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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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윌리엄 트레버의 팬임을 자임해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이 뜨자마자 구입했다가 책읽기 일정에 따라 이제 마지막 장을 덮고 독후감을 쓰려 PC를 열었다. 그러나 난감하다. <펠리시아……>의 독후감 쓰기가 만만하지 않을 거 같다. 트레버의 책들이 이렇지 않았는데 이번엔 매우 복잡하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펠리시아의 시선을 따라 갔다가, 이어서 등장하는 힐디치 씨의 입장으로 독후감을 써도 좋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나 이어서 곧바로 머릿속이 헝클어지기도 한다. 1916년 4월, 부활절 주간에 있었던 패트릭 피어스의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 아일랜드인의 대규모 영국 유입과 차별. 1980년대 대처-레이거노믹스 시대의 개막에 따른 신자유주의와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대규모 실직. 비정규직 시대의 도래, 아일랜드의 낙태 금지법,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힐 수 없는 영국에서 있었던 엽기적 사건 같은 것들이 작품 속에 다 들어있다. 여기에 윌리엄 트레버만이 쓸 수 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상실’까지 어김없이 전편에 깔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54년 전에 ‘조지프 앰브로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힐디치 씨. 12년이 넘게 124 킬로그램의 몸무게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남자로, 양복차림에 줄무늬 넥타이를 반듯하게 메고 매일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읽은 후에 작은 자동차를 손수 몰아 서행운전을 준수하며 출퇴근하는 15년차 회사 구내식당의 매니저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사무실에서 송장invoice을 작성하는 업무를 하다가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아 자리가 비자마자 회사에서 권유를 했고, 이를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대로 사무실에서 있었다면 벌써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 이것도 나름대로 운이 좋은 경우였으며 심지어 취향에 맞는 일이니 가히 행운이랄 밖에.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 관목 숲에 둘러싸인 단독주택에 사는 독신으로 동료들에겐 미소 가득한 외향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내면 깊이 존재하는 어두운 면이 있어 때때로 우울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인물.
  힐디치 씨는 사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웰링턴 로드 3번지에서 태어나 여태 살고 있으나 친척이라고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아일랜드로 파병되어 무장봉기를 진압한 전력이 있는 윌프 삼촌 한 명. 삼촌을 따라 군인이 되는 꿈을 꾸었으나 시력과 평발 때문에 입대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게 힐디치 씨의 나머지 삶 동안 나름대로 큰 콤플렉스로 작용하게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듯. 12년 전에 88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윌프 삼촌이 사실은 1979년에 사망한 엄마의 애인이었다는 걸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여튼 이 친절한 매니저이자 반듯한 직장인인 50대 중반의 힐리치 씨가 어느 아침에 직장인 구내식당에서 나와 사무실로 작은 승용차를 몰고 가는 길에 척 봐도 아일랜드에서 무작정 영국으로 건너온 것이 분명한 10대 소녀 펠리시아가 눈에 들어온다.

 

