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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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이지만, 꿈으로 넘어가서 계속 얘기하자고 말해주는 마음. 그게 예술가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빛이죠. 안이지 작가님, 당신의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당신 작품 속에 살고 있을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p.148


작가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는 것은 잔해뿐이다. 로켓 아랫단의 추진체처럼, 이야기를 중력 너머로 쏘아 올리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버려지는 존재. 그러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원본을 찾고 싶다면 독자의 책상으로 건너가야 한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은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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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윤고은 작가님의 소설을 읽었다. 이 책을 읽는 중에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시간차를 두고 이야기 하려니 생각들이 흐릿하게 흩어졌더라. 그래도 한국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로버트 재단에 도착하는 그 고생길 만큼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전시가 끝난 후에도 작품은 내 속에 살아 있는 법이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나를 흔들었으므로 <불타는 작품>이라는 책은 비로소 원본이, 하나뿐인 진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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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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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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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읽을 엄두를 못냈다. 그러다 시간이 흘렀고 뮤지컬화 된다는 기사를 접했는데, 주인공이 차언니라네?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이걸 어떻게 뮤지컬로 만들지 싶었는데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에 납득이 됐다. 공연예술이라는 게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 온도 속에 흘러가는 시간예술. 시작과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할 수는 있으나 잡아둘 수는 없어서, 짧다면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상실을 이렇게 표현하는 주인공이라니. 시간예술을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절이었다.

p.s. 그나저나 투우 역할은 김재욱 배우가 출연할 전망이라는데, 그는 전직 모태구였다고요... 하지만 우리 언니도 전직 백성미...는 농담이고 (드라마 보이스X모범택시1에서 각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 이야기) 초연 아마데우스와 재삼연 살리에리의 조합인 점이 재밌다. 둘이 붙었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영화는 아직 변요한 배우 캐스팅 기사만 보이는데 영화는 영화대로 재밌을듯. 조각도 조각이지만 강박사 캐스팅이 아주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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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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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일까?

궁금해한 이유는 내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속 터질 정도로 정독하고, 속도감 빠른 상업 영화와는 거리가 먼 독립 영화를 좋아하며 결코 빨리 감기 할 수 없는 연극과 뮤지컬을 몇 번이고 보는 사람이 나다. 나라고 시간이 많아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지 않는 것은 아니고, 영화의 상영 시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낭비는 악이고, 가성비는 정의라던데 그렇다면 나는 악 중의 악인 것인가.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 따르면 뉴스나 보도처럼 정보성 콘텐츠도 아니고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영상 공급 미디어의 다양화 및 증가로 영상 작품의 공급 과다.

둘째, SNS로 공감을 강요당하고 '개성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실패를 두려워하는 바쁜 현대인의 시간 가성비 지향.

셋째, 얕은 감상이 많아지면서 알기 쉬운 것이 추구되어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의 증가.

라인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친구와 연결되어 있다. 말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늘 어떤 반응을 요구받는다. 그렇다고는 하나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손쉽게 분위기가 살아나는 데는 “그거 봤어? (혹은 그거 들었어?) 재미있더라. 꼭 봐!”가 유용하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혹은 음악 등의 콘텐츠를 화제로 삼는 것이다. 이런 화제를 무시하면 대화에 끼지 못할 뿐 아니라 후폭풍이 따른다. 소위 말하는 ‘읽고 씹기’는 ‘그 화제에 관심이 없다’라는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화제가 된 작품은 가급적 보고 감상을 말해야 그룹의 평화가 유지된다.

(p.104)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인 중 첫째와 둘째를 아우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반응을 요구받고, 새로운 콘텐츠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우리에게는 너도나도 구독 중인 글로벌 OTT가 있으니까. 편 수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대여와 반납도 필요 없이 그 즉시 감상할 수 있는 VOD 서비스가 말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이 이야기할 때 나도 한 마디 얹을 수 있으려면 시간을 내서 콘텐츠는 챙겨봐야겠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면? 영상을 빨리 감아 보고 초반부 회차는 건너뛰고 때때로 마지막 회차를 보거나, 그 모든 게 한데 어우러진 요약본을 챙겨 보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로워했던 지점은 세 번째 요인이다. 얕은 감상이 많아지면서 알기 쉬운 것이 추구되어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친절한 영상 작품이 늘었다는 것. 나는 이 부분을 웹소설 플랫폼에서 느꼈다. 연재 작품의 특성상 회차마다 댓글이 달리는데, 댓글을 다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고구마 구간(갈등)’을 못 견뎠다. 당장 ‘사이다(해소)’를 내놓으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아니 갈등이 있어야 해소도 있을 거 아니냐고 이 사람들아... 싶었지만 댓글을 달지는 않았다. 사이다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의 독서 방식과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정보나 콘텐츠만 보고 싶다.”, “관심이 없는 건 아예 눈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편향되어 있다고 해도 괜찮으니 좋아하는 정보에만 둘러싸이고 싶다”. 영상 오락 콘텐츠뿐만 아니라 뉴스 같은 정보도 마찬가지다.

