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내내 철도 종점 너머의 수송은 압도적으로 말이 담당했다. 일단 열차에서 내리면 군대는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 사실 율리우스카이사르 시대의 군대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선 통신 그리고 통신 도청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고 있었고 특히 해전에서 중요했다. - P36

<1914년> 영국군은 전선에 정규군을 사실상 모조리 쏟아부었고 자질이 우수한 이 정규군은 영국군의 보잘것없는 규모를 충분히 상쇄할 만큼 선전했다.
팔켄하인은 새로 편성된 4개 군단을 투입했는데 일부 부대는 대부분 징집 연령 이하의 훈련받지 않은 학도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공격했지만 랑게마르크 마을 외곽에서 영국군의 라이플과 기관총 앞에 수천명씩 우수수 스러졌고 이들의 희생은 독일에서 킨더모르트(Kindermord), 즉 ‘유아 학살‘로 알려지게 된다. - P58

<1915년> 러시아군 10만 명이 포로로 잡히고 전선은 130킬로미터까지 밀려났다. 이 공세 자체는 결정적‘이지않았지만 팔켄하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이 새로운 종류의전쟁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목표는 전장에서의 승리라기보다는 소모‘였다. 독일의 전략은 이제 자기자원은 가능한 한 소비하지 않으면서 적들로 하여금 자원을 끝없이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 P88

<1915년>또한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양측이 이 전역을 수행할 때 보인 잔혹성으로, 민간인이 주된 희생양이었다. 러시아 부대는 폴란드인이나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동포애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퇴각시에는 그 일대를 초토화했다. 피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에서 1,0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독일군은 민간인의 안위를 러시아군보다 더 개의치 않았다. 독일군은 정복자이자 식민자로서 진격했다. 폴란드인이나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이곳은 루덴도르프가 더 큰 제국의 일부로서 병합하려 한 지역으로, 독일인이 정착하고 지배할 땅이었다. 그 지역을 지배한 군사 조직의 이름을 따 그곳은 단순히 오버 오스트(Ober Ost:‘상上동부‘라는 뜻으로 동부군 군정지역)로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 관리들은 주민들의 권리나 정체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야만인으로취급했다. 다른 여러 측면과 마찬가지로, 1차세계대전에서 보독일의 행위는 2차세계대전에서 보여줄 야만 행위의 불길한 전조였다. - P89

<1916년> 전쟁은 더이상 더 우월한 군사적 능력과 사기에 의해 전장에서 결판나는 무력충돌이 아니라, 산업사회 간의 지구력 싸움이었고, 여기서 병력 통제는 생산 관리 그리고 가용 자원의 배치와 매끄럽게 결합했다. 민간인은 군부만큼 전쟁 수행의 본질적 일부였고,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군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 P121

<1918년> 군대가 와해 직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정권에 대한 모든 신뢰가 사라졌다. 10월 29일, 해군 수병들은 해군의 명예를 중시하는 제독들이 계획한 ‘죽음의 질주‘에 가담해 함정을 몰고 나가는 대신에 반란을 일으켰다. 일주일 사이에 반란은 독일 전역의 모든 대도시로 퍼져나가 혁명으로 진화했다. 노동자 · 병사 평의회가 러시아의 소비에트 모델에따라 권력을 장악했다. 바이에른에서는 독립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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