  펠리시아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충만한 집안의 딸이다. 75년 전, 증조할아버지는 결혼하고 한 달밖에 안됐을 때 두 동지와 함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패트릭 피어스가 지휘하는 보런드 제분소 본부에 가담해 목숨을 바쳤고, 이후 증조할머니는 재혼하지 않고 남은 세월 내내 대저택과 사무실의 바닥을 닦아 번 돈으로 살아야 했는데, 가족 구성원은 이걸 오랜 대의이자 고귀한 일, 가족의 진실로 숭상해왔다. 이런 분위기는 세기말인 1991년에 와서도 가정을 상당히 완고한 규범으로 묶어놓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펠리시아는 육가공 공장에 다니다 작업 중 직원 브래넌 부인이 칼로 손을 벤 일을 보고하지 않은 사이에 패혈증이 발생한데 이어 공장에서 출고한 소고기 통조림을 먹은 소비자가 식중독에 걸렸을 때 하필이면 광우병이 영국을 휩쓸어 공장을 결국 폐쇄하고 말았다. 실업자가 된 펠리시아에게는 채석장에 다니는 쌍둥이 오빠와 바로 위에 에이든 오빠가 있었다. 에이든이 펠리시아의 친구 코니 조와 결혼을 하던 날, 신부 들러리 옷을 입은 펠리시아가 연회까지 마치고 호텔 앞에 나갔을 때 딱 그 앞을 지나던 조니 라이서트와 눈을 마주친다. 조니는 어머니가 건강에 문제가 있어 가끔 집에 들르는데 지금 영국 버밍엄의 잔디깎이 기계를 만드는 공장에 창고 관리자로 근무한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아일랜드 촌 아가씨 펠리시아는 그걸 굳게 믿고 허튼 사랑의 맹세에 넘어가고 만다. 조니가 알아서 다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곧이들어 그가 다시 영국으로 갈 때까지 날마다 숲 속에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임신해버리고 만다. 조니가 다니는 회사 주소도 모르는데.
  집안 식구라야 망백望百의 증조할머니, 홀아비 아버지, 쌍둥이 오빠. 어떻게 임신사실을 눈치 챈 보수, 폐쇄적인 아버지는 딸에게 창녀 같다는 말의 비수를 꽂아버렸고, 아이는 집안의 돈을 훔쳐 더블린을 거쳐 영국으로, 버밍엄의 잔디깍이 공장을 찾아 무작정 가출해버린 터.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만난다. 두 외로운 사람이.
  트레버의 소설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떠남과 기다림이다. 상실과 고독. 이제 두 사람이 만남으로 해서 트레버가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떠남 이후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이건 독자가 일방적으로 그러려니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전의 트레버라면 비록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겠지만 떠난 사람은 적어도 돌아와야 하니까. 남은 건 이제 치유의 과정과 시간이리라.
  실제로 건실한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힐디치 씨는 그동안 자신의 동네나 직장 등 주변 사람들 모르게 자신의 현금을 써가며 돌봐준 여러 아가씨들이 있었다. 유톡시티에서 온 엘시 커빙턴, 울버햄프턴의 베시, 마켓드레이턴의 게이, 윅스턴 출신 새론, 월손의 재키 등등. 힐디치 씨는 몇 아가씨들의 상당한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하고, 아픈 몸을 치료해주기도 하고, 그러고도 작지 않은 현금을 주고, 떠나보냈다. 책의 내용으로 봐서 아가씨들의 성적性的 보답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면서. 그런 것이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힐디치 씨는 펠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펠리시아가 지갑 대신 쇼핑백에 숨겨놓은 현금뭉치를 훔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자신이 아일랜드 소녀를 자기 집에서 계속 보살필 수 있게, 사이비 종교단체 같은 무리들에게 의탁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조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 수 있다. 심지어 보호자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낙태수술을 먼 도시까지 가서 시행해준다. 이게 문제였다. 천생 아일랜드의 완고한 가정 출신의 펠리시아는 태아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밤을 타 힐디치로부터 도망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얻은 것이 윌리엄 트레버 특유의 치유와 동시에 상실일까.
  여기까지 읽는 일은, 다른 트레버의 작품과 별로 다르지 않는 주제, 다만 떠남 이후의 과정을 그렸을 뿐, 분명히 뛰어나지만 기대에 조금 미치지 못할 정도의 ‘트레버스러움’으로 인상깊지 못했다. 그러나 내 평점은 별 다섯.

 

  왜 독후감 쓰기가 이렇게 불편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다섯 개의 평점을 주지 않을 수 없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심지어 사랑의 말을 하는 사람도 저 먼 기억 속의 상처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이게 내가 얘기 할 수 있는 가장 큰 스포일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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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05 08: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토리 요약이 탁월하세요!
천사의 말과 사랑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람에 대한 이해와 자비가 없으면 소용이 없죠. 울리는 꽹과리일 뿐.

