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뒤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태어나는 마음으로 산다. 제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커다란 운동장에 처음 들어설 때, 낯선 동네로 이사갈 때,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사랑이 올 때, 사랑이 떠날 때, 크고 작은 도전과 모험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시를 쓰지 않는 어리석음보다 시를 쓰는 어리석음을 더 좋아'(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용기를 낸다. '연습 없이 태어나서 /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 인생이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 낙제란 없는 법'이니(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기꺼이 매 순간 태어나는 쪽을 선택한다.

-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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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어느 시간에서든, 어느 공간에서든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다듬지 않아도 그건 내겐 보석이니까."

고교 시절에 오가던 소란한 감정이 휘발되고 흐릿한 색채로 남는 과정을 장장 18권에 걸쳐 그린 만화 『다정다감』(박은아)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p.27

마침 1990년대 초중반은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만화를 맘껏 사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절이었다. 열 살 즈음 된 소녀들을 위한 두툼한 만화잡지들이 창간을 알렸고, TV를 켜면 <꽃의 천사 루루>, <요술소녀>, <베르사이유의 장미>, <뾰로롱 꼬마마녀>, <웨딩 피치>등이 나오는 호시절이었다.

p.41

말할 때마다 슬퍼지지만 한국 순정만화 시장의 몰락은 급격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제대로 평가 받을 기회를 놓치면서 그 중요한 시기를 함께 견인한 대다수 독자들에게조차 만화는 현재진행형의 취미가 아니라 추억으로 남게 됐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떤 면에서 잔인하다. 대가 없는 애정을 쏟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특별한 이유나 계기도 없이 느닷없이 그 마음을 철회해버리니까. 세상이 순정만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동안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순정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근사한 부분과 장점들은 축소되고 폄하되고 사라졌다. 왜 설정이 과하거나 필요한 서사를 생략해 유치해진 작품을 가리킬 때 '순정만화 같다'는 비유가 쓰여야 할까? 순정만화가 정말 그런가? 뻔하고 조악한 드라마나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은데.

p.53

최근 많은 여성 소비자가 여자들의 이야기에 환호하는 심리는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가 꼴보기 싫다'는 것보다는 '여자 캐릭터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 이야기를 더 보고 싶지 않다'에 가까울 것이다.

p.100

"첫사랑의 사람과 처음으로 사귀고, 교내에서도 이름 난 커플. 그 사람하고만 섹스도 하고 평생을 살아간다. 사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게 가장 행복하겠지. 하지만 이젠 이런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고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이 사람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금 누군가 사랑과 연애의 '효용'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해피 마니아』(안노 모요코)의 주인공 시게타의 이 대사를 고를 것 같다.

p.103

믿음직한 동행을 찾았다면 운이 좋은 것. 하지만 나를 완전하게 채워줄 누군가가 등장하길 바라며 평생을 결핍감 속에 사는 것보다는 혼자, 성큼성큼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때로는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밭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가 되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알려준 감정들이 나를 자라게 했으니.

p.149

한자를 잘 모른다. 유치원 때부터 한자 카드와 시험지까지 직접 만들어주며 한문 조기교육을 시키려고 애쓴 엄마에게 미안할 정도다. 뻔한 간판이나 기사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때는 좀 무식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십이지 동물들의 한자는 대강 안다. 1995년 방영된 애니메이션 <꾸러기 수비대>의 마법 같은 주제가 덕분이다.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몽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신유술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이 경쾌한 리듬! 한국의 20대 30대 중 상당수가 십이지 순서를 완벽하게 외운다면 거기엔 이 주제가가 백 퍼센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p.160

그나저나 최근에 만화책들을 다시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순정만화가들은 일찌감치 고양이의 매력을 깨달은 종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시절에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제일 처음 자기 집 고양이 사진을 올려 RT를 타는 사람들은 분명 이 사람들이었겠다는 확신이 든다.

p.164

창작욕, 책임감, 성실함이란 말로 포장된 험난한 여정을 반복하는 일이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라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지, 지금은 감히 안다. 끝없는 불평과 수시로 솟구치는 퇴사 욕구로 가득한 직장인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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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

홀로 카페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거나, 홀로 책방에서 시집을 고를 때, 혹은 홀로 술집에서 생맥주 혹은 싱글몰트 따위를 홀짝일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분위기' 하나를 같이 먹는다. 그 '분위기'를 먹으면서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런저런 생각이라는 것을 하거나 혹은 그 어떤 생각도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됐든 결국 더욱 자신다움으로 단단해진 채 거리로 나오게 된다.

p.15

나는 '그립다'는 말을 되도록 참으려고 한다. 내 그리움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p.53

