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곳에는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단이 있었다. '존더코만도'라고 불리던 이들은 X자 표시가 된 작업복을 입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시키는 대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존더코만도' 소속이었던 남자 '사울'의 앞에 어린 아들의 주검이 도착한다. 처리해야 할 시체더미들 사이에서 아들을 빼낸 사울은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심한다.
2. 홀로코스트 영화로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본 것이 전부였다. 아우슈비츠의 참혹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그 마음에 눈물짓고 봤던 영화. 그 후에 나치의 만행을 글로 읽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나는 극히 일부를 알고 있었고, 어쩌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3. 영화의 배경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다. 비르케나우로 향하는 열차를 탄 사람(그 누구도 자의로 열차를 탄 사람은 없었겠지만)은 결코 그곳을 나올 수 없다는 악명을 떨치던 곳. 정말이지,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곳일 것이다. 그것도 생지옥.
가짜 샤워기가 달려있어 샤워장처럼 보이는 가스실에, 저마다 옷을 벗고 들어간 사람들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고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다 세상을 떴다.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독일군은 가스실 옆에 오토바이 두 대를 두고 종일 공회전을 시켰다고 한다. 비명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였는데, 그 어떤 소음으로도 비명소리는 덮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이 일이,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실의 문이 열리면 존더코만도들은 시체를 옮기고, 가스실을 청소하고, 소각하고, 재를 치웠다. 보는 것조차 힘겨웠던 그 광경은, 인물의 배경이 철저하게 아웃포커싱 처리된 덕분에 희미했지만 그 희미함으로도 끔찍함을 결코 지울 순 없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라고 해서 꼭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하느냐, 이 문제에 대해 감독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웃포커싱 처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오토바이의 공회전이 비명소리를 감출 수 없었던 것처럼, 귀를 막아도 소리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영화는, 다소 흐릿한 영상과 선명한 음성을 통해 관람의 개념을 넘어서 '홀로코스트'를 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4. 아들의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울에게 ‘정말 네 아들이 맞냐’는 질문이 날아든다. 사울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생지옥 같은 아우슈비츠를 그 모습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 생생한 현장감에 얼이 빠져있던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지옥 같은 그곳에서 사울이 발견한 것은 ‘아들’이라는 존재를 넘어선 ‘희망’ 그 자체였다는 것을.
사울의 말마따나 사울의 아들로 추정되는 그 소년은,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아이였다. 한 존더코만도가 전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고 말했고, 희미하게 붙어있는 아이의 목숨을 늘어난 일거리마냥 귀찮게 여기던 독일군은 아이를 손쉽게 처리하고 자리를 뜬다. 이 수용소를 나가기 전까지,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희망인데. 사울의 아들이자 희망인 소년은 그렇게, 두 번 죽는다.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사울은, 그래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는 일이라고.
5. 그런 사울의 여정을 담은 이 영화는, 제 69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고 제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다. 독특한 화면비와 촬영 방식, 음향 효과에 눈길이 갔던 건 이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올해의 데뷔작이라 꼽고 싶은 영화.
소박한 꿈도, 아우슈비츠라는 이름 안에선 결코 소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장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울. 영화의 끝자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울의 미소를 보며 깨닫는다. 끝까지 아들(소년)의 장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기억은, 우리의 몫이다. 영화가 사울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한 것처럼, 기억은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들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잊지 못할 잔인한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그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