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봤는데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중에서 가장 덜 어렵고 부드러운 소설이었는데. 



프랑스 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는 여주의 언어 표현이 몰입을 방해했지만 이시다 유리코니까 다이죠부. <갈릴레오>의 그 천재교수 후쿠야마 마사하루도 많이 늙어서 애틋한 마음이었다가... 그들의 키스는 뭐랄까... 침...추접... 아니, 아니다. 이시다 유리코의 영상으로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줄거리나 감상은 소설에서 얻기로 한다. 봄비가 내리는 토요일 마티네, 커피를 마시면서 보다가 봄옷 사러 나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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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1800년 후반까지 80년 이상 계속 되고 있었다. 1870년 프로이센 전쟁에 패한 프랑스의 파리는 척박한 폐허로 남았고 이제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정부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파리 코뮌은 몰리고 몰린 파리 노동자들의 자구적 항쟁으로도 보이지만 인간의 폭력성이 폭발하고 지옥문이 열리는 면면이 보이기도 한다. 이미 150년 전 일이다. 직접적인 발단은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시작했다. 그 피의 속죄로 1874년 사크레쾨르 성당이 세워졌다.



사료들을 충격을 줄만큼 충실하게 시각화 해 놓은 그림은 흑백이지만 화약과 피냄새가 진동한다. 기록은 실존 인물들과 가상의 중심인물들을 따라가는데 많은 부분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이야기에 업혀있다. 수양딸 잔의 살인범으로 억울하게 20년 옥살이를 하던중 가석방되어 새로운 신분, 경찰 정보원으로 살고 있는 오라스 그롱댕. 거구에 힘이 장사인 그는 진짜 살인범일 수양딸의 전약혼자 타르파냥을 좇고 있다. (레미제라블과 파리의 노트르담의 여러 요소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두 소설 모두 파리의 격동기, 민중의 궐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클로드 프롤로도 등장한다.) 오라스 그롱댕의 과거를 의심하며 박쥐처럼 코뮨파와 정부/경찰쪽을 오가는 기회주의자 경찰 이폴리트는 정의 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계산하기 바쁘다. 타르파냥은 잔과 헤어졌지만 정의를 따르고 솔직한 성격, 게다가 미남자라 따르는 여자들이 많다. 정부군으로 시민들과 대치하다 코뮌쪽으로 돌아선 타르파냥은 폭력단 우르크 파의 두목 에드몽 트로카르의 정부 가브리엘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에 대한 폭력단의 보복으로 (파리 코뮨 와중에) 죽을 위기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계속 헤어진 가브리엘라의 행방을 찾는다. 두목이 사창가로 보내버린 가브리엘라는 인생을 포기하며 살아가다 어린 소년병 (사진가 테오필의 조수)을 만나 부상병을 치료하며 코뮌군을 돕는다. 

전투와 방어전, 화염병과 총알이 오가는 거리, 스치듯 가브리엘라와 타르파냥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몇번이고, 복수심에 칼을 갈고 갈던 오라스 그롱댕은 잔의 진짜 살인범을 알지 못한 채 정부군의 총을 맞는다. (이 둘이 파리 지하도로 가는줄 알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사망하고 코뮌군의 두 젊은이만이 '총은 버린 채' 담을 넘어 파리를 벗어난다. 


파리 코뮌 역사의 중요한 여성 혁명가 루이즈 미셸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 Louise Michel : 1830년 5월 29일-1905년 1월 9일)은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 교육자, 의료노동자이며, 파리 코뮌의 요인이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적처녀"(red virgin of Montmartre)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사창가와 벗은 여인들, 특히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그림과 그 작업 장면 등을 필요 이상으로 묘사하고 성적이며 폭력적인 대사와 묘사를 넘치도록 실어놓았다. 여성은 그저 피를 뿌릴 대지, 아니 거름쯤으로 취급하고 있어서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여성은 거의 상의를 벗은 상태로 나온다. 어머니라 젖을 먹이거나 창녀라 성을 팔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들라크루아의 혁명의 이미지로 (붉은 처녀;;;; 무슨 홍대 여신 처럼) 깃발을 휘둘러야 한다. 제대로 옷을 입고 말하고 싸우는 모습의 중심 여성이 없어서 매우 안타깝다 못해 분노한다. 역사적 이야기를 엮기 위한 도구용 서사라 인물들의 행동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파리 시내의 묘사와 역사 자체가 주는 힘은 크다.  

