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새롭게 대학의 일원으로 선발된 당신들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머릿속에 대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간에 상관없이 당신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은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교육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이미 당신은 성인으로 사회 구성원이 되어 있으며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몇 배에 달하는 책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벌써부터 자유와 자유에 따르는 책임에 얽매어 위축되거나, 조금 나은 내일의 복지를 위해 소위 스펙 쌓기에 전력을 다하는 당신들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몸은 비록 도서관 열람실과 개가실을 오가더라도 당신의 전두엽에는 저 광활한 몽고의 평야에서 고비사막과 천상의 사마르칸트와 아스트라한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거인의 꿈을 간직하기를 기원합니다.
  애초에 대학은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생겼습니다. 나는 보이는 것만 믿는 유물론자로 신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탤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건 예외로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없어지긴 했으나 문학, 사학, 철학으로 대표하는 인문학이야말로 굳이 그것을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평생을 두고 가까이 해야 할 양식입니다. 당신의 전공과 관계없이 말입니다. 이건 삼백 년 전에도 그랬고, 삼백 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 스스로도 대학에서 이과 전공을 했으니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겠습니다. 인문학은 사람과 세상을 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투자입니다. 나중에 당신의 시계에 석양의 놀이 비칠 때, 그래도 안분하며 살았다, 생각하며 느긋한 한숨을 쉴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이 말을 믿기 바랍니다.
  이제 당신은 대학의 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첫 발을 축복하며 문학, 역사, 철학 가운데 딱 열 권의 책을 추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철학에는 관심이 덜 해 자신이 없어 철학을 위한 세 권의 자리는 비워두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이 이어서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단지 문학과 역사책 일곱 권을 골라 당신의 방문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열한 번의 전쟁을 벌여 세 번 이기고 여덟 번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헤로도토스라고 하는 역사가를 가지고 있어 단 세 번의 이긴 전쟁을 기념하여 제1차, 제2차, 제3차 페르시아 전쟁으로 명명함으로써 페르시아와 벌인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이라면 삼백 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이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 대군의 진격을 며칠 동안 꽁꽁 묶어둔 일을 상기하게 된 것도 다 헤로도토스가 자신들의 역사만 썼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역사의 주인공은 이긴 자, 그리하여 어차피 역사는 이긴 자의 역사라고 합니다만 천만의 말씀. 역사는 기록한 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붓의 힘은 놀랍습니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기록의 위력만 느낄 수 있어도 나는 만족할 것입니다.



사마천, <사기 세가>

 

  <사기 서>에 실려 있는 명문장, 보임소경서報任小卿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궁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마천의 천추의 한이 만든 위대한 역사서, <사기> 중 한 권입니다.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기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까지 작자가 생각하기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좌우했던 인물들에 관한 책이고, 표는 말 그대로 연표, 서는 전래의 예악, 천관, 율법 등을 정리한 책입니다. 그래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다면 표와 서를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세가는 본기에 실리지 않았으나 영웅의 풍모를 지닌 사람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제후들이 주로 소개가 됩니다만 사마천은 이 속에 역사상 첫 번째 민란의 주인공으로 진시황의 나라 진나라를 멸망으로 빠지게 만든 일반 백성 출신의 농민반란군 수괴 진섭을 위해서도 한 챕터를 마련해놓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영웅들의 행적을 통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어떻게 세월에 영향을 주는지 따져볼 양서입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세종임금, 전봉준과 더불어 내가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머리를 숙일 수 없다면서 꼿꼿이 선 채로 세수를 하는 바람에 아침마다 옷을 적셨다고 하는 역사가이자 혁명가입니다. 역사책을 단재 신채호만큼 강건한 문장으로 쓴 사람은 없습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식한 바가 정의라면 단연 정의를 위해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행한 분입니다. 그의 역사철학은 아我와 비아非我, 나와 내가 아닌 것의 투쟁이라고 단정합니다. 몇 년 전, 일본에 의한 식민지 침탈은 그 당시 세계질서를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한 젊은이로부터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매우 놀랐습니다. 그건 정확하게 식민사관으로 피 식민을 경험한 우리 입장에서는 타파해야 할 인식을, 그래도 소위 명문이라고 하는 대학 재학생이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해줍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책의 1장에서 단재가 풀어나갈 역사 이야기의 기본 시각을 설명해주는 1장에 나옵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은 흑백논리, 진영논리가 아닙니다. 혁명가답게 아와 비아가 투쟁해 다시 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변증법의 발전 과정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읽어보아야 할 명저입니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문학의 힘은 동감에 있습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고 벌써 이천사백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뛰어나지만 누구보다도 불행했던 한 영웅의 비탄이 아직도 세상의 독자들에게 절절하게 호소하는 것. 이것이 힘입니다. 세상의 어떤 작품보다도 자주 무대에 올려 공연하고, 이를 본 다른 예술가들이 불행한 영웅을 그림으로, 산문으로, 음악으로, 다른 공연으로 변신시켜왔던 불후, 불멸의 명작입니다. 내용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읽을 때 가슴 속을 벅차게 하는 슬픔과 동감을 결코 멀리하려 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세요. 아름다움은 그 콘텐츠를 아름답다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곁을 허여한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의문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왜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자주 슬프지? 하고 말이지요.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티보가의 사람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추악하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정의로웠던 전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전쟁과 차별로 인한 학살과 분쟁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 등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193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필생을 바쳐 티보 가의 완고한 아버지와 그의 두 아들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작은 아들 자크의 사춘기부터 시작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모두 여덟 편, 책으로 다섯 권으로 나왔습니다만 아쉽게 지금은 절판이라 도서관을 이용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유독 힘든 사춘기를 지나며 소년원까지 들어갔다 나온 자크가 1차 세계대전을 맞아 세상의 모든 반전주의자들과 연대하여 전쟁을 반대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읽으며 독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반전의식을 심어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건전한 의식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에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당신에게 그 신념이 생긴다면 그걸 결코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 강>

  이 책을 통해 당신은 또 다른 거대한 서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1920년대 폴란드에서 벨라루스를 거쳐, 우크라이나와 흑해 연안에 이르는 광활한 벌판에서 벌어지는 카자크 인들의 혁명과 반혁명, 그 속에서 피어나는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랑이야기의 화려한 만찬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혁명도 모르고 반혁명도 모르는 카자크 사람들. 그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용맹한 유전자가 소비에트 혁명 후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질주합니다. 더없이 재미있으면서도 저 변경의 민족인 카자크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을 잘 관찰할 수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서구 열강의 지원에 기대해온 백군들이 결국 철수하고 카자크와 우크라이나엔 붉은 깃발이 날린다는 것을. 그러나 문학은 보이는 결과가 다는 아니라는 진리를 깊은 재미와 함께 선물해줍니다. 이 책을 통해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를 만끽해보기 바랍니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당신은 대학생입니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삶은 이제 녹록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공부도 안 되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어도 그마저 쉽지 않습니다. 연애 마저 마음먹은 대로 안 될 겁니다. 쉬운 얘기로, 당신은 망했습니다. 이제 어려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당신의 교과서까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읽기에 매우 어려운 책을 한 권 소개합니다. 한 수도승의 구도과정을 그린,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빠지지 않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당신은, 모르긴 몰라도, 책의 첫 문장에서부터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읽으십시오. 그래도 이 책이 당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진짜 삶, 생활보다는 훨씬 덜 어렵습니다. 책의 내용보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이 읽기 어려운 책, 앞으로 읽어야 할 무수한 난독의 책을 준비하라는 의미가 큽니다. 박상륭의 다른 책 가운데 이것보다 어려운 책도 몇 있습니다. 그러니 읽은 후에 이거 읽었다고 자랑하지 말기 바랍니다. 당신은 망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를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힘내세요. 당신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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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29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곱 ‘권’ 아닌데요, 선생님?

