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과 평전, 그리고 논문,소설,학문적 성과를 함께 읽기.

인물들은 자칫하면 학문적의 성과에 가려, 그 그늘이나 일상을 함께 읽기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특정저작만 앞에 나와 그 삶의 고통이나, 고민, 그 막막함을 벗겨내는 과정들이 소멸되기 쉽상이다. 그래서 겨우 건지는 것이 그 저작의 두드러진 성과물로 희화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온전히 평전하나로 그려내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시선이 섞이면 그래도 단순화시킨 시선의 결을 넓혀 다른 이해를 들여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노신의 또 다른 평전들을 읽고 있는데, 생활의 세세한 면과 개인적인 고뇌, 그 일상을 작품과 연관시켜 논증하는 것이 인상깊다. 물론 인생을 일관성이나 논리성으로 지나치게 연결시키는 것 역시, 삶의 단편이 그렇지 않기에 이 역시 다른 면을 놓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삶의 맥락과 작품을 열결시켜 흡인력 높은 평전이나 논문을 만나면 마음은 그 삶과 작품을 대조시켜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폴라니와 노신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역사도 어쩌면 표피만 건들여서 깊은 맛은 언급하지도 않은 채 일방적인 주입으로 점철된 것은 아닐까? 열심히 학문적 연결과 깊이를 더해가는 학자들의 노력에 심심한 감사를 보내게 되는 연유가 있다. 존경심까지 뭉글뭉글해진다. 

[거대한전환] 홍기빈역자 폴라니소개글. [분서 1].... 

 


-지식인과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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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먹구름과 비. 사나운 바람이 정신을 못차리게 하더니 아주 잠깐 꽃을 피우고 사라진다. 일터동료 덕에 담을 수 있게 된다.

 

 

- 무지개 몇점-

뱀발.  무지개가 뿌리가 있구나. 사자바위 아래 산턱에 걸리 뿌리를 한참이나 보다. 그 줄기를 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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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광고]가 아니라 後告, 쉽게는 뒷북

꼭꼭접은 바람, 다가설수록 커지는 낙엽소리, 시계태엽처럼 꽉죄여진 도시음, 안개같은 섬내음, 11월에 내릴 가을비 한점에 섞인 달빛들을 밀물처럼 싣고 와 

 슬픔하나, 눈물한점, 별빛하나, 설레임한점, 홍시처럼 달린 시월 마지막날,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섹스폰 소리, 아직 바다에는 비치지 못한 하루남은 보름달. 아쉬움한점. 달빛둘. 아픔한점. 단풍하나.  

감추어둔 마을 속내와 향기, 저 호수와 바다에 비친 달, 통통거리는 작은 배와 바람에 몸을 맡긴 목선, 저기 철거민 둥지, 기모노입은 여인네를 배경으로 한 섬 해수욕장, 용머리를 들고나는 가을낙조, 끊일 수 없는 밀어와 속삭임들. 목포부청을 향해 떼인 월급받으러 가던 추석전야의 그(녀)들. 

 그렇게 한참을 노닐다가, 한참을 배어물고 음미하다가, 그렇게 그 쌉싸름한 삶들의 향내를 섞으려니 하다가... ...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이곳에 달도 반틈은 없어지고, 가을 단풍소리도 빠져나가 허전하고, 바닷내음도 밍밍하고, 모래도 바다도 섬도, 산도 별도 구멍 숭숭하다. 자리를 지키던 몇백년도 그(녀)들의 손에 닳아 지워져 여기저기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중할 설레임만 즐기다 차마 훔쳐달아날 생각을 못했나보다091031-091101 근대사답사모임. 아***. 

 

 

 



- 이훈동정원 -

 





-목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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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9-11-03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뎌 다녀왔슴다. 목포. 여러가지로 배려해주신 여울마당님께 감사. 깜짝선물은 더더욱 감사. 자꾸자꾸 가고싶어지면 어떡하나. 목포...

키바 2009-11-0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떠나오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여울마당님 모습은 가을남자, 돌아오면서 남겨진 분이 쓸쓸할 것 같아 마음에 남았으나 곧 교통체증으로 갑갑한 속만 챙기느라 잊고 있었네요. 목포는 여럿이 가도 아름다워 쓸쓸한 모습을 감출 수 없는 곳, 즐거웠습니다. 또 폐 끼칠 날이 있길 바래요. 다음 폐는 가볍게. 괜찮으시죠?ㅎㅎㅎ

여울 2009-11-0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차가 많이 막혔다고 들었어요. 고생들 많으셨네요. 그래요. 서로 폐끼치며 살아요. ㅎㅎ. 그래야 정도 마음도 깊어지겠죠. 다음 폐 기대할께요. 후후.
 

