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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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쉐의 장편소설 <마천대루>를 완독했다.

작가 천쉐가 8년간 살았던 타이베이의 한 고층 빌딩에서 영감을 얻어 쓴 이 소설은 2015년에 발표되었고, 2020년에 중국 텐센트TV에서 16부작으로 드라마화됐다.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 버그 중심의 가장 번화한 지역에 위치한,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주거용 건물 '폰테 타워'를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이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마천루 '토레 다비드'도 이야기한다.

전자는 1980년대 말 백인들이 대거 빠져나간 이곳을 마피아가 점령한 뒤 부랑자, 불법 이민자가 모인 거대한 빈민굴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가 덧붙는다. 1990년 유명 개발업자가 베네수엘라 경제 번영의 상징물을 세우겠다는 포부로 착공했지만 4년 뒤 금융위기가 닥치며 공사가 중단된 것이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건물을 인수했으나 재공사가 계속 미뤄지다가 2007년 마약중독자와 범죄자들이 그곳을 차지했고, 그 후 집 없는 빈민들이 이곳으로 속속 모여들어 45층짜리 미완공 건물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빈민굴로 전락했다는 이야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소설을 읽었을 땐 '서곡에서 언급하는 두 건물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싶었는데, 소설을 완독한 후에야 깨달았다. 폰테 타워와 토레 다비드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천대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소설은 1부에서 4부에 걸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마천대루 경비원 셰바오뤄, 아부카페 매니저 중메이바오, 마천대루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 로맨스소설 작가 우밍웨, 시간제 가사도우미 예메이리, 주부 리모리, 인테리어 디자이너 린다썬, 마천대루 경비원 리둥린, 임산부 리아이미, 아부카페의 사장 리톄부, 부동산 중개소 직원이자 아부카페 단골손님인 왕쓰보, 대학원생이자 마천대루 편의점 직원인 황하오우,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의 아내 딩메이치, 아부카페 아르바이트생 루샤오멍 등 마천대루와 관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인물들이 등장하는 방식이 재밌었다. 위에서 언급한 순서대로 등장하는데, 첫 타자 셰바오뤄의 이야기는 사실 큰 흥미를 못 느꼈다. 이 땐 몰랐다. 이 캐릭터가 나중에 날 울리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두 번째 타자인 아부카페 매니저, 중메이바오가 등장한 순간 이 소설에 급속도로 빠져들어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이 범죄소설의 중심이자, 마천대루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 메이바오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메이바오가 등장한다. 음흉한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의 시점에,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광장공포증을 가진 우밍웨의 시점에, 이중생활을 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린다썬의 시점에도.

그리고 마천대루의 또 다른 경비원 리둥린의 시점이 나올 때 마천대루에 사건이 일어난다. 살인 사건이었다. 이후 인물들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는 듯, 1인칭 시점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다.

사람들 말이 맞습니다. 이 빌딩에 관한 일은 모두 나한테 물어보면 됩니다.

(린멍위)

그래요. 그날 28층에 갔었어요. 내가 일하는 곳이에요.

(예메이리)

내가 수사하는 현장에 있는 것 마냥 거리감이 가까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그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았달까. 생각보다 더 저열하고 어떤 이야기는 역겹기까지 했다.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라던 책 소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이 문장이 정확히 반대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도 범인이 아니지만 모두가 범인이었다.

메이바오의 이웃이자 광장공포증으로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우밍웨는 메이바오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아무리 만신창이 같은 삶을 산다고 해도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할 정도로 비참할 수는 없어요. 난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걔처럼 그렇게 비참한 인생은 소설로도 쓰지 않아요.

(p.279)

메이바오의 이복동생 옌쥔은 메이바오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메이바오의 미모가 그녀 인생에서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그녀 자신보다도 먼저 알았습니다. 그런 미모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고, 행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메이바오도 알았을 것입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런 미모가 행운일 수 있지만, 우리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는 저주와도 같습니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냥감이 된 것입니다.

