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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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디에

뱀과 물, 배수아, 문학동네, 2017-11-10.


  난 좀 정치적인가. 소설 속 여왕과 득실거리는 쥐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 이것은 그런 이야기인가 싶었다. 아니 그런 쪽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내가 있던가.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은 책이 되었다. 그럼에도 제법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한마디로 하자면 배수아의 책이란 말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의 이름 속으로 이야기가 종속된다.

  7편의 단편은 이어진 이야기처럼 동일한 장소와 사건,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동일한 사람과 장소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충격의 떨림, 경악과 분노가 강렬한 이미지와 혼합된 『뱀과 물』을 읽어가는 것은 그렇기에 힘이 든다. 글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힘이 부친다.

  어린 왕자 속 보아구렁이가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보면서 무섭고 징그럽다 생각한 적 없는데 밭일 하던 여성을 삼킨 비단뱀은 기사제목만 보고도 끔찍함에 몸이 떨린다. 동일한 뱀의 동일한 행위에 대한 내 반응이 다른 것이 실화에 대한 것이라면 단지 소설인 「뱀과 물」의 뱀에서 그려지는 이 자지러지는 끔찍함은 왜인가. 

  첫 단편 제목부터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라니. 눈 속에서 불타는 아이의 모습을 기어코 상상하게 만드는 작가는 시종일관 충격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음에도 톤이 한결같다. 화형대에 타버린 시신을 나무토막의 일부로 보는 것처럼 뭉툭하게 이야기를 날리고 있다. 

  단편들마다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라고 해야 할지 소년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니 그냥 아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아이들은 “일곱 살 생일까지는 남자애지만 이후에 여자애”가 된다. 생물학적인 변화는 아니다. 그저 여왕이 일곱 살 이전의 여자아이를 잡아가기 때문에 남자로 변장을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쫓아오는 여왕의 공포를 피해서 아이들은 부재하는 어머니를 찾아 낯선 곳을 향해 아버지와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부닥치는 고통의 현장들, 기억들이 존재하고 때로는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이 살고 있는 터전은 두려움과 막막함이 가득한 세계, 그러니 아이들의 시절 또한 아름다울 리 없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죽음과 시간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쫓으려는 시도는 버렸다. 잡았다 생각하는 순간 사라지고 강렬한 이미지에 압도될 뿐이다. 마냥 쓸쓸하고 적막한 국경지대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심정을 가득 안고서 기다리는 것이 희망인지 절망의 마감인지 모를 상태로 서 있는 기분이다.


   “저기 미친년이 간다.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에 어머니는 부재하며 아이들은 여성임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 그곳. 그곳은 마치 ‘여성’이라는 운명이 본질적으로 슬프게 아프게 흘러갈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여성의 힘이 먹히지 않는 세상이라도 되듯이. 그곳에서 자라나야 하는 소녀들은 뱀과 물에 의해 폭력당하는 운명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처럼. ‘뱀’과 ‘물’이라는 이름을 획득한 알몸에 황소 마스크를 쓴 두 남자. 학대와 윤간과 살해와 낙태를 감행하는  ‘뱀’과 ‘물’의 이야기에 소녀들이 일곱 살 이후에도 영원히 남장을 하고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고 만다. 잔인한 폭력의 경험으로 결속되는 이 슬픈 소녀들의 이야기가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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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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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재이라면 소나기는 없다


한정희와 나-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다산책방, 2018-01-22.


  2017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은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전원과 사람의 풍경이 으스스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풍경의 으스스함이 사람의 마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사람의 마음이 모여 으스스한 풍경을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폭력이 일상의 모습이 되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노인들에게 여성에게 가족에게 가하는 이 폭력의 이야기는 또한 낯설지 않아서 놀랍지도 않다. 이런 삶을 모두 힘겨워하면서도 어째서 혐오와 폭력은 일상의 영역이 되었는가. 그것은 이해의 문제일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결심을 실패로 이끄는 것은 의외로 작고 사소한 일에서다. 누군가를 이해하겠다, 진정으로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은 크나큰 다짐과 의지와 결의를 필요로 하는데 비해서 훅 무너지는 것은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 하나다. 왜 그렇게 의지를 다져야 했는지 민망하고 무색할 정도로 쉬이 무너지는 터에 이해하려 하지 않으려던 마음의 크기가 컸음을 알고야 만다.

