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손석희를 듣는데, 기상 캐스터가 첫눈이 내렸다고 전한다.
일순간 '아웅~'하면서 김이 빠졌다.
나이를 먹었어도 첫눈을 기다리는 설레임은 이맘때쯤 여자들의 로망 아닌가 말이다.
그때 손석희가 툭 한마디 던졌다.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흑~멋지다, 손석희~!^^
아직 첫눈 오는 날 들어 줄 음악도 듣지 않았는데 말이다.
"형은 혹시 형 안에 무언가 잃어버린 게 있다고 느껴본 적 있어?" 동생이 말했다. "그게 뭔지는 몰라. 공처럼, 또는 돌덩이처럼, 쇠붙이일 수도 있고 솜이나 풀, 그런 거일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내 안에 있는 거야. 불이나 분노 같은 건 아니야. 그냥 커다란 공이야. 그리고 도저히 그걸 찾을 수가 없는 거야." 동생은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슴 왼편을 두드렸다. "여기 있어. 바로 여기."
언젠가 이 책을 읽다가 '찌리릿' 전류에 감전되는 듯 했었다.
내 안에 늘 자리하던 감정이었지만 언어화 할 수 없어 표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 사람은 마치 내 안에 들어왔었던 것처럼 그려내듯이 표현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이런 구절은 처음 읽을 때부터 거슬렸다.
"고통스럽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고통은 주는 거지, 받는 게 아니거든."
한번 좋아하거나 내 안에 들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찌리릿 한 책에 등장하는, 찌리릿 날 감전시킨 주인공이 하는 말이니까...왠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어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움란,
몸의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통각수용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걸 요즘의 내 일상에 대입시켜 보자면, 고통을 티끌로 주고 태산으로 받는 격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좀 무덤덤해지거나 무뎌질 필요가 있겠다 싶었고...
그래서 되지도 않는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모든 비밀을 안다고 생각하면 모든 치유법도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코리건이 헤로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다지 크게 놀랍지 않았다. 동생은 항상 그들이 했던 것을 최소한은 하곤 했으니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고집스러운 주문이었다. 동생은 자신이 땅을 디디며 걷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발걸음 소리를 듣고자 했다. 거기서 도망치는 일은 없었다. 더블린에서도 그랬었다. 그 무모함이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하긴 했지만, 그는 그가 떠난 현실 세계의 좁은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동생은 약에 취하지는 않고 그저 그들과 수준을 맞추는 정도인 것 같았다. 동생은 고통과 친숙했다.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면 고통을 받아들였다. 동생이 헤로인을 맞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같은 공포 속에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75쪽)
이 책의 고통 이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실은,
이 책의 동생 코리건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순간...현실에서 또 한명의 코리건을 순순히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엊그제 일요일.
남편은 자기 동생, 즉 서방님의 '안수 집사 취임식'이 있으니 온가족이 가서 축하해 주자고 했는데...싫다고 하였다.
미리 초대받지 못한데다가,
그 안수 집사라는 것이 되기 위하여 무리한 헌금으로 살림이 쪼들려 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서방님의 그 종교라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거기엔 거만함이 있었다. 그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을 탈때 거만함은 생존이 된다. 그때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는 때로 자기가 스스로를 미워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발을 없애 버려. 이 발가락도. 이 장딴지도. 움직임이 없는 곳을 찾아. 그가 이러는 것의 대부분은 잊어버림이라는 오랜 치유에서 연유한다. 자신에게 익명의 사람이 되는 것, 자신의 육신이 자신을 흡수해 버리는 것. 하지만 중복되는 현실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동시에 그의 마음이 그의 육체가 편안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마치 바람과 섹스를 하는 것 같았다. 복잡하게 엉켰다가 기쁨에 들뜨게 한 후 가만히 떨어져 나가 다시 그의 주변에서 부드럽게 맴돈다. 줄은 아픔이기도 하다. 아픔이 늘 거기 있으면서 그의 발을 파고든다. 장대의 무게, 바짝 마른 목 안, 욱신거리는 팔, 하지만 그 아픔이 사라져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을 때 그것은 환희였다. 그의 호흡 역시 그랬다. 그는 그의 숨결이 줄로 들어가 그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라지는 이 감각. 모든 신경이. 모든 피부 층이. 그는 타워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논리가 풀려났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지점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의 몸은 그 바람을 몇 년 앞당겨 미리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409쪽)
덩그러니 혼자 남아, 어떻게 해야 서방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리 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방님의 그 종교라는 것이 육체의 고통 쯤은 극복할 수 있게 하는 runner's high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책의 '애.정.남'은 그걸 '종교'가 아닌 '결혼'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휴우~=3=3=3
나는 잠시 후 클레어의 남편이 다시 그녀와 함께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잠시 있은 것만으로도 그가 누그러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런 것이 결혼인지도, 결혼이었는지도, 또는 결혼일지도 모르겠다. 가면을 벗게 만드는 것. 피곤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것. 몸을 기울여 함께한 세월에 입 맞추는 것, 그 세월들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것이기에.(538쪽)
그동안 종교 서적을 많이 읽지는 않았어도...전혀 안 읽은 건 아니었다.
당장 생각 나는 것만 옮겨 보자면,
김규항의 <예수전>
이현주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예수의 죽음><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오강남의 <장자><도덕경><예수는 없다><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등이 있다.
내가 읽은 어느 책에서도 무리한 헌금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럼,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건가 싶어 택한 책이 '오강남'의 <종교, 심층을 보다>이다.
이 책에서 '애.정.남'은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정리한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종교에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가 있단다.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은 종교가 달라도 서로 통하기 때문에 상대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단다.
표층 종교, 심층 종교의 구별을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타인 중심주의,신 중심주의로 넘어가는 깨달음으로 표현했다.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심층 종교의 그것으로 봤다.
그렇다면 표층종교,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논리로, 지극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내가 불안하여 들추게 된 책이 '알랭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이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무신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역시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그는 책에서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여전히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랑, 믿음, 관용, 절제 등 종교의 미덕을 배우고 실천하자고 제안한다.
'최근 서구사회에 공격적인 무신론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 책은 공격적 무신론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며 '완전한 무신론에서 종교를 존중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개인적 여정을 담은 책'이라고 말한다.
암튼, '애.정.남'을 빌려 몇가지 정리해 보자면...
첫눈은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누구는 종교의 힘으로, 누구는 결혼의 힘으로 극복한다.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아직은'긍적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등이다.



누구는 종교의 힘으로, 누구는 결혼의 힘으로 극복하는...그 '고통을 극복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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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남'의 강력한 항의로 내립니다~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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