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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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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 『눈물 - 최인호 유고집』은 작가 최인호의 마지막 비밀 원고를 공개한 책이다. 2008년 암 진단을 받은 작가 최인호는 환자가 아닌 작가로서 죽고자 했고, 이에 깊은 밤 탁상 앞에 앉아 자신의 고통과 정직하게 마주한 채 한 자 한 자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병마의 고통 속에서 작가는 새로운 눈으로 삶과 죽음을, 인간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신의 기적을 바라보고 기록한 책이다.

 

쌓여진 책 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미공개 원고 200매에는 ‘고통의 축제’라 명명한 암 투병 생활 속에서 신자이자, 작가이자, 결국에는 인간 최인호가 눈물로 기록한, 내밀한 고백이 담겨있었다.

매번 ‘사랑하는 벗이여’로 시작되는 글로 채워진 이 책은 책 속 구절로 미루어볼 때, 가톨릭 주보에 연재된 칼럼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모든 글의 끝은 주님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지만 시작은 달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플라톤 『향연』, 미켈란 젤로의 ‘최후의 심판’. 키에르 케고르『죽음에 이르는 병』, 스타인 벡 <분노의 포도>, 프란시스 톰슨 <하늘의 사냥개> 등 소설, 시, 그림, 조각, 벽화가 한 작품씩 언급되고,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을 향한 글에 녹여낸 느낌이었달까.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책 전체가 주님에 대한 글로만 담겼으면 읽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매 글마다 작품이 언급되어서 무리 없이 잘 읽혔다. 신자이자 작가가 이 작품을 접했을 때는 이렇게 느끼는구나 했고, 특히 종교에 관련된 작품일 경우 내가 해석해내지 못했던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도 접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여러 분야의 작품이 언급되다보니 자연스레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언급되는데,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글이 가장 인상 깊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동안 12장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자화상은 대부분 권총으로 자살하기 3년 전에 시작해서 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더라도 얼마든지 그림 그릴 소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고흐에게 있어 자신의 얼굴이야말로 그가 마음 놓고 그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소재였습니다. 그의 자화상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표정으로 점점 더 침울해 가고 얼굴은 말라 가고 두 눈은 점점 더 광기에 젖어 가고 있습니다.

죽기 전 자화상을 완성하고 나서 고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자화상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다.” (p.193)

 

이 글에서 최인호는 자신이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며 이제야 알겠으니 자신을 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 부분이 나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더라도 얼마든지 그림 그릴 소재는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하고 자화상을 그린 고흐. 그 자화상이 고흐의 말마따나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얼굴을 그려서라도 붓을 놓고 싶지 않았던 화가로서의 고흐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작가 최인호도 고흐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해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으나 직접 원고지에 만년필로 쓰는 수작업을 고집하고 있어서, 빠진 오른손 가운데 손톱의 통증을 참기 위해 고무골무를 손가락에 끼우고, 빠진 발톱에는 테이프를 칭칭 감고 구역질이 날 때마다 얼음 조각을 씹으면서 미친 듯이 20매에서 30매 분량의 원고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필한 최인호. 자신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해달라던 최인호. 정말이지, 환자로 죽고 싶지 않고 작가로 죽고 싶다고 주님께 외쳤던 최인호. 처절한 노력 끝에 그는 자신이 원한대로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 최인호로 세상을 떴다.

 

아아, 주님. 그래도 난 정말 환자로 죽고 싶지 않고 작⋅가⋅로⋅죽⋅고⋅싶⋅습⋅니⋅다. (p.33)

 

라던 작가의 말을 떠올리면, 내가 다 뿌듯하면서, 한없이 가슴이 저민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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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시간
파비오 볼로 지음, 윤병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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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가 원하는 시간』과 함께 읽은 에세이 『어쩌다 내가 아빠가 돼서』표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빠나 아들 중에 어느 한쪽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그 사랑을 느낀다면 이는 너무 늦다. 살아 있을 때, 내 눈에 보일 때, 그때 소통해야 한다.