  권여선의 「손톱」 속 소희는 오늘도 새벽부터 먼 출근길을 떠난다. 엄마와 언니에게서 차례로 버려지며 그들의 빚을 안고 사는 20대 초반의 소희가 피멍 든 손톱으로 절규하는 목소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엄마와 언니가 없어도 살아왔기에 손톱없이 사는 것쯤이야 별 거 아니라고 독하게 외치는 소희는 월급을 받으면 최소생활비를 제하고 얼마나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계산하며 산다. 희망어린 기대는 월세와 보증금이 오를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다. 희망없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희에게도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엄마와 언니들처럼 착취하고 버리고 갈까, 아니면 함께 그 고통을 헤쳐 나갈까가 궁금해졌다.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에서 나의 아내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다른 부부의 집에서 잠시 자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따쓰하고 편안하게 보냈던 아내가 그 부부가 입양한 아들의 딸, 손녀 한정희를 잠시 맡자는 제안에 그 옛날 아내를 맡아 주었던 부부처럼 되기로 한다. 기꺼이 고모부가 되어 여러 차이들을 이겨내며 적응하던 나는 한정희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반성할 줄 모르는 자세를 보며 ‘환대’를 거둔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서 이혼 후 아들 재이와 사는 ‘나’는 동네 청년들이 노인을 폭행하는 동영상 속에서 인형뽑기를 하고 있던 재이를 본다. 노인이 폭행을 받는 동안 신고하지 않은 재이가 동영상이 공개된 후 목격자로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받을 상처와 충격, 혐오가 만연하는 가운데 이혼가정이자 다문화가정인 재이가 앞으로 겪을지 모를 폭력에 걱정하는 ‘나’는 재이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동영상속에서 아이가 입을 가리는 장면이 폭행을 목격한 충격의 몸짓이 아니라 노인을 폭행한 이들의 혐오의 말들을 들으며 ‘웃는’ 것을 가리는 모습일지 모른다는 충격을 받는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 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다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폭력이 일상화된 데에는 가져본 도덕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방식은 ‘그가 가진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한 개인을 이해하는 일을 위해 필요한 역사가 모두가 동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갖는 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구조가 개인의 특별한 상황을 따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굳어져 버린 이 모습들은 정말로 우리가 가져야 도덕들을 물리쳐버린 결과가 아닐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을 등한시한 결과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정희와 재이, 이 둘이 만나 그려갈 풍경은 결코 소나기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둘은 서로 혐오의 언어들을 쏟아 부으며 기꺼이 웃어제낄 것이다. 소년과 소녀는 도시의 무법자가 될지도 모른다. 소녀의 죽음은 실제로는 폭력에 의한 살인이 될지도 모른다. 소설 속 한정희와 재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반응하는 저 무심함과 희화화, 반성없음을 떠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태도는 앞으로도 이어질 어두운 세계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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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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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저, 민음사, 2015.12.07.


