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한 것 보다 시몬 베유의 정치인, 행정가로서의 회고담 비중이 크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은 너무 짧고 2차대전과 유대인 박해가 시몬의 가족을 산산조각낸다. 시몬 베유는 자신의 유대인 수용소 경험과 차별에 대한 피해 경험을 매우 담담하게 적었다. 어느 상황에서건 완전한 선함이나 악행으로 나누기 보다는 행위에 따른 책임감과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의인들의 용기 덕에 누군가는 목숨을 구하고, 사람들은 더 나은 생을 향해서 힘을 모은다. 하지만 '평범한' 악의 결과와 그 '비겁한' 궤변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나는 연합군의 침묵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나 집단적 책임을 말하는 한나 아렌트와 같은 지식인 마초이스트들과는 달리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의 비관주의는 나를 거북하게 만든다. 나는 심지어 이것이 손쉬운 속임수라고도 생각하는데, 누구에게나 죄가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나라를 살리기 위한 방편을 백방으로 찾기 위해, 나치의 책임을 보편적 책임에 녹여내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비인격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절박한 독일인이 찾아낸 해결책이다. 양심의 가책이 일반화되면 개인적으로는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한다. '내게는 책임이 없어. 모두가 그렇듯이.' 수많은 저서에서 역사의 비극이 닥쳐올 때마다 모두가 죄인이며 책임자이기 떄문에 누구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인간의 야만성에서 예외란 존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를 상징적인 인물로 추대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측히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해서 아렌트가 남긴 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77-78)



역사적 큰 사건들을 몸소 살아낸, 그것도 소수자인 유대인 여성으로 겪은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법무부 장관으로 '임신중단법' 통과를 위한 업무, 유럽 의회와 프랑스 정부 (와 수많은 선거과정들) 사이의 협의와 갈등 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 (특히 극우 르펜의 등장과 득세)하다. 더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남편의 뒷바라지와 육아를 해내면서도 법조인의 경력을 놓지 않았다는 것에 감탄과 존경을 보낸다. 


처음엔 회고록이라는 책 소개에 그저 사르트르의 <말>과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원서로 읽기 시작했는데 전혀 다른 색조의 글과 내용이라 당황했다. 여러 인물과 사건들을 검색하다가 지쳐서 번역서로 바꿔서 읽었다. 그런데 오타(71쪽. 하루가 지나게 그가 쇠약해 지는 모습), 오역이 꽤 되고 (124쪽.좌파의 보수주의/우파의 보수주의 바뀜) 직역(이랄까, 매우 거칠고 투박하다) 문장이 많아서 가뜩이나 낯선 프랑스/유럽 정치사 부분을 읽을 때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다시 다듬어서 내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2008년에 나온 회고록이고 시몬 베유는 2017년에 작고했다. 끝까지 인류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았던 강단있는 인물인데 만약 그가 작금의 세계 정치를 본다면 어떨까 ... 아니, 모르는 게 나았으리라. 차라리. 

좀 더 자란 나는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기꺼이 사전을 뒤지는 아이가 되었다. - P21

같은 나라의 국민들은 우리가 결코 우리와 우리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사건을 잊기 위해서 온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말하고 싶었으나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 P81

25년이 지난 이후, 나는 이전의 판단에서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극우와 연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지자가 순교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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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16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몬 베이유가 2017년에 작고했군요. 저는 이분은 거의 보부아르와 비슷한 연배이지 않을까 했는데 약간 뒤쪽이네요. 한나 아렌트를 지식인 마초이스트라고 하는 저 강단은 어떤 논리에서 나왔을까 궁급해집니다. ^^

유부만두 2023-02-19 15:35   좋아요 0 | URL
보부아르가 13년 연상이에요. 후반부를 아직 남겨놓은 상태인데 사르트르 이야기는 한 번 (알제리 해방 운동을 하던 프랑스인 정치범들이 사르트르 면담을 원했고 정부 허가도 났지만 사르트르가 안왔다고) 썼지만 아직 보부아르 이야기는 없어요.

베이유는 철학가라기보다는 행정가, 정치인 모습이 많이 보여요. 여러 유명인들에 대한 평이 무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믿지는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