파리 코뮌 종식 두 달 후인 1871년 7월, 파리의 부촌 16구에서 프루스트가 태어났고, 코뮌파의 대 방화를 살아남은 노트르담 대성당은 2019년 화재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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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해(1870년)에는 보나파르트의 조카이자 제2제정기의 통치자였던 루이 나폴레옹, 즉 나폴레옹 3세가 현명치 못하게도 프로이센인들의 막강한 군대와 전쟁을 벌인 끝에 그들의 포로가 된 터였다. 파리 사람들은 즉시 그의 제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공화국은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그 즈음 파리는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프로이센 군대는 도시를 굶겨 항복시킬 작정이었다. 물자가 끊긴 넉 달 동안 파리의 거의 모든 말馬이 식탁에 올랐고 (심지어 쥐까지 먹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항복했다. 전보다 더 보수적인 새 정부가 화친조약에 동의했지만, 전투적이고 애국적인 파리의 노동계층은 그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으로 여겼다. 1871년 3월, 파리의 노동자들은 봉기했다. 


이 피바다의 신호탄이 된 사건은 몽마르트 언덕 위, 지금은 잊혀 사적史跡 표지로 밖에 기념되지 않는 장소에서 일어났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바로 뒤에 위치한 이곳의 현재 주소는 슈발리에-드-라-바르가街 36번지지만, 1871년 당시에는 로지에가 6번지였다. (https://goo.gl/maps/4oTTXvc7CiBXWwNL6) 몽마르트르 주민들이 바그람 광장에서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로 옮겨 놓았던 200문門의 대포를 회수하기 위해 정부에서 군대를 보내면서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대포들을 장만하기 위해 성금을 냈고, 그것들을 프로이센인들의 손에서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바그람 광장으로부터의 그 극적인 대이동을 강행했던 남녀노소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정부는 대포의 소유권 문제에 동의하기를 완강히 거부했으며, 변덕스러운 파리 빈민층의 수중에 그런 무기가 놓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양편이 대치하는 가운데 장군 둘이 포로가 되어 로지에가 6번지로 끌려갔고 거기서 총살당했다. (12-14) 





당시 파리는 휴전과 평화조약과 피에르 정부 반대 시위의 열기 속에서 일종의 반란 상태에 있었는데,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힘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국민 방위대였다.  

[...]


1월 28일 휴전 이래 파리의 분위기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과격해졌다. [...] 파리의 함락 이래 약 15만 주민이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훨씬 빈곤한 주민만 남아있는 파리는 그만큼 더 과격해지고 전보다 더 좌경화할 수 밖에 없었다. [...] 부자구의 방위군 대대들은 거의 자연 소멸하고 말았다. 온건한 부르주아 대대들이 줄어든 만큼 파리 전체 방위대의 성격이 더 과격해진 것은 당연하였다. [...] 대포의 몽마르트르 집결은 그 동기가 아무리 애국적이고 또 소유권에 대한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현실적 의의와 결과는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정부는 독일과의 협정에 따라 무장 정규군은 이제 1사단 밖에 갖고 있지 않았는데, 파리의 40만 방위대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170문의 대포를 가지게 되었다. [...]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코뮌이 선포되었다. 




파리 코뮌의 운명은 결국 험난했고 단명하였다. 72일의 단명 끝에 키에르의 군대에게 박살 나고 말 터였다. [...] 4월 6일 티에르는 정부군 사령관으로 비누아의 자리에 세당의 패장 마크마옹 장군을 앉히고 독일에서 귀환한 병력으로 파리 포위를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파리는 독일군의 포위에서 풀린지 두 달 만에 다시 동족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 5월 22일 밤 3시에는 이미 정부군 7만명이 무너진 성벽을 뚫고 시내로 돌입하여 방위대 1500명의 항복을 받았다. [...]


