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쇼몽'을 찾아 봤다. 단편 '라쇼몬'의 섬뜩한 느낌, 그 비내리는 폐허의 잔상이 길고 깊어서다. 옛영화 특유의 크게 울리는 음악이 내내 사람을 긴장 시켰다.

 

https://youtu.be/xCZ9TguVOIA

 

영화는 오늘처럼 비오는 날, 교토의 남대문인 라쇼몬, 지붕 위쪽은 반쯤 허물어져 살아있는 사람 보다는 시체에 어울리는 장소에서 시작한다. 백년 전의 소설가가 그보다 백년 앞선 황폐한 시대의 인간 맨얼굴을 그렸다. 비에 젖어, 낮에 쨍한 관가 마당에서 했던 증언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승려와 나뭇꾼.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속의 사건의 증인들이다. 승려는 길에서 지나가던 사무라이와 부인을 봤고 나뭇꾼은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영화는 소설과 동일한데 그들의 증언이 영상으로, 한낮의 맑고 무더운 날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두 남자, 도적 다조마루와 점잖은 체 하지만 얄팍한 속임수에 욕심으로 넘어가버리는 사무라이, 그 둘 사이에 성취물처럼 놓여있는 여인. 서로 차지하려 싸우다가 한쪽이 버리니 나머지도 금세 입맛을 잃는다. 소설에서는 끝까지 이제 어쩌냐며 울어버리는 여인이지만 영화에서는 미친 듯이 웃어제끼며 둘을 싸움 붙인다. 자존심을 부추키며. 둘다 지쳐 나가떨어질 땐 여인은 사라지고 없다.

 

이 모든 장면을 영화에서는 나뭇꾼이 목격했지만 재판정에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기도 욕심으로 무언가를 훔쳤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상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가라는 중얼거리는 승려와 나뭇꾼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인간 따위는 욕심으로 이루어졌고 체면 따위는 없는거라는 인물이 (아마도 소설 '라쇼몬'의 그 하인) 등장해서 이번엔 노파 대신 버려져 울고있는 아기에게서 옷과 포대기를 벗겨 갖고 떠나버린다. (비열하고 이기적인 이 인물은 '이야기는 재미있으면 그만, 진실은 내 알 바 아님, 이라고 말하는 ... 나 같았다.) 이제 이 아기는 어찌할 것인가, 최소한의 염치라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나뭇꾼이 속죄의 마음으로 (자신은 그리 말하지 않지만) 키우겠노라 약속하는 (처음엔 그 조차 의심하는 승려) 나뭇꾼. 영화는 어둡고 시끄럽고 강렬하게 비와 땀과 칼부림을 쏟아내지만 결말은 비가 그치고 그래도 인간, 약속이라도 작은 믿음이라도 보여주려한다. 이대근을 닮은 도둑 다조마루와 나약해 보이다가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르자  거의 미쳐 소리지르는 여인, 그리고 진짜 넋을 내준 무녀, 새침한 사무라이 등 각각의 인물들이 전형적이지만 생생하게 여러 감정을 보여주어서 기억에 남는다. 역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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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4-2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래식의 클라쓰라고나 할까요.
고전으로 추앙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라쇼몽의 핵심은 인간은 모두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사실만 보게 되더라 뭐 그런 게
아닐까요.

상이한 진술 가운데 진실을 찾아내는 일은
아마도 신의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부만두 2018-04-23 21:13   좋아요 0 | URL
동감이에요. 진실은 결국 인간의 능력 밖에 있겠지요.
그러니 인간 독자들은 재미만 챙기기로 하겠습니다. ^^

클래식은 의미 만큼, 은근하게 묵직한 재미가 있었어요.
이 영화 추천하고 싶어요. (이미 보셨을듯)

레삭매냐 2018-04-2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 전에 영화 보기에 미쳤었던 시절
이 있었습니다. 20년도 더 된 시절의 이야기네요.

한 때 씨네필이었는데 당근으로 봤습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