같은 리포트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보내던’ 시간을 바로 잡고 자신의 기분에 맞는 미디어 콘텐츠를 고르는 사람을 “피키 오디언스Picky Audience”라고 칭한다. 픽pick이란 ‘고른다’는 뜻이다. 뷔페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접시에 담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된다.

(p.158)

댓글에서 사이다를 내놓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다른 콘텐츠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이런 사람들을 피키 오디언스라고 부른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좋게 말해서 피키 오디언스지 그냥 편식쟁이다. 나도 이와 같은 편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나는 트위터에서 뮤트 기능을 곧잘 활용하는 편인데, 그 기능을 넷플릭스에서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나 감독·작가의 작품은 포스터도 보고 싶지 않아서 트위터처럼 뮤트 기능이 있었으면 했다. 다른 의미의 편식인 셈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 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생각을 보강해줄 이야기나 말을 찾고 그것만 강화하게 된다.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 그들은 “세상에 자신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는다. 혹은 그런 사람을 쉽게 적으로 치부한다.

(p.161)

이 책의 재밌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영화’를 주어 삼았지만, 영화를 포함하여 영상 작품을 빨리 감기로 보는 흐름이 생겨난 데는 비단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줄로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소비'와 '감상'의 시점을 오가며 엮은 미디어론이자, 커뮤니케이션론이고, 세대론이자, 문화론이다.

(p.277)

평소 해왔던 생각들과 책에서 언급된 이야기들이 만나는 지점이 여럿(이를테면 라이트 노벨의 길고 긴 제목 같은 것들) 있었다. 조목조목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도 후자일 테지만, 전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

추신. 재밌는 사실은 이 책 역시 ‘감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을 빨리 감기 할 수는 없을 테니 요약본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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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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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주인공은 안진진, 25세 미혼여성. 시장에서 내복을 팔고 있는 억척스런 어머니, 행방불명의 상태로 떠돌다 가끔씩 귀가하는 아버지, 조폭의 보스가 인생의 꿈인 남동생이 가족이다.

'안진진'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처음에 부모가 합의하기는 진, 이라는 외자 이름이었는데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러 가는 도중에 아버지의 마음이 변해서 즉흥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동사무소 직원에게 참 진(眞)자 같은 것은 한 번 쓰면 너무 무거우니 두 번으로 합시다, 하여 안진진이 되었다. 진진이라는 이름 앞에 '안'이 붙는다는 사실까지는 유념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진은 생각했다.

소설은 그런 진진이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부르짖는 것으로 시작한다. 진진은 이성적인 남자 나영규와 감성적인 남자 김장우 사이에서 누구와 결혼할지 고민하는 동시에, 어머니와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인생행로는 사뭇 다른 이모와 엄마의 삶을 바라보며 모순투성이인 이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필력 덕분인지 가독성이 엄청나서 막힘없이 술술 읽었다. 책 읽는 속도가 워낙 더딘 나로서도 깨나 빨리 읽은 편이었는데, 작가 노트를 읽으며 깨달았다. 좀 더 천천히 읽을 걸.

누구라도 거저 얻은 것에는 애착이 덜한 법이다. 비싼 값을 주고 얻은 물건은 그 값만큼 알뜰살뜰하게 취급된다. 한 권의 책을 알뜰살뜰하게 읽는 법에 대해 궁리를 하다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메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p.301-302)

이 책을 손에 쥔 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사람에 비하면 며칠에 걸쳐 읽은 나는 느린 편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 빨리 읽은 편이었고, 천천히 읽지 못했다 해서 이 책을 거저 얻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책을 구매했던 2021년이 있었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상을 보고 책장에 꽂아둔 책을 꺼내 읽은 2023년이 있다.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모순>을 그냥 누군가의 인생 책으로 여기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책장에 꽂아둔 책을 꺼내 읽음으로써 안진진의 이야기는 내게 왔고 더불어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 진모의 이야기와 이모와 이모부 그들의 딸 주리 그리고 나영규와 김장우의 이야기까지 내게 왔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매 쇄마다 표지의 색상이 변경된다는 점이 인상 깊다는 글을 썼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의 정보를 찾아보니 최근 양귀자 소설의 모든 저작권을 양도받은 도서출판 「쓰다」는 새로이 <모순>의 개정판을 내면서, 초판이 나온 지 벌써 15년이 흘렀지만 몇 번이고 재독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오래도록 소장할 수 있는 책, 진정한 내 인생의 책으로 소유할 수 있는 책이 되고자 세련된 양장본으로 독자와 만나는 것이라고. <모순>을 완독 하고나니 출판사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20대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보다 나영규와 김장우의 이야기 쪽에 더 관심을 보였을까. 시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읽으면 감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다.