Falstaff 2021-01-29 11:4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예요. 세상에나.
걍 일곱 권이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

유부만두 2021-01-29 12:07   좋아요 2 | URL
선생님들은 꼭 시험 쉽다, 일곱 권 ‘만’ 추천하겠다 하시는데요, 저희 ‘젊은’ 신입생들은 그 말씀이 너무 무섭답니다.

Falstaff 2021-01-29 12:3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쉽다고 안 했습니다. 망했다고 했습지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1-29 1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럴 수가 그냥 대학 입학 안 할래요. 스무살 잠자냥 올림.

단발머리 2021-01-29 12:38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은 이미 입학했습니다. 무를 수 없어요. 그냥 읽는 걸로 하세요. 스무살 단발머리 올림.

유부만두 2021-01-29 12:08   좋아요 1 | URL
선배님들, 저도 무를까요? 저 합격문자 지금 받았고요....

단발머리 2021-01-29 12:33   좋아요 1 | URL
입학 축하드립니다, 유부만두님! 위의 페이퍼 순서대로 읽으시고 1일 1페이퍼 하시면 되겠습니다. 선배 단발머리 올림.

Falstaff 2021-01-29 12:36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맨 마지막 거 빼고는 어렵진 않잖아요.
(지겨워서 그렇지.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1-29 12:45   좋아요 0 | URL
단발 선배님, 전 우선 노트를 사겠습니다. 회색으로요. 근데 저 프루스트 읽느라 바빠요.

Falstaff 2021-01-29 12:50   좋아요 1 | URL
윽, 이런.
프루스트를 읽으면 위에 열거한 책들은 전부 다 껌인데요.
그래 처음 한 얘기 듣고 딱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였어. 흠......

단발머리 2021-01-29 12:59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라면! 프루스트라면 무조건 프리패스입니다! 노트도 오케이구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1-29 12: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어야겠습니다! 제일 만만한게 <사기세가>같은데 집에 마침 없네요^^
근데 이 포스팅은 ‘두꺼운 책‘ 편으로 해주시고 ‘얇은 편‘으로다가 하나 더 해주시면 어때요? ㅎㅎㅎ

Falstaff 2021-01-29 12:39   좋아요 1 | URL
에휴, 이거 하나 쓰는데도 신경 많이 쓰이더라고요.
사기 세가는 재미있어요. 근데 진도가 팍팍 나가진 않습니다. 민음사 교정은 조금만 믿으시는 게 좋고요. ㅋㅋㅋ

수이 2021-01-29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생이라고 착각하고 저는 일단 집에 있는데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죽음의 한 연구 부터?! 근데 ‘당신은 망했습니다‘ ㅋㅋㅋㅋㅋ 음음음

Falstaff 2021-01-29 12:4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그 책 읽은 사람들이 대강 한 여섯 번 쯤 포기하고 그 후에 다 읽더라고요.

다락방 2021-01-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너무해요. 한 권쯤은 제가 읽은 것도 넣어주시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ㅌㅌㅌㅋ 다 너무 부담감 덩어리들이에요!! 저도 입학 취소를..........

Falstaff 2021-01-29 13: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거 업로드 하면서, 다락방님 장르가 한 권도 없다, 그건 철학 부분에서 해줘야 할 거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정말입니다. 유감스럽게 제가 그 분야에 관해서 아주 약하거든요. ㅋㅋㅋㅋ
다락방님이 이런 추천글 쓰셨으면 제가 입학 취소 신청 했을 겁니다. ㅋㅋㅋㅋㅋ

hnine 2021-01-29 1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험에 나오나요 교수님? (ㅋㅋ)

Falstaff 2021-01-29 13: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당연히 나옵니다. ^^

페넬로페 2021-01-29 13: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20세 통신입니다^^
저희들은 게임하느라 저 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나이든 제가 읽겠습니다
좋은책 추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1-29 13:35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 님, 아드님이 게임하지요? 저도 아들만 두 새끼 있어서 페넬로페 님 터지는 속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ㅋㅋㅋㅋ
어쩌겠어요. 그것도 다 지들 인생인 걸요. 근데 이미 다 읽으셨을까봐 말입지요. ^^

coolcat329 2021-01-29 13: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 댓글 넘 웃기네요 🤣🤣 폴스타프님 중년에게 추천할 책도 부탁드립니다. 체력이 좀 안좋은 중년...

Falstaff 2021-01-29 13:44   좋아요 2 | URL
ㅋㅋㅋ 중년이요?
에이, 세상에 제 주제에 어딜 중년을 위한 책.... 생각도 못하겠네요. ㅋㅋㅋㅋ
저를 위한 책의 목록은 좀 있습니다.
로또 맞는 법, 전립선을 사수하라 등등.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1-29 14: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생은 글렀습니다 ㅠ 아무쪼록 풋풋한 20대님들 이 글을 프린트해서 지니고 다니시길요. 제가 대학 신입생이라면 꼭 그럴겁니다. ㅠ

Falstaff 2021-01-29 14:48   좋아요 3 | URL
에이, 글렀다니요, 그게 어디 있습니까.
저도 직장생활 하느라 이십여 년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책은 무슨 책. 새벽에 나가 밤에 오고, 토요일도 야근, 격주 일요일 출근을 밥 먹듯 하던 시절에 딱 찍어서 쫄병 했으니까요.
그러다 한 50 가까이 되니 회사에서 나가라 그러고, 싫다니까 뒷방으로 쫓아내더군요. 아 글쎄 그걸 여태 버티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까진 너네가 날 원했지만 이제부터 퇴직할 때까진 내가 원한다고 했지요. ㅋㅋㅋㅋㅋ
원래 우리 책 좋아하는 인간들이 혼자 노는 덴 일가견들이 있잖아요. 그때부터 못 읽었던 책들 팍팍 읽기 시작했던 겁니다. ㅋㅋㅋㅋ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scott 2021-01-29 15: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퐐스타프님 전 박상룡 책 뺴고 추천하신책들 전부 읽었어요.ㅋㅋㅋ
요즘 20대들은 심리학-페메니즘-마이클 샌델-유발 하라리-유시민-윤동주-유툽영상편집 이런책들 읽어여 ㅋㅋㅋ(대학도서관 사서지인이 알랴줌)


*몇시간전 팔스타프님 댓글이 제포스팅에서 사라졌으요 ㅜ.ㅜ

Falstaff 2021-01-29 15:09   좋아요 2 | URL
20대들이 읽는 것들도 필요하지요. 제가 올린 책들은 일종의 기초체력을 단련시킬 수 있는 것들을 우선으로 했답니다. 와.... 전 스콧님이 일곱 권 소개하면 여섯 권 찍을 자신이 없습니다. 대단하시군요. @@

장미의 기사는 그냥 두 문장이면 되잖아요.
1. 바람난 유부녀 애인 정리하기.
2.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런 오페라.
제가 젤 좋아하는 영상물에 대해 썼는데 그걸 링크 시키셨더라고요. 그저 성미가 급해서 말입니다. 그래 다른 사람 볼까봐 얼른 지워버렸습니다. 딱 그 영상물에 대해 썼던 거거든요. 위의 두 문장하고요. ㅋㅋㅋㅋㅋ

syo 2021-01-29 15: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학생 형아 누나들 댓글 보니까 대단해요.
저도 얼른 자라서 대학생이 되어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들 다 읽고 말거예요!

그리고 봄이오면 저는 중3이 되겠지요. 이제 중2도 끝났는데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Falstaff 2021-01-29 15:3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럼 이제 열여섯, 이팔 청춘을 시작합니다!!

