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감기가 들어 맥을 못추는 아들녀석을 북돋워준답시고 온가족(이래봐야 남편, 아들, 나 3명)이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쇼파에 옹기종기 앉아 텔레비젼을 보았다.

아마 선거 홍보용인거 같은데, 개그맨들이 나와서 그 프로그램을 앞으로 10년간 이끌어갈 메인 MC를 뽑는 선거를 하기 위한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근데, 참 이상도 하지, 개그맨들의 그것이었는데, 재밌다거나 웃기기 보다는 안습이어서 난 보다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아침, 방현주의 라디오 북클럽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소개받았다.

그동안, 자신의 소신이나 주장을 한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던, 이권우가 자신의 그것을 드러낸 것도 멋있었고, 앗싸~^^

책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책을 읽은 사람이,

다시말해 책을 읽고, 책을 통하여 깨달은 사람이 그걸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하여야 하는지,

설득과 감화의 적절한 예를 보여준것 같아서 좋았다.

에효, 나 참 말 어렵게 한다, 이권우의 언변에 엄청 감동받았다. 한마디면 될 것을~ㅠ.ㅠ

 

오늘 소개된 책은 '주대환'의 '좌파논어'였는데, 난 제목을 듣는 순간 '김규항'의 '좌판'을 연상했다.

 

 

 

 

 

 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김규항의 좌판
 김규항 지음 / 알마 /

 2014년 4월

 

저자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좌파'와 '논어'의 조합이 가당키나 한것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일단은 그를 믿고 닥치고 읽고 볼 것이고,

그런 후에라야, 이 책과 주대환을 이해할 수 있고,

이권우를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설레발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실패와 실수는 용납되지도 용서되지도 않을 것처럼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요즘의 현실을 놓고봤을때,

공자와 논어를 새로운 시선으로 봤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그걸 주대환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공자가 당대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존경과 추앙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다가 상처받기도 했다. 비난보다는 경멸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권력과 힘을 가지면 사람들이 뒤에서 욕할지언정 함부로 대놓고 경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잠시 권력과 힘을 가져보았고, 그 효과를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갖기를 간절하게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 자주 쓸데없는 헛발질을 하고, 정치적 오판(誤判)으로 비웃음을 샀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비난과 비웃음,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 이런 것들을 2천500년 전의 공자도 겪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공간은 지금이나 당시나 비슷하지 않았을까? 나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알라딘 책소개'인용)

 

그걸 이권우는 다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핵심은 그대로인데, 가는 방법이 진보적이다.

그러자 방현주가 묻는다.

"극과 극은 통해서 일까요?"

이렇게 안물었으면 어쩔뻔 했나? 이토록 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현주 무한 땡큐다.^^

"진정성이겠죠."

 

이쯤에서 끝났다면, 내가 이권우를 향하여 설레발을 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진보주의와 진보정당의 문제점과 대안을, 주대환의 이 책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논어는 연대(連帶)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고 격려하는 '연대의 언어'다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하자.

부모에게, 형제에게, 동지에게, 잘하자.

 

그러면서, '우월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덜됐다'라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못하면서 연대를 이땅에 뿌리 내리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나 하는,

초로의 한국 진보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는 말로 맺는다.

 

내가 오늘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되 배려하지는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의식해야 할 주체는 자기자신이고, 배려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되는 것인데,

이게 바뀌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을 사는게 아닐까 하는 것.

가장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틈틈이 스스로를 위해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린다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든, 주대환의 해석이든 아니면 이권우의 그것이든 내가 설레발을 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읽은 '살아가겠다'의 '고병권' 같은 경우도 철학자나 인문학자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를 보면, 철학이나 인문학이야말고 무엇보다 삶과 밀접한 실천의 학문인것 같다.

주대환도 경험을 벼리어 글로 써서 그랬지만, 고병권 또한 현장에서의 목소리를 글로 옮겨서 생생하다.

 

 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를 보지만 모두가 신기루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던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11쪽, '책을 내며'중에서, '살아가겠다')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몸이 기억하는 것, 날것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날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로 와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를 꾸준히 계발, 적어도 유지할 수 있도록 수혈, 내지는 급수, 내지는 에너지 공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 길지만 같이 되새겨보면 좋을것 같아 옮겨보았다.

