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스타프 님의 추천으로 읽었다. 함께 추천하신 오페라 <외투>의 영상을 보고 도밍고의 노래도 듣고 했더니 유진 오닐의 극을 이미 읽은 기분 마저 들었다. 하지만 <애나 크리스티>와 <외투>는 다른 작품이다. 배경이 되는 나라도 다르고 바지선의 의미도 다르고 무엇보다 결말이 아주 다르다. 하지만 등장 인물들은 서로 매우 닮았다.


다섯 살 이후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러 뉴욕의 한 술집으로 오는 애나. 스웨덴에서 이민와 미국 중서부 농촌에서 성장해 이십대 초반인 그녀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렸다. 바다와 남자, 무엇보다 이 둘을 합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이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딸이 와서 기쁜 바지선 선장 오십대 크리스. 그는 문제가 생기면 맞서 해결하기 보다는 도망 가거나 숨기는 스타일. 함께 지내던 사연 많은 여인 마티는 눈치를 채고 바로 퇴장한다. 크리스는 뒤늦은 아버지 행세를 하려들고 애나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가 조금씩 안개와 함께 바지선에 사는 그녀에게 스며든다. 


폭풍우가 치던 밤, 몇 명의 난파선 선원들을 구출하게 된다. 그중 웃통을 벗은 떡대 맷 버크는 애나에게 반하고 청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바다와 뱃사람보다는 뭍의 농장을 높이 치는 크리스는 맷을 반대하고 그 사이에서 애나는 갈등한다. 아버지와 맷 둘다 애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애나는 폭발한다. "내가 내 주인이야!" 애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애나는 문제를 덮지 않고 밝힌다. 나 이런 과거가 있어, 하지만 널 향한 마음은 진심이야. 놀란 크리스와 맷. 맷은 분노하며 애나를 죽이겠다고 날뛴다. 자신의 비겁함과 이중 잣대는 뭉개면서 애나의 과거를 저주하고 윽박지른다. 크리스는 이번에도 덮고 도망가기 바쁘다. 그럴리 없다 없다 없다 술이나 마시자. 크리스나 맷이나 똑같은 뱃놈들. 결국 바다와 남자 때문에 이런 인생 이런 결말이라니. 인물들 모두 자신이 제일 불쌍하고 힘들고 소중해서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는다. 세 명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소리지르고 울고 뒹군다. 그나마 생각을 조금 더 할 줄 아는 애나는 가방을 싼다. (알고보니 다른 두  남자들도 가방을 싸고 있었음)


그리고 <외투>와 닮은, 하지만 아주 다른 결말로 4막이 채워진다. 팔스타프님 따라 나도 안 알려드림. 


유진 오닐의 극은 소설 읽는 재미를 주는 지문이 많다. 인물 표현은 연출과 배우 몫이겠지만 독자들도 연극 공연장에 있는 기분이 든다. 크리스가 함께 지내던 여인 마티는 "남자 같은 목소리로 커다랗게 이야기하다가 끝에는 거친 웃음을 한바탕 웃으며 마무리 한다. 핏발이 선 푸른 눈에는 고단함이 꺾지 못한 삶을 향한 젊은 욕망이 있고, 조롱이 섞였지만 착한 심성에서 우러난 유머 감각도 있다." 과연 이 여인은 젊고 고단한 애나와 얼마나 겹치는가. 


백 년 전 남자들 맷과 크리스의 대사를 읽다보면 복장이 터지지만 참고 읽다보면 바지선이라는 장소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깨닫게 된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 그 위의 바지선. 극을 다 읽었는데 어쩐지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수습될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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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1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 장면 함 보셔요.
https://youtu.be/46ybS7cebuU?si=ZPbdNmD-JO0iLMgf
그레타 가르보가 애나 역을 하는, 그레타 역사상 최초의 유성영화 장면이랍니다.
전 이 영상 보기 전까지 가르보의 매력을 거의 몰랐답니다. 맨인블랙에선 그레타가 외계인이라고 하잖아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3-12-11 17: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뒤에 해설을 읽고 그 영화가 궁금했더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