막시무스 2021-01-29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서적에서 맛보기로만 보다가 40대 중반에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정독했을때 받았던 감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ㅎ 저는 소포클레스 작품집과 장자를 주로 추천하는데 추천받은 사람들은 시큰둥 하더라구요!ㅋ 즐건 주말되십시요!

Falstaff 2021-01-29 20:07   좋아요 1 | URL
예. 역시 소포클레스는 불멸의 명작입니다.
두 번 이야기하면 입 아픈 작품이지요.
장자를 말씀하시니....
전 ㅎㅎㅎ 암만해도 철학적으로 좀 약한 체질인가 봅니다.

mini74 2021-02-01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맘껏 책을 고르라, 계산은 엄마가 하겠다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결론은? 축복만 감사히 받겠답니다 ㅎㅎㅎ 고요한 돈강과 사기는 소장 중이니 일단 이 책들부터 아이방에 넣어두고 잠시 문을 닫겠습니다. 사식은 맛있는 것으로 넣어줄까 합니다. ㅎㅎㅎ

그리고 정말 진심이 담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멋집니다 선생님 !!!

Falstaff 2021-02-01 17:22   좋아요 1 | URL
아이, 자꾸 선생이라 하시면 창피해서 말입죠. ^^;;;
뭐 아이들이 다 그렇지요. 책 읽을 시간 있으면 게임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사내 아이들은 게임 때문에, 에휴......
돈강 좋습니다. 근데 그것도 좀 길어서 아이 엉덩이가 좀 질겨야 합니다만 한번 진도만 나갔다 하면 걍, 그렇게 재미날 수 없는데, 그죠? ㅋㅋㅋㅋ

gangstaink 2021-02-07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로도토스 역사 저 책으로 읽었는데 넘 재밌어요

Falstaff 2021-02-07 18:27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재미난 거 맞지요?
ㅋㅋㅋ 일단 책은 재미가 있으면 좋거든요.

tintin2506 2021-02-1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네요 ㅎㅎ ‘타보가의 사람들‘ ‘고요한 돈 강‘같은 작품들은 처음 들어보네요. 죽음의 한 연구 / 조선상고사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제 맘대로 철학책 3권을 꼽자면 플라톤‘향연‘ 니체‘이 사람을 보라‘ 마르크스‘공산당 선언‘ 무엇보다 얇으니까요!

Falstaff 2021-02-10 10:04   좋아요 0 | URL
의견주셔서 고맙습니다.

scott 2021-02-10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퐐스타프님 이 20대들에게 추천한 목록 !
21학년에게 통했나봐요
이달의 당선작 ^ㅎ^ 추카!

Falstaff 2021-02-10 15:08   좋아요 2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스콧님도 마이 리뷰 축하합니다.
 

 

  꽤 유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집필가께서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가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고 해 득달같이 가봤다. 바로 이 책이다.

 

 

 "새 번역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새로운 역자가 새롭게 작업해서 기존 김규종 번역을 극복하는 서적이라고 이해해왔었는데, 거 참. 좋다, 좋아. 새 번역본이란 다만 기존의 번역과 다른 번역본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면 반박할 여지가 없으니.

  이 책을 번역한 추영현 씨는 1930년 생으로 2019년에 생을 마감했다. 일간스포츠 기자 생활을 하다가 박정희 유신정권의 함정수사에 걸려 긴급조치 1호와 4호, 그리고 반공법을 위반한 혐의로 옥고를 치룬 전력이 있다. 출감 후에도 이어지는 유신과 전두환 정권 치하에 감히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 전력이 있는 인사를 재취업시켜줄 회사는 한 곳도 없어 틈틈히 번역 일을 하고는 했다.

 2011년에 긴급조치와 반공법이 위헌으로 판결이 나 사면 복권이 되었어도 지난 세월을 어찌 돌이킬 수 있었을까. 나름대로 굴곡많은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큰 희생을 당한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추영현 씨가 1930년생. 해방이 될 때 나이 열여섯. 일본어를 국어인줄 알고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추 씨는 출감 후에 스피노자, 로크 등을 번역했고, 특히 나도 읽어본 <겐지 이야기>는 유려한 문체로 빛나는 번역을 만들었다.

 

 

 추 씨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괴벨스 프로파간다!>를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어, 지금 보니 이것도 저작이 아니라 번역이다.

 

 

 

 그런데, 1930년에 식민지 조선 땅에서 태어나 활발하게 일본 책을 번역하고, 서양 책을 중역해온 추영현 씨가 러시아 말에도 능통해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이번에 영혼이나마 다시 환생해 번역했다....고 믿을 수도 있는 얘기를, 그것도 유명인이 하시면 안 되지.

 차라리 해당 포스트를 통해 전에 책을 낸 출판사 열린책들에게 역자 김규종과 조속히 판권 협의를 거쳐 중판을 내라고 독촉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독자들 또는 자신의 수강생들로 하여금 중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중역의 의심을 받는 책을 구입하게 할 수도 있는 언행은 삼가는 것이 옳았을 듯하다.

 자신의 강의에 이 책을 쓰건 말건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이 두 권의 책에는 공통점이 있다. 외양은 소설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수백년이 흐른 다음의 존재 의의는 20세기에 70년간 존속했던 소비에트 연방에서 인민들의 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만든 대표적인 의식화 교재라는 것. 21세기에 이 책을 읽는 일은, 백년 전 지구인들 가운데 일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나도 <강철은....>을 좋아하지만 결코 문학작품, 소설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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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1-13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대학생 때 읽었는데 21세기에 읽기엔 참 낡은 작품이기는 하죠. ㅎㅎ

Falstaff 2021-01-13 09:51   좋아요 1 | URL
이런 작품들의 운명적 종착점이 다 그런 거 같더라고요. 쉽게 헤지는 거. ㅋㅋㅋ

레삭매냐 2021-01-13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작권 따위는 아몰랑하는 출판사
의 책은 도저히 사 줄 수가 없네요.

게다가 중역의 의혹까지 있다면
더더욱! 왜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지...

아니 중역이면 중역이라고 당당하게
라고 수정해야 하나요.

Falstaff 2021-01-13 10:27   좋아요 2 | URL
대단히 슬프게도, 일어 중역의 수준이 직역보다 ˝읽기가˝ 나은 경우가 왕왕 있더군요. 일본인들은 번역에 무척 공을 들이는 반면, 우리나라는 전통의 속도전, 빨리빨리, 후딱 번역을 해치우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래 결과가 오히려 일어 중역이 직역보다 읽기가 수월해지는 ㅋㅋㅋㅋㅋ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지곤 했던 거 같습니다.
맞습지요. 중역이면 어떠냐 이겁니다.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체코 언어 번역이 사실은 중역이다, 하면 어디가 덧나나요. ㅋㅋㅋ

레삭매냐 2021-01-13 10:31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출판사에서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쓴 책을 냈는데,
역자가 독일어 번역하시는 분이라 이거
슨 중역이다라고 유추해서
별점 테러(1개!)를 가했더니 관련자인지
마구 뭐라해서 식겁했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그 책은 사긴 했는데 그 때의 트라
우마 때문인지 아직도 못 읽고 있습니다.

속도전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절대 우리의 영업 비밀을 까지 마라가
아닌가 싶더군요.
 

