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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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나”는 오전 오후반으로 순서대로 말썽을 일으키는 필경사들과 잔심부름꾼 소년으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그곳, 그 사무실은 그저 “생명이 결여” 되었을 뿐, 변호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 시켜서 필요한 만큼 보수도 벌어들였다. 하지만 한 남자, 바로 표지의 그 남자 바틀비가 나타나자 평온했던 변호사의 세계는 흔들린다. 바쁘게, 곧바로, 당장, 지체하지 않고 일을 밀어 붙이는 변호사의 기질에 화를 돋우듯, 바틀비는 천천히, 의자를 끌면서, 몇 번이나 질문을 받고 나서도 느릿느릿 거절만 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조용하게 거절만 하는 이 청년에 대한 부담감에 괴로워하던 “나”는 그를 내 보내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이 석고상, 주검, 유령 같은 젊은이는 이미 “나”의 어깨 위에 앉아 버린 듯, 아니 한 몸이 되어 버린 듯 떼어낼 수가 없다. “나”가 인정한 것처럼 바틀비와 “나”는 아담의 아들들로, “나”는 그의 입관된 환영을 볼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바틀비의 고통과 고독, 끔찍한 진실을 볼 뿐, 그 해결법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바틀비의 고통은 “나”에게 가까이 올수록 혐오스럽고, 그의 비참함과 빈곤은 점점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나”를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한 번 들어와서 나가지 않는 이 불가해한 존재는 과연 실제로 “나” 변호사가 본 젊은이였을까. 절대 자신의 가족이야기나 개인 이야기, 혹은 사무실과 업무 관계 밖의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나”의 불안증이 만들어낸 하나의 서류는 아닐까. 절대 떼어낼 수 없던 악몽이었던 바틀비의 눈을 감겨 주고 나서야 “나”는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사라진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서 갈 곳을 잃어 헤매다 태워지는 “사서(死書)”처럼, 자기 일을 잃고 헤매다 어느 한 곳, 어쩌면 어느 벽 속으로 스며들기를, 어느 글 속으로 녹아들기를 바랐던 바틀비를 애도하면서.

꽃이 만발한 봄이다. 한쪽 눈이 검게 표현된 표지의 바틀비가 쓸쓸하다. 그는 무얼 보는 걸까. 그는 누구일까.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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