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듣고 싶은 노래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곡들에 써놓은 것이 파일에 있군요. 글과 유튜브 영상을 함께 조합해 보았습니다.
비어있는 가슴 속의 긴 공명
H, 9월의 들판엔 아직 곡식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햇볕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여름은 이미 황혼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단풍이 들고 어느 새 낙엽이 지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지난 여름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우리의 세월은 바야흐로 지난 여름의 태양같이 여전히 뜨겁지만 오늘은 조금 마음을 추스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가을을 이야기해봅시다. 가을...... 생각만 해도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구석이 황량해지는 단어지요. 이 가을엔 또 어느 외로운, 그러나 장난끼 많은 요정이 있어 당신 가슴에 치명적인 사랑의 화살을 날릴까요. 그러나 그 화살을 피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사실 피할 수도 없지만.
고백을 할까요? 당신이 지난 여름에 묻혔던 나른한 추억의 작은 한 구석에 내가 있었듯이 당신의 가슴을 향한 그 화살에 묻힌 치명적인 독이 바로 내 심장에서 비롯하는 갈증의 먹줄로 만들어진 것이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답니다. 그리하여 아주 먼 훗날 이젠 당신의 심장에도 나와 똑같이 그어져있을 먹줄을 서로 맞대고,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이 가을에마저도 당신이 그 화살을 사양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차마 난감한 일이지만 지난 해 가을에 그랬듯 그 비어있음을 더욱 비어있게 할 수밖엔 없겠군요. 그래서 그 비어있음, 또는 비움을 위해 아마 나는 불란서 노래들을 몇 개 들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흐르는 수 많은 음악 속에서 그 음악을 듣고난 다음,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곡이나 연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지요. 오늘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비어있음에 어울리는 얘기를 해볼까 해요.
H. 먼저 이마에 몇 가닥 굵은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모나코 태생의 레오 페레, 그가 노래하는 <세월의 흐름 속에 : Avec le Temps>를 말하고 싶어요. 레오 페레. 이 백발의 노 가수에 대해서는 뭐라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의 노래야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답니다. 얼핏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레오 페레는 초기에 경영학과 피아노를 공부해서 처음엔 클래식 영역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샹송으로 선회했지만 인기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지내다가 에디트 피아프의 도움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고, 71년에 이 <세월의 흐름 속에>를 발표해서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기록했다고 하는군요.
사실 그의 음반 <Avec le Temps>를 들어보면 첫 곡인 <예술가의 생애 : La Vie D'Artiste>에서 아주 청명한 피아노 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어느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즈음 페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치 시를 읊듯 흘러나옵니다.
그의 음악은 사람의 감성에 호소합니다. 나같은 보통사람이 아니더라도 샹송은 사실 곡의 내용을 알고 듣는다기보다는 샹송이라는 쟝르 특유의 어떤 서정성, 프랑스어 특유의 발음에서 비롯되는 신비감, 마치 흐느낌 같은 선율에 매혹되기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페레의 노래는 그것들 외에도 참으로 귀한 것, 혹은 귀했던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답니다.
역시 어깨 너머로 들은 것에 의하면 그가 노래를 만들때 보들레르나 아폴리네르 같은 프랑스의 대시인의 시를 자주 가사로 인용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의 노래, <세월의 흐름 속에> 안에는 아무 사변적인 덧붙힘 없이 들으려고 노력해도 기어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조, 젊은 시절의 모든 열정이 다 사위고 대신 담담하게 지난 날들을 뒤돌아 보는 듯한 쓸쓸함, 여유로움, 아쉬움 같은 것이 배어나와 마치 인생의 만가를 듣는 듯하게 만들어냅니다.
세월이 더 흐르고, 죽음이 내 앞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때, 나는, H, 당신의 손을 잡고 이 노래만큼의 회한과 아쉬움, 그리고 여유과 관조를 함께 가질 수 있게 되길 진정 바라고 있답니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은 가버리고
완전히 지친 말과 같이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겠지
우연의 침대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느낌
여위어 초췌해지고 고독해진 나를 생각해.
그리고 잃어버린 세월에 속은 듯한 느낌....
그래서 시간과 함께 사람은 이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거야
가장 멋진 추억마저 다른 것과 같지
토요일 밤, 나는 미술관에서 죽의 이의 선반을 뒤적이고...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은 가버리고
매우 사소한 일로 믿었던 타인
그 사람을 위해 약간의 돈에 영혼을 판 적도 있는....
개를 끌고 갔던 것처럼, 그 앞에서 질질 끌려갔던 타인마저
시간과 함께 모두 가버리지
가버려. 정열을 잃어버린 낮은 목소리와.....
H. 내겐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불란서 노래가 있어요. 당신도 너무 많이 들어 아마도 "또 이 노래야?"하고 반문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을만 되면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이 노래가 들리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니까. 그래요, 지금 이태리 태생 샹소니에, 이브 몽탕의 <고엽 : Les Feuilles Mortes>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몽탕은 나이를 먹은 다음에도 그의 모습 자체에 깊숙한 우수가 서려있지요.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무수한 모습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파리의 정사>, <마농의 샘>에서 그의 단면들.... 이러한 것, 그 가운데 <밤의 문>에서는 바로 이 노래 <고엽>이 주제가로 나오기도 하는군요.
세월은 모든 것을 추억으로 만듭니다. 추억은 아름다운 낡음일 거예요. 다미아, 쥴리엣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조르주 브라상스.... 이들과 마찬가지로 몽탕 또한 예전의 영화를 뒷전으로 하고 이젠 대지에 차분히 누워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살아 있군요.
샹송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에디뜨 피아프 마저 그에게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몽탕은 피아프를 이용해 성공한 다음에 그녀를 배신한 전력도 있지요. 어렸을 적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불우한 소년시절의 각인이 그런 이력을 만들었겠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다지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고엽>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고엽>은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곡을 붙힌 것이지요. 그러나 추억과 회환 또한 고엽과 같다는 가사를 몽탕 만큼 온유한 쓸쓸함으로 노래할 수 있는 가수는 없답니다.
수많은 남성 샹송 가수들이 음유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나 진정 자신있게 음유시인이라는 계관을 쓸 수 있는 샹소니에는 이브 몽탕과 그리스 출신의 조르쥬 무스타키 정도 아닐까요. 피아프마저도 자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깊숙한 곳의 매력을 이 몽탕은 가지고 있으니까. 이 가을에도 전 세계 무대와 방송에선 여전히 "난 잊을 수 없어..."가 울리겠지요.
난 잊을 수 없어.
추억과 회환 역시 고엽과 같은 것을....
인생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떼어 놓았고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 찍은
맺어지지 않은 연인들의 발자국마저
지워버려.....
H. 내 가슴의 비어있는 곳에 이 가을날, 샹소니에의 부드러운 목소리들만이 들어와 메워지게 내버려두지 않기를 소망한답니다. 그들의 노래와 더불어 당신의 손끝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입김을 나는 기다릴테요. 이 서신을 읽은 한 달 후, 그래서 정말로 가을이 처들어왔을 때, 또다시 당신이 이 부끄러운 글을 찾아 읽어 내가 말한 음악을 듣고난 다음, 당신의 가슴 속에도 그때 까지 비어있는 곳이 있다면, 내가 그 속에서 울리는 공명이 되게 해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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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하....핰
몇 십 년만에 읽어보니 간질간질하고 오글거려서 도무지 못 읽어주겠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