 

  올 한 해 동안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좋았던 책들을 선정했습니다. 이름하여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 그동안 최고의 한 권으로 선정한 책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2016년.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2017년.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늦여름>
  2018년.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2019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올해는 연초부터 명편들을 많이 읽는 바람에 애초에 2020년 Top 10 선정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짐작이 맞았습니다. 또한 처음으로 과연 열 권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궁리가 들기도 했습니다만, 아마추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우습더군요. 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부류가 아닌, 그저 취미의 일환으로 책을 읽는 우리 아마추어 독자들은 자유롭게 올해 읽은 최고의 책을 선정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우리의 목적은 문학적 가치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저는 앞으로도 매년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을 선정할 것입니다.
  책의 선정은 매 분기마다 포스트를 쓴 추천작품 모두 마흔 권 가운데 열 권과 최고의 한 권을 고르는 방식입니다. 올해 Top 10에 말 그대로 “아깝게” 들지 못한 책들로 말하자면 박재삼의 《박재삼 시집》,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단지 유령일 뿐》,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호르헤 셈프룬의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율리 체의 <새해>, 토머스 핀천의 <브이.>, 정말 아까운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아흐멧 함디 탄피나르의 <시간조정연구소> 등이 있습니다.
  순서는 제가 책을 읽은 날짜순입니다.

 


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이런 어처구니없는 책이 있을까. 이건 문학의 반란이다. 이렇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따로 영토를 탈취해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거나 율법의 개로부터 참형을 선고받아야 마땅하다.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제일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즐길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고생을 시킨 나보코프와 그의 역작 <창백한 불꽃>이 얼마나 짜릿하게 느껴졌는지는 이 책을 직접 읽은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야속한 오르가슴이리라. 장미 같은 책. 그러나 주의하시라, 하물며 대 시인조차도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을 수 있었으니.

 

 

2. 막스 프리슈, <슈틸러>

 

  프리슈를 읽으면서 재미를 기대하기는 애초 불가능하리라, 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물론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는 긴박하거나 즐거움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프리슈의 작품도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책. ‘나’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어떤 스위스 사람으로부터 내가 아나톨 슈틸러라는 이름의 스위스 조각가라고 지목을 받는다. 근데 내가 진정 나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내가 슈틸러일까. 원래 인생이 온전한 끝도 없고 온전한 의미도 없는 거잖아. ‘나’의 혼돈 속에 또 20세기 초중반의 현대사까지 가세해서 만들어낸 명편.

 

 

3.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작년에 이이의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를 ‘최고의 한 권’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올해 그 자리를 넘보지 않은 책. 처음 장면부터 어쩌면 이렇게 매혹적인지. 첫 번째 가을비 방울이 떨어지려는 무렵,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이곳 집단농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불길하게 전해지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하여 농장 구성원들은 횡령한 돈을 싸들고 도망칠 생각을 시작하기도 하고, 그들 덕에 집단농장이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싸이기도 한다. 농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카프카 적인 접근을 감행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게다가 무지하게 긴 문장의 신기한 긴장감까지. 그러나 주의하시라.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터.

 

4. 미셸 투르니에, <마왕>

 

  ‘최고의 한 권’ 후보작이었다. 왜소한 체격이었다가 1940년대 당시 190센티미터, 110킬로그램에 이르는 거인으로 성장한 아벨 티포주의 행적을 그렸다.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급성 근시와 성기왜소증을 피할 수 없는, 이를테면 일종의 괴물.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징집당한 티포주는 초기에 포로로 떨어져 동프로이센 지방의 수용소를 거쳐, 소년병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나폴라에서 거대한 검은 말을 타고 일대를 돌아다니며 소년들을 ‘수집’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마치 괴테의 시, 슈베르트의 리트 <마왕>과 비슷한 모양이라 제목을 이리 붙였던 것. 이런 단편적인 내용만 가지고는 왜 내가 이 책을 ‘명작’이라고 부르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을 터. 여기에 투르니에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다양한 의미를 혼합하기 주저하지 않았다.

 

5.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독후감을 쓰면서 제목을 “모든 비문맹인에게 권합니다.”라고 지었다. 저 광활한 열대우림, 인도차이나의 온대우림, 북아메리카의 한대우림을 떠올려보자. 지상 60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끝도 없이 펼쳐지는 녹색 지평선. 이게 오버스토리Overstory다. 삼림의 덮개를 형성하는 엽군. 숲과 잡목과 거목과 균류와 기타 미생물,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생명집단이 오직 털 없는 원숭이 한 종의 편리를 위하여 급속도로 제거되어 왔고 제거되고 있는 곳. 그곳의 가장 중추적인 생명체인 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진정으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장엄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널려 있지만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다. 인간은 숲과 지구에 미안해하며 불편한 것을 참고 겸손할 필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6. 채만식, <탁류>

  1938년 작품. 우리나라에서 30년대 소설이라면 근대문학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탁류>를 읽고 그동안 우리 근대문학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나의 오만과 무지를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다니. 에밀 졸라가 한반도에서 환생했으면 썼을 법한 작품이라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감칠맛 나고, 긴박하기도 하고, 이야기 진행에 따라 흥분도 하고 기뻐도 하고, 환장까지 할 한 바탕 사기극. 기본적으로 비극이긴 하지만 지뢰처럼 묻혀 있는 골계와 해학과 풍자와 능청이 기가 막힌 사투리와 버무려져 곳곳에서 펑펑 터져나간다. 30년대 당시 조선 최고의 물산 집합지 군산과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 살던 모든 그저 그런 인간들의 난장판. 아무리 난장판이라도 엄연한 향연을 어찌 이리 늦게야 읽게 되었을까.

 

7. 토마스 만, <요셉과 그 형제들>

  이거 토마스 만 아니면 못 썼다. 창세기에 겨우 몇 페이지 나오는 텍스트 가지고 무려 3천 페이지가 넘는 구라, 그것도 읽는 즉시, 즉각, 읽자마자, 거 그럴 듯해,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장광설로 만드는 신공.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래 토마스 만, 하면 길기만 길지 재미는 하나도 없는 소설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도 하니 아마 대표작 <마의 산>에 하도 덴 사람이 많아 그럴 거다. 그러니 내가 토마스 만만 나오면 앞 뒤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서평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 읽는 건 그와 내가 연분이 맞아서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이 책은 이사악, 에서와 야곱, (르우벤과) 요셉 이야기를 알고 있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3천 페이지를 독파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결국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도 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의 결론이, 진짠데, 심금을 울린다.

 

8.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하나만 가지고도 이 리스트에 오를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 작품이 1934년, 갑술 해에 쓴 것인데, 이상의 <날개> 2년 전에도 이런 모더니스트가 있었다니, 와, 놀랄 놋자字여. 한 지식인 청년의 삶에 천착을 해 종로, 광교, 남대문, 경성역 일대 까지 일상적인 생활, 그리고 생활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심리 또는 주인공의 내면세계가 절묘하게 절충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 디덜러스다. 오전 열한 시 경에 어머니의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 다음날 새벽 두시까지 온갖 곳을 다니며 여러 명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스쳐 지나가고, 모른 척하고, 괜히 아는 척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술도 마시고, 예전에 선 본 아가씨를 회상하는 룸펜 인텔리겐치아의 삶을, 입에 착 달라붙는 맛으로 버무려놓았다.

 

 

9. 오르한 파묵, <눈>

  터키의 북동쪽 국경도시 카르스. 프랑크푸르트에 망명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귀국한 카는 장례식이 끝나고 이스탄불의 신문사 임시기자로 유행하는 소녀들의 연쇄자살과 지방선거 취재차 카르스로 떠난다. 이때 습기를 머금고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저기압과 함께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할 눈의 도시에 파묻혀버린다. 여기까진 낭만적이지? 그러나 이제야 시작. 하필이면, 원래부터 주인공의 숙명이긴 하지만, 카가 도착한 날 밤, 도시의 유일한 공연장에서 군사 쿠데타가 터지고, 절세의 미인이자 카의 대학동창인 이혼녀와의 연애사업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도 의문에 싸이고, 터키의 거의 모든 부조화가 이곳 국경도시에서 터지느니, 종교와 정치의 갈등, 빈부 격차, 부패한 정부와 군부, 도농 간 의식 차이 같은 모든 모순 속에 어느덧 눈이 그치며 대단원이 까마득하게 보이게 되는데, 가히 파묵의 대표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터.

