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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함

 

홀, 편혜영

 

 

 글을 읽어가면서 계속 ‘이걸 읽었는데, 어디서 봤더라?’ 묻고 있었다. 분명 이 내용을 알고 있기에 같은 책을 또 읽었나 하며, 나의 기억력을 탓했다. 역시 책은 읽은 후 바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다. 오래 전 기억에 사라져 버린 책들을 다시 읽지 않는 한 “읽었다”와 “읽었던 것 같은데”로 남을지 모른다. 물론 읽은 기억이 있는 책이라 해도 “재밌다”로만 기억될 것이고. 그래서 기록의 이유는 기억과 편리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게으름이 기억력마저도 게으르게 만들었다.

  다행히 나의 기억력은 완전히 죽은 건 아니었다. 이 장편소설은 작가의 단편 <식물 애호>를 전개시킨 것이었다. 2015년 현대문학상 <소년이로>수상집에 수상작가 자선작으로 실려 있던 것이었다. 불과 1년 새 기억이 가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다니......후반부로 갈수록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 익숙함은 그 때문이었다.

  작가 자신도 자선작으로 이 단편을 꼽았고 다시 단편에서 확장시켜 장편으로 전개시킨 만큼 이 단편에 애착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긴, 오기 씨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더욱 더 세심하게 그리며 내용을 전개시켰다.

  편혜영 작가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오이가든>에서 느꼈던 것처럼 전반적으로 공포를 동반한다. 피터지는 끔찍스러움이 아니라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괴기스러움, 기이함. 극도의 불안을 동반하는 심리적인 긴장감이 느껴졌다. ‘홀’이라는 제목만을 보고선 요즘 증가하는 싱크홀을 연상했다가 표지의 ‘집’그림 때문에 집안에서, 가정에서 느끼는 삶의 구멍, 인생의 헛함을 생각했다.

 

기억이 선명해지고 정황이 분명해질수록 오기는 슬퍼지고 서글퍼져서 비통할 것이다. 차라리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기억이 떠오를수록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다시는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p34

 

  사고로 아내를 잃고 반신불수로 누워 있는 사내. 오기 씨. 오기 씨의 시선으로 그에게 안타까움을 보낸다. 더구나 운전자가 자신이었으니 스스로에 대한 자책은 얼마나 더할 것인가. ‘그래도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지요, 오기 씨’라고 응원하는 마음을 계속 갖게 될까. 삶의 의지를 다질까 말까를 고민하는 오기 씨의 사고 이전의 기억들은 그에 대한 응원을 지속하는 것을 계속할까를 고민하게 하지 않는다. 그냥, 오기 씨는 어떻게 될까가 관건이 된다.

  사고 이전의 그의 아내와의 관계, 오기 씨의 행동은 둘만 아닌 듯 아닌 듯 오기 씨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지만, 그 파장은 사고 이후의 그의 삶을 지배한다.

 

간혹 자신의 성공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누군가의 실패가 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p184

 

  우리는 오기 씨의 성공을 바랄까, 실패를 바랄까. 사고 이후 몸을 회복하고 다시 일상의 생활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응원의 마음이 갈림길에 놓여 있는데, 오기 씨가 인생을 살면서 가졌던 저 마음이 내 마음에도 스르륵 자리잡는다. 나에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던 건가?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으로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p28

 

  삶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뒤바뀔 순간을 위해 여러 층의 행동들을 쌓는 것 같다. 그러니까 무너질 탑을 쌓아 가는 순간순간의 행동들이라고 해야겠지. 아내의 행동들, 장모의 행동들에 불안감을 느끼는 오기 씨 역시도, 지난 순간순간의 자신의 행적들 때문에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눈에 띄지 않는 듯하지만 내 행동은 세밀하게 기록되어 남는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기록의 페이지가 세상에 펼쳐지는 것. 살아가면서 내가 느끼는 삶의 헛함은 무엇일까. 그 헛함으로 만들어 버린 구멍은 무엇일까. 사람을 더욱 공포스럽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뜻하지 못한 불행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하나 만들어 낸 떳떳하지 못한 삶의 행동들 아닐까. 아니, 그 행동들이 드러나는 것. 잊어먹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순간, 아무도 모르리라 여겼던 것을 타인에 의해 까발려지는 순간.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p78