꽃나무가 주는 향기를 맡는 일은 나에게 간단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꽃나무는 가까이 다가온다고 해서 향을 더 나눠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바로 곁을 지나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도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모든 것은 그 나무의 컨디션과, 그날의 바람과 온도, 그리고 하필 그 순간의 내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아주 찰나에 좌우된다. 길을 걷다가 꽃나무 향기를 맡는 것도 나에게는 큰 횡재인 것이다.

p.62

맛없는 떡볶이집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나는 좋다. 대체로 모든 게 그렇다. 뭐가 되었든 그닥 훌륭하지 않더라도 어쩌다 존재하게 되었으면 가능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사십 년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안심이다. 그것은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라거나 내가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라고 여겨져서가 아니라 어쨌거나 백기녀와 신중택의 젊은 날 뜨거운 밤을 통해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존재하게 되어버렸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래오래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p.121

나는 어느 건물 지하의 오래된 가게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어른이 된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 중 어떤 어른들은 자신들이 먹고 자랐던 음식을 다시 찾아 먹으며 자신을 닮은 자식을 품고 조용히 엄마와 아빠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어른들은 이미 그 과정을 지나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이곳을 찾고 있다. 이 작은 가게에서 얼마나 커다랗고 아름다운 것이 쑥쑥 뻗어나가고 있는지 김경숙 씨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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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순간 세계는 멈춘다.


-쇼노 유지,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안은미 역, 정은문고, 2018) 23p 중에서




지금의 세상은 헤매지 않도록, 틀리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지도 앱이 있으면 처음 가는 곳이라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쇼핑을 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가격과 기능을 비교해 싸면서도 인기 높은 상품을 산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또는 책을 사기에 앞서 인터넷 댓글이나 별점을 확인해 평판 좋은 작품을 고른다. 음악은 인터넷으로 미리 듣고 나서 앨범 속 마음에 드는 곡만 내려받는다. 다들 영리해진 탓에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학창시절, 들어보지도 않고 재킷만으로 선택한 레코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된다거나(대실패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딱히 취향이 아니었던 곡이 자꾸 듣다 보니 그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 된 적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고르고 고르다 보면 '미리 정해진 어울림'밖에 만나지 못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게 되기에 감동한다.

-쇼노 유지,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안은미 역, 정은문고, 2018) 100~101p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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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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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을 완독했다.

1.

2021년 김연수 다시 읽기의 첫 책으로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다. 지난 여름 내게 왔으나 뜻하지 않은 일로 읽기를 미룬 책이었다. '다시' 읽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가진 책부터 읽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완독한 지금에야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를 마침내 쓰는 마음과, 그뒤 삼십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옛말과 흑백사진과 이적표현의 미로를 헤매고 다닌 작가의 선물과 같은 이야기.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며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시인과, 그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을 그려낸 작가. 반 년이나 늦어졌지만 끝까지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과 그 안에서 쓰이는 말이 어려울 때면 나는 내가 챙겨 보았던 뮤지컬 작품들을 생각했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곳에서, 오랜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p.196)

젊은 소설가가 이십 년 전의 일을 끄집어내니 자연스레 기행도 그때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게 됐다. 그즈음 그는 도쿄의 기치조지에서 살면서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 이듬해 졸업을 앞두고 멀리 눈 쌓인 후지산이 보이는 이즈반도를 한 바퀴 여행하고 서울에 돌아와보니 구인회라는 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구인회의 멤버 중에서 이상과 유정은 젊어서 죽고, 기림과 지용은 전쟁 뒤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됐으며, 상허와 구보는 북으로 와 이십 년 전의 일을 추궁받고 있었다.

(p.98-99)

전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고 후자는 '팬레터'. 뮤지컬 덕후이기에 가능한 독서였지 싶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거기에 뭐가 적혀 있는 줄 알고 그걸 가져와? 북조선이라고 엔카베데(NKVD)기 없겠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좋을 게 하나도 없다구."

(p.37)

는 미드나잇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고,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민요 등을 채집할 테이프 레코더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영화 '콜드 워'가 떠오르기도 했다.

3.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p.32)

소설 전체를 통틀어 나는 이 구절에 가장 마음이 쓰였는데, 이어지는 준의 말 때문이었다. "이제는 자네가 자네의 시보다 더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해." 전선을 따라 끌려다니며 기행이 맡긴 시에 많이 의탁했던 준이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고, 기행은 대답 대신 어느 틈엔가 손바닥만한 마당을 희뿜하게 비추고 있는 달빛을 바라봤다.

'희붐하다'는 표현을 찾아 보았는데, '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돌아 약간 밝은 듯하다'라는 뜻이었다. 순하고 여린 것들로 북적대던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고 찾아온 적막에,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은 그가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모습을 표현한 우리말인 것만 같았다.

4.

작가님이 이 소설을 쓸 때 자주 들었다는 음악 3곡을 이 글에 기록해둔다.

김계옥, <눈이 내린다> (옥류금 연주)

아와야 노리코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

바흐의 칸타타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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