  특별히 유쾌할 일 없는데 웃음이 났다. 처음 몇 장을 넘기면서는 스릴러인가 했는데 판타지, 코믹 장르였다. 열편의 연작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인공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하여 모두가 명랑만화에서 봄직한 캐릭터들이다. 당연 이런 캐릭터의 열전은 명랑만화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주인공이 가진 남다른 능력 또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일찌감치 학교는 온갖 귀신이야기가 출몰하는 전설의 장소다. 안은영이 일하는 M고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명확치 않은 생물들이 학생들을 위협하고 있다. 안은영은 이런 기운을 에로에로 에너지라 칭한다. 이런 것, 액토플라즘을 ‘보는’ 능력자 안은영은 이것을 퇴치하기 위해서도 애쓴다. 그녀가 가진 ‘능력’ 때문에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유령, 귀신 등, 나쁜 기운을 뿜는 물질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보건교사인 안은영은 비비탄과 플라스틱 장난감 칼을 소지하고 산다. 이런 에로에로 에너지를 내뿜는 물질이 학생들을 위협하는 순간 저 멀리서 달려와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을 휘두르거나 비비탄 총을 쏘는 선생님이라니. 학생들이야 나사가 빠지거나 풀린 듯이 보건선생님을 보지만 안은영은 제 능력을 단지 ‘보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쁜 에너지를 뿜는 공포스럽고 위험한 물질에 언제든 맞설 준비가 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나쁜 에너지를 차단하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다 끌어모은다.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열편의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귀신들이 갖는 기운은 이전의 생애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에서 연유한다. 이루지 못한 욕망과 욕구, 억울함을 한가득 지고서 몇 배의 파장을 이승에서 내뿜는다. 살아있을 때부터 얻게 된 불온한 감정의 덩어리는 그것을 얻게 된 곳으로 늘 되돌아온다. 남겨둔 것이 있다면, 풀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얻은 그곳에서 해결되어야만 한다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혼들은 얼마나 무한할까. 이 무한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안은영이 선택한 것은 자신이 가진 친절함을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죽음과 폭력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무한으로 샘솟아도 충전과 방전을 오가며 끝까지 나쁜 기운이 세상을 휘두르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새부터 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친절한’ 안은영의 기질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명랑스럽게 이끄는 힘이기도 하고 단조롭게 만들기도 한다. 온갖 복수와 악행의 화려한 마침은 인과응보, 권선징악이기에 안은영이 휘두르는 총과 칼은 장난감이지만 ‘선’이라는 초강력 기능을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안은영은 ‘인지’하고 있다. 이 직진하는 친절함이 가진 단점을.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사연많은 귀신들이 출현할 때마다 힘을 써야 하는 안은영은 방전되지만 다행히도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를 찾았으니 그것은 같은 학교의 선생님과의 스킨십이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대화와 활약상을 보다 보면 이런 고전적인 설정이 주는 안정감을 알게 된다. 무한한 긍정은 다소의 불안을 포함한다. 불안하기에 긍정의 힘으로 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나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친절함’이란 말이 명랑만화에서 뛰쳐나와 서글픈 기분을 돋운다. 친절이란 상대의 친절 정도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적 친절함에 세상이 어떤 식으로 대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폭력의 상황에서 언젠가는 질 지 모르는 상황이 올 거라는 걱정에도 힘을 돋궈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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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품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이야기도, 문체도, 구성 방식도 하염없이 좋구나를 외칠 만큼 7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은 기억에 남는 작품이 많았다. 대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는 작가의 단편집과 함께 출간되어 한참을 베스트셀러에 머무른 것으로 안다. 양희가 주는 그 신선하고 아릿한 연애의 이야기가 드라마화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양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을 읽고 내가 형상화한 이미지가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내가 느낀 느낌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어떤 것이 될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을 안 하는데 알 수가 있나. 뒷모습으로 남은 얼굴. 아름답게 움직이던 위빙. 오리나무와 자귀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이상한 지식. 오늘 만난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정용준의 「선릉산책」도 곱씹을수록 기억에 남는다. 선릉을 산책해 보지 않았다면 느낌이 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릉을 산책한 기억이 소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재현해 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발달장애를 가진 한두운을 보면서 발달장애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깐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과 지속적으로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것의 차이를, 선릉 산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니, 타인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 이해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물며 장애인이라면, 그 이해의 시선은 처음부터 평행선이 아니라 사선이 아니라 우위에 서 있던 것은 아닐까.

  올 봄 비가 거세게 내리고 난 뒤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한 장애인이 동네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물이 넘었는데 석달이 다 되어 가는데 자꾸 묻는다고 했다.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모를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아들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없는 나날, 이 장성했지만 장성하지 않은 상태의 아들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낼까. 아버지와 함께 했던 동선으로 다니면서 아들은 계속 묻는다.

  “우리 아빠 왜 안와요?”

  처음의 안쓰러워하던 마음은 항상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감정은 옅어지고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에는 다른 감정들이 섞인다. 답답함이 쌓이고 자꾸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는 행동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할지 난감해한다. 한없이 갑작스레 홀로 남은 아들의 삶을 걱정하고 도와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란 저 아들의 장애 상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대체 얼마만큼의 상태인지, 저렇게 혼자 두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옮겨간다. 기꺼이 한두운을 돌보고 한두운을 이해하려던 마음이 시간이 연장되자마자 삐걱거린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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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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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이라서 슬프다

고마네치를 위하여 ,조남주, 은행나무, 2016.