 

플라톤이 '철학하는 왕' 프로젝트에 실패하고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철학의 지헤란 홀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면 온갖 마찰이 생긴다. 그 마찰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돌멩이를 부딪치면 그렇듯, 우리의 부대낌은 열을 만들어내고 때로 불꽃을 튀게 한다. 그 불꽃이 영혼의 램프에 옮겨 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지혜가 아닌가. 나는 노년의 플라톤이 쓴 이 비유가 참 좋다. 서로 다투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때로 열이 나고 불꽃이 튀는 곳에서 우리는 영혼의 램프를 밝힐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불을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위대한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나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계속 기름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불은 금세 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쉼없이 가꾸어감으로써만 우리 영혼의 램프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참 멋진 학문이 아닌가.(29쪽, '살아가겠다')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언더그라운드 니체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인간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다. (노엘레 노이만)

 

새움 출판사 판 '이방인'과 관련하여 '노이즈 마케팅'운운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자가 본명을 사용하였느냐, 필명을 사용하였느냐,

영어판을 사용하였느냐, 불어판을 사용하였느냐,

따위를 가지고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는 것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기득권의 그것 같아서 볼썽사납다.

 

난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하기 위해선 그보다 번역을 더 잘해야 하거나 그보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번역은 삶을 해석해내는 일과도 닮았다.

내가 안 살아봐서 모르는 타인의 삶을, 더 어려운 말로 내지는 문장의 호응에 맞지 않게 해석을 해놓았을 경우,

그 문장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문장순서 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이정서의 '이방인'을 얘기하는 것은,

그동안은 죽어도 안 읽히던 책이 쉽게 읽혔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사람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밀도 있는 장르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싶었기 때문이다.

 

장르소설도 그렇지만,

문학작품의 경우, 내 경우엔 그랬었다.

구석구석 다양한 장치들을 해 놓았는데,

여러문장들이 각기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적재 적소에 배치되었을때,

그것이 적절하게 해석되었을 경우,

응집력을 발휘하여 마음에서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을 경험하였고,

그게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 카타르시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얼마나 수려하고 매끄럽냐 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이러한 응집력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반응할 수 있도록,

다시말해 화학반응이 제대로 일어나도록 불순물이나 이물질을 끼워넣지 않는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정서의 번역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김화영의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정서의 그것을 두고 '도덕적 해이'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처음 바탕체로 밝힌 이유에서, 이정서가 이런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을만큼의 '도덕적 해이'를 가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세상에는 이만큼 기득권의 그것을 견뎌낼 수 없을만큼 도덕적인 역자들만 존재했었고,

그리하여 난 책이 고프고 목마른 독자였으니까 말이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마립간 2014-04-16 11:53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양철나무꾸님.
저는 이 번역 논쟁을 흥미롭게 보고 있지만, 저의 판단은 유보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에게 판단에 도움이 될 조언을 구합니다.

'김화영의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누군가가 '김화영의 그것은 틀린 것이다'라고 판단한다면 그 판단의 적용 즉 옳고 그름의 적용은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옳지 않지만 수용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양철나무꾼 2014-04-16 12:29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님의 글들 귀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전 번역이란 작업이 얼마나 힘든 작업임을 알겠기에,
문장 하나 하나, 낱말 하나 하나와 싸워서 하나의 번역서를 만들어낸 김화영 님의 업적을 알겠기에, 또 그 반대 이정서 님의 경우도 미루어 짐작하겠기에, 저런 가변적인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흑과 백, 정오가 분명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는 흑과 백, 정오가 불분명한 논리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논리의 판단이 되는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결과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페어 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조건을 똑같이 주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조건이 다른걸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자체가 언페어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논쟁이 붉어지기도 전에 힘 없이 사그러들고 마는걸 너무 여러번 보아왔었기 때문에,
전, 이렇게 논쟁이 될 정도로 '도덕적 해이'를 가진 역자가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케 2014-04-16 12:24   댓글달기 | URL
오늘 이정서씨와 새움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비난하는 기사들이 죽 뜨던데 정작 핵심인 '번역의 적확성 또는 뉘앙스의 올바른 해석'에 관한 이야기는 없더군요. 당연히 논쟁의 출발부터 지금까지를 리뷰하는 가이드 기사도 없고... 기사만 보면 김화영의 번역에 반기를 든 익명의 번역자가 출판사 사장이었다는 '도덕성 논쟁 구덩이' 형
국인데 결국 이정서씨 까기 기사의 의심을 지울 수 없네요. 과연 김화영 교수가 문화권력이라 불릴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민음사가 출판권력인건 사실이지요.

