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느 왕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을 담은 것을 가져오라는 우화가 있다. 신하들은 책들을 모으고, 어렵고 어려운 책들을 갖다바치자 왕는 점점 더 간단한 것을 요구했다. 또 다른 것을 가져오고 오고 그렇게 순환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하나로 정리된 것이 나왔다.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엔 공짜는 없다.'였다는 한마디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처럼 인문학에도 인문에도 공짜는 없을 것이다. 요약이나 다이제스트는 들어가는 문의 편리나 수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인문이라는 것은 달리 그 숙성의 과정이 배이지 않으면 무용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유명인이나 강사를 찾거나 쫓아다니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인문의 입문으로 저명한 분의 안내가 얼마나 유효한가는 입증된 사실이다. 선무당같은 이에게 출발을 맡겨 도통 알 수 없는 길이나 숲으로 들어서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다.

그런데 정작 인문의 힘은 무엇일까? 유명하고 능력있는 누구 [ ]가 말했다. 어떤 어떤 대학자가 이렇게 말했다에 괄호를 쳐보면 어떨까?  그 영향력을 끼치는 [괄호]에 장삼이사를 넣는 것이다. 인문의 힘이란 것은 [괄호]에 누가 들어가든지 상관없이 그 [괄호]를 통해 [나]와 [너-나]를 달리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차이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세상도 사회도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들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가져가는 힘일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과 인문을 소비하지 않고 소통한다고 한다면, 그 궁극은 저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에 전율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일 것이다. 유명강사를 만나는 회수나 강도로 당신의 인문이 확장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신의 자유와 바라고자 하는 바는 바로 당신 등잔밑에 있다는 사실부터 출발하는 것이 인문의 길일지 모른다. 인문人文이 아니라 인문人紋. 그렇게 평범하고 모자란 사람들의 무늬를 탐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2. 


인문학이 유행이다. 어느 모임도 공지사항이나 게시판을 보면 인문의 흔적이 넘쳐나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듣고 싶고 보고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보지 못하던 사람과 얼굴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갑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대면하고 접촉하고 싶어하던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일까? 인문을 핑계로 서로의 삶이나 견해를 섞고 품고자 했던, 인문의 기본소양에 대한 궁금증을 잊은 것은 아닐까? 

 
유명한 사람과, 인문의 주제가 화려하면, 우리 단체와 모임은 잘 되는 것일까?라는 우려는 그 모임들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생각은 섞이는가? 고민을 섞이는가? 내모임에 대한 아집과 경계는 허물어지는가? 인문으로 인한 상상이 저기 저 모임의 당신에게 향하는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수집이야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조선의 골동품들이 돈이 될 것이라구.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재미란 문화는 다음을 기다리게 한다. 사람들이 저기 갈 곳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보이는 것만 쫓는 무리에게 여전히 보이는 것만 궁금할 것이다.

 
또 다른 것이 괜찮다 하면 또 우르르 몰릴 것이다. 다음 유행할 것은 인문이 아니다. 소통의 아이템이 아니라 소비의 아이템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또 몰릴지 모른다. 그리고 또 그것만 할 것이다. 소비의 순환구조를 갖는 것은 정작 아줌마와 장삼이사의 모임이 아니다. 찬란한 모임들이 더 그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 


 

1. 

며칠전 신문 정칼럼니스트의 글이 생각난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여기저기 봇물터지듯 공간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문화의 향유가 꽂꽂이나 그림, 취미를 넘어서는 공간잠식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헌데, 조금 헛갈리는 것이 그것이 인문학의 소통인지 소비인지 구분이 모호함이라 한다. 세대가 달라지듯, 주도적인 주부도 달라지고 있다. 새마을...부녀회..엄마세대에서 그래야 조금 다른 지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일까? 일견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소비인지 소통인지, 유행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가르는 선은 무엇일까?
 
아마 소비는 끊임없이 유명하다는 것과 좋다는 것을 쫓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통은 아마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일회성이 아니라, 조금씩 뿌리를 내리려할 것이다. 만들거나 끊임없이 작아지거나 하는 방향성으로 그 가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되물어보는 것이다. 유명하다는 단맛이 빠진다면, 우르르 몰려다닌 연유뒤에 허망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더해지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아프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한마디 한마디 죽비소리에 정신이 바짝 나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더 원하는 인문의 골수만 갖는 명강사에 이끌려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시선이 걸려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이 바뀌고 있다. 

뱀발.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이 바뀌고 있다. 내아이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말이다. 무늬만 바뀌는 것인지? 무늬도 바뀌는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세월의 힘은 관심과 질적 측면도 다른 색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보인다. 그런데 집착에 대한 반성이나 잣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 자의적이면 되는 것일까? 아마 반성의 능력과 인문학의 힘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현실화시키는 것은 소비와 소통의 문제이지 않을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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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9-11-1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