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해(1870년)에는 보나파르트의 조카이자 제2제정기의 통치자였던 루이 나폴레옹, 즉 나폴레옹 3세가 현명치 못하게도 프로이센인들의 막강한 군대와 전쟁을 벌인 끝에 그들의 포로가 된 터였다. 파리 사람들은 즉시 그의 제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공화국은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그 즈음 파리는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프로이센 군대는 도시를 굶겨 항복시킬 작정이었다. 물자가 끊긴 넉 달 동안 파리의 거의 모든 말馬이 식탁에 올랐고 (심지어 쥐까지 먹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항복했다. 전보다 더 보수적인 새 정부가 화친조약에 동의했지만, 전투적이고 애국적인 파리의 노동계층은 그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으로 여겼다. 1871년 3월, 파리의 노동자들은 봉기했다. 


이 피바다의 신호탄이 된 사건은 몽마르트 언덕 위, 지금은 잊혀 사적史跡 표지로 밖에 기념되지 않는 장소에서 일어났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바로 뒤에 위치한 이곳의 현재 주소는 슈발리에-드-라-바르가街 36번지지만, 1871년 당시에는 로지에가 6번지였다. (https://goo.gl/maps/4oTTXvc7CiBXWwNL6) 몽마르트르 주민들이 바그람 광장에서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로 옮겨 놓았던 200문門의 대포를 회수하기 위해 정부에서 군대를 보내면서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대포들을 장만하기 위해 성금을 냈고, 그것들을 프로이센인들의 손에서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바그람 광장으로부터의 그 극적인 대이동을 강행했던 남녀노소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정부는 대포의 소유권 문제에 동의하기를 완강히 거부했으며, 변덕스러운 파리 빈민층의 수중에 그런 무기가 놓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양편이 대치하는 가운데 장군 둘이 포로가 되어 로지에가 6번지로 끌려갔고 거기서 총살당했다. (12-14) 





당시 파리는 휴전과 평화조약과 피에르 정부 반대 시위의 열기 속에서 일종의 반란 상태에 있었는데,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힘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국민 방위대였다.  

[...]


1월 28일 휴전 이래 파리의 분위기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과격해졌다. [...] 파리의 함락 이래 약 15만 주민이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훨씬 빈곤한 주민만 남아있는 파리는 그만큼 더 과격해지고 전보다 더 좌경화할 수 밖에 없었다. [...] 부자구의 방위군 대대들은 거의 자연 소멸하고 말았다. 온건한 부르주아 대대들이 줄어든 만큼 파리 전체 방위대의 성격이 더 과격해진 것은 당연하였다. [...] 대포의 몽마르트르 집결은 그 동기가 아무리 애국적이고 또 소유권에 대한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현실적 의의와 결과는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정부는 독일과의 협정에 따라 무장 정규군은 이제 1사단 밖에 갖고 있지 않았는데, 파리의 40만 방위대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170문의 대포를 가지게 되었다. [...]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코뮌이 선포되었다. 




파리 코뮌의 운명은 결국 험난했고 단명하였다. 72일의 단명 끝에 키에르의 군대에게 박살 나고 말 터였다. [...] 4월 6일 티에르는 정부군 사령관으로 비누아의 자리에 세당의 패장 마크마옹 장군을 앉히고 독일에서 귀환한 병력으로 파리 포위를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파리는 독일군의 포위에서 풀린지 두 달 만에 다시 동족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 5월 22일 밤 3시에는 이미 정부군 7만명이 무너진 성벽을 뚫고 시내로 돌입하여 방위대 1500명의 항복을 받았다. [...]


코뮌의 죄에대한 보상은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보다도 철저하였고, 심지어 1917년의 상트페레르부르크 혁명보다도 더 철저하였다. 몽마르트르의 바리케이드를 사수한 코뮌파 중에는 여자가 100명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전멸되었으나 포로로 잡힌 49명 중 여자가 셋 어린이가 넷이었는데, 23일 정부군은 이 부녀자들도 함께 현장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코뮌군의 잔학함도 끔찍하였다. 그들의 저항은 매우 완강하였다. 그들은 저항에 방해가 되는 건물을 모조리 불살랐다. 아름답고 웅장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해갔다. 튈르리 궁, 팔레 루아얄 궁, 법무무, 치안국, 회계원, 상훈국, 참의원 등의 유서 깊은 건물들이 다 타버렸다. 24일 오전 11시에는 시청이 화염에 싸였다. 이날 파리는 온통 불바다로 변하였다. 코뮌군은 불을 지르는 한편 감옥에 수감해둔 인질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다르부아 대주교와 드그리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26일은 쌍방의 소탕전의 날이었다. 독일군이 코뮌파의 도망을 막기위해 동쪽으로 1만명이 이동하였다. 코뮌파는 도망 갈 길이 막혔다. [...] 전투는 27일의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전개된 백병전이었다. 28일 오후 2시 최후의 총성이 멎었다. 29일에는 동쪽 교외의 고립된 행센 요새도 항복하였다. 


연구들의 평균치에 따르면, 즉결재판에서 처형된 자의 수는 적게 잡아도 2만 이상이고 많이 잡으면 2만 5000 이하였다. 그런데 이 즉결 재판에 관해서는 처형자의 명단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파리 코뮌에 희생된 자의 수는, 즉결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전사한 자들과 '피의 주간'이후에 마구 학살된 자들을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수효는 엄청나게 더 늘게 마련이었다. 


파리 코뮌을 상퀼로트 적 성격을 띤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의 종장終場으로 보느냐, 아니면 파리 코뮌 직후 이래 마르크스에 의해 주장되어 온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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