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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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병희 번역의 일이아스를 읽고 그가 번역한 고전을 찾아서 보고 있다. 

역사는 묵직하다. 

낯선 지역이름과 난해한 사람이름이 읽는 것을 방해하지만 여전히 천병희의 번역은 편안하고 안정감있다. 


헤로도토스는 공정하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기록하려고 이미 노력했다. 

일리아스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암송된 시로 헬라인들을 보여준다면 

헤로도토스는 당대 사람의 눈으로 기록한 글로 우리에게 기원전 500년전, 지금부터 2500년 전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2500년전 그리스를 중심으로 여행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과거의 이야기, 도시국가들의 흥망성쇠와 전쟁

신의축복과 영웅의 실수, 저 산너머 나라의 결혼과 장례풍습을 들려주는 이방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기록하는 

헤로도토스가 보인다. 얼마나 재밌었을까. 

 

호메로스보다 400년 정도 뒤에 살았던 헤로도토스가 기록하는 역사는 

아직 인간의 역사에 독점을 좋아하는 난폭한 유일신이 극적으로 등장하여 세계를 지배하기 전이라 

여러민족의 여러신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소박하고 다채롭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신과 인간이 뒤섞여 있으나 

그러나 그는 문화로서의 신, 신앙의 대상으로의 신이 아니라 말그대로의 신을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신들이 저마다 어디서 생겨났으며, 그들이 모두 언제나 존제했느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헬라스인들이 알게 된것은 말하자면 엊그제의 일이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는 나보다 기껏해야 4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헬라스인들을 위해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신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신들 사이에 직책과 활동 영역을 배분하고, 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의식강한 인문주의자다. 

이미 2500년 전의 학자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검증하지 않고 정치권력과 신의 권위에 함부로 복종하는 자들이 어찌 학자라 할수 있겠는가.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일을 기록하고자 분명히 밝히지만  

그럼에도 신을 믿지 않는다고 명문화하여 신의 분노를 살만한 문장을 남지기는 않는다. 

또한 역사란 상대적이라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았으며 

인간의 역사가 덧없고 허무하다고 행간에서 말한다. 


호기심 많은 밝은 눈이 빛나는 사람이다. 



2. 

헤로도토스가 스스로 밝힌 역사를 쓴 이유중 하나는 전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대 최초의 역사에 씌어진 최초의 전쟁의 이유는 

서로가 상대국의 공주를 납치해와서 대리고 살아버렸기 때문이다. 

납치한 쪽은 그녀가 사랑에 눈멀어 스스로 따라왔다 하고, 납치당한 쪽은 니네가 그런다면 우리라고 못할것 없다며 적국의 공주를 사로잡아 온는, 뭐 그런 얘기다. 

미인을 탐하는 남자 때문에 전쟁이 생긴다는 말이지. 하. 참. 


헤로도토스는 인간이 운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과거의 인간들, 저멀리 이민족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리저리 여행하며 직접본것은 판단하고 들은것은 그대로 기록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운명이 태어날때 이미 결정되었다고 판단한다.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창 명예로운 가문에 태어난 그가 왜 그렇게 바보같은 짓을 해서 말아먹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22세대 505년동안 아버지에서 아들로 왕권을 계승하다 칸다울레스에 이르러 망한다. 

이런것은 숙명이라고, 칸다울레스는 가문을 망해먹게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고 헤로도토스는 생각한다. 

재밌다. 인간과 전쟁과 음모에 대한 이야기. 


트로이의 전쟁중에 막상 트로이에는 헬레네가 없었다는 헤로도토스의 판단에 동의한다.

만약 있었다면 토로이인들이 헬레네를 그리스 연합군에게 넘겼을 거라고

이때 파리스와 헬레네는 이집트 근처를 표류하고 있었다고 

일리아스를 읽으며 이해할수 없는 몇가지 중 하나가 바로 요 대목이었다. 

프리아모스와 헥토르가 헬레네를 적들에게 넘겨주는 대신 파리스의 철없는 애정행각을 덮어주기 위해 

국가가 망하게 했을리 없다.  