(p.368)

메이바오의 미모는 그녀에게는 불행이었고, 결말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메이바오의 삶은 충분히 비참했다. 도박, 술, 마약, 싸움 등 미치광이 같은 남자들만 사랑했던 엄마, 재회한 첫사랑은 유부남이면서 자신의 몸만 탐했고, 천장의 에어컨 배기구를 통해 자신의 집으로 숨어 들어온 남자, 자신의 집에 CCTV를 설치한 남자친구 그리고 자신이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계부까지 불행의 연속이었으나 메이바오는 굴하지 않았다. 삶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불행했을지언정 자신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메이바오가 이다지도 똑 부러진 사람이었기에 엄마 중춘리도, 계부 옌융위안도, 첫사랑 린다썬도, 남자친구 리유원도, 부동산 중개인 린멍위도 그녀를 몇 번이고 꺾어버렸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다혜 작가님의 말처럼 메이바오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사랑받았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서 오직 셰바오뤄만이 메이바오를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절대로 원치 않았을 거라며, 지금 이곳에 메이바오는 없지만 메이바오가 원하던 삶을 사는 게 메이바오를 계속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사람. 메이바오가 그날 밤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셰바오뤄와 떠나 자신이 원하던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빵을 굽고 있었을까. 늘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을까. 살아 있는 희열을 느끼고, 아직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가도 가도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은 무섭지 않아졌을까. 그리하여, 가장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거라던 '생명'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무 영향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생활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걸 알았어. 난 방관자 입장이었는데 점점 깊이 빠져들었지. 메이바오의 죽음으로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 예전에는 그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p.465)

셰바오뤄의 동료였던 리둥린은 셰바오뤄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위와 같이 말했고, 이 문장을 조금 빌려와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이다혜 작가님의 추천사에 혹했던 나는 그저 이 책을 펼쳐든 독자였는데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셰바오뤄는 리둥린에게 쓴 편지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어.'라는 글에 마음이 놓였다지만, 나는 아니었다. 메이바오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나도 밝은 척하다 보면 밝아질까 싶어, 밝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중 한 명이라 그런지 삶이 고될수록 밝게 살고자 했던 메이바오가, 그저 활자로만 만났을 뿐인 메이바오가 마음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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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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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이지만, 꿈으로 넘어가서 계속 얘기하자고 말해주는 마음. 그게 예술가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빛이죠. 안이지 작가님, 당신의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당신 작품 속에 살고 있을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p.148


작가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는 것은 잔해뿐이다. 로켓 아랫단의 추진체처럼, 이야기를 중력 너머로 쏘아 올리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버려지는 존재. 그러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원본을 찾고 싶다면 독자의 책상으로 건너가야 한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은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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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윤고은 작가님의 소설을 읽었다. 이 책을 읽는 중에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시간차를 두고 이야기 하려니 생각들이 흐릿하게 흩어졌더라. 그래도 한국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로버트 재단에 도착하는 그 고생길 만큼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전시가 끝난 후에도 작품은 내 속에 살아 있는 법이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나를 흔들었으므로 <불타는 작품>이라는 책은 비로소 원본이, 하나뿐인 진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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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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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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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읽을 엄두를 못냈다. 그러다 시간이 흘렀고 뮤지컬화 된다는 기사를 접했는데, 주인공이 차언니라네?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이걸 어떻게 뮤지컬로 만들지 싶었는데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에 납득이 됐다. 공연예술이라는 게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 온도 속에 흘러가는 시간예술. 시작과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할 수는 있으나 잡아둘 수는 없어서, 짧다면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상실을 이렇게 표현하는 주인공이라니. 시간예술을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절이었다.

p.s. 그나저나 투우 역할은 김재욱 배우가 출연할 전망이라는데, 그는 전직 모태구였다고요... 하지만 우리 언니도 전직 백성미...는 농담이고 (드라마 보이스X모범택시1에서 각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 이야기) 초연 아마데우스와 재삼연 살리에리의 조합인 점이 재밌다. 둘이 붙었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영화는 아직 변요한 배우 캐스팅 기사만 보이는데 영화는 영화대로 재밌을듯. 조각도 조각이지만 강박사 캐스팅이 아주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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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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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일까?