 

비단 아빠와 아들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살아 있을 때, 내 눈에 보일 때, 그때 소통해야 된다는 걸 우리는 안다.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의 주인공 로렌초 역시 다르지 않다.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드디어 성공의 길이 열리는 순간, 그는 아버지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서로 상처를 준 채 아버지와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런 그에게도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오지만 사랑을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로렌초는 결국 그녀를 떠나보내고 만다. 그로부터 2년 뒤, 아버지가 건강 검진을 받던 날 암일 수도 있다는 결과가 나오고, 헤어진 그녀는 두 달 뒤에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사랑하지만 한 번도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는 아버지, 사랑했지만 이제는 떠나버린 여인. 삶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되찾기로 결심한 로렌초.

 

이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혈연’인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연’인 그녀와의 이야기가 함께 다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면 길고, 짧으면 짧았다고 말할 수 있을 2년의 시간이 로렌초에게는 애석하게 길기만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은, 혈연간의 정을 되돌릴 순 있어도 연인간의 정을 되돌리기엔 너무 길었다 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모든 내일을 단 하루의 어제와 바꿀 수 있다면…’하고 소망하며 노력하는 로렌초의 마음이 절절해서, 안타까웠다. 앞으로의 모든 내일을 내주고서라도 단 하루의 어제와 바꿀 수 있다면 하고 소망하는 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소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 그랬다. 돈으로 행복한 삶은 살 수 있어도 행복을 사진 못한다고. 이 책 『내가 원하는 시간』을 읽고 있던 중에 읽게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줄 곧 이 말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만추>에 대한 한줄 평으로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라 말하던 영화 평론가 이동진님의 말처럼, 행복 역시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라서, 돈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삶을 살 순 있어도 행복은 살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이란, 상대방이 순수하게 나를 위해 내어주는 그 시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르고, 굳이 행복이라 명명하지 않아도 그 순간 느껴지는 그 온전한 마음을 우리는 행복이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인상 깊었던 구절

 

책을 읽는다는 건 멋지고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똑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는, 그 책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읽은 책에 다시 흥미를 느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세계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소설 속의 세계, 상황들이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비추어질지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그 세계가 나를 다시 받아줄 수 있는지 혹은 내 안에 들어와 숨 쉴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읽으면 몇몇 페이지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책을 다시 읽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그 페이지들 속의 내용을 변화시킨다.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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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가 아빠가 돼서 - 아빠, 그 애잔한 존재들에 대하여
유승준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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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은 본 서평을 멀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본 서른 편의 영화 중 ‘올해의 영화’라며 최고로 꼽았던 영화는 <소원>이었다. 모 영화 블로거님의 평처럼 ‘처참한 상황을 선동하지 않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던 영화 <소원>에서 내가 가장 집중했던 부분은 아빠(설경구)와 딸 소원이(이레), 부녀(父女)관계였다. 딸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손이 떨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목이 메는 아빠. 영화의 후반부, 그런 아빠마저도 결국 폭발하고만 법정씬에서 “집으로 가자”며 아빠의 손을 잡던 소원이. 힘든 시간이었을 테지만 법정에 참석해서 범인을 지목하는 일을 해낸 건, 소원이 역시 범인이 죗값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소원이가 집에 가자며 아빠의 손을 잡고, 아빠는 그제야 정신이 든다. 그 상황에서 소원이는 이성을 잃은 아빠를 말리고자 했던 걸까. 어떤 생각이 들어, 행동에 옮긴 것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아니, 당연히 아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범인의 죄를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자신의 손으로라도 처단하고 싶어하는 아빠 이전에, 소원이의 ‘아빠’로서 소원이에게 최선을 다해 힘이 되고자 한 아빠였다. 사건이 일어난 그때가 떠올라서 아빠를 멀리했던 소원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가까이 다가가고자, 아빠는 소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코코몽’ 탈 인형을 쓰고 소원이 앞에 나타난다. 그 무더운 여름, 더위 속에서도 묵묵히 탈 인형을 쓰고 소원이 주위를 맴돌며 등∙하교를 챙기던 아빠의 노력을 알아준 소원이가 탈 인형의 머리를 들어올려 아빠의 땀을 닦아줄 때까지.

