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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의 허기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1954년 남부 네덜란드의 덴 보슈에서 전통 유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드 빈터는 덴 보슈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의 바바리아 영화 아카데미를 거쳐 암스테르담 영화 아카데미에서 공부한다. 그런데 학교는 드 빈터가 하는 작업마다 타박을 해대는 통에 결국 1978년에 학위 없이 아카데미를 때려치우고 만다. 이후 텔레비전 시리즈물 작업의 일원으로 일을 하면서 1982년까지 잡지에 기고도 하고, 소설도 끄적이다 드디어 1981년 <아일린 W를 찾아서>로 널리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한다. 이어 발표한 작품이 올해 읽어볼 책 목록 가운데 한 권으로 점찍어 둔 <바스티유 광장>. 프랑스 혁명 후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가정하는 내용이라 한다. 1986년에는 탄생과 사랑, 죽음의 진실에 관한 탐구인 <카플란>을 썼고, 이어서 1991년 그의 대표작,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는 스릴러 <호프만의 허기>를 출간하고, 이후 계속 장편 소설을 발표한다.
드 빈터의 정체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네덜란드에서 전통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났다는 점. 자신들은 네덜란드를 조국으로 알고 일해 번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면서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믿었으나, 조국 네덜란드 사람들은 나치에게 그들을 고발하여 가스실을 거쳐 화장장의 분골로 만들었다. 모든 유럽의 유대인들은 그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뿐이어서, 물론 이 책의 주인공 펠릭스 호프만 한 명의 경우를 단정해 말하기는 무리이지만, 그들의 인식이 유럽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매우 신랄하게 나타난다. 또 다른 디아스포라 유대인 외교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알베르 꼬엔의 작품 <주군의 여인>의 주인공 쏠랄과는 묘하게 겹치기도 하고 상반되기도 한다.
일주일 전에 대사관저에 새로 입주한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네덜란드왕국의 신임 대사 펠릭스 호프만. 당년 59세. 이이에 대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1930년, 네덜란드에서 주로 농부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은행의 행장으로 있는 작은 부자 유대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유럽의 1930년생 유대인이라면 애초에 좋지 않은 팔자다. 열두 살이 되던 1942년에 아버지는, 지불 능력 범위 이상의 빚을 진 독신 농부에게 빚을 전액 변제해주는 조건으로 펠릭스를 농부의 돼지 목장에 숨겨달라고 그를 보낸다. 아직 철이 들지 않았던 펠릭스는 부모가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알았지만 이런 오해의 바탕은 역시 부모를 향한 진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캐나다 병사들이 진주하면서 해방이 된 것을 알게 된 펠릭스는 그길로 농부의 돼지 목장에서 무작정 나와 1944년 겨울부터 이듬해 8월까지 나중에 고지식한 공학도가 되는 초등학교 동창생 헤인 다먼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이후 유대인 고아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탈출해 다시 다먼의 집에 들어가자, 헤인의 부모가 정식으로 법정 후견인이 되어 1950년에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펠릭스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돈이 생기기도 해서 크게 부족한 줄 모르고 지낼 뿐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미술학도의 그림을 사주어 그들을 도와주는데, 이때 모은 그림은 나중에 훌륭한 노후생활 자금으로, 죽을 때까지 충분한 복지를 약속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나중에 아내가 될 국문과 마리안 트뤼디를 만난다. 마리안은 국문과 교수 아버지와 같은 전공인 17세기 네덜란드 작가 폰덜을 집중해 공부하고, 이후 수십 년이 흘러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연구하지만 결국 폰덜에 관한 논문을 끝마치지는 못한다. 투뤼디 교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 호프만 부부는 딸 쌍둥이 에스터와 미르얌을 낳고, 세계각지를 다니며 외교관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에스터가 불치인 백혈병에 걸려 죽고, 이후 에스터의 죽음에 유난히 죄의식을 갖는 미리얌은 점점 외골수가 되어 가고, 아내 마리안과의 성생활이 멈추었으며, 몇 달 후부터 이후 삼십 년간을 괴롭힐 불면증의 손아귀에 사로잡힌다. 에스터의 질병 때문에 자주 상관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해야 했던 펠릭스는 주로 격오지 근무로만 돌아다니는 외톨이 신세가 되고, 그럴수록 이이의 성격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 나날이 더 많은 적들을 배양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결국 케냐에서 폭력배와 연계된 매춘부와의 사건이 불거져 크게 곤욕을 치르다가 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은 거의 마지막 보직으로, 유럽이긴 하지만 네덜란드와 거의 교류가 없는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사로 남은 임기를 조용히 끝마치기를, 국가도 본인도 바라는 입장이다.