두 번역서를 번갈아 읽어보니 가톨릭판 한글성서와 개신교판 한글 성서를 읽는 느낌이더군요. 불문학 전공도 아니고 불어 사용자도 아닌 제 입장에선 이정서 번역에 위화감이 덜하다는 건데 문제는 영어판 중역 시비가 단순히 레퍼런스였는지 아니면 텍스트였는지인데... 좀 추이를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양철나무꾼 2014-04-16 12:47   URL
로쟈님의 오늘 페이퍼를 보니, 러시아판을 로쟈님에게 의뢰(?)했었나 보더군요.
그걸로 미루어, 영어판, 독어판, 등 여러가지 판본들을 참고했을 수도 있고, 텍스트로 썼을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원작인, 불어판과 비교를 했느냐, 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저것을 다 떠나서...기득권과 권력에 가려져,
제 목소리와 의견을 내지 못했던 많은 힘없는 번역자들을 생각할때,
이정서의 그것이 다행이고 참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나저나, 여의도의 벚꽃은 흐드러지다 못해 이울었겠네요?

jlovek 2014-04-16 17:18   댓글달기 | URL
우와, 왠지 멋져 보입니다 양철나무꾼님!
"이런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의 '도덕적 해이'를 가진 것이 다행"이라는 구절이 뒤통수를 퍽! 하고 때리네요.

위 '알케'님의 궁금증에 답하자면, 제가 지금까지 본 것을 그대로 옮기면,
이정서님은 처음에 불어판보다 영어판이 익숙해서 영어판 중심으로 번역을 하다가, 나중엔 그게 아무 의미가 없어져서(아마도 중역의 폐해를 깨달았다는 의미 같음) 영어판조차 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어판을 보고 한 것이죠.
책을 읽어보면 존댓말 부분에서 영어판과 불어판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까지 한 것을 보면 불어판을 기준으로 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근데 양철나무꾼님은 글을 참 잘 쓰시네요. 뭔가 있는 것처럼, 멋지게... 뭐라고 설명하기가 좀ㅠㅠ
암튼 엊그제도 봤는데...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저는 번역에 관심이 있는데 님처럼 우리말을 멋지게 구사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러니까 외국어를 외국어 티 안 나게 우리말로 산뜻하게 번역해내기가 아주, 몹시, 매우, 대단히 어렵습니다ㅠ


양철나무꾼 2014-04-19 09:04   URL
왠지 쑥쓰럽지만, 기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님의 그 기백 꺾이지 말고 건필하세요,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2014-04-16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4-04-18 19:36   댓글달기 | URL
"장르소설도 그렇지만,
문학작품의 경우, 내 경우엔 그랬었다.
구석구석 다양한 장치들을 해 놓았는데,
여러문장들이 각기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적재 적소에 배치되었을때,
그것이 적절하게 해석되었을 경우,
응집력을 발휘하여 마음에서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을 경험하였고,
그게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 카타르시스였다."

특히 이부분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마찬가지의 경우를 만나게됩니다

작품의 전반에 걸쳐있는 전후 상관 관계(흔히 context)와 별개의 것이 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문맥이 주는 상황성을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도록, 즉 말씀해주신 "응집력을 발휘",
그 응집력들이 작동하는 순간 완전 새롭고도 아찔한 감동을 준다는데 적극공감합니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응집력 미발휘)은
그야말로 글의 가치를 상당히 훼손하거나 혹은 결정적인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경우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 치명적인 오류가 수백년동안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표현 불가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 동양 고전도 머리가 쭈삣서고, 뼈마디가 으스스해지는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ㅠ.ㅠ
(장르 소설도 이러한가요? 여쭈나 마나겠지만...ㅠ.ㅠ)


양철나무꾼 2014-04-19 09:01   URL
월레레~~~~~, 이게 누구래요~^___________^
덥썩~(( ))

차트랑 2014-04-20 01:23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월레레~~~'는 반겨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오랫만에 왔더니 알라딘 서재가 무척 낮설게 느껴지는군요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서재에 자주 들르겠습니다

좋은 글, 기대할게요~~

마립간 2014-04-21 08:56   댓글달기 | URL
번역에 관해 양철나무꾼님의 댓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제 서재에 올리려 했는데, 국가적인 사고 있어 안 올렸습니다. 제 글에 양철나무꾼님의 글을 패러디처럼 인용한 부분이 있어 양해를 구하며 내일 올릴 생각입니다. 제 글에 대한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양철나무꾼 2014-04-21 12:10   URL
국가적인 우울증으로 인한, 집단 멘붕 상태라고 해야할까요~--;
이럴때일수록 님이나 저같은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주변으로써 굳건해야 할텐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 하루하루입니다.

