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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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곧 오월이다. 며칠째 차고 강한 바람이 분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참말로 잔인토록 바람만 분다. 꽃이 핀 것도 진 것도 모르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다. 멈춰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세상도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변해야 하는데 나는 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래로 돌아온’ 것도 아니니, 도대체 이건 뭔가.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디디하면 어느 소설 주인공이 떠오른다. dd하면 45도로 몸을 비튼 채 들어 올려 흔드는 양손 엄지손가락이 떠오른다. 나는 이 간극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데 왜 디디인지 왜 d이고 dd인지, 이런 이름인지.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자꾸 선점해버린 디디가 생각나서, 그와 평행하게 dd에선 엄지 척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버스 밖으로 튕겨 나가버린 dd임에도 엄지 척,이라니. 이건 너무 어이없게 슬프지 않나.

  <디디의 우산>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디디가 있고 분위기가 겹쳐 떠오르고 ‘혁명’도 기여한다. dd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놀라고 재밌어 했다. 그러나 혁명을 행하던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도 혁명을 말하며 행하며 웃지 않는다. 우리가 거쳐 온 세계는 좌절과 환멸 또한 가득 뿌려놓아서 혁명을 말하며 웃음짓기란 쉽지 않다. 혁명을 말할 때 생각할 때 웃음지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dd를 잃어버린 후의 d는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웃지 않는 모든 주인공의 재연 같다. d를 도려내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보내버리면 그 시대와 분위기에 딱 맞을 것이다.

  그러나 d는 <디디의 우산>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dd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아 dd를 기억해야 한다. dd는 운동권도 아니고 단지 혁명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을 보며 혁명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기억하며 dd를 기억하는 d에겐 모든 혁명의 현장이 dd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기제가 된다. 소설은 절여진 배추처럼 곰삭아 있는 d가 다시 소금기를 털어 내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까. 그것은 ‘여소녀’를 통해 제 주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내는 이들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다. 하찮음에 하찮음에.


  d가 이렇게 광장에서 공명한 소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제목으로 이어져 좀더 구체화된다.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저항하는 것,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는 그나 그녀로 또는 익명으로 d나 dd가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형태가 등장한다. 이름을 가진 하나하나의 인물들로 말이다. 이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에 대해 책과 영화 등을 빌려 생각하고 생각하는 모습은 그저 관념으로 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유가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이들 걸음 방향은 광장으로 향해 있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나…. ‘혁명’속에 갇힌 것, 외면하는 것이 있음을 소설은 또한 보여주고 있다. 올바름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 침묵하거나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혁명’이란 나를 우리를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가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도 모든 이야기 끝에 남은 것 역시 이야기.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도 ‘나’는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말할 필요가 있다”고.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산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섭도록 패배한 분위기와 운동권의 교조적인 문체가 후일담 문학이 가지는 특성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은 건가, 살아있음이 죄인듯 더 가라앉은 모습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것이더라도 나를 미워하는 것만으로 있던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 <디디의 우산>은 과거에 이어 현재 진행이고 어쩜 황정은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여러 책들을 인용하며 사유하는 방식에서 언뜻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내리꽂히는 연설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의 갈래 속에서 확실한 나의 신념을 세워가기 위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올바름을 지기기 위해 행했던 ‘혁명’과 그 과정은 ‘혁명’이라는 단어에 무게감을 지우므로 어렵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왔던 여러 사건을 통해 혁명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묵자(墨字)의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묵자의 세계관을 지닌 이들에게 세상에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혁명이 도래했다.” 언제나 말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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