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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치일가 ㅣ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7
앙토넹 아르토 지음, 신현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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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냉 아르토
앙또냉 아르또. Antoine Marie Joseph Paul Artaud (1896~1948)은 흔히 Antonin Artaud라고 표기한단다. 사실 어떻게 쓰는지 별 관심 없다. 근데 책의 “작가 소개”를 보면 놀랍게도, 20세기 서양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연극인으로 아르또와 함께 브레히트를 들고 있다. 그러니까 브레히트와 거의 동급으로 친다는 얘긴데, 어째 이름이 이렇게 생소할까.
사람이 너무 다양한 방면으로 재능이 있으면 가끔 이런 일도 생기나 보다. 앙또냉 아르또는 작가, 시인, 극작가, 영상예술가, 에세이스트, 연극영화 배우, 연출가 등, 하도 많은 분야에서 이름을 내, 그냥 퉁 쳐서 20세기 공연예술과 유럽 아방가르드의 권위자로 부른단다. 그의 작품은 대개 가공되지 않아 거칠고,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는데, 이제 <첸치 일가> 한 편을 읽었을 뿐인 과문한 입장에서 그저 그런가보다, 할 밖에.
그러나 재능이 뛰어나다고 늘 성공하는 게 아니라서, 스물일곱 살에 파리로 올라와 자신의 시를 유명 잡지 누벨 르뷔에 기고를 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다. 편집자인 자크 리비에르로부터 격려를 받긴 한다. 이후 그와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고 공동작업도 하게 되지만, 아뿔싸, 똑똑한 사람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불행이 아르또에게도 닥치니, 바로 조현증, 옛말로 정신분열증 증세. 이 당시의 고통을 스스로는 “끔찍한 화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게 벤자민 브리튼을 비롯한 몇몇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불타는 화덕>하고 연결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불타는 화덕’을 네이버 검색해보시라. 숯불 갈빗집만 열라 나올 테니.
그래도 잘 치료를 한 덕분에 불행하게 끝나지는 않았는데 이 와중에 아르또가 집중한 극 형태가 잔혹극. 1935년에 작업을 끝내고 1936년 초연 당시 쓴 실패를 경험한 <첸치 일가>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영국의 시인 퍼시 비쉬 셸리가 쓴 <첸치 가 The Cenci>를 파리의 폴리 와그랑 극장에서 공연했을 때 참여한 아르또가 영향을 받았단다. 퍼시 비쉬 셸리 잉글랜드의 낭만파 시인으로 두 번째 아내가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다.
베르톨트 골트슈미트라는 퇴폐음악 작곡가가 있다. 퇴폐음악, 퇴폐미술 등을 총칭하는 퇴폐예술은 독일 제삼제국 시절 나치에 의하여 탄압받던 예술형식이니까 사실은 퇴폐적이지 않은데, 하여튼 오페라 <우아한 한나>와 함께 골트슈미트의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으로 <베아트리체 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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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르 자그로세크,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1994
사이먼 에스테스(프란체스코 첸치), 델라 존스(루크레치아), 로버타 알렉산더(베아트리체)
첸치 가족 이야기는 16세기 말 이탈리아에 정신이 습관적으로 출장 가는 귀족 프란체스코 첸치가 실제로 있어서 다 성장한 두 아들을 죽이고, 딸 베아트리체를 능욕하고, 감히 교황 성하에게 전쟁을 벌이겠다고 깝치다가, 능욕당한 딸과, 딸의 비천한 신분의 연인과, 재혼한 처 루크레치아, 죽이지 않은 셋째 아들 자코모한테 살해당하고 살인에 가담한 모든 가족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당연히 당사자 이름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건 물론이다. 이 사건이 제레미 아이언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돈 주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영화를 뭐 하러 보나. 그것도 안 봤다. 근데 퇴폐음악이란 타이틀을 달고 출시된 음반이 눈에 띄는 건 도무지 참지 못해 사서 들었다. 아마 이 판도 알라딘에서 샀을 걸? 아마존이었나? 그래서 이번에 프랑스 희곡을 읽는 김에 딱 이 제목이 눈에 띄어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사서 읽었다.
하여튼 프란체스코 첸치라는 인물이 서양 역사상 가장 골치 아픈 패륜인물이었던 것은 맞는 거 같다. 그런데 극작가 앙또냉 아르또, 흠, 어감이 좋지 않아 다시 쓰자면, 앙토냉 아르토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연극이 출발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던 1930년대에 작품을 썼음에도, 지난주에 읽은 타르디유의 <지하철의 연인들>이나 아폴리네르의 <티레시아스의 유방>, 알프레드 자리의 <위비 왕>, 마테를링크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같은 전위적 요소가 거의 없다. 당연한 거겠지. 사극으로 아방가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희곡만 가지고는 힘들 거 같다. 애초 앙토냉 아르토가 관심을 가졌던 마임 등 몸짓과 율동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의 극형식을 연출자가 혁신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 터이지, 스토리가 분명해 책에 기록된 사실만으로는 좀 무리가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여튼 어찌 됐든 덕분에 읽기에는 수월한데, 여태 뇌 활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복잡하게 헝클어진 희곡들을 읽다가 내용까지 미리 알고 있는 작품을 만나니까 참 나, 쉽기는 하지만 좀 어딘가 모자란 느낌이 드는 건 웬 일?
어쨌든 그렇다. 뭐 책 읽는 것도 사람 사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