그리고, 글은 상업적 목적을 위한 그것이 아닌 다음에는 도용이 되든, 인용이 되든, 패러디가 되든...
좋을대로 하십시오.
제가 게을러서 일일이 댓글 달기가 용이하지 않지만,
마립간 님이 인용하신다면, 오히려 제가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다는, ㅋ~.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이곳 서재에서 처음 활동을 할때는 새벽 무렵에 깨어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 새벽 무렵에 깨어있다 보니, 이곳 서재를 어슬렁거렸다가 인과 관계에 맞는 표현이겠다.

근데, 내가 새벽 무렵에 깨어있는 것은,

잠 없는 할머니의 불면증이랑은 좀 다른 그런것이었는데...

낮동안 육체노동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는 나로써는,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말똥 말똥을 굴리는 요사스런 것이었다.

 

다시말해, 몸의 상태로는 언제 어디서고 눈만 붙이면 쪽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정신상태로는 늘 깨어있으려고,

아니 늘 'Yes, I can.'의 상태로 스탠바이하고 있으려고 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육체와 정신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가끔 눈에 헛것이 보였으며, 급기야 헛소리도 하기에 이르러,

이러다가 임성한 작가의 '왕꽃선녀님'을 영접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었다.

 

그렇게 된 근원을 나름 분석해 보자면,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린시절 부모가 아닌, 조부모와 고모들 밑에서 자랐고,

당신들에게 아무리 귀하게 대접받으며 컸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무의식 속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로 각인되었으며,

아빠의 나를 향한 그것은 애정이라고 하기엔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모든 것에서 평범함 - 그 이상이 아니었던 내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다시말해 그들에게마저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든,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나서는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오지랖을 떨며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을 굴리는 각성 상태로까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간혹,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는 아픔이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었지만,

난 그들을 비겁하게 비껴갔다.

내 자신이 아직 그 담굼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닮아도 너무 닮은 그 친구를 향하여 서슴없이,

영혼의 찜찌름한 냄새까지도 닮았다고 할 수 있겠고,

그 친구를 거울 삼아 날 비추어 보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 친구의 상처에서 내가 본 것은,

상대방의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내 자신의 상처의 깊이였다.

내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수 닦아낸 후에야,

옹이가 훈장처럼 담담 또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얼마전 지인 하나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하면서 내게도 장점과 단점을 얘기해보라는데 딱히 생각나는게 없는거다.

예전 같았으면 '다 잘해요'라든지 의욕이 앞서서 '뭐든지 잘할 수 있어요'라고 했을텐데,

이제는 장점이 하나도 없고 단점으로만 똘똘 뭉쳤어도,

그게 난데 어쩔 것인가, 내지는 나름 찌질한 단점이 매력이라고며 쿨하게 넘어갈 수 있겠다, ㅋ~.

 

암튼,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 세 부터 삼 세까지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 시기에 엄마가 기르지 않은 아이는 정신병자가 될 확률이 높고 강아지도 새끼 때 어미 품에서 떼어 놓으면 사망률이 구십 퍼센트나 되죠"

라는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말의 조건에 꼭 부합하는 나는, 그동안 살면서 쉽게 맘을 툭 터놓고 무장 해제를 하지 못했었다.

 

실은 이 책을 몇 년 전에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이 책 속의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의 세진의 얘기는 또 다른 나의 얘기라고 할 정도로 나의 상처를 후벼팠고,

그리하여 감당할 수 없을만큼 아파서 잔뜩 움추러 들었던 것이었다.

"그 슬픈 얘기를 하면서 왜 웃어요?"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며 가슴 밑바닥으로 슥 칼날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오래된 방식이았다. 나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웃으면서 되도록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에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적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발뒤꿈치를 땅에 붙이고 뻗대는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다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제 와 새삼스럽게 올어요? 이 나이에?"