 

 

10.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마카닌, <아산>

  체첸 내전을 주제로 한 작품은 처음 읽었다. 그런데 무지 재미있다. 얼핏 보면 전쟁 소설이라 할 만한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주인공 알렉산드르 세르게이치 질린 소령의 보직은 전투대대가 아니라 보급대대. 특히 휘발유, 경유, 등유, 항공유, 윤활유 등의 병참 3종에 관한 한 체첸 일대에서 러시아군은 물론이고 체첸 반군 쪽에서도 절대 무시하지 못할 실력자다. 휘발유와 경유야말로 현대전의 피blood이니까. 아산이란 체첸 산山사람들의 영혼에 간직된 불분명한 신으로 두 팔이 달린 거대하고 웅장한 새의 모습을 갖추고 오직 파괴만을 위한 절대적인 힘을 상징한단다. 체첸 산사람들은 질린 소령을 아산 질린으로 호칭할 정도. 질린은 어느 의미에서 부패한 관리다. 그러나 휘발유를 악착같이 지키려 하면 죽고, 대신 판다고 하면 돈을 받고 팔 수 있을 때 당연히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팔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에 빠진 질린 소령. 그를 통해 마카닌은 체첸 내전을 그야말로 처절하게 비꼬고 있다. 어차피 역사상 정의로운 전쟁은 한 번도 없었으니.

 

 

 


2020년 최고의 한 권
헤르만 브로흐, <현혹>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유대인 작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나치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던 브로흐는 자신의 시대를 걸쳐 철저하게 전체주의를 경멸하게 되었을 것이다. 브로흐는 1951년에 죽었는데 <현혹>은 1953년에 발표가 됐고 1976년에 영문판이 출간됐다. 정확하게 몇 년 작품인지 모르지만 30년대 중반에 썼으리라 추측하고 있단다.
  이 우화적 소설은 저 까마득한 쿠프론 산자락에 있는 두 마을,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에서 한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다. 관찰자이기도 하고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한 중년의 의사의 시점으로 쓴 작품인데, 이 두메에 피곤한 몰골의 마리우스 라티라는 인물이 들어와 전설 속의 한 장면, 쿠프론 산에 무한정으로 묻힌 황금을 채굴하겠다는 환상을 갖게 만든다. 고을이 생긴 이래 꿈이라고는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 황금덩이에 찬란한 빛을 비추어주는 마리우스의 약속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이들의 (현혹된)꿈에 대항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금을 그어, 내 편과 네 편으로 이분화 시켜버린다.
  브로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전체주의는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것. 진실과 관계없이 다중의 뜻이라는 현혹에 빠질 때, 2020년, 2021년의 한반도에도 언제든지 내 편만이 옳다는 최면상태로 돌입할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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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31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선택한 열권은 어떤것일까 아주 기대하며 읽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제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을까요? 하하하핫. 전 지금 성경의 창세기를 읽는 중인데, 그래서인지 토마스 만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볼까 싶습니다.

폴스타프님, 내년에도 열심히 읽어주시고 열심히 써주세요. 폴스타프님 덕에 존재를 모르던 많은 책들에 대해 알게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Falstaff 2020-12-31 09: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다락방님 라이브러리 보면 생소한 것들 엄청 많아요. 늘 참고 하기만 하고 정작 책 고를 때는 살짝 기억에서 빗겨나는 모양입니다. ㅋㅋㅋㅋ
다락방님도 내년엔 행복 가득하세요. 제가 말하는 행복이란 당연히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건강을 뜻합니다. ^^

단발머리 2020-12-3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클릭해서 들어오는 그 순간에 너무 떨리는 거 있죠. 역시나 처음 보는 작가에, 처음 보는 작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양식 같은 독서리스트 감사합니다.
올해 폴스타프님 <요셉과 그 형제들> 연재 페이퍼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책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0-12-31 10:08   좋아요 1 | URL
아이고, 과찬을 해주시네요. ㅋㅋㅋ (기분은 째집니다만)
요셉이 재미있으셨어요? ㅎㅎㅎ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내년에도 즐거운 나날들.... 말고 그냥 연초에 로또나 한 번 맞으세요!

coolcat329 2020-12-31 1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책 기다리고 있었어요. <슈틸러>, <오버 스토리>는 폴스타프님 리뷰읽고 사놨는데 역시 ‘탑10‘에 들었네요. 탁류와 구보씨도 꼭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라슬로라는 작가는 2년 연속 순위에 들었네요.
최고의 한 권인 <현혹>, 전 또 폴님에게 현혹당하네요.😅

Falstaff 2020-12-31 10:14   좋아요 3 | URL
ㅎㅎㅎ 좋은 작품들 고르신 겁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성이 크러스너호르커이고요, 이름이 라슬로인 이 양반, 내년에도 읽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 올 12월에 출간예정인 책이 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아주 매력적인 작가더군요. 아니면 저하고 찰떡 궁합일 수도 있고요. ^^

scott 2020-12-31 1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팔라프님
현혹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내년에도 좋은책 이야기 많이 많이 해주세요
2021년 새해 행복과 건강으로 가득차시길 바랍니다.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Falstaff 2020-12-31 10:22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 고맙습니다.
근데 현혹, 취향이 아니라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0-12-31 1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최고의 한 권이 <현혹>입니까?!
오르한 파묵의 <눈>이 최고의 열 권에 들어가 있는 게 의외군요. ㅎㅎ 파묵의 대표작이라고 하시니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겠습니다. 비록 파묵이더라도........

여러분 그런데 <현혹>에 현혹되시면 코피 줄줄 흘려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2-31 11: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그래도 현혹은 몽유병자한테 비하면 새발의 피, 조족지혈입니다!
생각보다 곤란하지 않았으니 코피까지는 그저 ㅋㅋㅋ 사람에 따라 뭐.... ㅋㅋㅋㅋ
옙. <눈> 괜찮더군요. 아마 연간 리스트에 올라온 첫 파묵일 거에요.
사실, 현혹이냐 불꽃이냐, 좀 고민했습지요. 뭐 인생이니까요. ^^

비연 2020-12-31 11: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못본 책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펼쳐지다니. 몇 권 푱푱 보관함에 넣으며 아 내년 초 살 책들 리스트는 폴스타프님의 책들인가 합니다. 새해 복!

Falstaff 2020-12-31 11:24   좋아요 4 | URL
비연님도 새해 복 왕창! ㅋㅋㅋㅋ
좀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알라딘엔 워낙 고수분들이 많아서 사실 이런 추천 비슷한 거 쓰기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답니다. ^^

겨울호랑이 2020-12-31 1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Falstaff 2020-12-31 11:24   좋아요 4 | URL
겨울호랑이 님도 내년에 건강하시고 돈 많이 버세요! 그게 제일입니다!!

막시무스 2020-12-31 1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항상 좋은 문학작품의 소개와 리뷰에 감사드립니다! 감히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차곡차곡 잘 쟁여두고 있습니다!ㅎ 2021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책읽기의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Falstaff 2020-12-31 12:45   좋아요 3 | URL
무슨 말씀을요. 막시무스 님의 내공이면.... 아이고.... ㅋㅋㅋ 그래도 말씀은 고맙습니다.
2021년, 무조건 건강하시고, 무엇보다, 주머니가 두둑해지시기 바랍니다.

