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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년 동안 미뤘던 책. 후속편까지 사 놓고도 열지 않았던 책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 첫 장면이 눈 먼 사람 이야기라서 당황스러웠다. (제목을 안 읽은거야?) 갑자기 눈이 멀어 버리는 사람들.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리고 단 한 사람만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게 만드는 상황을 보고 있다. 그리고 독자인 나도 그들과 동행했다. 이야기는 눈 뜬 것이 더이상 축복이 될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다가 백색 암흑(!)을 거둬낸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내 두 눈이 아직도 밖의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 줄 것인지, 의심스럽다. 과연 내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인지. 보는 것이 또, 보이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 나를 그나마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시인들은 침묵의 두려움을 노래했고 화가들은 눈이 머는 것을 작품안에 그려 넣었다. 그리고 저자는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을 같이 놓고 문명을 잃어가는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밤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이미 눈이 멀어버려 자신의 글도 볼 수 없게된 작가의 옛책을 듣는 사람들. 눈이 먼 호머의 구술 일리아드,오딧세이를 들었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또 다른 버전이다.
끝까지, 저자는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눈먼 안과 의사, 그의 부인, 또는 이제는 던져버린 검은 안경을 썼던 여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년동안 묵혔던 책을 늦게나마 열고, 숨가쁜 책의 흐름을 못 따라 가서 세 번 책을 쉬고 집안을 돌아 다녀야 했던 여자다. 이 여자는 문장 부호나 따옴표가 없는 글을 읽다가 눈을 들어 집안을 둘러보고, 그 때 마다 아, 내 눈은 멀지 않았구나 확인한다. 책을 읽는 순간, 활자를 들여다 보는 순간에는 그 안의 백색어둠이 너무도 그 여자를 사로잡아 자기가 눈이 멀지 않았을까 의심하게 된다. 살짝 살짝 나오는 제 3의 화자는 눈을 뜬 의사부인과 함께 "우리"에게 그 의심을 불어 넣기 때문이다.
이제 결정해야 하는 두 가지 : 영화판 "눈먼자들의 도시"를 볼 것인가? 후속판 "눈뜬자들의 도시"를 읽을 것인가?
332쪽 - "딱딱한 빵 한 조각의 냄새는, 숭고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삶 자체의 본질과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수용소에서 나와 여섯명의 맹인 앞에 한 명의 보는 자가 어렵게 구한 빵을 꺼내면서.
388쪽 -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눈먼 의사가 눈을 뜨게 된다면 사람들의 눈 속에 있을 영혼을 들여다 보고 싶다고 하자, 눈 먼 여자가 하는 말. 내부에 있는 그 사람 자체가 이미, 눈이 먼 세상에서 밖으로 다 드러나 있다는 것일까.
395쪽 -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말 [...] 때문에 흥분한다. 그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뜨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빗속에서 두 눈먼 여자와 한 눈 뜬 여자가 서로의 아름다움 혹은 추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413~414쪽 - "나는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요. [...]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눈먼 작가가 손으로 더듬어가며 쓰고 있던 기록을 보여주며 하는말.
428쪽 - 아래층 늙은 여자를 묻는 장면, 아이러니하게 "부활"을 이야기하는데, 내 눈앞의 장면은 고야의 그림이 떠오른다. 사실, 이 책에서는 고야 그림이 나오지 않는데.
449쪽 - 시간은 모든 패를 쥐고 있는 도박판의 타짜다. 눈을 멀어 이미 시간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제 무엇을 해야하는지 손을 놓고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