<조선 성리학 1> 학문은 시대적 산물이다!

    “어떤 학문이든 시대적인 산물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난 백여 년간의 ‘학문’은 전문적인 영역들로 작고 깊게 분화되어 왔던 반면, 현대에 와서는 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식의 통섭(統攝, Consilience)’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분리되었던 각각의 학문들이 만나 <큰 줄기를 이루면> 우리시대를 병들게 하는 불필요한 매듭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동서고금을 자유롭게 횡단하는 학문의 전당이 되어야 할 대학이 시장논리를 도입하여 실용학문 위주의 학과 통폐합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학문은 시대의 거울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의 등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기세춘 선생님의 동양사상 강좌가 벌써 4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강좌를 통해 노장의 민중사상, 공자의 보수주의, 묵자의 진보주의에 이어서 유학의 쇠퇴 ․ 유교와 성리학의 역사를 공부했었습니다. 이번 4기에는 유교의 성리학이 조선의 성리학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강의해 주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조선 성리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2기 묵자의 진보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강의도 우리역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서양문명 중심의 세계사를 학습했던 편향과 무지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해 봅시다.

    유교는 15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비단 조선의 유교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한문을 쓰기 시작한 것도 BC 108년 한사군 설치 이전부터였다고 하니 이때 유교가 함께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교가 생활규범으로 자리 잡은 시기를 삼국시대 초기로 보고 있습니다. 유교가 이렇게 일찍부터 영향을 끼쳤다는 역사적 사실은  선생님께서는 언급하신 몇 가지 사례에서도 충분히 드러납니다.

가. 유교 교육기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 국립대학 태학(太學) 창설
나. 유학 보급 - 백제 근초고왕(371-374) 아직기와 왕인 박사 일본에 유학 전수
다. 유교적 생활규범 - 신라 600년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
라. 유학의 진흥 - 신라 김춘추 647년 당(唐)을 다녀온 후 유학 진흥에 힘씀
                - 신라 신문왕 682년 국학(國學) 설립 유교경전 교육
마. 유학자 - 崔致遠 등 당나라 유학생들 文名을 떨쳤으며, 고려의 崔沖은 海東孔子로 불림

    고구려가 국립대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무렵 서양에서는 라틴어 성서가 완성되었다고 하니, 성서의 역사가 유구한 것과 같이 우리 학문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물론 조선 성리학의 시작은 고려 말엽인 1286년 안향에 의해서입니다. 노파심에서 몇 말씀 드리자면, 유교의 성리학은 공맹의 유학(儒學)과 동중서의 유교(儒敎)와 구분됩니다. 공자의 경세치학(經世治學)을 근간으로 하는 유학은 정치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군현제(郡縣制)의 진(秦)나라가 무너지고 봉건제의 한(漢)나라가 들어서면서 동중서에 의해 민간의 도참설(圖讖設)과 결합하여 BC 136년 유교(儒敎)라는 종교로 정착되었고 400년간 국교의 지위를 누렸었지요. 이후 진(晉)나라 300년간은 불교의 흥성과 도교의 발흥으로 쇠락을 길을 걷다가 당(唐)나라에 이어 송(宋)이 들어서고서야 주희가 北宋 五子를 종합하고 도교와 불교의 장점을 수용하여 새로운 유교를 창립하였는데 이를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합니다.
    기세춘 선생님의 명쾌한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한나라 이전의 원시유교는 하늘님 제사를 매개로 하늘과 소통할 수 있다는 이른바 開天의 사제(司祭)인 제사장으로써 성왕(聖王)을 따르는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였으며, 漢나라 동중서의 유교는 하늘님을 대신하는 성왕의 말씀을 믿고, 이를 증언하는 선지자로써 공자를 따르는 복음주의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은 하늘님을 사람의 마음에 내재화시켜 <人心이 곧 天理>라고 하는 이념을 믿는 理神論(deism)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리학은 노장의 객관주의적인 道 개념, 불교의 주관주의적 心論으로 우주론과 인성론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한족의 문화적 우월성을 읽고 금(金)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겨우 잔명을 유지하던 남송(南宋)에 주희가 나타나 중화의 정체성을 확립할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성리학은 송(宋), 원(元), 명(明), 청(淸) 등 4왕조를 거쳐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적 중심사상이었으며, 서양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17-18세기에 계몽주의를 열게 하였다고 선생님은 강조하십니다. 계몽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사상인 반면 그 모태인 성리학은 잘 읽히지 못하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안향은 연경에서「주자대전」필사본과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들고 와서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합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文名을 떨치게 됩니다.