 

  어쩌면 오기 씨의 고발자가 되었을 아내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은 오기 씨의 장모다. 오기 씨의 장모는 특유의 분위기로 오기 씨를 옥죈다. 그 장모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오기 씨의 공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한 기억이 선명할수록 더욱 더 커진다. 그래서 오기 씨는 아름다운 나의 집, 정원이 있는 자신의 집에서 꼼짝할 수 없는 몸과 심리에 놓인 자신을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쓴다.

 

어떤 가정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오기는 무력해졌고 내부의 공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이 아예 빠져버릴 것 같았다. p184~185

 

  오기의 불안을, 공포를 잠재워 줄 수 있는 것은 작가다. 그러나 또한,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구멍 속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오기를 구멍으로 밀어버릴지 말지를. 오기 씨에게 다시 기회를 오기 씨에게 연민을. 아니면 내 성공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실패에 느낄 안도감을 위해 오기 씨를 더 깊은 구덩이로 쓰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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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나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기호 , 박선경 (그림) .

 

 

 

    의도한 것인지 이기호의 소설은 읽기 전부터 웃음이 유발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웃음이 길고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에 함정이 있다. 이 책도 그 중에 하나다. 제목에서 주는 느낌,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속에 담겨진 웃다 앓을 이야기들. 그런 것 같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는 소설.

   이 소설집도 최근 여러 편의 소설집의 계보를 잇는 짧은 소설의 묶음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로 페이지가 정해진 소설의 흐름이 어느덧 짧은 이야기로 바뀌는 건가. 최근 출간된 여러 편의 소설에서 이런 경향을 봤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인지 편집자의, 출판계의 의중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후자일 수도 있는 게 특정 출판사에선 아예 짧은 소설 위주의 시리즈를 기획적으로 출간하고 있는 것을 봐선 이런 분량의 소설을 작가에게 요구했겠거니 싶다. 이런, 그 출판사가 이 출판사였다. 정이현의 <말하자면 좋은 사람>과 같은 스타일. 소설의 분량인들 무슨 상관이랴. 글이, 이야기만 좋다면 그것에 마음을 주면 되는 것일 뿐.

  어쨌든, 이렇게 짧은 소설의 계보에 이기호도 참여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전반적으로 몸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그 움직임이 예사스럽지 않다. 움직이고 움직이며 무언가를 하고는 있는데 그 모습이 어째 뒤뚱뒤뚱 허둥지둥 위태롭기만 하다. 소설의 세계가 상상이 아닌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때,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타게도 안쓰러운 모습들을 보인다. 이기호의 전작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현실적이기도 하고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낮은 곳으로 임하라>의 청년들의 이야기가 맴돈다. 소설집의 제목이 짧은 소설의 제목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문장이었다. 계속되는 취업의 실패를 겪는 청년들의 표정이 이 제목과 겹쳐진다. 그래도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겠지. 부모에게서 사업자금을 얻어낼 형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다행이지 않은가, 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으니까.

 

준수는 강원도를 향하는 내내 말없이,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우리 미취업자들의 일상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그게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가르침이었다.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 설령 눈높이를 낮춰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월급에서 학자금 융자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라…….

강원도에 갔다 온다 한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거기 가면 눈높이 따윈 없겠지,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p25~26


  한편, 현대 사회 속에서 가상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이는 사람들은 많이 볼 수 있다. SNS의 세계에서 자신을 가상하고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들. 이에 관한 이야기도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이 인터넷상에서 가상의 나로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관해서 정이현의 짧은 소설집에도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그 두 이야기를 비교하는 맛도 좋을 듯하다.

