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경기도민에서 서울시민이 된 나는 2주 전부터, 살신성인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경기도에 사시는 부모님을 둔 덕에. 

 - 웬디야,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교회봉사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꼭 유시민 찍어달라고 해라...

라는 말을 같이 공부하는 분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것. 그러니까, 왠만하면 나도 하겠는데, 그럼 전....오후예배도 드려야 하잖아요. 네? 그러니까, 난, 저게 정말로 통할 것 같아서, 부모님한테 차마 말을 못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도 했지만, 정치얘기하다가 괜히 열만 내고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법한 속상한 기억들이 주는 두려움도 있었다.

- 전.... 제 삶도 중요한데요....ㅜ_ㅜ 꼭...그래야 할까요...?
- 몸을 던져서라도 4대강은 막아야한다. 꼭 말하거라.
- 흑흑...네...

그러나, 여전히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두번의 주말을 보냈다. 여러모로 편치 않은 마음으로 심상정 후보의 사퇴 소식도 접했고, 그 외 여러 움직임들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뗐다, 말았다, 뗐다 말았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너무 마음이 불편해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 엄마, 그런데, 이번에 누구 뽑을 거에요? 도지사?
- 왜?
- 그냥, 누구 뽑을 거야?
- 1번
- OTL 뽑지마, 뽑지마, 안돼, 엄마, 유시민 한번만 뽑아주세요.
- 왠 유시민? 
- 그냥 내 말 한 번만 듣고 뽑아요, 주말에 고기 사줄게요.
  (이거 너무 다락방님식 화법, 차마 교회 열심히 다닌다는 말은 못하고
  쉬운 것부터 던진 소심한 영혼)
- 끊어, 일단.

좌.절. 그러니까, 난, 실패했구나. 흑. 슬픈 마음으로 카페 불라에 잠깐 들른 나는 사장님께 억울함을 토로.

- 사장님, 저 엄마한테 유시민좀 찍어달라고했다가 퇴짜맞았어요 ㅜㅜ
(이후 이래저래 얘기하다가)
- 그러니까, 해법은 하나야. 자식들이 다 부모님한테 전화걸어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어.
- 그러게. 흑흑.

나는 혼자 막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무슨 카드를 써야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4대강 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고, 천안함 얘기를 하면 싸움만 나겠고,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나는 생뚱맞은 카드를 선택했다. 잠시 후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 자, 이제 나를 설득해봐. 왜 유시민을 뽑으라고 했는지.
- 엄마, 이명박이랑 김문수랑 한나라당 나쁜 놈들이 나라를 다 망쳐놓고 있잖아.

역시나 어이없다는 듯한 기운이 수화기 너머 들려온다. 그리고 나는, 의료보험민영화제도에 대해서 엄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시민이 그걸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선거의 이슈도 딱히 아니지만, 일단은 눈 감고,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들께 한나라당이 왜 나쁜지 설명하는 데는 의료보험 민영화 카드가 최고라는 나의 결론... 엄마도 미국 의료보험 제도가 어떤지는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난 이번에 건강보험 제도의 덕을 톡톡히 본 입원 환자였지 않은가. -_-v 엄마는 옆에서 눈으로 확인한 산 증인. 엄마, 이 나쁜놈들이 막 제주도에 민영화 병원 짓고 있잖아. 걔들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정말 다 끝이라니까.

- 좋아, 대신....

엄마도 하나의 카드를 내밀었다. 엄마가 공부하고 계신 게 있는데, 그걸 좀 도와드리기로. 나로서는 꽤 성가신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후예배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엄마가 내민 카드를 흔쾌히 집었다. (흑 ㅜ_ㅜ) 그리고.... 아빠도 부탁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사실 엄마는 처음에 내게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져줄 생각을 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후보들이 내미는 핑크빛,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보다는, 자식이 제시하는 손에 잡히는 실질적 도움이 더 어필하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 (알고보니 실용주의노선?...;;;)

이 작은 몇 표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오늘 밤 나의 마음에 와 닿았던 그 어떤 간절함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간절함이 모이고 모여, 어쩌면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밤의 기적, 같은 거 말이다.
이제 하루 남았다. 어쩌면 짧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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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머니의 선거
    from 자유를 찾아서 2010-06-01 01:04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게 주어진 첫 투표권을 거부했다.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에 나왔던 때였다. 그해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정치판을 잘 몰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통적 우파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 경찰이 된 이후로 퇴직할 때까지 오직 경찰에만 몸 담았던 분으로 완전한 보수였고, 어머니도 보수였다. 두 분이 함께 살면서 보수가 되었는지,
 
 
사과나무 2010-06-0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집은 선익이로 협박?
1번 찍어서 세상 망가지면 민선익이 고스란히 독박 쓰는 거라고...

