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정식 시집을 낸다

달력들의 전투대형은 단순하다

7열 횡대,

붉거나 검은 전투복

지피지기여도 백전백패

이 이상한 전투가 아름답기도 한 것은

내 육체의 텃밭인 턱에

수염이 끈덕지게 자라듯

내 마음의 비탈이 차차

늙어왔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리 아파 다리 펴고 싶은 의자에

다리 아파 앉고 싶은 사람처럼

염치없이

시 의자에 푹신 앉아보았으나

시를 앉혀보지는 못한 미안함 마음 절감하며

삐꺼덕,

시집을 엮는다

 

 

강화에서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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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시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썩는 것과 마르는 것. 아름다움이 절정을 다한 뒤에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썩기 시작한다. 그것이 꽃이든, 음식이든, 영혼이든. 그러나 썩기 전에 스스로 물기를 줄여나가면 적어도 아름다움의 기억은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건조의 방식은 죽음이 미구에 닥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영속성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게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어서 네 안의 물기를 말려버리라고, 피와 살을 증발시키라고. 어딘가로 달아나라고, 늘 방부제나 건조제를 서둘러 찾았을 뿐이다. 마른 열매와도 같은 정신에 하루 빨리 도달하려고 젊음을 앞당겨 반납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책상 위의 마른 석류를 들여다보니 주변에 검붉은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몇 년째 썩지 않는 석류를 보며 '불멸'이라는 말을 떠올리기까지 했는데, 그 단단한 껍질을 뚫고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아, 육체란 얼마나 덧나기 쉬운 것인가. 견고해 보이는 고요와 평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 관능의 벌레들이 오글거리고 있는 것인가. 석류를 손에 들어보니 어느새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삶이란 완벽한 진공 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차라리 안도했다. 그리고 내 풍장의 습관도 앞으로 몇 번이고 생명의 기습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라는 걸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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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그래서 적어도 도달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혹은 누군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 이루어지길

사람들은 왜 내겐 들을 수 있는 귀만을 허락했냐고

신에게 한바탕 퍼붓는 살리에르의 한탄과 비애를 전하지만,

사실 얼마나 배부른 소린가?

모차르트와 동시대인이라는 거, 그거 축복 아닐까?

돌이 아니라, 쏟아지는 별들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인가?

친구, 정말 끝까지 가보자.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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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해둔 '김영하 산문 : 보다'가 도착했다기에 시집 12권 중 3권의 시집과 함께 빌려왔습니다 :)


그리고 오늘 배송 온 <미움받을 용기>까지.

얼마나 빨리 받아서 읽겠다고 분리 배송 시킨건지T_T


일단 읽고 있는 <그것도 괜찮겠네>를 마저 읽고 한 권 한 권 읽어봐야겠습니다.


brown_and_con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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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집 - 갖고 싶은 나만의 공간, 책으로 꾸미는 집
데이미언 톰슨 지음, 정주연 옮김 / 오브제(다산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책등의 색이 같은 계열의 책을 한데 모아 정리한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그 사진을 본 한 분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댓글을 달아주셨기에 물었다. 어떤 책인지 궁금하다고. 남겨주신 답글에는 이 책 <책과 집>이 담겨있었다.

'갖고 싶은 나만의 공간, 책으로 꾸미는 집'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각각의 공간과 취향, 책의 양에 걸맞은 수납 방식을 터득해보기로 한다"(p.11)고 운을 떼는데 정말 그런 책이었다. 장식으로서의 책부터 어린이방 등 총 7챕터로 나눠서 이야기하는데, 정확히 30쪽에서 나는 익숙한 책장을 발견했다. 색깔별로 정리된 책장 사진 아래, 이런 글이 실려있다.

색깔별로 책을 정리할 때는 스펙트럼이 나뉘듯 차가운 색(파란색과 초록색)과 따뜻한 색(빨강과 노랑)으로 나누어 배열하면 보기 편하다. 중간 색(보라와 분홍)이 시각적인 다리 역할을 하면 이상적이다. 이런 배열은 오른쪽 사진 속의 벽돌벽처럼 거칠고 광택 없는 배경에서 큰 효과를 발휘한다. (p.30)


외국 서적이긴 하지만 '책'이어서 낯설지 않았고, 곳곳에서 공감해가며 읽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구절이다.

캐나다 소설가 로버튼슨 데이비스가 말했다. "진정 위대한 책은 어려서 읽고, 커서 다시 읽고, 늙어서 또 읽어야 한다. 훌륭한 건물을 아침 햇살 속에 보고, 점심 때 보고, 달빛 아래 다시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대로라면 책을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또 늘었다. 이렇게 한번 손에 넣으면 내놓질 않으니, 현대식 로프트에 살든, 빅토리아 풍 연립주택이나 조지 왕조풍 대저택에 살든 책을 보관하고 정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수밖에. (p.7)

공감가는 말은 더 있다. 19세기 중반 성직자 헨리 워드는 "책은 가구가 아니지만 그만큼 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고, 12세기 유대인 철학자 유라이븐 티본은 "책을 친구 삼으라. 그대의 책꽂이가 유원지가 되게 하라."고 했으며 작가 애나 퀸들런은 "내 아이들이 집안 장식은 필요한 만큼의 책꽂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고 했단다. 책 사진 중간 중간에 이런 말들이 나와서 메모하기 바빴다.

소름돋게 공감했던 구절은 이 구절이다.


서재란 누군가가 평생 모아온 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진지한 관심사를 반영하여 구체화한 곳에 가깝다. 미국 성직자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읽지 않은 책들』에서 책꽂이가 부족해 목수를 불렀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목수가 그에게 "정말 이 책들을 다 읽으셨어요?" 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도구 상자에 있는 도구들을 다 쓰시오?" 물론 아니다. 도구란 나중에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재는 읽은 책을 보관해두는 곳이 아니라 필요할 때를 대비하는 공구상자에 가깝다. (p.91)


책을 읽다보니 작년에 읽은 『장서의 괴로움』이 떠올랐는데, 판형과 책장은 저마다 제각각이어도 책 덕후의 책 사랑은 나라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런 책 덕후 중에 한 명이고.

움베르트 에코는 『장미의 이름』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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