나는 트라케인들, 스퀴타이족, 페르시아인들, 뤼디아인들과 거의 모든 비헬라스계 민족들이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천하게 여기고, 기술과 무관한 자들, 특히 전쟁에 전념하는 자들을 귀히 여기는 것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기원전 600년에서 1000년, 지금부터 3000년 쯤 전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이미 

먹고살기 위해 기술을 익히는 자들, 그의 자손들은 천대받았고 싸우는 자들은 우대받았다는 것이다. 

오랜 전통이구나! 

하긴 헤로도토스보다 조금 빠른 호메로스만 해도 그가 찬양하는 것은 전사들 군인들이다. 

일하는자들은 기록하지도 않았지. 

인간의 역사가 전쟁과 함께 시작된 것을 다시한번 생각한다. 

오랜 전통이구나. 생산하는 자보다 싸우는자, 파괴하는 자를 더 우대하는 것은.

이때 이미 군인들은 일당을 받았고 프로페셔널 전사, 용병이 있었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독재정치를 어찌 좋은 제도라 할수 있겠소?......그러나 독재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독재자는 조상 전래의 규범을 철폐하고, 여인을 겁탈하며, 재판 없이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오. 그러나 민중 정치는 첫쩨,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니 그 이름부터 가장 좋고 둘째, 독재자가 하는 못된 짓을 하나도 하지 않소. 민중 정치에서 관리들은 추첨으로 선출되고 직무에 책임을 지며 모든 안건이 민회에 제출되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독재정치를 철폐하고 민중의 힘을 늘리기를 제의하오. 국가는 민중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오."

2500년전 페르시아의 오타네스는 이미 독재정치를 철폐하고 민중의 힘을 늘려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물론 그당시에도 늘 이런 호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것은 아니다. 

이런 선동후에 사람들은 그래도 독재자를 세우기도 하고, 다시 그 독재자를 끌어내리기도 하며 시간이 흘러왔다. 

그러나 오타네스의 저 선동에는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동의하는 독재의 폐혜와 민중의 정치에 대한 핵심이 있다. 


박근혜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기 아버지가 한 근대화의 내용이 여인을 겁탈하고 재판없이도 사람을 죽이며 아무 책임도 지지않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한 

나쁜 독재정치였다는 것을, 알고싶어하지 않는. 


그리하여 인간은 2500년 전에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2500년 후에도 독재정치가 판을치니 

민중의 힘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옥에 갇히고 죽임당하고 그러고 있을까. 2500년 후에도. 


헤로도토스의 말처럼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3. 

사마천보다 300년쯤 먼저 기록한 인간의 역사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았으니 이제 사마천의 사기를 읽으면  기원전 동서양 인간의 삶을 보는 셈이다. 

사마천에게 역사가 운명이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헤로도토스를 보니 사마천을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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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다시 찾다
제임스 멀홀랜드.필립 걸리 지음, 이슬기 옮김 / 삼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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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세계를 비참하게 만든것은 폭력적이고 편협한 신의 형상이다. 폭력적이고 편협한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거의 모든 잔혹한 행위들 - 천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 수백 년간의 노예무역,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행렬, 그리고 빌딩 속으로 날아드는 여객기들 - 을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택받은 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에게 끔찍한 악을 저질러도 무방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외침이 생생한 한국땅에서 믿음이란 죄짓고도 용서되는 면죄부이고 죽어서 천국가기 위한 보증수표다. 


하느님의 자비는 변화를 가져다 주는 수단이 아니라 천국행 티켓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속에 본디 내재된 매력이란 없으며, 채찍이나 당근 없이는 아무도 하느님을 걱정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참편리하다는 생각을 최근에는 더 많이 했더니 

살면서 타인을 존중하기는 커녕 남을 못살게 굴고 착취하고 못된짓 겁나 많이 하다가 일요일날 교회가서 회개하면 천국간다니, 

반대로 아무리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아도 교회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철학은 참 천박하다. 