코뮌의 죄에대한 보상은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보다도 철저하였고, 심지어 1917년의 상트페레르부르크 혁명보다도 더 철저하였다. 몽마르트르의 바리케이드를 사수한 코뮌파 중에는 여자가 100명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전멸되었으나 포로로 잡힌 49명 중 여자가 셋 어린이가 넷이었는데, 23일 정부군은 이 부녀자들도 함께 현장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코뮌군의 잔학함도 끔찍하였다. 그들의 저항은 매우 완강하였다. 그들은 저항에 방해가 되는 건물을 모조리 불살랐다. 아름답고 웅장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해갔다. 튈르리 궁, 팔레 루아얄 궁, 법무무, 치안국, 회계원, 상훈국, 참의원 등의 유서 깊은 건물들이 다 타버렸다. 24일 오전 11시에는 시청이 화염에 싸였다. 이날 파리는 온통 불바다로 변하였다. 코뮌군은 불을 지르는 한편 감옥에 수감해둔 인질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다르부아 대주교와 드그리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26일은 쌍방의 소탕전의 날이었다. 독일군이 코뮌파의 도망을 막기위해 동쪽으로 1만명이 이동하였다. 코뮌파는 도망 갈 길이 막혔다. [...] 전투는 27일의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전개된 백병전이었다. 28일 오후 2시 최후의 총성이 멎었다. 29일에는 동쪽 교외의 고립된 행센 요새도 항복하였다. 


연구들의 평균치에 따르면, 즉결재판에서 처형된 자의 수는 적게 잡아도 2만 이상이고 많이 잡으면 2만 5000 이하였다. 그런데 이 즉결 재판에 관해서는 처형자의 명단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파리 코뮌에 희생된 자의 수는, 즉결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전사한 자들과 '피의 주간'이후에 마구 학살된 자들을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수효는 엄청나게 더 늘게 마련이었다. 


파리 코뮌을 상퀼로트 적 성격을 띤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의 종장終場으로 보느냐, 아니면 파리 코뮌 직후 이래 마르크스에 의해 주장되어 온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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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울한 봄날, 개학인데 개학 아닌 개학. 개같은 나날들. 개의 심장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뇌하수체와 성기를 이식한 개, 그래도 개의 심장을 지닌 개-인간, 샤릭-샤리코프의 이야기를 읽었다. 


차가운 눈바람이 몰아치고 허리에는 화상을 입은 길거리의 개, 자부심은 고고해서 지나가는 인간들을 하나씩 멸시하며 (어이, 그래도 소시지나 좀 조바라) 품평하다 먹이와 따뜻한 잠자리에 이끌려 의사 필립 필리뽀비치네 집에 들어간다. 하지만 의사는 그를 실험대상으로 여기고 있었고 어느날, (아직은 개) 샤릭의 머리가 나쁜 예감으로 쿡쿡 쑤시던 날 그 실험/수술은 이루어진다. 


의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회춘' 대신 '변신'이 이루어지는 샤릭의 몸. 맥줏집에서 칼싸움에 사망한 망나니의 성질이 옮아가 이제 샤리코프는 말을 하고, 직립 보행을 하고, 폭행을 저지른다. (이제는 인간) 샤리코프는 자신을 꾸짖는 의사에게 묻는다. "아빠, 아빠는 왜 그렇게 나를 심하게 학대하고 그러세요?" 그리고 샤릭코프는 여엿한 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공산당에 들어가고 직함을 갖는데 평소 샤릭이 혐오했던 길고양이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더이상 샤리코프의 폭력과 비행, 자신의 영역과 권위를 위협하는 것을 참지 못한 의사는 조수 보르멘딸리와 함께 일을 수습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의사 직과 명예를 걸고, 또한 의사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저 놈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결자해지. 결국 그 인간말종의 뇌하수체와 성기가 부린 난동을 지우기 위해선 그 원인을 (사회제도나 인간관계가 아니라 글러먹은 그 육체조직) 제거하고 의사의 발 옆엔 (다시 개) 샤릭이 엎드리게 된다. 아직 혀에 남은 인간의 말, 하지만 온순해진 뇌로는 자신의 복받은 환경에 감사하면서. 계속 샤릭-샤리코프의 몸에는 개의 심장이 펄떡이고 있었다. 