"어리광을 부려본 적 없어요?"

"없어요."

"한번도?"

"네. 기억하는 한에서는 전혀."

"슬픈 애기를 할 때는 슬퍼해야 하잖아요."

"남 앞에서 울어본 적 없어요. 선생님은 남이잖아요."(1권, 79쪽)

 

나또한 '수도꼭지'나 '집을 팔아 벌금을 내야 하는 여자'라고 하여 '집.파.녀'라고 불리울 정도로 눈물이 헤프지만,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일이었지, 내 자신의 일로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전 이곳에서 알게된 친구 하나가 '애착의 변화'라는 설문을 의뢰해 왔다.

다른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부탁할 수 있는 '질문이 다소 길고 민감'한 것일 수는 있지만,

나의 이런 과거사와 가족사를 잘은 몰라도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케이스스터디가 좋아도 쉽게 설문조사를 의뢰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을게다.

 

어떤 종류의 귀뜸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가 설문의 문항들을 보고,

'헉~'한동안 숨쉬기가 힘들었다.

내용이 다소 민감한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미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처를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는 꼴이었다.

 

상처를 일단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아야, 치유책도 생긴다는 자명한 이치가 요번에도 몹시 아팠다.

난 직업적 소명도 내세우고,

병을 오래 앓아왔던 만큼 병의 내구력도 내세워 보고,

그동안 꾸준히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노력을 했던 만큼,

이내...상처의 치유와 봉합을 위해 이 책을 다시 펼쳐 보았고,

요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이책에서 세진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치유하고 치유받고자 하였다.

"ㆍㆍㆍㆍㆍㆍ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찾아봤어요. 혼자 나를 분석할 때는 그 사람 책이 많이 도움이 됐는데 그가 가장 최근에 낸 그 책은 귀신들림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저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학문적 성과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만한 절박함으로 그 문제를 연구하고 발표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었다. 객관적 실체로서 사탄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목사가 집전하는 엑소시즘 현장을 참관하고, 귀신들림의 원인과 증상, 해결책 등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삶도 결국 그 길로 가는군요."

  "융이 말년에 그쪽으로 갔죠? 어쨌든, 그 책에서 다시 확인한  내용은 사탄이라는 존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연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랫동안 외로웠던 사람들,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에게 깃들인다는 거죠."

  "나는 그 외로움에 한가지 더 첨가하고 싶어요. 적개심. 적개심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죠. 공격성이나 방어 의식."(1권, 196쪽)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의 세진이 나였다면,

이 책의 세진이 치유받은 그 방식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아졌다면,

그러기만 했다면, 그게 끝이었다면, 난 이 페이퍼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거야. 심리적인 공백감, 애정에 대한 허기, 보호받고 보살핌받고 싶다는 소망 같은 거. 물건을 사면서 나는 애정의 대용품을 구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사는 물건을 내 존재와 등가품으로 여기기도 했을거야. 그랬으니까 동종 품목 중에서는 되도록 고가의 물건을 집어들곤 했겠지."(1권, 255쪽)

 

  "그런 이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야. 강한 의지로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성실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어. 이런 이들이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구멍들을 하니씩 가지고 있는 거야. 이멜다의 구두나 재클린의 소핑 벽도 그런 예야. 목표 지향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느라고 억압해둔 감정과 무의식 영역의 욕망들이 그런 식으로 이성에게 복수하는 거래."(1권, 267쪽)

왜냐하면,

어려운 심리학 용어로 도배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순 외로운 사람들 천지이고,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인데,

실패하고 마음 아파하니까 말이다.

 

나는 한번도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2권, 52쪽)

나도 남편이랑 6년을 연애하다, 결혼한지 올해로 19년인가 보다.

그런데 아무리 분위기 조성되고, 감성 충만하여도...사랑한다는 말을 해본적이 없었다.

남편이 하는 '사랑해'라는 말에 '동감이야'라든지 '나두'라고 소극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서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웠다.

 

이 외로운 세상을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은 어쩜 아주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이 필요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 따위는 필요없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흠뻑 담금질하고, 내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후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니, 밥 사줅게 나와 하면 거절하는데, 언니 밥 사줘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고. 그러니까 저 사람을 불러내려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해야 한다고.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넘겼던 말이 뒤늦게 목에 걸렸다.(2권, 175쪽)

다시말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사랑을 하는 것도 나이고,

사랑을 하지 않는 것도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물건을 취하거나 버리는 것도 나의 자유 의지이다.