Falstaff 2021-08-05 08:56   좋아요 3 | URL
크.... 고맙습니다. 아, 전 누가 칭찬해주시면 곧바로 약해져요. ㅋㅋㅋㅋ

blanca 2021-08-05 08: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별 기대 없이 읽었다 거장이란 이런 거구나 싶더라고요. 트레버는 뭔가 어떤 차원을 넘어간 작가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1-08-05 08:57   좋아요 3 | URL
예. 어느 책을 읽어도 실망시키지 않는 몇 안 되는 작가로 꼽겠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붕붕툐툐 2021-08-05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트레버 장인의 눈에는 이 책이 그닥이군용~ 다른 장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용~~
헤어지고 싶지 않은 힐디치씨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8-05 10:11   좋아요 2 | URL
오, 마지막에 나오는 기막힌 반전이 띵! 하잖아요. 도무지 별 다섯을 주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ㅋㅋㅋㅋㅋ

ㅋㅋㅋ 장인은 딸의 남편이 저한테 부르는 호칭입니다만, 아쉽게도 전 딸이 읎어요.
그닥...은 아니고요, 워낙 좋은 책들이 많아서 트레버 가운데서는 별 거 아니네, 했다가 마지막에 꼴까닥 넘어가는 작품이었습니다. ㅎㅎㅎㅎ 역시 트레버예요!!!

페넬로페 2021-08-05 1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떠남과 기다림, 상실과 고독‘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힐디치에 대해 여러 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것도 트레버의 탁월한 능력같더라고요~~
트레버스러움에 대해 계속 알고 싶어집니다^^

Falstaff 2021-08-05 10:56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떠남과 기다림, 상실과 고독˝ 이게 트레버 아닌가 합니다.
그것들을 얼마나 쓸쓸하게 써놓았는지 아휴.... 트레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거 같아요. 윽. 너무 유행하는 말인가요? ㅋㅋㅋ

독서괭 2021-08-05 10: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윌리엄트레버 책을 이걸로 처음 읽었는데 폴님 글 보니 다른 책들도 더 읽고 싶어집니다. 잠자냥님 이 쓰신 페이퍼 보고 이미 잔뜩 담아두긴 했습니다만.. 역시 조만간 읽어야겠는데.. 음.. 아휴ㅋㅋ

Falstaff 2021-08-05 10:57   좋아요 1 | URL
트레버를 한 번 파 보세요. 야, 이게 웬 떡이냐,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ㅎ

초란공 2021-08-05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 한번 더 읽은 것 같아요~^^ 트레버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제가 큰 실수를 했네요. ‘송장‘처리를 담당했던 힐디치의 과거를 아무런 의심 없이 ‘장의사‘ 관련 일을 했다고 생각해버렸어요~ 작품이 주는 분위기가 있다보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송장‘을 오해하다니요...ㅋㅋㅋ 부끄럽사옵니다 헤헤 ㅋ

Falstaff 2021-08-05 13:18   좋아요 3 | URL
다른 트레버도 놓치지 마세요. 만족하실 겁니다.
ㅎㅎㅎㅎ 송장. 발음이 다릅니다. invoice는 송짱. 시체는 송장. 저도 송장 일을 해봐서 단번에 접수를 한 거 같네요. ㅋㅋㅋㅋ 부끄럽긴요.

Azalea 2022-06-2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힐디치씨는 여자들을 그냥 떠나보낸게 아니지 않나요? 여자들을 다 죽였다는 암시가 책 후반부에 여럿 나오던데요.

Falstaff 2022-06-26 09:09   좋아요 0 | URL
책을 읽은 모든 독자는 내용을 알고 있지만, 리뷰를 쓰신 분들은 그걸 밝히지 않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이 혹시 중요한 내용을 미리 알게될까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고요.
스포일러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