초딩 2020-12-31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

Falstaff 2021-01-01 08:4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초딩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 다른 건 몰라도 현금 대박 하나만이라도요. ㅋㅋㅋ

문수봉우리 2021-02-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 작품과 작가들을 저 아래로 깜보다가,탁류를 겁나게 재밌게 읽고 아 그게 아니구나했었습니다,저는 채만식의 ˝논 이야기˝를 읽지는 않았지만 이 대사 하나가 채만식을 대변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독립됐다고 했을제,내 만세 안부르기 잘했지˝ .

Falstaff 2021-02-08 12:22   좋아요 0 | URL
아, 그 대사가 <논 이야기>에서 나오는군요.
채만식, 참 재미있는 작가입니다. 의미심장하기도 하고요.
 

오랜만에 듣고 싶은 노래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곡들에 써놓은 것이 파일에 있군요. 글과 유튜브 영상을 함께 조합해 보았습니다.




비어있는 가슴 속의 긴 공명



 H, 9월의 들판엔 아직 곡식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햇볕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여름은 이미 황혼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단풍이 들고 어느 새 낙엽이 지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지난 여름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우리의 세월은 바야흐로 지난 여름의 태양같이 여전히 뜨겁지만 오늘은 조금 마음을 추스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가을을 이야기해봅시다. 가을...... 생각만 해도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구석이 황량해지는 단어지요. 이 가을엔 또 어느 외로운, 그러나 장난끼 많은 요정이 있어 당신 가슴에 치명적인 사랑의 화살을 날릴까요. 그러나 그 화살을 피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사실 피할 수도 없지만.

 고백을 할까요? 당신이 지난 여름에 묻혔던 나른한 추억의 작은 한 구석에 내가 있었듯이 당신의 가슴을 향한 그 화살에 묻힌 치명적인 독이 바로 내 심장에서 비롯하는 갈증의 먹줄로 만들어진 것이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답니다. 그리하여 아주 먼 훗날 이젠 당신의 심장에도 나와 똑같이 그어져있을 먹줄을 서로 맞대고,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이 가을에마저도 당신이 그 화살을 사양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차마 난감한 일이지만 지난 해 가을에 그랬듯 그 비어있음을 더욱 비어있게 할 수밖엔 없겠군요. 그래서 그 비어있음, 또는 비움을 위해 아마 나는 불란서 노래들을 몇 개 들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흐르는 수 많은 음악 속에서 그 음악을 듣고난 다음,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곡이나 연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지요. 오늘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비어있음에 어울리는 얘기를 해볼까 해요.


 H. 먼저 이마에 몇 가닥 굵은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모나코 태생의 레오 페레, 그가 노래하는 <세월의 흐름 속에 : Avec le Temps>를 말하고 싶어요. 레오 페레. 이 백발의 노 가수에 대해서는 뭐라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의 노래야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답니다. 얼핏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레오 페레는 초기에 경영학과 피아노를 공부해서 처음엔 클래식 영역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샹송으로 선회했지만 인기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지내다가 에디트 피아프의 도움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고, 71년에 이 <세월의 흐름 속에>를 발표해서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기록했다고 하는군요.

 사실 그의 음반 <Avec le Temps>를 들어보면 첫 곡인 <예술가의 생애 : La Vie D'Artiste>에서 아주 청명한 피아노 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어느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즈음 페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치 시를 읊듯 흘러나옵니다.

 그의 음악은 사람의 감성에 호소합니다. 나같은 보통사람이 아니더라도 샹송은 사실 곡의 내용을 알고 듣는다기보다는 샹송이라는 쟝르 특유의 어떤 서정성, 프랑스어 특유의 발음에서 비롯되는 신비감, 마치 흐느낌 같은 선율에 매혹되기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페레의 노래는 그것들 외에도 참으로 귀한 것, 혹은 귀했던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답니다.

 역시 어깨 너머로 들은 것에 의하면 그가 노래를 만들때 보들레르나 아폴리네르 같은 프랑스의 대시인의 시를 자주 가사로 인용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의 노래, <세월의 흐름 속에> 안에는 아무 사변적인 덧붙힘 없이 들으려고 노력해도 기어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조, 젊은 시절의 모든 열정이 다 사위고 대신 담담하게 지난 날들을 뒤돌아 보는 듯한 쓸쓸함, 여유로움, 아쉬움 같은 것이 배어나와 마치 인생의 만가를 듣는 듯하게 만들어냅니다.

 세월이 더 흐르고, 죽음이 내 앞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때, 나는, H, 당신의 손을 잡고 이 노래만큼의 회한과 아쉬움, 그리고 여유과 관조를 함께 가질 수 있게 되길 진정 바라고 있답니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은 가버리고
완전히 지친 말과 같이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겠지
우연의 침대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느낌
여위어 초췌해지고 고독해진 나를 생각해.
그리고 잃어버린 세월에 속은 듯한 느낌....
그래서 시간과 함께 사람은 이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거야
가장 멋진 추억마저 다른 것과 같지
토요일 밤, 나는 미술관에서 죽의 이의 선반을 뒤적이고...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은 가버리고
매우 사소한 일로 믿었던 타인
그 사람을 위해 약간의 돈에 영혼을 판 적도 있는....
개를 끌고 갔던 것처럼, 그 앞에서 질질 끌려갔던 타인마저
시간과 함께 모두 가버리지
가버려. 정열을 잃어버린 낮은 목소리와.....



 H. 내겐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불란서 노래가 있어요. 당신도 너무 많이 들어 아마도 "또 이 노래야?"하고 반문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을만 되면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이 노래가 들리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니까. 그래요, 지금 이태리 태생 샹소니에, 이브 몽탕의 <고엽 : Les Feuilles Mortes>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몽탕은 나이를 먹은 다음에도 그의 모습 자체에 깊숙한 우수가 서려있지요.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무수한 모습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파리의 정사>, <마농의 샘>에서 그의 단면들.... 이러한 것, 그 가운데 <밤의 문>에서는 바로 이 노래 <고엽>이 주제가로 나오기도 하는군요.

 세월은 모든 것을 추억으로 만듭니다. 추억은 아름다운 낡음일 거예요. 다미아, 쥴리엣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조르주 브라상스.... 이들과 마찬가지로 몽탕 또한 예전의 영화를 뒷전으로 하고 이젠 대지에 차분히 누워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살아 있군요.

 샹송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에디뜨 피아프 마저 그에게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몽탕은 피아프를 이용해 성공한 다음에 그녀를 배신한 전력도 있지요. 어렸을 적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불우한 소년시절의 각인이 그런 이력을 만들었겠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다지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고엽>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고엽>은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곡을 붙힌 것이지요. 그러나 추억과 회환 또한 고엽과 같다는 가사를 몽탕 만큼 온유한 쓸쓸함으로 노래할 수 있는 가수는 없답니다.

 수많은 남성 샹송 가수들이 음유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나 진정 자신있게 음유시인이라는 계관을 쓸 수 있는 샹소니에는 이브 몽탕과 그리스 출신의 조르쥬 무스타키 정도 아닐까요. 피아프마저도 자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깊숙한 곳의 매력을 이 몽탕은 가지고 있으니까. 이 가을에도 전 세계 무대와 방송에선 여전히 "난 잊을 수 없어..."가 울리겠지요.




난 잊을 수 없어.
추억과 회환 역시 고엽과 같은 것을....
인생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떼어 놓았고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 찍은
맺어지지 않은 연인들의 발자국마저
지워버려.....