 인생은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 같은 것일 게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쉽다고 세상 모두가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세계는 삶의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들만을 한다.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그러니 ‘넌 왜 그러고 있니?’ 같은 뉘앙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린다. 돌아보면 모두 힘겨운 삶에 허덕이고 있으면서도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너만 왜 그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무언가 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버팅기며, 들어갈 틈을 주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저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p184

 

  힘겨운 삶을 버팅기며 살아가면서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일까. <이젠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 그것이 포기의 낙심의 말로써가 아니라,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의 말로써 건네고 듣는 말로.

 

그 형 딸아이 말이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내 오촌 조카가, 제 아빠 얼굴을 쓱 한번 문지르더니 귀에서 뭔가를 쑥 빼내는 거야. 그러면서 “아빠, 이젠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하더라고. 그게 뭔지 알겠어?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그래, 그게 바로 보청기였어. 알고 보니 이 형이 교통사고 당했을 때, 그만 청력도 많이 손상되었다나 봐. 그런데도 그 귀로, 그 청력으로, 이십 년 넘게 가수 생활을 한 거였지……. 그걸 이 세상에서 오직 딸만 알고 있었던 거고. 나? 나는 형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어. 그저, 그 형이 고장 난 귀로 살아온 이십 년을 생각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고.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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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



         한강. 흰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한 책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아니고

 책도 많이 팔리는 나라가 아니다. 

심각한 독서율과 OECD 회원국 월평균 독서량에 대한 

비교 기사를 읽다 보면 평균 독서량보다 많이 읽는구나라고 뿌듯해지는 게 아니라 서글프다. 

책 판매율도 수험서, 영어책, 자기계발서이거나 TV를 비롯한 언론에 

소개된 책만이 높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작가 마르케스의 소설이 널리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흰’과 같이 최근 분량이 적은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들 책에 비해 ‘흰’은 좀더 다르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소설책의 분량이 줄어든 것이 페이지가 많은 소설책은 독자들에게서 외면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서시장의 변화에 맞게 오래도록 장편소설의 적정 분량으로 인식되던 소설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 변화의 원인은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핵심은 ‘잘 안 읽는다’ ‘어쨌든 안 읽는다’니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책의 표지와 뒷면을 살폈다. 거듭 확인을 했지만 이 책은 분명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형식과 구성의 파괴, 변주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하게 되는 익숙한 전개가 아니라 에세이 느낌이 강했다. 함께 곁들여진 사진이 더욱 그 느낌을 강조했다. 최근에 읽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과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도 문체도 분위기도.....마침 <멀고도 가까운>에서도 리베카 솔닛은 여행을 떠났고 북유럽이었고 어머니가 나왔고.......한강의 ‘흰’을 읽으면서도 북유럽의 느낌이 났는데 역시나 북유럽 쪽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 두 책이 유사하게 느껴졌는데 하나는 ‘에세이’로 하나는 ‘소설’로 불릴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일까.

  문장으로 본다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참 좋았다. 한강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소설 ‘흰’은 정말이지 ‘희다’도 아니고 ‘흰’이라는 어감에 맞는 글이었다.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느낌으로 와 닿은 이야기. 하지만 소설이 인물과 사건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임을 알기에 익숙한 형식에서 떨어져 있는 한강의 ‘흰’은 계속 멀찍이 떨어져서 봐지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말, 소설이란 무엇인가.

  한강의 이름을 지운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 책을 소설이라고 생각할까. 수긍하며 놀라움과 경탄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을까. 덧붙여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의 신작이라는 글귀는 책 제목을 ‘흰’이 아니라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의 문학시장에서, 출판계에서 어느 신인 작가가 이런 글을 들고 출판사를 찾았다면, 편집인들은 흔쾌히 출판을 해줄까? 아니, ‘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을 수긍을 할까?

  궁금해졌을 뿐이다. 이 책이 독자의 마음에 닿기까지 분명 ‘출간’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할 텐데 어느 무명의 작가가 달려 나와 ‘나의 첫 소설을 출간하고 싶어요’라며 이 책을 내밀었을 때 출판사 관계자의 얼굴이, 표정이, 그들의 조언이.... 뛰어 넘어야 할 것은 여러 가지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름 하나로 ‘새로움’ ‘낯섦’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상당히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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