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1 - 일타 큰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인연>의 장르정체성 문제를 살펴보자. <인연>은 '일타 큰스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일타 큰스님의 삶을 돌아보고 기리는 '전기적 성격'이다. '일타 큰스님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했다'라고 말하는게 타당할 듯 하다. 주목할 것은 소설을 위해 일타 큰스님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일타 큰스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형식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즉, <인연>은 장편소설이라 불리지만, 일반적 의미의 장편소설은 아니다. 또한 실존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했기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저것이 문제일까? 그렇지는 않다. 정작 중요한 건, 전기적 요소와 소설적 허구를 어떻게 버무려 조화시키느냐 이다. 저자는 일련의 서술적 장치와 놀라운 구성력으로 이를 해결한다. <인연>의 구성은 이렇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일타 큰스님의 자취를 더듬는 현재의 '고명인'이야기(A), 일타스님의 출가부터 해탈까지의 전기적 이야기(B)가 교차 서술된다. 양자는 무리없이 어우러 진다. 특히 고명인과 다른 스님들(주로 일타스님의 제자)의 추억속에서 그려지는 일타스님의 모습은, (A)에서 (B)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고명인은 20년전 보았던 일타스님의 법문을 떠올린다. 고명인의 회상속에서 일타스님은 생생하게 법문을 하고 있다. 또한 혜각스님이 고명인에게 들려주는 설명(p.49이하)속에도 일타스님은 미소짓고 있다. 이처럼 고명인과 혜각은 자연스레 일타스님의 흔적을 되살리고,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일타 큰스님의 전기적 요소를 녹여 넣는다. 이는 전기적 요소가 혹여 야기할 수도 있는 거부감을 제거한다. 객관적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고명인이란 인물을 내세운 것도 좋다.

한가지 의문은, '고명인이 일타 큰스님의 흔적을 더듬는 동기가 약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오래전 일타 큰스님을 본 적 있다? 그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설 속에선 자세한 설명이 없다. 이는 구성의 전제가 되기에 꽤 중요한 문제다. 저자도 이 점을 고심한 듯 하다. 관련된 부분을 보자.

"이상하고 분명한 사실은 미국에서 벌려놓은 사업들이 까마득히 멀어져버렸고, 특별한 이유없이 고승 일타의 흔적을 쫓고 있다는 점이었다."(p.219참조) " '일타 스님은 어떤 분인가.' 고명인에게 동기가 있다면 이 정도일 뿐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결정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 우습기조차 하였다. (중략) 그런데도 고승 일타는 자력이 강한 자석처럼 밑도 끝도 없이 고명인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무형의 무언가를 자신에게 안겨줄 것만 같았다. 고명인은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어느새 고명인은 일타 스님이 누구인지, 스님이 이 세상을 살다 간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p.220)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저 정도에 만족하자.

일타스님과 혜각, 혜인, 혜국스님의 이야기속에 성철 큰스님 이야기가 드문드문 등장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다. (처음 말한 것처럼 이것이 실화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다.) 일타스님의 세속 누나인 응민스님이 봉암사에 머물고자 일종의 시위(?)를 한다. 그러자 성철 큰스님은 응민과 대면하고 이렇게 말한다. "봉안사에서 살고 싶다꼬." "좋데이. 그라믄 내 시키는 대로 할 낀가, 말 낀가." "지금 당장인기라. 니 손가락을 끊어 보그래이."(p.214) 과연 대단한 스님이다. 손가락을 끊으라는 큰스님이나, 정말 끊는 응민스님이나 대단하다.

또한 세속의 정을 끊지 못하고 방황하는 혜국스님에게 호통치는 성철 큰스님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성문제로 방황하다 절을 떠난 혜국스님이 돌아오자, "야, 이 샹놈의 새끼야. 너 가스나 생겼지." "니 동자때 준 세뱃돈이 아깝다. 좋은 중 되라고 했더니만 도망친 놈 아이가."(2권.p.24) 이처럼 엄격했던 성철 큰스님. 혜국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깨우침 덕인지 손가락을 연비하고 큰스님이 된다.

일타 큰스님의 삶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무교지만 불교에 상당한 호의를 갖게 되었다. (만약 종교를 갖게 된다면 불교에 마음을 줄 것 같다.) 일타스님의 행적을 더듬는 고명인의 여정도 인상적이었으며, 실제 여정을 함께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저자가 일타 큰스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도했던 일련의 소설적 장치는 성공했다. <인연>, 일타 큰스님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책이다. 소설적 완성도도 뛰어나기에 종교적 색채에 부담갖지 않고 읽어도 좋다. 책으로나마 일타 큰스님을 만나 보시길.

 

* 일타 큰스님의 어린시절, 출가과정, 가족관계등 모든 것을 정리해 언급하려고, 노트에 일일 체크해가며 읽었다. 하지만, 서평을 쓰면서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소설'인 작품속 내용을 '이건 일타 큰스님의 출가과정이야, 가족관계야'하며 정리한다는게 주제 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삶은 1권 앞부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원하시면 그걸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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