여기까지 보면 에스터의 죽음으로 호프만 가족의 모든 불행이 시작한 것 같다. 또 사실이 그렇다. 에스터가 죽어 잠과 아내와 딸 마리얌을 사실상 잃은 호프만. 여기에 이제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마리얌이 펠릭스, 행운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펠릭스에게 치명적 카운터 블로우를 날린다. 미르얌이 암스테르담 바르무스 가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약물과다 복용으로 숨을 거둔 것. 이때를 전후로 펠릭스는 늘 허기에 시달린다. 그래서 늘 마시고, 먹고, 먹고 마신 것을 소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먹고 마시기 위해 구토를 하고, 당연히 습관적으로 역류하는 위산으로 큰 고통을 받고, 술이 과한 인간들이 늘 그렇듯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그 빈도가 잦아지다가 사고도 치고, 다시 술과 음식을 먹고 미사고, 또다시 구토를 해 위장을 비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모습을 보는 아내 마리안의 심정은 어땠을까. 두 딸의 죽음을 그런 방식을 통해 잊으려 하는 것을 넘어, 완만하게 스스로를 살해하는 과정을 목격해야 하는 아내는.
그러다가 호프만은, 그에게 치명적인 장면, 스포일러가 될 것이 우려해 밝히지 않겠지만, 하나 남았던 딸 미리얌이 죽기 전에 남긴 돌이키기 어려운 모습을 보게 되고, 호프만은 미리얌이 남긴 흉터를 지우기 위해 자신의 노후를 책임질 옛 친구들의 그림 전부와 미리얌의 흉터와 맞교환한다. 이제 그야말로 펠릭스 호프만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 이때 난데없이 주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왕국 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삼십대 초반의 아름다운 신문기자 이레나 노바. 이이를 얻기 위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자 네덜란드인인 펠릭스 호프만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읽는 것이 <호프만의 허기>를 첫 번째 방법이다.
다른 방법은 펠릭스 호프만 이전에 등장하는 뚱보 프래디 맨시니가 프라하에 있는 헝가리 식당에서 타이어처럼 딱딱한 스테이크 4인분을 해치우는 것으로 시작해 풀어나가는 스파이 물을 추리해가는 것이다. 프래디는 책이 시작할 때 350파운드, 159킬로그램이었다가, 책이 끝날 때는 440파운드, 2백 킬로그램으로 마감하는 말 그대로 대식가의 표본이다. 아내 바비와 이제 다 커서 결혼해 따로 분가한 세 자녀를 두었고, 수영장이 딸린 근사한 저택과 크라이슬러, 닷지, 지프 체로키를 지닌 애국자이며 모범 납세자이자 공화당 지지자.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 크라이슬러 뉴요커를 운전하다가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때부터 폭식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단체로 유럽 관광을 온 것. 밤에 느끼는 공복. 그는 호텔에 상주한 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의 가로등 없는 수도의 거리로 나가 식당을 찾다가 택시 운전사와 깡패에게 뒤통수를 맞고 호주머니를 털리고, 거리를 헤매다가 그만 나중에 미국측 정보원으로 밝혀진 관광객이 납치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샌디에이고의 세탁소 재벌 맨시니 선생은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에 벌어진 첩보 전쟁의 목격자가 되고, 불현듯 이 와중에 이중간첩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미국 정보국은 확정도 부인도 하지 않고 그를 다시 돌려보낸 다음 체코 현지의 이중 또는 삼중 간첩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대사 가운데 한 명을 이용해보기로 하는데, 이 작전의 잘 생긴 책임자 존 마크스는 이미 십여 년 전에 네덜란드의 대사 부인 마리안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해버린 적이 있었으나, 대사 부인은 남편의 곁을 지키기로 하는 바람에 끝이 난 경험이 있다.
이렇게 이중, 삼중 간첩의 복귀를 위한 공작과 이들 사이의 관계 등을 추리하는 스파이물로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
세 번째로 펠릭스 호프만이 작품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하고 숙고하는 스피노자와 작품의 스토리를 연결해보는 것. 그리고 마지막 방법은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구조식을 그려보는 것. 내 평가는 첫 번째 읽기로 별 다섯++, 두 번째는 별 셋, 마지막도 별 셋. 그리하여 평균 별 네 개+. 복잡하지만 재미있는 책이다. 무더운 날 에어컨 틀어놓고 시간가는 줄 모른 채 즐길 좋은 책이다.
* 스포일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 속으로 삼켰다. 깊은 슬픔을 안은 한 인간의 피학성 도피와 타인에 대한 공격적 독설이 독자 마저 슬프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