 

 H. 내 가슴의 비어있는 곳에 이 가을날, 샹소니에의 부드러운 목소리들만이 들어와 메워지게 내버려두지 않기를 소망한답니다. 그들의 노래와 더불어 당신의 손끝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입김을 나는 기다릴테요. 이 서신을 읽은 한 달 후, 그래서 정말로 가을이 처들어왔을 때, 또다시 당신이 이 부끄러운 글을 찾아 읽어 내가 말한 음악을 듣고난 다음, 당신의 가슴 속에도 그때 까지 비어있는 곳이 있다면, 내가 그 속에서 울리는 공명이 되게 해주겠소?


*************


크하하하하....핰

몇 십 년만에 읽어보니 간질간질하고 오글거려서 도무지 못 읽어주겠습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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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부터 9월까지 읽은 책 가운데 공감하면서, 또는 감동하면서 읽은 책 열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읽은 날짜순서이며 짧은 소개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번 분기엔 대작, 장편들도 몇 있었고 독서하기 쉽지 않은 여름철이 끼어 있어서 마흔다섯 권에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핑계입니다. 그간 책 읽는 데 너무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어 책 읽기를 좀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것도 습관이라고 덜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요. 어쨌든 올해는 근 십년 만에 처음으로 200권미만을 읽는 데 성공할 거 같습니다. 좀 인간적으로 보이지요? 시작하겠습니다.


1. 알레산드로 바리코, <비단>

 

  장교가 되려고 했으나 유럽에서 누에 바이러스가 퍼지자 군문에서 나와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누에알을 구해오는 직업을 갖게 되는 에르베 종쿠르. 그러다가 전 유럽에 누에 병이 도져 이제 종쿠르는, 유럽을 관통해 유라시아 대륙, 시베리아와 스텝지역을 통과해서 바이칼 호까지 도착한 다음 아무르 강을 따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닿고, 여기서 네덜란드 밀수선을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단을 생산하는 일본의 동쪽 끝, 외딴 섬의 주인, 도주島主와 거래를 맺게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가슴에 필생의 그리움을 담을 젊은 여인, 도주의 여자와 눈길을 부딪고 절망적인 사랑을 만들게 되니, 이후 그는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를 가진 채 그리워하며 생을 보내게 되는,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아련하게 슬픈 이야기.


2. 신석정, <그 먼 나라를 아르십니까>

  20세기가 시작한지 10년이 되지 않아 출생한 176센티미터의 시인이, 그리 큰 키를 하고도 어머니와 자연과 노란 나뭇잎과 비둘기 나는 오월의 하늘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썼음에랴. 그러나 이이의 이런 퇴행적 서정시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은 물론이고 한 번의 신사참배도 하지 아니한 선비 그대로의 풍모를 견지했다가, 그 어려운 세월을 겪고 해방을 맞고, 전쟁도 보내고 시민혁명을 겪은 다음에 출현한 군사정권에서 치도곤을 당하니 이보다 서글픈 일이 어디 있으랴. 그리하여 석정은 “나와 / 밤과 / 무수한 별뿐이로다 //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라고 노래하며 자신의 시업을 마감한다.


3. 호르헤 셈프룬,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작가 호르헤 셈프룬은 스페인 공화국의 주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하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가족의 2녀 5남 가운데 똑똑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나, 만일 프랑코가 내전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바다와 같은 집안환경 덕에 애초에 용으로 비상해 가재, 붕어, 개구리를 다스리며 살았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할 당시 스페인 공화국은 거의 완벽하게 망조가 든 상태였으며 이들 가족은 한갓 벨기에 국경을 관리하는 세관공무원에게도 멸시의 눈짓을 받는 처지에 떨어져 있었다. 셈프룬은 네덜란드를 거쳐 스위스의 칼뱅 중학교, 파리 앙리 4세 고등학교에 재학하는데, 이 무렵의 시기를 그린 자전적 작품이다. 쉽지 않다. 역사와 철학과 신학 등이 현학적인 문장으로 갑자기 출몰하며, 구성도 시간적 배열이 아니라 작가가 생각나는 대로 앞뒤로 섞여 있어 여간한 집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름다운 회상과 문장과 안타까움이 충만하니 한 번쯤 힘든 독서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4.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망자들>

 

  첫 장을 열면 1930년대 초중반의 5월, 잘 생긴 장교가 일본식 할복을 준비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이어서 무척이나 예리하게 벼린 단도로 흰 천을 감은 자신의 단전을 푹 찌르고 엎어진 다음, 칼이 꽂힌 대장에는 무수한 통감세포가 분포되어 있는 부위인데,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칼을 상복부 쪽으로 죽 밀어 올려, 칼이 위까지 상처를 입혔는지 덩이진 피를 입으로 울컥 울컥 쏟아내며 죽어간다.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도 이렇게 죽었으니까. 그러나 이 장교의 할복 순간에는 벽에 몰래 숨겨져 있는 카메라가 잘생긴 젊은 장교의 마지막 순간을 계속 촬영하고 있었고, 일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카메라를 회수하여 즉각 인화한 다음 속달 편으로 베를린으로 보내진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전체주의 국가 독일로. 이후 작품은 베를린과 일본을 넘나들며 전개되지만, 스토리에 국한하지 않고도 충분히 즐거운 온갖 비의로 싸여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5. 니콜라 마티외,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2018년 공쿠르 상 수상작. 그러나 한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인간이, 특히 남자들이 인생 중에 가장 욕설을 많이 하는 시기가 사춘기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초반에 무수히 쏟아지는 욕설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끈기가 필요하다. 그것만 넘으면 여러 인종들의 용광로인 프랑스에서 한 시절을 보내는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다. 내용이야 뭐 성장소설이니 뻔하겠지만, 이라고 생각하시면 오산. 이들에겐 한 시절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강도시로 지나가는 개도 백 프랑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젠 제철소가 문을 닫아 마티외가 준비해놓은 청소년들의 아버지들의 거의 대부분은 한 시절 같은 직장에 다니던 실업자. 여기에 부잣집 여자애들이 등장하고, 쇠락한 도시답게 마약과 마리화나가 사고 팔리는 음울한 분위기. 그러나 이렇게 남루하게 남겨진 아이들도, 성장한다.


6. 율리 체, <새해>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체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읽는 도중 사고에 대한 예감 때문에 노심초사, 그러면 안 돼, 안 돼 얘들아, 애타는 마음이 당신을 초조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크리스마스와 새해까지 이어지는 연휴에 카나리아 제도로 휴가를 온 부부. 주인공 헤닝은 아직 아내 테레자가 일어나지도 않은 새해 아침에 생각보다 무거운 자전거를 빌려 섬의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을 목표로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마음이 멀어진 것 같은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육아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이 고생보다는 덜 할 것이라고, 이것만 견디면 앞으로 닥칠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 하고 페달 밟기를 멈추지 않는다. 헤닝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장애가 하나 있으니 공황발작. 이것은 예상 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난데없이 닥치는데, 저 멀고 먼 기억 속에서 헤닝은 자기도 모르는 채 근본적인 공황의 장소를 향해 근육파열을 무릅쓰고 페달을 밟고 있는 줄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 책이야말로 정말 읽어봐야 맛을 안다.