가. 백이정 白頤正 ; 원나라에서 정주의 성리학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 보급
나. 이재현 李齋賢 ; 원나라에서 주자를 연구하고 문명을 떨침
다. 고려 삼은(三隱) ; 이색 李穡, 정몽주, 길재吉再 - 不事二君의 충절  
라. 조선 건국 ; 정도전, 권근 - 성리학을 국교 지위로 끌어 올리고, 역학 ․ 경학 체계화

   선생님은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로 세우는 과정에 대해 ‘1392년 불교의 고려가 망한 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은 1398년 성균관 문묘와 팔만대장경의 해인사 이전작업을 진행하면서 성리학의 국교화를 추진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1413년 중앙집권 관료제를 확립했다. 이것은 당시 세계적인 현상인 영주가 세습되는 봉건제와는 다르며 秦나라의 법치주의적인 군현제(郡縣制)와 비슷한 것이다. 조선에서만은 중국이나 서양이나 일본처럼 지방의 영주가 세습하여 자치권을 갖는 일반적인 형태의 봉건제가 존재한바 없기 때문이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1403년 금속활자를 보급한 점, 1420년 집현전의 설치와 1426년 삼포 개항에 이어, 1443년 민족의 자랑인 훈민정음의 창제 등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적 대 사건이 일어난 조선의 초창기는 학문의 진흥과 더불어 문화적 황금기를 열었다고 하겠습니다. 1517년 성리학의 교과서인 소학(小學)이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10년 후에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가 간행되고, 1560년 退溪의 도산서원, 1575년 栗谷의 聖學輯要 등의 유학의 부흥은 조선에서 활발한 학문 연구의 풍토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이 성리학을 받아들일 당시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기세춘 선생님은 “피렌체 가문에서 르네상스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것이 16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 운동이 만개했고 드디어 종교개혁 운동으로 중세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1517년 조선에서 소학이 한글로 번역되던 같은 해에 독일에서는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것이다. 퇴계가 태어날 때쯤엔 에라스무스가 愚神禮讚을 지었고, 1516년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가 1535년에 처형되었다. 1513년 왕권을 옹호하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나왔다. … 1598년 낭트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양에서도 학문과 신앙의 자유가 없던 16세기 초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른바 사칠논쟁, 격물논쟁 등 활발한 학문 연구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봉건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구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중국의 성리학은 조선의 성리학으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17세기에 들어서자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형해화 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념적 독제로 고루해지면서 후유증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율곡의 말을 빌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잔하고, 창고는 비었는데,
왕의 은택은 아래에 미치지 않고 신의는 땅에 떨어졌으니,
만약 외침이 있어 변방이 위태롭고
완고한 백성이 무장하고 저항한다 해도 막을 병사가 없고,
먹일 곡식이 없고, 벼리를 지탱할 신의가 없으니,
이러한 때에 전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퇴계, 남명, 율곡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성리학은 퇴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16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지배계급의 곪은 치부로 인해 내리막길을 가파르게 뛰어간 셈이지요. 1559년 임꺽정의 난,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과 그 직후 일어난 8년간의 왜란이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선생님은 지적하십니다. 조선의 멸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나봅니다. 西人들의 인조반정이후 尊明 反淸의 말뿐인 북벌 정책의 강화는 조선을 쇄국의 길로 안내했으며 세계 문명으로부터 더욱 더 고립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反淸의 강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민중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조선 성리학의 흥망성쇠를 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개관하고 나니 자괴감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부말씀처럼 ‘고민했던 역사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으며, 그 배우는 자세는 경건하고 존중하는 자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씨앗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뱀발.  

