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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쉐의 장편소설 <마천대루>를 완독했다.
작가 천쉐가 8년간 살았던 타이베이의 한 고층 빌딩에서 영감을 얻어 쓴 이 소설은 2015년에 발표되었고, 2020년에 중국 텐센트TV에서 16부작으로 드라마화됐다.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 버그 중심의 가장 번화한 지역에 위치한,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주거용 건물 '폰테 타워'를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이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마천루 '토레 다비드'도 이야기한다.
전자는 1980년대 말 백인들이 대거 빠져나간 이곳을 마피아가 점령한 뒤 부랑자, 불법 이민자가 모인 거대한 빈민굴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가 덧붙는다. 1990년 유명 개발업자가 베네수엘라 경제 번영의 상징물을 세우겠다는 포부로 착공했지만 4년 뒤 금융위기가 닥치며 공사가 중단된 것이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건물을 인수했으나 재공사가 계속 미뤄지다가 2007년 마약중독자와 범죄자들이 그곳을 차지했고, 그 후 집 없는 빈민들이 이곳으로 속속 모여들어 45층짜리 미완공 건물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빈민굴로 전락했다는 이야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소설을 읽었을 땐 '서곡에서 언급하는 두 건물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싶었는데, 소설을 완독한 후에야 깨달았다. 폰테 타워와 토레 다비드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천대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소설은 1부에서 4부에 걸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마천대루 경비원 셰바오뤄, 아부카페 매니저 중메이바오, 마천대루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 로맨스소설 작가 우밍웨, 시간제 가사도우미 예메이리, 주부 리모리, 인테리어 디자이너 린다썬, 마천대루 경비원 리둥린, 임산부 리아이미, 아부카페의 사장 리톄부, 부동산 중개소 직원이자 아부카페 단골손님인 왕쓰보, 대학원생이자 마천대루 편의점 직원인 황하오우,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의 아내 딩메이치, 아부카페 아르바이트생 루샤오멍 등 마천대루와 관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인물들이 등장하는 방식이 재밌었다. 위에서 언급한 순서대로 등장하는데, 첫 타자 셰바오뤄의 이야기는 사실 큰 흥미를 못 느꼈다. 이 땐 몰랐다. 이 캐릭터가 나중에 날 울리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두 번째 타자인 아부카페 매니저, 중메이바오가 등장한 순간 이 소설에 급속도로 빠져들어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이 범죄소설의 중심이자, 마천대루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 메이바오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메이바오가 등장한다. 음흉한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의 시점에,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광장공포증을 가진 우밍웨의 시점에, 이중생활을 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린다썬의 시점에도.
그리고 마천대루의 또 다른 경비원 리둥린의 시점이 나올 때 마천대루에 사건이 일어난다. 살인 사건이었다. 이후 인물들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는 듯, 1인칭 시점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다.
사람들 말이 맞습니다. 이 빌딩에 관한 일은 모두 나한테 물어보면 됩니다.
(린멍위)
그래요. 그날 28층에 갔었어요. 내가 일하는 곳이에요.
(예메이리)
내가 수사하는 현장에 있는 것 마냥 거리감이 가까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그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았달까. 생각보다 더 저열하고 어떤 이야기는 역겹기까지 했다.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라던 책 소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이 문장이 정확히 반대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도 범인이 아니지만 모두가 범인이었다.
메이바오의 이웃이자 광장공포증으로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우밍웨는 메이바오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아무리 만신창이 같은 삶을 산다고 해도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할 정도로 비참할 수는 없어요. 난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걔처럼 그렇게 비참한 인생은 소설로도 쓰지 않아요.
(p.279)
메이바오의 이복동생 옌쥔은 메이바오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메이바오의 미모가 그녀 인생에서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그녀 자신보다도 먼저 알았습니다. 그런 미모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고, 행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메이바오도 알았을 것입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런 미모가 행운일 수 있지만, 우리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는 저주와도 같습니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냥감이 된 것입니다.
(p.368)
메이바오의 미모는 그녀에게는 불행이었고, 결말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메이바오의 삶은 충분히 비참했다. 도박, 술, 마약, 싸움 등 미치광이 같은 남자들만 사랑했던 엄마, 재회한 첫사랑은 유부남이면서 자신의 몸만 탐했고, 천장의 에어컨 배기구를 통해 자신의 집으로 숨어 들어온 남자, 자신의 집에 CCTV를 설치한 남자친구 그리고 자신이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계부까지 불행의 연속이었으나 메이바오는 굴하지 않았다. 삶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불행했을지언정 자신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메이바오가 이다지도 똑 부러진 사람이었기에 엄마 중춘리도, 계부 옌융위안도, 첫사랑 린다썬도, 남자친구 리유원도,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도 그녀를 몇 번이고 꺾어버렸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다혜 작가님의 말처럼 메이바오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사랑받았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서 오직 셰바오뤄만이 메이바오를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절대로 원치 않았을 거라며, 지금 이곳에 메이바오는 없지만 메이바오가 원하던 삶을 사는 게 메이바오를 계속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사람. 메이바오가 그날 밤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셰바오뤄와 떠나 자신이 원하던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빵을 굽고 있었을까. 늘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을까. 살아 있는 희열을 느끼고, 아직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가도 가도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은 무섭지 않아졌을까. 그리하여, 가장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거라던 '생명'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무 영향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생활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걸 알았어. 난 방관자 입장이었는데 점점 깊이 빠져들었지. 메이바오의 죽음으로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 예전에는 그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p.465)
셰바오뤄의 동료였던 리둥린은 셰바오뤄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위와 같이 말했고, 이 문장을 조금 빌려와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이다혜 작가님의 추천사에 혹했던 나는 그저 이 책을 펼쳐든 독자였는데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셰바오뤄는 리둥린에게 쓴 편지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어.'라는 글에 마음이 놓였다지만, 나는 아니었다. 메이바오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나도 밝은 척하다 보면 밝아질까 싶어, 밝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중 한 명이라 그런지 삶이 고될수록 밝게 살고자 했던 메이바오가, 그저 활자로만 만났을 뿐인 메이바오가 마음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