갯벌요리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을 거쳐 켜켜이 쌓여온 생명의 역사, 바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소금과 갯벌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를 맛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귀하다, 천하다 이름을 지어 생각의 벽을 만들어서 보니까 못 보는 것이다. 그 벽만 없애면 갯벌은 얼마든지 식재료로 쓸 수 있다. 우주의 별을 구성하는 성분과 내 몸을 이루는 성분이 같듯이, 갯벌을 이루는 성분도 내 몸을 이루는 성분과 같다. 그렇게 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59쪽)

소금에서 갯벌을 불러들이고, 갯벌에서 貴賤을 분별하고, 우주와 별들과 갯벌과 내 몸의 성분을 아우르는 것도 대단했으며,
산을 올라 산의 기운을 받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옮겨놓는 일을 한다고 하는 호기도 멋졌다.

 

ㆍㆍㆍㆍㆍㆍ산에 있으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겐 숲속이 놀이터이자 침대였다. 요즘도 생활에 지쳐 맥이 빠질 때 산에 오르면 힘이 솟는다. 방전된 힘이 충전되고 다시 아이처럼 생기발랄해진다. 그게 산, 자연이 주는 에너지다. 그렇게 산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나면, 그 좋은 기운을 마음에 실어와 다시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주곤 한다. 그러면 그이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어도 그 기운을 그대로 먹을 수 있다. 나는 자연을 옮겨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65쪽)

맛을 보지 않고 요리를 한다는 부분은,
환자가 하는 말과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라, 환자가 하는 말과 말 사이의 행간과 동작과 동작의 연결 부위 사이에서, 또는 미묘한 손 끝의 palpation만으로 환자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읽어내야 하는 상황을 닮았다.

"왜 맛을 보지 않고 요리를 하는 거요?"
"원래 맛의 수행은 맛보지 않고 하는 거예요."
기분에 의해, 몸의 상태에 따라 혀로 느끼는 맛은 기복이 심하다. 혀에 의존하지 않고 냄새와 색, 질감과 같은 다른 감각으로 맛을 보는 것 또한 훈련이다. 몰입할수록 맛보지 않고도 제 맛에 근접해간다. 수행하듯이 맛있다, 맛있다는 생각을 심으면 그 생각이 음식에 녹아든다.(95쪽)

 

신기하고 재밌어 보여 해보고 싶었던 레시피는 '낙엽소스, 낙엽차 만들기'이다.
하긴 기분이 우울할 때 은박 도시락에 낙엽을 모아놓고 태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커다란 통에 낙엽과 물을 넣은 다음 물의 양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끓인다. 끓인 낙엽 국물에서 낙엽을 걸러낸 다음 조선간장과 요리술을 넣고 끈적끈적한 소스가 될 때까지 오랫동안 조린다. 이 낙엽 소스를 나물 무칠 때나 떡이나 과자를 만들 때 쓰면 좋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맛이 위장을 편안하게 해준다. 나는 낙엽을 끓여 차를 마시기도 한다. 낙엽만으로 끓인 차는 가슴을 뻥 뚫어주면서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낙엽차만한 게 없다.(222쪽)

 

음식이 맛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음식에 담긴 마음이 있어서 더욱 감동적이고 맛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음식이 가진 사랑의 힘이고 치유의 힘이란다.(156쪽)
이것이 내가 식성을 취향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과 삶으로까지 확장시켜 넘나들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냅 둬, 이렇게 살다 죽게." 하는 자조인지...
"내버려 둬, 저렇게 살다 죽으라고..."하는 타성의 꾸짖는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취향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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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2 10:3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장,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인데,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권 다 땡기네요. 이래서 서재글들을 읽기가 무서운 겁니다. ㅎㅎ 마음 속으로 체크만 해 두고~
그 환자, 진짜 재밌어요. -순해지니까 오히려 재미없다는 양철님도 재밌구요.

2011-12-22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