인간들 묘사와 대사가 과장되고 희화되어 블랙 코미디 극을 읽는 기분이 든다. 추운 거리의 샤릭의 시점으로 시작해서 3인칭 시점과 묘사-기록-대화 등 여러 형식으로 구성된 짧은 소설은 투박하지만 흡입력이 강하다. 특히 수술장면의 생생한 묘사는 의사 작가의 특기가 살아있다. 수술 장면만 두 번 읽었는데 이런 피냄새 나는 (응?) 묘사를 '프랑켄슈타인'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는 만나지 못했기에 더 신선한 기분이 든다. (라고 쓰고 보니 내가 많이 이상한 사람;;;;) 


못 배우고 더러운 것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의사의 혐오가 큰데 그것을 혁명과 계급에 대한 반동문학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은 던져주었으니 고민은 독자의 몫으로 남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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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21-03-19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이한 소설이군요. 유부만두님 오랜만. 여전히 읽고 쓰시는 거 보니 반갑.
개학인데 아이 둘의 학교 가는 날이 달라서 급식의 은혜를 못 입고 있어서 너무 우울합니다. 저도.
그래도 봄이니까 잘 지내시죠?!
저는 자주 안 오면서 늘 있는 분들 보면 너무 좋다. ㅎ

유부만두 2021-03-22 11:13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반갑습니다. 저야 별일 없이 밥밥책책밥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급식의 은혜는 정말 없을 수록 더 크게 느껴지고요. 봄이네요. 겨울옷 아직 입고 밤에만 동네 슈퍼를 가곤 하는데 꽃이 조금씩 보이는 데 더 우울하고 그래요.

이 소설은 20세기 초 러시아 소설인데 투박하고 강렬한데 은근 매력있습니다. <거장과 마가리타> 읽기 전에 준비운동 삼아 읽었습니다.
 


스완에게는, 부모님의 옛 친구인 ‘아들 스완‘이자 조키 클럽 회원으로서의 스완과는 전혀 다른 인격,(이것이 마지막일 리는 없겠지만) 즉 오데트의 남편이라는 인격이 더해졌다. [...] 그는 아주 딴사람같아 보였다.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아내와 함께 두 번째 삶을 선택한 그 - P14

이런 변신의 가장 주된 이유는 [...] 우리의 미덕 자체가 자유롭고 유동적이어서 영구히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 P15

내가 박수를 치면 칠수록 라 베르마의 연기가 더 훌륭해지는 것만 같았다. - P49

이런 민중의 열광이라는 싸구려 포도주를 그들과 나누어 마시면서 취했다. - P50

인과관계란 가능한 거의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며, 따라서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도 만들어 낸다. 이 작업은 우리 욕망이나 - 빨리 진행하려고 하면 도리어 방해가 되는 - 삶 자체로 인해 더욱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욕망이나 삶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 스완의 마음 속에서, 그의 모든 삶을 함께 보내고 싶어 그토록 열망하고 절망했던 존재가 죽고 나서야 한 결혼이 바로 이런 사후의 행복 아니었던가? - P86

대개는 천재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서는, 자기 작품에 이 천재의 생각을 덧붙이고 그래서 자기 작품을 다시 생각할 때면 처음 나타났던 대로 보지 못하고, [...] 자신에 대한 최종적인 만족감을 표현하는 전체 속에 [천재의] 뛰어난 글 몇 쪽의 기억을 끌어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리하여 자기가 그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작가들 - P102

우리 정신 속에서 공동으로 기거하는 관념들 가운데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관념이 처음에는 진짜 기생충처럼 자신에게 부족한 중요한 힘을 낯선 사람이나 이웃에게서 얻었던 것은 아닌지 말해보라. - P103

내가 ‘시간‘ 밖에 있지 않고 소설 속 인물 처럼 시간의 법칙 속에 종속된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콩브레에서 덮개 달린 버드나무 의자 깊숙이에서 그 인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인물들이 그토록 날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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