웽스북스 2010-06-01 21:57   좋아요 0 | URL
아, 우리 선익이가 사는 세상은
부디 이것보다는 더 좋아야 할텐데 말이죠...

反mb 2010-06-0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훌륭한 웬디양님, 그 "간절함" 모두에게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근데 일단은 엄마가 아빠를 이겨주셔야만 할텐데... 결과가 궁금합니다.

웽스북스 2010-06-01 21:58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말입니다. 흣.

푸핫 2010-06-01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료보험 민영화 유시민이 추진하려고 했던건데;;

웽스북스 2010-06-01 09:03   좋아요 0 | URL
참여정부 시절 검토했고, 국민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해 지금은 반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요?

치니 2010-06-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 자식 간에도 거래가 필요할 때가 있더라고요 ~ :) 대부분 부모가 져주는 거래이긴 하지만. 웬디양님 낼 모레 공부도 하고 고기도 먹었으면 좋겠다!

웽스북스 2010-06-01 21:58   좋아요 0 | URL
그죠. 참, 저같은 딸내미 낳을까봐 좀 겁나지 말입니다.

風流男兒 2010-06-0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했어요 ㅎㅎ
상정이누나도 눈물로 나오신 이 마당에. 정말이지 축구선수도 아닌 1번이라면. 정말.

웽스북스 2010-06-01 21:59   좋아요 0 | URL
그아저씨 위트가 있어 좋더마요. ㅎㅎ
한나라당은 차라리 축구를 시키면 잘할듯.

다락방 2010-06-0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 식(?)의 화법이 안먹히는군요. ㅎㅎ

저는 부모님한테는 못하겠고(이건 오- 패쓰), 남동생의 표라도 좀 어떻게 해봐야겠어요. 말을 들어줘야 할텐데..에휴..

웽스북스 2010-06-01 21: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남동생한테 문자보내야겠어요.
생각해보니 저희엄마는 고기를 별로 안좋아하세요. ㅠㅠ

yamoo 2010-06-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은 전혀 안먹힐거 같다는..ㅋㅋ 그나저나 이번에 투료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여집니다..갈등중..

웽스북스 2010-06-01 21:59   좋아요 0 | URL
아니 왜이러십니까. 전화번호 대세요.

치니 2010-06-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랑할라고 왔어요 헥헥.
자주 가는 회사 옆 백반집 아주머니들이 '낼 놀지 ~?' 하니까, 동료가 '네! 낼 투표하셔야 돼요 ~!' 하고나자,
아주머니 한 분이 '근데 나 누가 누군지 몰라 , 교육감 누구 찍어야 해?' 라길래, 제가 원하는 분 찍으라고 말씀드렸더니 눈 크게 뜨시면서 옆에 아주머니가 '아 그 사람이다 우리 누구누구가 찍으라던 그 사람 ~ '하는 거에요. 여세를 몰아 거기 세 분 다 그 분 찍기로 순식간에 결정! 아, 이렇게 쉽구나 싶더라구요. ㅎㅎ

웽스북스 2010-06-01 22:00   좋아요 0 | URL
치니님 최고에요. 조금씩 조금씩 애쓰다보면 변할 수도 있겠죠? 그렇겠죠?

마그 2010-06-0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선거에 이모 대통령 누가 뽑았냐고 피튀기던 제게 아는 동생이 조용히 손들더라구요.
아버님이 거금 30만원을 주셨다며..그래서 돈받고 딴 사람 찍었어야지 라고 구박해줬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가 아니고 꽤 되더라는 거죠. 이제... 자식들의 역습! ㅋㅋ 웬디님 고생하심다~

웽스북스 2010-06-01 22:00   좋아요 0 | URL
헉. 30만원...ㅜㅜ
그런거였구나... 고기는 아무것도 아니였어...

레와 2010-06-0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나마 다행스럽게 부모님 설득은 어렵지 않았으나
회사 사람들, 그중에 투표 자체를 안할려고 하는 사람들 설득이 힘들어요.
저의 히든 카드는 '군복무'와 '체납액'입니다.
여기에 의료보험 민영화도 넣어야겠어요.

여직원 중엔 여태 한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어요.
아.. 증말 ..;;

웽스북스 2010-06-01 22:01   좋아요 0 | URL
군복무와 체납액. 저는 그렇게 어려운 거는 못 들이밀어요. ㅎㅎㅎㅎ
그냥 감정적으로...(으이그...인간아...)