회개하면 되는 면죄부가 있으니 도덕적인 관념은 더 떨어지고 욕망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것에 부끄럼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기독교에 대한 성찰이 솔직하고 겸손하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만 하면 그의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모두가 당신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함으로써

사탄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목사님이 신선하다. 

폭력을 응원하고 복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말한다.  



2. 

나는 목회를 하면서, 재정적으로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가 자비를 행할 수 있는 많은 제안들을 수없이 묵살하는 것을 본다. 반면, 예배당 카펫과 의자를 새것으로 바꾸는 데 얼마나 쉽게 돈을 쓰는 지를 보고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 한쪽에는 천사가 다른 쪽에는 은행원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은행원의 말을 듣는다.

이런식으로 솔직하게 경험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안타깝게도, 종교가 경제적 이익의 노예가 될때 종교 단체들은 분첩을 곱게 발라 홍조 띤 올굴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입찰자에게 상품(?)을 팔아넘기는 창녀촌이 되어버린다. 


많이 가진 자들은 적게 가진 자들을 도덕적으로 게으르거나 사악한 자들이라고 넌지시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풍요로움을 정당화한다. 많이 가진 자들은 적게 가진 자들한테서 가져다가 쌓아놓은 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온두라스를 방문했을때 나는 가는 곳마다 소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저택과 은행, 고급 식당을 보았다. 내가 한 온두라스 사람에게 그것을 지적하자 그는 미국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대답했다. 옳은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풍요를 지키려고 미사일 격납고와 핵잠수함에 무기들을 숨겨두었다. 

자비의 눈으로 현실을 똑바로 보니 에둘러 거짓말할 필요없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말하니 문장이 쉬운것도 장점이다.


저자들이 밝히는 자비로운 세상은 사회주의자들의 미래와 닮았다. 

평등하게 더불어 나누어 풍요로운 세상

기다리지 말고 그런 세상을 현실에서 만들기위한 삶의 방식이 예수처럼 사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근거한 주장들이 어렵지않고 편안하다. 하나도 어렵지 않고 쉽고 당연하다는 듯이 급진적인 삶의 방식을 말한다. 

그것이 기독교라고. 


원수를 사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사람의 완전함은 몇가지 종교적인 규범을 지키는 대 있지 않고, 자비롭지 못한 것들을 자비로이 대하는 데 있다. 

나는 이건 못하겠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같은자, 명박이와 이건희, 정몽구같은 자들이 적이든 아니든 나는 결코 용서할수 없다.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고통이 세상을 끓어오르게 하는 자들

다행이도 책의 저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그것에 침묵하며 무조건 원수를 사랑하라고 후려치지는 않는다.


가장 낮은 자들의 권리가 억압받거나 무시당할 때에는 그것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면서 저항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미국의 중산층집안 장남으로 태어난 저자가 절대 모르는 한국 노동자계급의 분노가 있다.

내 동지들과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해 원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면되지. 난 싫다.  

 

방방곡곡 자비가 흘러넘치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잔치마당 같은 세상을 나는 꿈꾼다. 

예수가 그런 삶을 혁명적으로 살았다는것에 동의한다. 

그렇게 살고 싶기도 하다. 

기꺼이 현실의 고통과 분노를 넘어 즐겁게 저항하며 사는 것을 나는 꿈꾼다. 



3. 

저자들의 대부분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정치적인 여러가지는 나와 다르다. 

저자는 사형제도는 반대하지만 사법제도의 죄있는자를 재판하여 형벌을 정하여 가두는 시스템에 동의한다. 

나는 그 시스템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한다면 인간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감옥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것인지라도 말해야 한다. 

심지어 신도 용서하는데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재판하는가. 더욱이 형벌제도는 동의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뿐 사법시스템이 평등하게 운영되는것을 단한번도 보지 못했다. 


저자는 대화와 타협의 자비로 세상이 바뀔거라 생각한다. 

그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래도 제도의 문제가 있다. 독재국가에서 고문당하며 통제당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독재자를 용서하겠는가. 