 

 

서론이 너무 길었다. 대뜸 영화 <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다름이 아니고, 이 책 『어쩌다 내가 아빠가 돼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아빠’가 떠오르는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원>을 보고 한 번도 글로 정리한 적이 없는데, 이번 기회에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책의 구성 덕분이었다. 喜(희) 아빠의 미소가 필요한 순간들, 怒(로) 자녀를 분노하게 만드는 아빠들, 哀(애) 때로는 아빠도 눈물을 흘린다, 樂(락) 힘들어도 웃는다, 나는 아빠니까 라는 ‘희로애락’ 총 네 파트로 나눠서 영화와 책 속의 아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소원>의 아빠는 怒(로)를 제외한 喜(희),哀(애),樂(락)에 해당되는 아빠였던지라 많은 작품 속 그 어떤 아빠보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 같다. 프롤로그 속 작가의 말마따나 소설과 영화는 인생의 축소판이고, 그 안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다. 한국∙외국 소설과 한국∙외국 영화가 각각 여섯 편에 담긴 아빠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내가 읽고, 본 책과 영화 속 아빠들이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영화 <소원>을 비롯해, 영화 <어바웃 타임>, 책 『7년의 밤』의 두 아빠 최현수와 오영제, 영화 <화이>의 아빠들 등등. 내가 읽고, 본 모든 작품과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설과 영화에서 그려지는 아빠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조금이나마 내 아빠를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도 하다.

 

 

아빠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슈퍼맨이 아니며, 가족과 함께 걷는 인생길의 한 동반자일 뿐이라는 것을. 아빠와 자녀 어느 한쪽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그 사랑을 느낀다면 이는 너무 늦으니, 살아 있을 때, 내 눈에 보일 때, 그때 소통해야 된다는 것을.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알고 있지만’ 어렵다고 말하지 말고, ‘알고 있으니’ 잘 하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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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어 - 세상 사람들이 뽑은 가장 소중한 단어 50
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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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어』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일 년 하고도 한 달 더 된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내가 좋아라하는 야구 선수 오승환이 강연 콘서트 ‘열정락서’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오승환을 최대한 가까이서 보겠다는 나 때문에, 아침 일찍 강연장을 찾았던 나와 친구는 일찍이 입장권 교환권을 입장권으로 바꾸고 행사장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다. ‘열정락서’라는 강연의 테마에 맞게, ‘청춘’과 ‘열정’에 관한 주제로 개설된 행사장이 많았다. 그 중한 쪽 벽에 여러 단어들이 피켓에 하나씩 붙어있는 곳이 우리의 눈길을 끌어서 그 곳으로 향했는데, 알고 보니 많은 단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고르면 그 피켓과 함께 내 모습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해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고른 단어는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고른 단어는 또렷이 기억난다. 많고 많은 단어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고심 끝에 책을 골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책이 내 인생의 목적어는 아니지만, 2년 전의 내게 청춘이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책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책이 내 인생의 목적어라 단언할 수 없지만 책은 여전히 내 일상이고, 책을 읽다보면 내 인생의 목적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어쩌면 책이 내 인생의 목적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이 뽑은 가장 소중한 단어 50’이라는 이 책의 부제와, 표지 하단에 있는 ‘죽는 날까지 가져갈 당신의 단어는 무엇입니까?’라는 이 책의 문구가 내 인생에 있어 책 이외에 다른 인생의 목적어를 생각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들고 있는 여자 ‘엄마’부터 이유 없음이라는 가장 큰 이유 ‘그냥’까지. 머리말 속 작가의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란 곧 인생의 목표가 되는 목적어일 것이니, 내가 꼽았을 혹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목적어를 잘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고, 내 인생의 목적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달까.


