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스타프/골드문트 님의 중국판 감자, 아니 소금, 아니 복자거나 봉염 엄마 이야기 <샤오홍 이야기> 리뷰를 읽고 <소금>을 다시 읽었다. 지지리 고생과 억울함이 단락마다 턱턱 얹힌다. 해법이 안 보이는 가난과 고생 중 제일 아팠던 건 일하러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봉염의 애타는 장면.
그는 못 견디게 어머니 품에 자기의 다는 몸을 탁 안기고 싶었다. 그는 목이 마른듯 하여 물을 찾았다. 그래서 봉희가 밥 말아 먹던 물을 마셨지마는 어쩐지 더 답답하였다.
이렇게 자리에 못 붙고 안타까워하던 그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 무엇에 놀라 후닥닥 깨었다.
[...]
어머니 못 봤다는 말에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그는 눈이 벌개서 찾아다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뒤뜰에서 무슨 소리가 나므로 벌떡 일어나 뛰어 나갔다.
저편 뜨물 동이 옆에는 봉희가 붙어 서서 그 큰 머리를 숙이고 마치 젖 빨듯이 입을 뜨물 동이에 대고 뜨물을 꼴깍꼴깍 들이 마시고 있다. 그리고 머리털은 햇볕에 불을 덴 것 처럼 빨갛다.
젖어멈으로 들어간 하층민 여자가 정작 자신의 아이는 내버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는 건 흔한 소재다. 흑인 유모의 아이들이 굶는 이야기는 모리슨의 소설에도 나오고 김정민 작가의 동화 창작물 <담을 넘은 아이>에서도 유모의 두고 온 아이들 이야기가 나온다.
유모로 간 엄마 대신 아버지 수발을 들며 갓난 아기 동생과 밉상 남동생까지 돌보는 (만 나이 아니고 옛 나이로) 열두살 여자 아이 푸실이. 계급과 신분, 가난과 성차별에 눈 뜨는 영특한 아이는 용기를 내어 담을 넘는다.....(넘었니) 그 아이의 발받침이 되어주고 어깨를 두드린 건 역시나 교육, 글 깨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혼자의 힘이 아니고 귀한 양반댁 아가씨의 자비심으로만 가능한 이야기.
올해 멋진 리커버로 나온 책인데 나는 4년 전 초판으로 읽었다. 초등 5학년일 나이의 푸실이가 혹독한 사회 속에서 고생을 하고 온갖 학대를 당하는 이야기는 읽기가 매우 힘들었고 마무리도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옛날 배경의 역사 동화는 흥미롭지만 이토록 엄혹한 상황의 아이를 보는 것은 학대에 일조한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괴로웠다. 밥 굶으며 아버지와 (미운) 일곱 살 남동생의 밥상을 차리는 아이라니. 아이에게 위로란 길에서 주운 책, 읽지도 못하는 책이었다니. 이 아이의 '구원' 혹은 담 넘기가 양반댁 아가씨의 돈과 힘으로 가능하다니 요즘 읽는 여러 동화의 해결이 건물주 할머니인 것(순례주택, 맹탐정 고민 상담소, 헌터걸, 나의 진주 드레스, 연동동의 비밀 등에서. 마법의 선녀님 대신 건물주님인가)과 비슷해서 힘이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