저자가 말하는 자비를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다해도 경험과 깊은 성찰에서 나온 그의 신중한 의견들은 기꺼이 경청할 만하다. 

그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나의 이야기도 기꺼이 들어줄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자비로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는 현실의 문제들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할수 있는 실천을 한다. 

낮은 목소리, 쉬운말로 반복해서 말하는 그의 자비에는 통찰의 힘이 있다. 



4. 

붓다는 말했다. "소문으로 들은 것을 받아들이지 말라. 전통을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 경전에 있기 때문에, 네 믿음과 일치하지 때문에, 네 스승이 말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 말들을 받아들이지는 말라.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저자가 인용한 붓다의 이말은 생각보다 어렵다. 

조중동 기사의 대부분은 소문보다 나쁜 거짓말이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사회주의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전을 들이밀며 토론하는 자들을 나는 최근에도 보았다. 하! 

내 믿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행복한것인지 의심하고 있다. 

나를 등불로 삼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예수가 해답이었고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의 임무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납득시키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런 태도의 사회주의자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진리를 독점하며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강요하는 자들. 

이들과 말하는 것은 벽을 향해 말하는 것같다. 그 답답함이라니. 

노동자계급의 원칙에 근거한 진리를 그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토론은 헛되다. 전위투사인 그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그는 마르크스 경전에 의한 진리를 알기때문에 결코 반성하지도 않는다. 

오만한 그의 실천은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인민을 해방하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게 한다. 재앙이지. 


천국갈 사람과 지옥갈 사람을 나누는 기독교는 선진노동자와 후진노동자를 나누는 사회주의와 닮았다. 

전지전능한 그것들이 싫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기독교와 더 많이 닮았구나. 그 오류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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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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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쳐야 미친다 이후 정민은 나의 스승이고 벗이다. 

조선시대 고루한 사대부 양반들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마이너 지식인 주로 백탑파 선비들을 통해 바꿔주었지. 

그들의 영민한 꿈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연암이 존경스러웠고, 조선의 선비들을 만만히 보지 않기로 하며 한시를 들추었다. 

눈에 붙은 콩깍지 하나를 정민이 벗겨주었다. 

어쩌면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벽에 걸려 설레는 밤을 보내는 이시대의 아웃사이더가 아닌가 했는데 

그럼에도 시대를 넘어 벗을 만나는 그의 밝은눈이 부러웠는데 

이번에는 정약용과 황상이다. 

최근 그의 저작들을 보면 공부하는것에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할것같은 정민에게 고맙다.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이상 예전의 나일수 없다. 

글을 열며, 정민이 맛나는 글로 유혹한다. 


황상과 관련이 있는 필첩의 소장자를 물어물어 찾아가 그 생생한 묵흔과 마주했을 때는 감격을 가누지 못해다. 다산과 정학연, 그리고 추사 형제가 황상에게 준 여러 권의 친필첩을 보았다. 필치가 황올했고, 내용이 눈물겨웠다. 자료가 나올 때마다 문집 내용과 맞춰보니 알수 없던 여백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이 내 몫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 버린 것을. 

정민은 조선 지식인들의 제한된 자료를 어렵게 만나면 글씨체에 황홀하고 행간의 눈물자국을 읽는다. 

또한 선비들은 여전히 정민의 마음밭을 거닐고 그의 심장을 뛰게 하며 숙제를 주기도 한다. 

그는 벽에 들렸다.

정민선생이 정약용같은 스승을 만났는지는 궁금하지 않은대 황상같은 제자를 만났는지는 궁금하다. ^^

정민의 문장이 더 단단해 졌다. 



2. 

책이 대중화되어 대량생산된 시대는 사실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그 이전의 선비들은 좋은 책을 만나면 친히 붓을 들고 베껴써서 묶어서 자기책을 만들고 지인에게 선물했다. 

자기가 지은 시와 서도 따로 묶고 편지는 편지대로 따로 묶어서 또한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때때로 펼쳐보고 선물하고 

하기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몇달에 걸쳐 전달되는 그 느림과 기다림의 간곡한 편지들을 어찌 한번 읽고 버릴수가 있겠는가. 