하지만,

물건과 달리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취하거나 버리는 것은 나의 자유 의지이지만,

거기에는 꼭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김형경의 이 책까지는 재밌게 읽었다.

근데, 근간 '남자를 위하여'는 모든 걸 다 안다...가 지나쳐 거의 우상화, 신격화 수준이다.

내가 원하는 건...

힘들때,

등짝 한번 툭~하고 두들겨 주고...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아무말없이 술병을 기울여주는 사람이지,

모든 걸 다 알아주는 신이 아니다~ㅠ.ㅠ

 



 
 
꿈꾸는섬 2014-04-02 06:56   댓글달기 | URL
상처를 들춰내고 들쑤시고 헤집어내야 그걸 치유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요. 자꾸 감추려고 할수록 상처는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수도꼭지에요ㅜㅜ
그리고 그 설문ㅜㅜ 저도 참 힘들게 답했어요. 그게 참 그렇더라구요.
사랑을 선택하는~ 이 책 오래전에 읽으며 많은 공감했던 기억이나요.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 좋은 일 행복한 일 많은 하루되시길~~

하늘바람 2014-04-02 13:18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냥 가슴아픈기억이 살아나더라고요 근데 아닌척하며 해버렸다는
 

남들이 다 좋다는 책이 내게는 별로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봐도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경우가 일본 소설이다.

일본 소설이라면 정서가 우리와 비슷해서, 보통 쉽게들 감정이입을 하곤 하나본데,

난 어쩐 일에선지 영 불편하고 마뜩잖다.

 

 

 

 

 

 

 

 

그렇다고 일본 작가라고 하여 마냥 간과할 수만은 없는게,

내가 엄청 감동 받았던 '신들의 봉우리'를 썼던 '유메 마쿠라바쿠'의 경우,

'음양사' 라는 책은 어떨까 하였는데,

그야말로 귀신과 혼령이 블루스를 추는,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소설이었다.

 

가만보면, 일본소설에는 혼령이랄까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그게 내게는 낯설고 거부감이 생기는 거다.

 

SF소설에 등장하는 science fiction이나 social fantasy적 요소를 수긍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혼령이나 영혼이 시도 때도 없이, 어떤 기준이나 경계도 없이 등장하는게,

개연성을 방해함은 물론, 억지다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코널리'의 '모든 죽은 것' 정도가 되면 낫다.

혼령이나 영혼의 중간자로서의, 영매가 등장하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일본은 혼령이나 영혼을 하나의 전통이나 민간신앙 차원에서 흔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수도꼭지 끝에 맺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울리는 것처럼, 외로워, 외로워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59쪽)

라는 표현 따위로 미루어볼때, 이사람의 감수성과 필력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하긴 내가 이 사람의 다른 것들을 평가할 깜냥은 아닌 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사람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겠는데,

나와 코드가 안 맞을 뿐이다.

 

어차피 애도라는 것은 죽은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부고가 난 이후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의 편의와 마음대로 꿰어맞추고 각색하고 해석하려든다.

 

왜냐하면 애도라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면,

"ㆍㆍㆍㆍㆍㆍ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551쪽)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인생의 본질이라는 허울 좋은 살아 있는 동안에 대해서, 가 아니라,

죽어서 어떤가 따위를 얘기해야 할텐데...

살아있을 때의 그(그녀)와 죽어서의 그(그녀)가 마치 별개인양 얘기하고 있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살아있는 나날들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강령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거야.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죽은 사람과 자신을 같이 생각하는 건 달라.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일이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돼.ㆍㆍㆍㆍㆍㆍ(264쪽)"

이렇게 산자의 삶 위주로 얘기하고 있다.

내가 생략해버린 저 말 줄임표 부분에는,

우리식으로 따지면 죽은자는 죽은자고, 어찌되었건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뉘앙스가 담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면 죽은자를 위한 애도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얘기하는게 낫지 않을까?

지지고 볶고 싸우고 다투더라도, 그게 삶의 온기가 바탕이 되어 비롯되는 그것 말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느라 왕방울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마워할까?

눈물 흘리는 내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닐까?