강의 정리를 해주셔서 이렇게 날름 받아 먹는다. 세상에는 공짜란 없지만, 더구나 학문에는 필시 공짜가 또 다른 헛점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되새김한다. 맥락과 처지나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앎이란 쓸모가 그만큼 얕다. 역사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며, 인물에 대한 지식도 그러하다. 모두 잘게 잘게 나뉘고 부서져서 연결이 되지 않는 앎이란 더 더구나 그러한 것 같다. 한문맹이자 역사맹인 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맥락을 설명해주니 그래도 작은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모르는 것이 아니구나. 조금이라도 맥락과 처지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으면 낱개인 앎들이 그래도 제법 볼 품있게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이라도 이는 것 같다. 가뜩이나 비슷한 고민을 담는 책들을 보다나니 반갑기도 하다. 

이것 또한 공짜 속셈이니, 그 만큼 싸한 아픔을 빨리 느끼고 어려움의 응어리를 가져가는 것이 더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날름받아먹지 말고, 고민고민하다 받으면 그래도 몸에 한구석엔 붙어있으리라. 이렇게 머리로 들어와 후르르 날라가기 전에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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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운동을 하러간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 운동필을 받더니 너무 열씸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데 시간이 이내 출근하던 시간을 넘어선다. 띠리릭 전화를 날리니 일이 있어 인천을 올라간다고 하더니 연락을 못줘 미안하다고 한다. 문여는 소리를 새벽운동으로 착각하다니 그제서야 신발장 위 그대로 남아있는 차 key가 떠오른다.

오늘도 차가 많이 막히는 것을 보니, 영암으로 가는 대로에 사고가 난 것이 분명하다. 신호가 의미없는 네거리앞에서 라디오를 켠다. 앵커와 기자가 어제 미디어법 헌재판결을 두고 주고받는다. 논리가 맞지 않고 설명은 해야하는데, 당췌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서로도 기가 찬 모양이다. "*기자. **가 위법이면 헌법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요?" "아~ 네. 버벅버벅" "어제도 버벅대더니 오늘도 그러시는군요." "버벅" 그리고 어디 황당한 사례를 찾아냈는지 "예전 노동법 통과할 때 신한국당에서 어쩌구저쩌구 긁적긁적"한다. 

3:2의 패배가 다음날, 전날의 수도권, 중부권 전멸의 분위기와 달리 근소한 차이의 패배로 묘사된다. 그리고 긴장하던 한나라당이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힘을 받아 국면을 전환해나갈 것 같은 뉘앙스를 던진다. 이어지는 소식, 정운찬이 박근혜를 만나기로 했고, 세종시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해나갈 것 같다고 전망한다. 다음, 선거구를 통합하면 지역숙원사업을 들어준다는 되지도 않는 황당한 이슈가 메인으로 올라와 있고, 망발을 주고받고 한다.(숙원사업이면 진작 들어주던지,그들의 포석은 원색적이다.어차피 말도되지 않지만 단맛만 적당히 던져주면 무마된다는 전략이겠다.)

그러다보니 벌써 뉴스 클로징 단계, 오늘의 논평이 이어진다. 미디어법 어쩌구저쩌구. 이제 집에서 방송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동하면서 dmb를 보고 이래저래 편해졌고 살맛난다. 미디어 사업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어쩌구저쩌구...(그러니 미디어법이 좋다란 이미지만 만들어놓는다. 논평인지 선동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미디어법과 관계없는 이야기만 잔뜩하고 마무리한다.

이어지는 앵커의 클로징멘트. 미국 저명한 누가 말했답니다. 그래서 뭔가 거창한 말이 이어지는가보다 했다. 그 말이 뭐냐하면  

 "세상일이 다 그런거죠"라구.  

 차는 막히고 왜 공연히 이 방송을 들었는지 후회도 되고, 거기에다가 이 소리까지 들으니 가슴이 막막하다. (왜 채널을 이곳으로 돌렸는지 모르겠다. kbs 뉴스와화제 08:00-08:35)


공연한 생각과 몽둥이, 저질 방송 생각과 그 가운데서 일하느라 쓸데없는 자료만 잔뜩 모은 기자나 작가나 누구나...세상 일은 다 그런거죠 하는 놈들만 잔뜩 버무려져 있을 그 생각을 하니 울화도 치민다. 

 



잠시뒤 지역 광주 방송이 이어진다. "가재는 게 편이라죠" " 지역언론에서 총력을 다해 투쟁하기로 했습니다."란 오프닝멘트가 없었다면 하루 종일 개(게)들 생각만 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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