전화와 인터넷 메일을 넘어 타임라인으로 대화하는 트위터 세대는 편지문화를 박탈한 문명의 변화를 아쉬워할라나. 

나는 아쉽당^^ 


필명을 날린자들은 죽으면 그 자손이 아버지의 글들을 모다 또 책을 만들었다. 

어떤 이에게 이 작업은 평생의 소명이었을 듯하다.

모두 일일이 써야하니 중노동이지만 또한 각별한 애정이 책마다 있었을 게다. 

책이, 얼마나 소중했겠는가. 말그대로 귀한 책이다. 



3. 

마흔살에 귀양가서 18년을 가족과 떨어져 강진 바닷가 오지에 유배되어 갇혀 있었으니 정약용의 답답한 외로움이야 오죽했겠는가. 

마음둘곳 없어 외롭고 때때로 울분이 치밀어 오르니 몸도 상해 종합병원처럼 안아픈 곳이 없다. 

다산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 가르치며 갈아낸다. 

흔한 양반들의 현학적인 시와달리 당시 시들이 허물없고 진솔하다. 

장맛비라는 시다. 


궁한 살림 찾는 사람 아예 없어서

온종일 의관을 벗고 지낸다. 

썩은 지붕 바퀴벌레 툭 떨어지고

밭두둑엔 팥꽃이 남아 있구나. 

병이 많아 잠도 따라 자꾸 줄어도

책 쓰는 데 힘입어 근심을 잊네.

오랜 비를 어이해 괴롭다 하리

맑은 날도 혼자서 탄식했거니. 


정민의 밝은 눈은 가난과 외로움의 고통, 스승과 제자간에 오가는 도타운 정을 볼 뿐 아니라 

좋은 지인간의 만남에 흥분하여 유배된 선비와 혈기왕성한 천재 학승 헤장의 만남은 무림고수들의 진검승부처럼 묘사했다. 

정민이 옛 스승들의 필채를 읽어 눈빛을 보고 손짓과 발길을 어울려 논다. 좋겠다. 부럽네.^^


공부는 밥먹듯이 해야하는 법이다. 숨 쉬듯이 하고, 습관처럼 해야지.

다산처럼 깐깐하고 잘 삐지는 선생 밑에서 공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을 거야.


다산은 기록한다. 끊임없이 기록한다. 이것은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한 사람이 아니면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공부가 평의 업이 아닌 사람은 또 누가 있겠는가. 

유배된 다산에게 공부는 진리의 탐구이고 삶이다. 

공부는 즐거움이고 위안이고 스스로 부지런히 다그쳐 완수해야 하는 끝없는 목표였다. 

정약용의 책읽기는 수행하는 자의 인내와 닮았다. 


나에게 책은 유희고 휴식이다. 

나는 다그치며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즐겨 읽는다. 

정리하고 카테고리를 만들어 지식을 쌓는것은 어쩌다 필요하다 느낄때만 한다. 즐거우면 장땡이니까. 

다산이 보기에 나처럼 책을 읽는것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도루묵인 셈이다. 

그러나 정말 다른가. 그의 지식경영법을 읽어 봐야겠다.


깊은 산속에 살며 거친 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고송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다산이 일러주는 청목의 삶이다. 황상은 그렇게 살았다. 부럽다.  



4. 

황상은 강진 아전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병치레하다 10대에 죽어 집안의 가장이 된다. 

어차피 중인이고 다산이 그의 학문을 아껴 과거시험을 권하지만 뿌리친다. 

평생을 귀양온 다산에게 배운 18년을 거름삼아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자갈밭을 일궈 농사짓고 책읽고 시쓰며 살았다.

유가의 제자이나 얼마전에 읽은 노자의 은둔철학이 더 잘 어울리는 삶이다. 

권력다툼에 눈에 멀어 최고의 스승인 정약용을 유배보내 잊어버리는 왕과 사대부지식인들을 어쩌면 황상은 신뢰할수 없었겠지. 