애도의 목적이 내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니라,

진짜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면,

살아있는 동안 하루를 살아도 매순간순간을 가열차게 살 수 있도록,

사람의 단점보다는 작은 장점이라도 찾아내어 북돋워 주고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러려고 애쓰느라고 흘린 작은 땀방울을 같이 나누는게 오히려 값지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의미가 좀 애매모호한데,

사고사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고,

자신의 명대로 다산 다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혜경 외 지음,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엮음 /

 애플북스 / 2014년 3월

 

죽을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애도받고 못받고는 차후의 문제가 될 것 같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의 여부가 우선이 될 거 같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다양한 집단과 연령대의 국민들 총 16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단다.

이게 확률과 통계를 필요로 하는 역학조사라면, 165명이라면 대상이 좀 작은 감이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충분하다고 본다.

 

이 자료를 보니,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으로 응답자가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이었고,

‘주변 정리’,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음’, ‘통증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그 뒤를 이었단다.

 

이걸 누구의 문제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걸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인사치레가 되어버렸다.

건강함이란 몸과 마음, 심신이 균형과 조화되어야 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어긋나는 것이니...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니, 곱게 나이먹는다 내지는 나이값하고 산다는 게 제대로 된 덕담이다.

  

암튼,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다.

알지도 못하는 사돈의 팔촌, 조문을 가고 인사치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거다.

태어나는건 내가 어쩌지 못했지만,
나의 죽음은 예비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내 의지대로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죽음마저도 스스로 예비할 수 있다면 바랄 게없는 어른일게다.

동안을 부러워하지말고,

나이값하고 사는걸 부러워하자~!

 



 
 
하늘바람 2014-03-07 23:33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넘 빨 리 들어서 그 값하기도 허걱되네요 저도 반성해요

Ralph 2014-04-03 10:15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든것처럼 생각됨니다. 대부분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나 주위 사람이 안다해도 가르쳐주거나 도와주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누구도 가르쳐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차피 자신이 알아야하고,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사는 것과 같겠지요.
 

 

 

여자의 솜씨라고 해도 좋다 싶은 이건 울아들의 작품되시겠다.

얼마전 날 추웠던 어느날 더이상 책은 보기 싫고 할일은 없어 심심해서 만들었단다.

난생 처음 만든거라는데, '마음씨, 맵씨, 솜씨' 3씨를 자랑하는 날 닮지 않았다고 할까봐 손끝이 야무지다.

 

이게 정체성이란 말로 대치 되어도 좋을까 싶지만,

어렸을때 난 이 야무진 솜씨를 자랑하는 무언가를 직업으로 갖게 될 줄 알았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고, 아직도 그게 회한으로 남는다.

 

 

책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대충 골라 읽는 타입이기 때문에,

보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러브 라인을 그린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을 읽은 다음엔,

영국 조각가 남자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독서는 말 그대로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기 때문에, 선택을 할때 신중하지도 않지만,

읽다가 별로이면 집어던지면 그만이었다.

 

근데, 근래에 읽은 책 두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이,

끝까지 읽느라 인내심을 발휘하는 수고를 하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게,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게 일반적인 검증을 거친작품인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이 큰 감동을 느낀 책이라고 해서,

나도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것이다.

 

 

 

 

 

 

 

우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같은 경우,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 만으로도 결의를 다지기 충분한데,

강신주의 감정수업, '자긍심'편에서 언급되어 읽어봐야 겠다 싶었었다.

강신주는 '자긍심'을 일컬어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한다.

 

솔직히  '정체성'의 개념조차 모호했던 난,

책을 읽고나니까 선명해지는게 아니라 더 모르겠었고,

그리하여 네이버를 찾아보니,
'어린이가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차별화되고 사회에서 취득하는 과정을 발전시키게 되는 '자아'의 의미를 말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도 애매모호해서,

강신주가 언급한 자긍심이란 단어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본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얘기하는듯 한데,

그중 지속되어 자신의 것으로 습관화 돼고,

긍정적이어서 본인이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다.