진진의 시점에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라 그런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종종 떠올랐다. 2022년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있었다면, 1998년에는 장편소설 <모순>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간 이래 쇄를 거듭하며 책이 나왔으니 1998년에만 있지는 않았으려나.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p.303)

책의 그 어떤 구절보다 작가 노트의 위 구절이 이 책을 관통하는 글이라고 생각해서 담아보았다.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고,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고,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고민하던 진진은 엄마와 이모의 인생을 어떻게 해석했을지 그리하여 나영규와 김장우 중 누구를 택했을지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미래의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296)

모든 삶을 체험해볼 수 없어서 나는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것이라고, 진진의 말을 읽으며 생각했다. 진진의 삶은 모순 때문에 발전할 것이고, 나는 독서 덕분에 발전할 것이며 그 길에 <모순>이라는 책을 한 권 더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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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 매우 예민한 당신을 위한
샤히다 아라비 지음, 이시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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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클럽문학동네 5기 서평단으로, 샤히다 아라비의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읽었다. 책에 대한 내 감상에 앞서 팩트로만 설명하자면, 예민도가 높은 성격적 특성 때문에 악의적인 사람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양 심리학 책이다.

1. 북클럽문학동네 5기 서평단으로, 샤히다 아라비의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읽었다. 책에 대한 내 감상에 앞서 팩트로만 설명하자면, 예민도가 높은 성격적 특성 때문에 악의적인 사람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양 심리학 책이다.

 


2.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내가 매우 예민한 사람, 이른바 초민감자empath’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이 책의 42쪽부터 44쪽에 걸쳐 매우 예민한 사람 체크리스트가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해당 쪽수를 찾아보기 바란다) 초민감자가 아니더라도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은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책을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다.



3. 책을 읽는 내내 정세랑 작가님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의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이 글에 담아본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마티아스 마우어는 그런 면에서 예방주사에 가까웠던 셈인데, 그런 예방주사 두 번 맞았다간 죽을 일이었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잃은 것들과 얻은 것들(1993)에서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p.125-126)

 

심시선의 손녀 화수와 지수는 어느 날 할머니 심시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p.182)

 

이 부분을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유해한 사람을 못 떠나는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관계가 좋아서가 아니라 훨씬 더 위험하고 중독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우리는 해로운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정서적인 뇌에 충격이 가해져 편도체와 해마 같은 부위가 영향을 받는 한편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피질은 비활성화된다. 이는 우리의 자제력과 충동성, 감정, 위협에 대한 반응, 기억력, 학습, 계획 및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또 트라우마를 겪으면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 간 소통이 막히고 좌반구가 비활성화되어 집행 기능이 멈춘다. 집행 기능은 우리의 경험을 조직화하여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유익한 결정을 내리는 데 매우 중요한 능력인데 말이다.

(p.67)

 

화수와 지수의 말처럼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른 것이 분명하다. 심시선은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라 마티아스 마우어와의 관계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었으나, 시작선이 달랐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심시선이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매우 유해한 관계로부터 자신을 지켰고, 쉽지 않았으나 이제는 지나온 갈림길을 글로 쓰며 이해한 사람이라니.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나는 심시선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실재하는 인물이었다면 나는 그의 책을 구매해서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4. 나르시시즘적인 파트너에게 상처 입은 생존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포럼 사이코패스 프리에서는 어떤 MBTI 유형이 나르시시스트들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지를 파악하기 위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시작했는데, 샤히다 아라비는 이 결과를 두고 놀랍지도 않다고 평했다.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가장 표적이 되기 쉬운 유형은 INFJ INFP로 조사되었단다. 이런 성격 유형은 감성이 발달하고 양심적이며 공감 능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을 볼 때 매우 예민한 사람들이 지닌 특성과 유사하다고.

(p.45-46)

 

MBTI가 한국에서만 유행하는 건 아니구나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MBTIINFPINFJ가 나온 나로서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MBTI가 전부가 아닌 만큼,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악성 나르시시스트들을 경계해야한다. 또한 유해한 성격 유형에서 양성에 해당되는 사람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경계 침범자, 짜증 유발자와 관심 종자, 에너지 뱀파이어 등등. 심리학이다보니 용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어, 부족한 후기지만 이 글로 말미암아 이 책에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일독하기를 권한다.

 

샤히다 아라비가 소개한 것들 중 가장 인기가 많았고,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매우 예민한 사람이 유해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친다.

 


나는 남들을 돕는 일이 좋지만, 내게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당신의 해로운 행동을 받아줘야 할 책임은 없어요. 당신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관리하거나 당신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거나, 평화를 유지하려고 당신이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책임도 없죠. 나는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도 아니고 감정 스펀지도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당신의 고통을 투사할 대상으로 존재하지도 않아요. 내가 할 일은 나 자신, 즉 가장 나다운 사람이 되어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는 것뿐이죠. 내 상처를 치유하고, 나를 자극하는 요소들을 관리하며 나 자신을 돌봄으로써 스스로 고갈되지 않고 진심으로 남들을 대하는 일이요. 결국 다른 사람들과 특히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과 건강한 경계를 유지하는 일이죠.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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