7. 베른하르트 슐링크, <올가>

 

  쓸쓸한 이야기. 부두 노동자 아버지와 세탁부 출신의 슬라브 엄마 사이에서 엄마의 이름을 이어받은 올가. 서 있게 된 때부터 서서 창 너머 언제나 무엇을 관찰하는 습관을 갖고 있던 아이는 이웃 아주머니한테 글쓰기를 배웠지만 어려서 티푸스로 양친을 모두 잃고 만다. 할머니를 따라 농촌도시로 옮겨간 올가는 도서관에 다니는 습관을 들이고, 교회 오르간 연주자한테 연주법도 배우더니 나중엔 급할 때 미사에서 반주도 할 수준이다, 음악의 나라 독일에서. 남달리 총명한 올가는 교원대학을 졸업해 교사가 되는 것이 꿈.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남매가 있어, 오빠 헤르베르트의 배려로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그나마 나은 환경을 만나 계획대로 교사가 되지만, 헤르베르트가 올가와의 결혼을 선언하자 그의 가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상속권 박탈과 의절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세월은 흐른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세상엔 되지 않는 일이 많고 많다. 올가와 헤르베르트의 사랑은 서로를 향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있었을까.


8. 토마스 만, <요셉과 그 형제들>

 

  토마스 만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긴 장편.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을 3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확장했다. 구약성서의 행간을 소설가적인 눈썰미로 파헤쳐 요란난만한 가족사를 완성한 역작. 야바위보다 더 지독한 사기행각으로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을 받아 쌍둥이 형으로부터 도망한 야곱과, 어머니 라헬로부터 물려받은 천상의 미모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받은 극도의 편애로 교만에 빠진 요셉. 그리하여 형제들에게 당한 죽음의 위협과 마른 우물 속에서 온몸이 묶인 채 사흘을 견뎌야 했던 수난. 그곳에서 구출된 일을 재탄생으로 받아들인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 환관인 궁신의 집 하인으로 들어가 왕의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신하인 경호대장의 눈에 들어 저택의 집사를 하고, 요셉의 미모에 반한 주인의 아내가 관계를 거절당하자 겁탈범의 누명을 씌워 옥에 갇혀 이번엔 3년. 예언의 능력과 형제간의 화해 등을 신화가 아닌 삶의 눈으로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장인의 솜씨. 이 책을 빼고 올해의 책읽기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9. 토머스 핀천, <브이.>

 

  8백 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 게다가 큰 판형. 빽빽하게 지면을 채운 글씨들. 온갖 에피소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발하게 쏟아지는 거한 만찬. 다 읽으면, 한 판 잘 때려먹었다, 감탄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오리라. 뭘 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인간이란 뜻의 슐레밀인 프로페인이 뉴욕의 하수도에 들어가 한 시절 아동들의 애완용으로 키워졌으나 이젠 거대한 크기로 자라 하수도 쥐의 씨를 말리는 위협적 생물이 된 악어 사냥을 하다가, 뉴욕 하수도의 빈 터에 가톨릭 신부가 한 시절 수도를 하던 시설을 발견하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이 책은 그 괴짜 신부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도무지 오리무중의 V.가 무엇인지 어찌 쉽게 말로 할 수 있으랴. 가르쳐드리면 안 읽을 거지? 이 가톨릭 사제의 뒤를 쫓기 위해 프로페인의 뒤를 따라가든지, 아니면 ‘모든 병든 족속’의 가장 나이 많은 멤버 로버트 스텐슬이 자기 아버지 시드니 스텐슬의 V.였을지도 모르는 빅토리아를 찾아가든지 그건 마음대로 하시라.


10. 줄리언 반스, <메트로랜드>

 

  반스의 데뷔작이자 성장소설이며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포함되어 있다고 역자 신재실은 말한다. 성장시절 가운데 16세, 21세, 30세 시점을 꼽아, 16세 시절, 런던 교외 지하철(메트로)이 운행하는 지역에서 화자 ‘나’와 절친 토니가 펼치는 귀엽고도 치기어린 지적 활극. 혈관에 바리케이트와 폭동 또는 혁명의 DNA가 세상 어느 나라보다 진하게 흐르는 프랑스의 1968년을 파리 현장에서 맞은 영국인인 ‘나’는 내적 혁명, 이라고 거창하게 부를 수도 있을 첫 번째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여생을 함께 할 운명적인 여성을 만난다. 다시 메트로랜드로 돌아온 ‘나’는 이제 완전히 청춘과 이별을 해서 어른, 이라기보다 차라리 성인의 영역으로 진입했으니 십여 년 전의 ‘나’ 크리스토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줄리언 반스는 이 작품을 발표하고 이십 년이 되지 않아 영어문학권의 대표적 소설가 또는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될지 몇 명은 알았을 터.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읽기도 편하다.



  아홉 권은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반스의 <메트로랜드>를 목록에 포함시킬까 말까를 여러 번 다시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궁리를 했던 작품으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로베르토 볼라뇨의 <먼 별>,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 별장, 그 후>, 조태일의 <국토>, 오르한 파묵의 <빨강 머리 여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집,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를 대신해도 아쉽지 않을 것들이었지만 제 취향 상 반스를 선택했습니다.
  연휴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댁내 행운 가득하기 바랍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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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는 올가가 특히 읽어보고 싶네요. 와, 존재도 몰랐던 책에 대해 이렇게나 많이 알게 되네요. 저는 올가를 장바구니에 넣겠습니다!!

Falstaff 2020-09-29 09:44   좋아요 0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좀 쓸쓸한 게 계절하고도 어울리겠는 걸요. ^^

비연 2020-09-29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권 보관함에 투척!

Falstaff 2020-09-29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으셔요!

syo 2020-09-2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본 게 하나도 없어요!! 으앜ㅋㅋㅋㅋ
왜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ㅎㅎ

폴스타프님 명절 잘 쇠소서...

Falstaff 2020-09-29 11:07   좋아요 0 | URL
잘못 되긴요. 사이오님 읽은 책 가운데 아는 게 없어서 댓글을 못 달고 있는 걸요. ㅋㅋㅋㅋ
연휴 기간에 책은 그만 보시고, 노세요. 돈 떨어질 때까지 노세요. 노는 게 남는 겁니다. 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20-09-2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읽을 책들을 가네요. Falstaff님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Falstaff 2020-09-29 18:2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추천은 아니예요, 제가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분들의 취향하고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겨울 범 님도 편하게 추석 달을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mini74 2020-09-2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이 라길래 초딩때 본 파충류외계인 이야기인줄 ㅠㅠ 옛날사람입니다. 물욕을 일으키는 글이에요 ㅠㅠ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Falstaff 2020-09-29 20:30   좋아요 0 | URL
아, 초딩 때셨군요. ㅎㅎㅎ 주민등록 앞자리가 비슷하게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ㅋㅋ
근데, 이건 제 기준에 좋은 책이고요, 읽는 분과 합이 맞지 않으면 아주 경을 칠 수도 있으니 매사 불여튼튼입니다. 특히 다이아나던가요, 미모의 빵빵한 아가씨가 생쥐 한 마리를 산 채로 꿀떡 삼키는 소설 같은 거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9 20:4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다이아나랑 줄리엣의 그 브이인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ㅋㅋ

Falstaff 2020-09-29 21:21   좋아요 1 | URL
1980년대의 미국 드라마 <V>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있을 수 없는 일이야>를 대폭 각색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있을 수.....>에서는 어디를 봐도 파충류 인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전체주의 독재가 미국에서 벌어잘 수 있다는 노골적인 비유가 독특합지요. 지금 트럼프의 미국이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루이스를 읽으려면 아무래도 <있을 수 ...>보다는 <베빗>이 좀 더 낫더랍니다.
드라마에서 다이아나가 생쥐 육회 먹는 건 정말 쇼킹이었습니다. ㅋㅎㅎㅎㅎㅎ

coolcat329 2020-09-2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맞이 풍성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올가>가 제일 끌리네요.🤭

Falstaff 2020-09-29 22:03   좋아요 1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근데요,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ㅋㅋㅋ
저는 비단, 아르십니까, 찬란한 빛이여, 새해가 좋았는데, 다 취향 따름입니다.
짱고양이 님도 편안한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