교활한 자들의 농간에 시달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록 아전이었으나 품이 넓었던 아버지를 보고 이미 알았을 터이고 

부귀영화를 탐하여 과거시험을 보면 더욱더 그 구렁텅이로 빠진다는 것이 딱 질색이던 거다. 

더욱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관리라는 것들은 인민의 껍데기를 벗겨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아전의 아들로서 황상은 더욱 예민했을 것이다. 


1803년 봄, 바닷가 노전리에 사는 백성이 칼로 제 남근을 잘라버린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황상이 전후 사정을 듣고는 분을 못참고 이일을 시로 노래했다. 제목이 '남근 자른 일로 슬퍼하다'이다. 


노전 사는 젊은 아낙 곡소리 길고 길다. 

가진 아이 못기르고 지아빈 남근 잘라.

시아버지 죽던 해에 포수로 차출되고

올해는 봉군에다 충군까지 겹쳤구나.

칼을 갈아 방에 들자 피가 자리 가득하니

민 땅 아이 잔혹함이 실로 또한 근심겹다. 

돼지와 말 불알 까도 오히려 구슬픈데

하물며 사람으로 혈맥을 자르다니.

부잣집은 1년 내내 세금 한푼 안걷고

종과 거지 부류들은 착취하여 상케 하네.

이법을 안 바꾸면 나라 필시 야해지리

한밤중 이생각에 속이 부글 끓는구나. 


아낙네의 때아닌 곡성이 날카롭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던 해에도 포수보로 차출되어 군포세를 내야 했다. 그때는 참고 냈는데, 올해는 자신을 봉군으로 동원한다는 영이 내렸다. 여기에 갓 태어난 핏덩이까지 충군한다는 날벼락 같은 통고를 받았다. 이른바 악랄한 백골징포, 횡구첨정의 현장이다. 

이치로 따져본들 눈하나 깜짝할 저들이 아니다. 악이 받쳐 눈이 뒤집힌 그가 칼을 시퍼렇게 갈아 방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제 남근을 잘라버렸다. 이것만 없어도 자식을 낳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나를 죽여라. 방안이 온통 피투성이가 괴고 말았다. 


관리들의 학정에 인민들의 삶이 비참하고, 그것이 분해 밤에 잠도 오지 않는대, 

혁명가가 될수 없으니, 차라리 은둔할 밖에. 

신선이 별건가. 

이렇게 황상처럼 산에들어 한세상 살다가도 좋겠다. 

그의 삶이 비록 유배되었어도 꼬장꼬장 수백권의 저작을 남긴 정약용처럼 행복했을 것 같다. 

문득 문득 저렇게 살고 싶다는 바램이 있다. 

문닫으면 깊은 산인걸, 굳이 산속으로 거처를 옮기는 호사를 부리지 않더라도 

봄다람 불면 엄마 따라 밭을 일구어 볼까. 



5. 

헌대 모든 제자가 황상같지는 않았다오. 

다산을 도와 수많은 저서를 편찬했던 최측근의 총명한 제자들이 스승의 힘으로 관직에 나가길 바란것은 당연해 보인다. 

더욱이 정약용은 실사구시의 학자가 아닌가. 현실에서 쓸모가 없다면 배워서 무엇을 하겠는고. 

유교적 학문의 목적은 왕을 도와 치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글을 쓰고 편찬할 시간이 되었으나

다산조차 강진에 처박혀 18년의 유배생활을 한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유배끝나 휘파람불며 서울로 와보니 정약용에게 현실적인 권력은 없는 것이고 

이것을 눈치챈 제자들은 다만 학문에 힘을써 일가를 이루려면 도로 강진으로 내려가 서원이라도 만들어 거느려야 하는데 

이미 조선의 사대부 사회를 비집고 들어가 세력을 이루기는 벽이 너무 높았던지 

셈은 밝지만 품이 넓지않은 다산의 성정으로 스승만한 제자를 만들지 못했든지

사제지간의 의리가 쓸쓸하다. 