카피라이터라는 작가의 직업답게 각 단어마다 위트 있는 본문이 실려 있는데, 본문만큼이나 좋았던 건 각 단어에 대한 짧지만 여운 가득했던 작가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만나다의 과거형은 만났다,가 아닙니다. 기다리다,입니다. (p.115)’, ‘믿는다,가 잘 안 되면 믿어 준다,로 시작해 보세요. 믿어 준다,가 얼마 후엔 믿는다,로 바뀝니다.(p.143)’, ‘실패했다. 앞의 두 글자를 보지 마십시오. 뒤의 두 글자를 보십시오. 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일입니다.(p.313)’라는 생각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은, 그 어떤 단어보다도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단어 ‘자식’이었다.

 

우리 모두는 자식이다. 엄마나 아빠가 아닌 사람은 있지만 자식이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는 안다. 자식들은 안다. 거의 모든 부모의 인생의 목적어가 바로 자식이라는 것을.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자식이 순위 밖으로 밀려났을까?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설문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자식을 낳고 키워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대답 속에 자식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을 리 없다. 나이를 조금 올려 설문을 했다면 틀림없이 자식이라는 단어는 꽤 높은 순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위 밖에서 서성대는 ‘자식’을 이 책에 초대했다. (p.244)

 

작가가 자식이라는 단어를 초대한 이유는 뜻밖이었는데, 이제 자식을 조금만 덜 소중히 생각하자는 뜻으로, 덜 사랑하자는 뜻으로 초대했단다. 초대 이유에 대한 이유가 바로 뒤에 이어진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고정관념이 하나 살고 있다. 그것은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똑같은 자식인데 그 앞에 붙는 수식어가 ‘나’인가 ‘남’인가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 (중략)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을 먼저 생각한다. 사람이 아닌 미물도 본능적으로 자식을 챙긴다. 그것을 나무랄 이유는 없다. 문제는 기준이 고무줄처럼 왔다갔다하면서 내 자식과 남의 자식에게 너무 큰 차이를 둔다는 것이다. 내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 그것은 내 자식을 조금 덜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자식을 조금 더 사랑하는 것이다. (중략) 사랑한다면 덜 사랑하자. (p.244-247)

자식인 동시에 부모인 작가가 쓴 ‘자식’에 대한 이 생각은, 자식이지만 아직 부모는 아닌 내게서 큰 공감을 이끌어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생의 목적어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인생의 목적어는 지금의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그 무엇일 수도 있다. 가족, 사랑, 나, 엄마, 꿈, 행복, 친구, 사람, 믿음, 우리, 열정, 너, 도전, 지금, 희망, 돈, 건강, 자유, 이름 등등 많고 많은 단어 중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 어떤 것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인생의 목적어를 어떠한 단어 하나로 결정짓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의 내게 어떤 단어가 더 소중하듯, 내일의 내겐 다른 단어가 더 소중해질 수도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니까.

 

그런 인생을 훨씬 더 헐렁하고 넉넉하고 가볍게 사는 법에 대한 작가의 말이 있어서 담아본다.

 

사람이 좋아지는 백만 가지 이유 중에서 가장 멋진 이유를 꼽으라면 그냥을 꼽겠습니다.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헐렁한 이유, 그냥을 꼽겠습니다. 논리와 과학이 개입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멋진 이유, 그냥을 꼽겠습니다. 이유가 아닌 이유, 그냥을 꼽겠습니다. 그냥 좋다,라는 말이 나는 그냥 좋습니다. (중략) 그냥은 아무 이유 없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언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한두 마디 언어로 표현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태어난절묘한 말이 그냥일 것입니다. 그냥은 여유입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자잘한 이유들은 일일이 상대하지 않겠다는 너털웃음 같은 말입니다.