  “어쩐지 나는 이 해피엔딩마저도 슬프게 느껴졌다.”

  그랬다. 난 이들의 삶이 슬펐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 위해선 소설의 엔딩을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 서울에서 가난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달동네 S동에서 살던 고마니 가족, 재건축, 재개발을 꿈꾸며 서른해를 넘기도록 버티던 그곳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것은, 해피엔딩일까.

  그토록 가난하고 힘겨운 S동살이가 마냥 칙칙하고 힘겹지 않은 것은 무겁게 이야기를 이끌지 않은 작가의 힘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다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은 그때를 아름다웠노라고 낭만적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삶이 그닥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른 여섯, 미혼이며 실직 상태의 더 이상 꿈꾸기도 없는 ‘고마니’는 유년 시절 자신이 꿈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시절이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면 아홉 살 소녀, 고마니가 꿈꾸고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서른 여섯 고마니가 일찌감치 깨달은 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이라 생각하는 고마니 인생의 첫 실패이자 꿈은 고마네치처럼 되는 것이다. 1988년 그해에 서울올림픽이 소녀에게 안겨준 체조 선수의 꿈은 동네 아이들과 체조 연습을 하는 것에서 시작해 체조 학원을 다니고 체조 학교를 다니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희망이라곤 부동산 재개발뿐인 생활에서 고마니의 엄마는 딸의 꿈을 위해 S동살이와는 맞지 않는 지원을 해준다. 그래도 딸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던 그때를 행복하게 여기는 엄마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름의 유사성으로 자신이 고마네치의 환생임을 주장하며 왕따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높이기도 했지만 고마네치는 고마니의 인생에서 졸고 있는 뇌를 깨우는 것처럼 인생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자신을 점검하도록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런 고마네치는 차우셰스코의 독재정권 아래서 힘겹게 살다가 망명했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나 결혼해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 이런 고마네치의 해피엔딩을 슬프게 느끼는 건 루마니아 국민영웅, 체조선수 고마네치는 고마니에게는 닿을 수 없는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존재로 인식되기에 느껴지는 슬픔과 애틋함은 체조 선수가 되리라는 꿈이 결국 환상에서 현실적인 이유로 무너지는 것을 겪어야 하는 슬픔과도 맞닿아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성장해가는 소녀 고마니가 꿈을 포기하게 된 계기가 성장의 징후라는 아이러니는 애잔하다. 아무리 체조선수가 되기 위한 재능이 부족했다고 할지라도, 준비하기엔 늦은 나이였다고 해도.

  이제 다시 고마니는 꿈꾸지 않는가. 진정 고마니 부모의 희망은 부동산뿐인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환경이란 결국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건 실패한 경험보다도 더 쓰다. 성실과 정직으로도 녹록치 않은, 힘겹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삶, 거듭거듭 실패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의 슬픔은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태도를 잊어버리게 하기에 슬프고 아프다.


사실 고생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마음보가 더 못된 법이다. 이리저리 부딪히고 깨졌으니 둥글둥글한 게 아니라 뾰족뾰족 모가 나는 게 당연하다. 불법과 탈법과 비도덕을 동원해서라도 고생문에서 나오겠다는 게 정상이지 가시밭길이라도 바르고 착하게 가겠다는 건, 미친 거다.


  미친 세상. ‘너무 더럽고, 사람들이 구질구질하다며 그걸 가릴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너무 더럽고 구질구질한 형태의 구조적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로 인해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때론 모난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지속되는 삶에서 한없이 모가 난 순간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게 삶이라고 고마니는 말한다. 다섯 아들이 전쟁터로 넘어가 돌아오지 않은 ‘넘어가면 고만인’ 고마니 고개에서 이름을 딴 고마니는 말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특별히 우울하지 않은, 겨울에 해고당한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고마니는 말한다. 십년을 일한 직장에서 해고되어 또다시 진로를 고민하는 중이지만 지금 이순간도 그저 열심히 살고 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고마니의 해피엔딩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진다. 차우셰스코의 독재정권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핍박받으며 살다가 망명한 고마네치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힘겨운 사람들을 더 힘겹게 만드는 ‘힘’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고마니는 내게는 전혀 환상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고마니는 ‘나’라서 이 해피엔딩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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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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