궁금해한 이유는 내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속 터질 정도로 정독하고, 속도감 빠른 상업 영화와는 거리가 먼 독립 영화를 좋아하며 결코 빨리 감기 할 수 없는 연극과 뮤지컬을 몇 번이고 보는 사람이 나다. 나라고 시간이 많아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지 않는 것은 아니고, 영화의 상영 시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낭비는 악이고, 가성비는 정의라던데 그렇다면 나는 악 중의 악인 것인가.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 따르면 뉴스나 보도처럼 정보성 콘텐츠도 아니고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영상 공급 미디어의 다양화 및 증가로 영상 작품의 공급 과다.

둘째, SNS로 공감을 강요당하고 '개성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실패를 두려워하는 바쁜 현대인의 시간 가성비 지향.

셋째, 얕은 감상이 많아지면서 알기 쉬운 것이 추구되어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의 증가.

라인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친구와 연결되어 있다. 말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늘 어떤 반응을 요구받는다. 그렇다고는 하나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손쉽게 분위기가 살아나는 데는 “그거 봤어? (혹은 그거 들었어?) 재미있더라. 꼭 봐!”가 유용하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혹은 음악 등의 콘텐츠를 화제로 삼는 것이다. 이런 화제를 무시하면 대화에 끼지 못할 뿐 아니라 후폭풍이 따른다. 소위 말하는 ‘읽고 씹기’는 ‘그 화제에 관심이 없다’라는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화제가 된 작품은 가급적 보고 감상을 말해야 그룹의 평화가 유지된다.

(p.104)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인 중 첫째와 둘째를 아우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반응을 요구받고, 새로운 콘텐츠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우리에게는 너도나도 구독 중인 글로벌 OTT가 있으니까. 편 수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대여와 반납도 필요 없이 그 즉시 감상할 수 있는 VOD 서비스가 말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이 이야기할 때 나도 한 마디 얹을 수 있으려면 시간을 내서 콘텐츠는 챙겨봐야겠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면? 영상을 빨리 감아 보고 초반부 회차는 건너뛰고 때때로 마지막 회차를 보거나, 그 모든 게 한데 어우러진 요약본을 챙겨 보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로워했던 지점은 세 번째 요인이다. 얕은 감상이 많아지면서 알기 쉬운 것이 추구되어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친절한 영상 작품이 늘었다는 것. 나는 이 부분을 웹소설 플랫폼에서 느꼈다. 연재 작품의 특성상 회차마다 댓글이 달리는데, 댓글을 다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고구마 구간(갈등)’을 못 견뎠다. 당장 ‘사이다(해소)’를 내놓으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아니 갈등이 있어야 해소도 있을 거 아니냐고 이 사람들아... 싶었지만 댓글을 달지는 않았다. 사이다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의 독서 방식과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정보나 콘텐츠만 보고 싶다.”, “관심이 없는 건 아예 눈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편향되어 있다고 해도 괜찮으니 좋아하는 정보에만 둘러싸이고 싶다”. 영상 오락 콘텐츠뿐만 아니라 뉴스 같은 정보도 마찬가지다.

같은 리포트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보내던’ 시간을 바로 잡고 자신의 기분에 맞는 미디어 콘텐츠를 고르는 사람을 “피키 오디언스Picky Audience”라고 칭한다. 픽pick이란 ‘고른다’는 뜻이다. 뷔페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접시에 담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된다.

(p.158)

댓글에서 사이다를 내놓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다른 콘텐츠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이런 사람들을 피키 오디언스라고 부른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좋게 말해서 피키 오디언스지 그냥 편식쟁이다. 나도 이와 같은 편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나는 트위터에서 뮤트 기능을 곧잘 활용하는 편인데, 그 기능을 넷플릭스에서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나 감독·작가의 작품은 포스터도 보고 싶지 않아서 트위터처럼 뮤트 기능이 있었으면 했다. 다른 의미의 편식인 셈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 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생각을 보강해줄 이야기나 말을 찾고 그것만 강화하게 된다.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 그들은 “세상에 자신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는다. 혹은 그런 사람을 쉽게 적으로 치부한다.

(p.161)

이 책의 재밌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영화’를 주어 삼았지만, 영화를 포함하여 영상 작품을 빨리 감기로 보는 흐름이 생겨난 데는 비단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줄로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소비'와 '감상'의 시점을 오가며 엮은 미디어론이자, 커뮤니케이션론이고, 세대론이자, 문화론이다.