'자긍심','자아존중감' 정도가 되면 뜻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렇게 무덤덤한걸,

처음 너무 어려웠거나 내 취향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은 신프로이트주의 이론가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언급한거라고 하는데,

프로이트 이론도 모르는 내게 신프로이트주의라니 머리에 쥐가 날 수밖에~--;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 책이 별로였던 이유는 샹탈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에 서글퍼하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어느 날 연하의 애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고 하소연 하게 되고,

애인 장마르크는 그런 샹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시라노'라는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인데,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점이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라고 한다.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또다시 임신을 하라고 부추기는 시누이와 거기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회의를 느껴 이혼하고,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캐리어우먼이 된다.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같이 사는데, 잘은 모르지만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는 변변치 못한것 같다. 

 

나이가 먹고 늙어가는 걸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가지고 서글퍼할 수는 있다.

평생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내가 샹탈이 별로인건 이런 것들 때문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면,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실천의 방법이지,

장마르크에게 그렇게 표현한 순간 또 다른 애인이 가능하다는 허용이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시라노'라는 익명에게서 받은 편지를 감추는 그 마음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들을 '정체성'으로 제한시켜 버린 작가도 별로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또 한권, '올리버 키터리지'가 그렇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세밀한가.

감정이 느끼는 파동은 얼마나 섬세할 수 있나?

인간과 인간이 내는 파동이 물결처럼 어우러져,

서로 간섭 현상을 일으키는 점이지대도 있겠지만,

어떤 파동에도 휩쓸리지 않는 소외지대도 있는 법.

 

이 책은 'ㄱ'님의 리뷰의 이 구절이 너무 좋아 외우다가, 내 편견이 잊혀질때쯤 되어 집어 들었다.

이 책 같은 경우는,

꽃이 피어 붉기는 잠깐이고 줄기에 이파리를 매단 채 견뎌내는 시간이 더 오래임을 조용히 얘기한다.

우리의 불편하고 추레한 현실 한쪽 자락을 건드려 감성을 자극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인지는 모르겠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조각조각 단편의 삶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은,

삶은 매순간 우리가 계획하거나 맘 먹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늙었거나, 나이를 먹었거나 덜 먹었거나, 에 관계없이,

우리가 매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거기 나오는 '샹탈'과 '장 마르크'로 돌아가,

내가 별로라고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이유는,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해서도 아니고,

사랑이 영원할거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순간에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순간조차도 서로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현세의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라는 책이 궁금하다.

이 책엔 '해지기전 한걸만 더 걷다보면' 류의 글이 가득할 것 같다.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이현세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2월

 

다시 처음의 만두 빚는 울아들로 돌아가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그것을 발휘하며 살 수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것을 선택한다고 하여 삶도 2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할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서,

놀땐 노는데서,

만두를 빚을땐 만두를 이쁘게 빚는데서, 울아들은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샹탈은 그순간 뭇 남자들이 아닌 장 마르크가 쳐다봐주지 않는다면 서글퍼하면 그만인 것이고,

장 마르크 또한 샹탈을 여러번 다른 여자와 혼동한 과거를 놓고 그럴게 아니라,

그순간 샹탈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때 놀라면 된다.

 

흔히들, 몸이 나이를 먹지 마음이 나이가 먹지를 않는다는 말을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마련이고 언제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라면,

밥을 꼭꼭 씹어먹듯, 내 발로 한걸음씩 내딛듯,온 몸으로 통과하며 살고 볼 일이다.

이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랑은 좀 다른 의미인데,

사람이 항상 전력질주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항상 최선을 다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는가?

잘하고 못하고, 의 개념이 아니라,

나를 올곧이 내어맡기는 의미라고 해야할까?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게 다 한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관계가 정리되면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고 밍기적거릴 수도 있고 그런 것.

 

정체성을 난 '자긍심' 내지는 '자아존중감'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거기서 최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두번째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차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이 얘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정도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그게 사람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다.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대상에 집중하고 볼 일이다.

그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꿈꾸는섬 2014-02-20 10:46   댓글달기 | URL
아드님이 빚은 만두 정말 이쁘네요. 맛나보여요.
감동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느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여러 사람이 좋다고해도 내겐 읽기 어렵고 별 감동없는 것들도 많더라구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는 것이라 아마도 죽을때까지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알케 2014-02-21 08:43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딸래미를 키우시는군요ㅎㅎ 맵시하고는..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사다놓긴 했는데 저는 어째 시들합니다 ,

하늘바람 2014-02-22 07:45   댓글달기 | URL
만두 만두 정말 아드님솜씨여요? 것도 첨 만든?와 정말 감탄에 입이 쩍 벌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