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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불에 덴 자리에 찬찬히 얼음을 갖다 대듯이 게이스케는 매일 공책에 이야기를 썼다. 그럴 때만 외롭지 않았다. 넘쳐나는 말을 글자로 바꾸어 쓰고 있는 동안은 슬프지 않았다. (p.21)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무관심, 가난 때문에 친구들에게 집단 폭력을 당하던 게이스케의 유일한 ‘낙’이자 ‘구원’은 매일 공책에 쓰던 동화였다.
야요이의 마음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좋아해온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만 해방되었다. 그 시간만을 버팀목 삼아 하루하루를 보냈다. (p.69)
게이스케의 두 눈을 보고 숨을 삼켰던 야요이. 게이스케의 눈은, 야요이 자신이 알고 있는 눈이었다. 본 적 있는 눈이었다. 거울 속에서. 사진 속에서. 숨통이 막힌 듯이 답답한 감정을 어딘가 다른 곳에 가두어두고 온 듯한 눈. 얇은 막이 한 꺼풀 쳐져 있는 듯한 눈. 그 후로 같은 반이 된 게이스케가 몹시 눈에 밟혔던 건, 야요이 역시 아버지의 변태성욕으로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야요이에게 있어 구원은, 어릴 적부터 좋아해온 그림그리기였다.
그날부터 리코는 매일 국어 공책으로 마코와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상에 공책을 펼치고 도중에 몇 번이나 연필을 깎으면서 오른손이 피곤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에서 다리와 배 때문에 놀림당한 일. 특히 싫어하는 반 아이. 점심시간에 칠판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 소풍 갔을 때 내내 혼자였던 것. 할머니와 만든 여러 가지 추억. 히나단 안에 숨었던 일. 거기서 우연히 들은 엄마 아빠의 이야기. (p.133)
다리가 굽혀지지 않는 장애와 엄마의 임신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어둠 속의 아이’ 리코에게는 매일 국어 공책으로 이야기 하는 마코가 있었다.
축제 음악. 멀리서 작게, 하지만 귀를 기울이자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수화기를 꽉 눌러 댄 귀로 흘러 들어와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옛날에 들었던 그 축제 음악. 망대를 들고 바닷가 길을 나아가는 그리운 행렬. 핫피(예전 일본에서 하급 무사나 고용인이 착용하던, 소매가 짧은 상의 - 주) 차림의 남녀가 연주하는 대나무 피리와 큰 북.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몇십 년이 흘렀지만 기억 속에 있는 소리와 똑같았다.
요자와는 곁에 둔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그 옛날의 저물녘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p.196)
자식도 없이 살아오다 아내마저 죽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계획하는 요자와를 살린 건, 그 시절 듣던 축제 음악이었다.
리코는 <하늘을 나는 보물>이라는 동화를 읽고 구원을 얻었고, 요자와는 편지를 받고 흔쾌히 축제 음악을 들려 준 사람 덕분에 구원을 얻었는데, <하늘을 나는 보물>은 게이스케가 쓰고 야요이가 그린 동화였으며, 요자와의 편지를 받고 축제 음악을 들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게이스케였으며, 게이스케는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요자와 덕분에 구원을 얻었다는 인연이 참 흥미로웠다. 이런 것이야말로 인연이지, 했달까. 그리고 어쩌면, 인연보다 더 이들을 구했던 건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있어 각자가 살았고, 끝내는 서로를 살린 그 ‘이야기’ 말이다.
아직 이야기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지어봐라. 뭐든지 상관없으니까 지어봐. 그러면 강해질 수 있어. 언젠가 힘든 일이 생겨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의 세계로 달아나라는 의미인가 싶었지. 선생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줄 알았지. 그래서 그때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슬퍼졌지. 이야기가 현실을 구원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러자 선생님은 마치 게이스케의 생각에 대답하듯이 이렇게 덧붙였다고 했다.
이야기의 세계로 달아나라는 뜻이 아니야. 이야기 속에서 다정함과 강함 등 여러 가지를 보고, 알고 나서 다시 돌아오는 거야. 다른 사람이 지은 이야기도 물론 괜찮아. 하지만 알고 싶은 것을 알려면 스스로 지어보는 편이 나아. 혹시 알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른다 해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자신이 지은 이야기는 반드시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법이니까. (p.253-254)
게이스케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요자와 담임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이야기에 끄덕 끄덕, 수긍이 갔다. 나 역시 이야기 쓰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니까. 경험자로서 말하건대, 정말이지 이야기는 힘이 세다.
12월은 1년을 마무리하는 달이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달이기도 하다. 올 한해가 가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 못 다 이룬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내 이야기를 하나 둘 정리한다. 비록 메모로 하는 이야기지만, 그제야 비로소 나 자신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올 한해는 이렇게 살았구나, 토닥 토닥, 해가면서 말이다. 그 곁에, 겨울에 참 잘 어울리는 이 책 『노엘』이 함께해서 따뜻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