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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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참 불공평 하다. 선(善)이 인정받고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악(惡)이 반드시 징벌 받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의해 그냥 흘러갈 뿐이다. 그런 것이 삶이라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정말 삶은 '원래 그런 것'일까? 지금의 내 삶도, 400여년전 낮선 이국땅에 표류해 온 그들의 삶도, 원래 그런 것인가? 조금 씁쓸하다.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책 임에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들. 이런 작품들을 보면, 안타깝다. 훌륭한 책이 반드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인생이고 삶인가?

'천년의 왕국'은 400여년전 동방 미지의 나라에 표류해 온 네델란드인의 이야기이다. 벨테브레, 에보켄, 데니슨. 그들의 불안한 심리와 그들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소설의 축으로, 효과적으로 서술된다.

'벨테브레', 그는 우리가 역사시간에 '박연'으로 배웠던 인물이다. 여기서 우린, 조선의 표류해 왔던 또 다른 네델란드인 '하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가사키로 가려다 폭풍우에 좌초된 하멜일행. 그들을 억류한 조선조정은 26년 먼저 표류해 와 정착한 '벨테브레'를 보내 그들을 조사하게 한다.(p.15-20) 이처럼, 26년이란 시차를 두고 조선을 표류한 두 이방인의 만남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김경욱은 이미 이와 유사한 단편을 선보인 적이 있다.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 마지막에 실려 있는 '나가사키여 안녕'. 인상깊게 읽었었다. 양자는 단편과 장편이라는 차이외에 한가지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나가사키여 안녕'은 하멜이,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가 화자라는 점이다. 이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한 일부 에피소드가 양자 모두에 공유되는데, 이는 '나가사키여 안녕'을 바탕으로 이 소설이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소설로 돌아가자.

'벨테브레'는 하멜일행을 보며, 이국땅에서 보낸 26년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즉, 이후 전개는 지금의 '벨테브레'가 회상하는 과거의 이야기. 조선에 억류된 '벨테브레' '에보켄' '데니슨'. 이들은 국왕의 근위병으로, 화포제작자로, 때로는 죄인으로 새로운 삶을 강요받는다. 낮선 이국에서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이들의 내면심리와 그 변화, 새로운 삶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에 주목했다.

'벨테브레' 그는 다른 두명을 어우르는, '수용과 거부' 양극단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하게 품고 있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화포제작에 몰두함으로써 극복하려 한다. '에보켄' 굉장히 적극적인 인물이다. 삼국지의 장비같은 화통한 성격으로, 변화된 삶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척하려 한다. 이교도(이들이 조선사람들을 칭하던 말)들과 잘 어울리며, 무녀 '자줏빛 구름'과 동거하기도 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회의적이다. '데니슨' 그는 도저히 강요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신이 불안정하고,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채 20살이 되지 않는 나이에 강요된 변화가 너무나 힘들었던 데니슨.

이런 이방인들과 조선인을 연결 해주었던 인물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젊은 관리'이다. 그는 이방인들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배워간다. 나중엔 그와 에보켄이 서로의 언어에 능숙해 질 정도가 된다. '젊은 관리'는 그들을 항상 걱정해 주고, 관심을 가져준다. 그들의 국경,피부색을 초월한 우정 역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야기 전개와는 큰 관련없지만 '젊은 관리'가 연루된 살인사건을, '에보켄'이 놀라운 과학지식을 동원해 그의 무죄를 증명해 보인 부분은 또 다른 차원에서 흥미를 주었다.

이방인들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들 눈에 비친 우리는, 정이 많고, 순박하다. 한 장면을 살펴보자. 억류되어 있다 도성으로 압송되는 장면에서, '성을 나설 때 몇몇 병사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에게 매질을 했던 병사도 있었다. 작별에 대한 아쉬움은 진심으로 보였다. 나는 이교도들의 불가해한 다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p.69) 이방인들은 정 많은 우리의 모습에 당황하고, 당혹스러워까지 한다. '역사속 '벨테브레'가 박연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우리의 저런 정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끝부분으로 갈수록, 김훈의 남한산성과 비교 되었다. '남한산성'을 읽고 실망을 했던지라, '천년의 왕국'은 그런의미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작가 김경욱. 400여년 전 우리에게 표류해 온 이방인들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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