(p.277)

평소 해왔던 생각들과 책에서 언급된 이야기들이 만나는 지점이 여럿(이를테면 라이트 노벨의 길고 긴 제목 같은 것들) 있었다. 조목조목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도 후자일 테지만, 전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

추신. 재밌는 사실은 이 책 역시 ‘감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을 빨리 감기 할 수는 없을 테니 요약본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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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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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주인공은 안진진, 25세 미혼여성. 시장에서 내복을 팔고 있는 억척스런 어머니, 행방불명의 상태로 떠돌다 가끔씩 귀가하는 아버지, 조폭의 보스가 인생의 꿈인 남동생이 가족이다.

'안진진'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처음에 부모가 합의하기는 진, 이라는 외자 이름이었는데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러 가는 도중에 아버지의 마음이 변해서 즉흥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동사무소 직원에게 참 진(眞)자 같은 것은 한 번 쓰면 너무 무거우니 두 번으로 합시다, 하여 안진진이 되었다. 진진이라는 이름 앞에 '안'이 붙는다는 사실까지는 유념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진은 생각했다.

소설은 그런 진진이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부르짖는 것으로 시작한다. 진진은 이성적인 남자 나영규와 감성적인 남자 김장우 사이에서 누구와 결혼할지 고민하는 동시에, 어머니와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인생행로는 사뭇 다른 이모와 엄마의 삶을 바라보며 모순투성이인 이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필력 덕분인지 가독성이 엄청나서 막힘없이 술술 읽었다. 책 읽는 속도가 워낙 더딘 나로서도 깨나 빨리 읽은 편이었는데, 작가 노트를 읽으며 깨달았다. 좀 더 천천히 읽을 걸.

누구라도 거저 얻은 것에는 애착이 덜한 법이다. 비싼 값을 주고 얻은 물건은 그 값만큼 알뜰살뜰하게 취급된다. 한 권의 책을 알뜰살뜰하게 읽는 법에 대해 궁리를 하다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메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p.301-302)

이 책을 손에 쥔 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사람에 비하면 며칠에 걸쳐 읽은 나는 느린 편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 빨리 읽은 편이었고, 천천히 읽지 못했다 해서 이 책을 거저 얻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책을 구매했던 2021년이 있었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상을 보고 책장에 꽂아둔 책을 꺼내 읽은 2023년이 있다.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모순>을 그냥 누군가의 인생 책으로 여기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책장에 꽂아둔 책을 꺼내 읽음으로써 안진진의 이야기는 내게 왔고 더불어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 진모의 이야기와 이모와 이모부 그들의 딸 주리 그리고 나영규와 김장우의 이야기까지 내게 왔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매 쇄마다 표지의 색상이 변경된다는 점이 인상 깊다는 글을 썼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의 정보를 찾아보니 최근 양귀자 소설의 모든 저작권을 양도받은 도서출판 「쓰다」는 새로이 <모순>의 개정판을 내면서, 초판이 나온 지 벌써 15년이 흘렀지만 몇 번이고 재독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오래도록 소장할 수 있는 책, 진정한 내 인생의 책으로 소유할 수 있는 책이 되고자 세련된 양장본으로 독자와 만나는 것이라고. <모순>을 완독 하고나니 출판사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20대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보다 나영규와 김장우의 이야기 쪽에 더 관심을 보였을까. 시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읽으면 감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다.

진진의 시점에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라 그런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종종 떠올랐다. 2022년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있었다면, 1998년에는 장편소설 <모순>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간 이래 쇄를 거듭하며 책이 나왔으니 1998년에만 있지는 않았으려나.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p.303)

책의 그 어떤 구절보다 작가 노트의 위 구절이 이 책을 관통하는 글이라고 생각해서 담아보았다.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고,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고,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고민하던 진진은 엄마와 이모의 인생을 어떻게 해석했을지 그리하여 나영규와 김장우 중 누구를 택했을지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미래의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296)

모든 삶을 체험해볼 수 없어서 나는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것이라고, 진진의 말을 읽으며 생각했다. 진진의 삶은 모순 때문에 발전할 것이고, 나는 독서 덕분에 발전할 것이며 그 길에 <모순>이라는 책을 한 권 더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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