굿바이 2010-06-01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짝!!!!!! 잘했다! 웬디!
정말, 잘했다. 어머님도 너무 감사하고, 흑흑....
사람이 기적이라고 믿고, 선거 끝나고 고기 사줄께^^

웽스북스 2010-06-01 22: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게 다 언니와 목사님의 압박...덕분...하하하..
그래도, 내일 좋은 결과 있음 좋겠어요. 흑.

니나 2010-06-0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학교에서 분당 사는 애한테 이 글 보여주며
유시민 찍으라고 하고 있어ㅋㅋ

아유 그 옆에 언니는 ㅁㅅ 찍는 데서 아예 투표 하지 말라고 했어(귀찮아서 안할 것 같음 ㅎㅎ)

웽스북스 2010-06-01 22:02   좋아요 0 | URL
굿굿. 좋아좋아.
옆에 언니는 꼭 붙들어놓고. (왜 ㅁㅅ를 찍는다는지, 좀 궁금하긴 하다)

니나 2010-06-02 01:34   좋아요 0 | URL
정말 근데 요기, 딱 요기만 그런 거 같어... 요기는 이렇게 말하면 환영인데
정말 조기, 딱 조기만 가도... ㅎㄴㄹㄷ이 대세인걸 느끼고 말았어ㅠㅠ(여론조사 다 맞구나 하면서ㅠㅠ)

Alicia 2010-06-0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 친구만나서 같은얘기했어요. 친구가 부산사람이거든요.
부모님 설득해보려 애쓰고 이 문제로 얼마전 심하게 싸우기까지 했는데 결국 포기했대요. 그래서 언니 얘기를 하면서 먹히는 이슈하나를 잡아서 설득을 해야 한다고 힌트를 줬어요. 근데 이미 포기했다는데 어떡해.. =.=
부산은 이렇대요. 한나라와 친박연대인지 뭔지 그리고 한나라당 공천탈락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1인. 무소속을 찍지 그랬냐 그랬더니 결국엔 무소속이 당선된 후 다시 한나라당에 들어갈 수가 있어서(공직선거법이 바뀌었거든요)누굴찍어도 1번이 되다는거에요. 그래서 친구 동생은 1번을 찍었대요. 이런 경운 투표를 안하는게 낫지 싶은데..-_-a

웽스북스 2010-06-02 23:3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데 부산 이번에 민주당 40%나 나왔네요. 놀라워 놀라워.

순오기 2010-06-0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했어요~ 웬디님!!
나는 비례대표는 '진보신당' 키워 달라는 문자를 열심히 보내고, 전화통화도 불이나게 하고 있어요. '좋다'는 반응은 절반쯤...명색이 당비내는 당원으로 이 정도는 해야될 거 같아서요.ㅋㅋ

웽스북스 2010-06-02 23:41   좋아요 0 | URL
저도 비례대표는 진보신당 찍었는데 참 쉽지 않은 장벽이긴 하네요.
순오기님도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토깽이민정 2010-06-0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학교에서 다음으로 투표현황을 보니까 (한국시간으로 새벽 두시 반쯤) 계속 한명숙 후보가 이기고 있잖아. 게다가 민주당이 계속 앞서고. 나까지 덩달아 신이나서 막 좋아했거든.
근데 웬일이니, 자기 전에 다시와서 보니까 다시 오세훈으로 된거야.
어제 기분 너무 나빴어 ㅠ.ㅠ
경기도 지사는 너무도 일찍 결정이 되어 그 시간에 이미 김문수였었구...
경기도는.. 아직도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리려나봐. 아 싫다. 그치?

웽스북스 2010-06-03 21:38   좋아요 0 | URL
언니 저는 굿바이언니랑 새벽까지 문자 주고받으면서
함께 절망했어요. 흑흑흑.

멜라니아 2010-06-0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주도 지사가 새 사람으로 되었으니까
강정 해군 기지 반대하는 운동 몇 년 동안 계속 해 온 우리는
새벽에 만세 부르고 하이파이브 하고 생난리 부르스 추고
맥주 마시고 하하 웃었는데 서울 경기 주민 여러분 우리만 그랬군요.

토깽이 민정이는 해군기지 반대 데모도 참여했으니까

그거를 국책 사업이라고 밀어 부치려했던 후보가 떨어진 것을 축하하려무나

누가 되어서 기쁜 것보다 누가 떨어져서 기분 좋은 건
선거 하다가 처음 맛 보는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