 

헐렁해집시다. / 넉넉해집시다. / 가벼워집시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 앞에 그냥이라는 말 하나만 얹어도 우리 인생은 훨씬 더 헐렁하고 넉넉하고 가벼워질 것입니다. (p.356-35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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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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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여자를 모른다’고 소설가 이외수는 말했다. 여기서 ‘모르다’는 뜻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뜻일텐데, 여자인 내가 여자를 모르는 부분이 있듯이 남자 역시 남자를 모르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아들이 자라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아버지로서의 남자, 자동차가 애인이자 물신에 가까운 애착과 숭배의 대상인 남자, 여자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하면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자기를 향해 웃기만 해도 벌써 그녀를 상대로 성적 판타지를 펼치는 남자, 대표적인 여성 혐오주의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비롯해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 등등의 남자 이야기 말이다.

그런 남자들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 김형경은 저자의 이전 에세이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경험하고 공부한 심리학을 토대로 남자의 심리에 관련해서 남자도 몰랐던 남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아들이 자라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아버지로서의 남자에 대해서는 그 두려움이 실은 자신이 늙고 힘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설명하고(p.39), 사물을 통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남자의 방식이며 남자들은 자기 감정이나 내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자주 사물들을 화제로 삼는다고 말하면서 자동차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설명하고(p.104), 진화심리학적으로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약하게 진화되어왔으며 남자들이 그토록 유혹에 약한 이유는 그들이 치명적 나르시시스이기 때문이라 말하면서 여자의 웃음에 약한 남자들에 대해 설명하고(p.184-185),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는 남자는 두려운 대상을 비난하는 방어기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곧 그들의 투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p.207~220).

 

이렇듯 저자가 풀어서 이야기해주는, 남자 역시 잘 몰랐던 남자 이야기만큼이나 좋았던 게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이 책의 구성이다. ‘여자의 웃음에 약한 남자들’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화 혹은 저자가 읽은 책 속 구절이나 글을 인용해서 여자의 웃음에 약한 남자를 글로써 먼저 보여주고, 남자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의 구성이 남자에 대해 잘 모르고, 남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더욱이 모르는 내게, 이해를 돕고 가독성을 높여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남자에게 남자는 기본적으로 경쟁자이다. 비록 그가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감사하고 경탄하는 성숙한 남자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적어도 중년의 시기가 되어야 자식이 책임이나 부담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제야 아버지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고, 아버지 역할에 필요한 것은 딱 두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넘치는 배려와 넘치는 우정. 하지만 그때는 이미 자식들이 충분히 상처받으면서 다 자란 이후일 때가 많다. (p.48)

 

인상 깊었던 위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연초에 굉장히 인상 깊게 본 영화 <어바웃 타임>의 부자(父子)를 떠올렸다. 주인공 팀의 집안에서 남자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설정 때문의 부자간의 유대관계가 더 와 닿았던 것도 있었지만, 부자의 모습을 보며 눈물지었던 건 그들의 넘치는 배려와 넘치는 우정이 부자간의 정을 모르는 나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을 행운이라 여겼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위해 시간을 여행해서 자주 아버지를 만나러 갔던 아들. 남자에게 남자는 기본적으로 경쟁자이고 비록 그가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지만, 영화 속 부자의 이야기지만 그런 남자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일상에서 내 감정에 대한 심리를 생각할 때, 나는 저자의 이전 에세이집 중 한 권인 『사람풍경』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건 아마도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심리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딱딱한 심리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 들려주는 것 같았던 남 일 아닌 심리 이야기. 『사람풍경』이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 내가 지나치고, 만나고, 경험할 모든 남자들의 심리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면 나는 어김없이 이 책 『남자를 위하여』가 떠오를 것이다.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많은 남자들이 읽었으면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때때로 인정하면서 남자도 모르는 남자의 이야기를 알고, 나아가 남자인 자신을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테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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