그럴줄 미리 알았던 게지. 차라리 이꼴저꼴 안보고산 황상이 스승보다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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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이다 - 오늘의 대표시인선 1
문정희 지음 / 뿔(웅진) / 200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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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아동지 농성장을 방문하며 문정희의 시집을 선물해 주고 갔다.
농성장에서는 시를 볼만한 시간이 없고,
오다가다 차안에서 보는데,
그녀의 영혼이 나의 영혼과 닮았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 영혼인 듯이 들여다 본다.

직설적이고 뜨겁고 솔직하고, 촉촉하다.
어떤 시를 읽어도 그녀의 맨살과 닿는다.
가끔 서럽고, 자주 유쾌하다. 그녀의 도발은 무겁지 않고 경쾌하다.

고등학교때 미당 서정주의 발문으로 시집을 냈다는 천재 소녀가
나이들어 삶의 열정과 고락을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뛰어난 시를 쓴다는것은, 뭐랄까.
그녀의 시에대한 집요함이 느껴진다.
아니 시에 대한 집요함 아니라 삶에 대한 집요함이 그대로 시인 여자.
평생을 차라리 진흙탕에 뒹굴며 날카롭고 황올한 것을 꿈꾸었다.


집시가 되어

......
나는 누구를 동경하거나
피를 나눈 제 새끼를 기르며
옹기종기 살아가는 문약한
정주의 족속이 아니다
날마다 길을 떠나는 집시
옷을 번어던지고 맨몸으로 싸우는
화적떼의 아내이거나
하다못해 혈혈단신 화전민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더운 물을 퍼 올리는
신기한 도르래를 심장에 매달고
나는 새로이 망명길을 떠난다


자의식 강한 그녀의 심장에 매달린 도르레가 어떤것인지 알고 있다.
축복이 아닌지 모르지만, 저주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2.
뒤에붙은 이혜원의 서평은 형편없다. 차라리 쓰지 말지.
문정희의 시를 읽고 이 따위 서평을 쓰다니.
뜨거운 시를 뜨겁게 읽든지, 열정의 근원을 밝혀보던지, 솔직한 문정희와 대화를 하든지
문정희의 시를 소재별로 묶어 나열한다. 이렇게 건조하게. 이게 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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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
명진 스님 지음 / 이솔 / 201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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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길을 돌아 만난 벗처럼 반갑다.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은 잘 차려진 비단길이나 고상한 길이 아니다. 가시밭 길이고 진흙탕 길이라도  그 길이 옳다면 기꺼이 가야 한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산중에서 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서 연꽃을 피워 올리듯 혼탁한 현실 속에서 참되고 옳은 것을 구해야 한다.

나의 수행이 맑아 억울하고 천대받는 자들의 투쟁을 함께 하는것, 중생이 아플때마다 고통을 함께 하는것
사회주의자의 삶이 수행자의 삶과 같은 거라고


1.
그랬구나. 전두환의 독재가 사람잡던 시절에 절까지 군인들이 총들고 들어가 지랄을 했구나.
조계종 총무원 건물에 안기부 직원과 보안사 직원이 상주하는 사무실이 있었다고

반나치 운동을 하다가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의 말을 명진이 알려준다.
"어느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진하면서 많은 교통사고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고 만일 성직자라면 쫓아다니며 치료만 해 주고 기도한 해 주겠습니까? 아니면 미친 운전자를 끌어내리겠습니까?"

맞아, 교도소 독방은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절에서 초파일날 파는 등에도 자리마다 가격이 있다네. 천국가는 티켓을 파는게지. 더좋은 자리의 천국을 위해 가격도 다르고.
개운사주지 하면서 평등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천도재나 제사가 기본이 되는 '제사종', 관람료를 받아서 운영하는 '관람료종', 입시기도 위주의 '입시종'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거듭나야 된다.
ㅎㅎㅎㅎㅎ

깐깐한 법정스님은 이슬만 먹고살 것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노인네더니
명진스님은 좌충우돌 몸으로 부딪힌 자리마다 상처나고 딱지 앉으며 수행을 하네.
많이 부패했다는 조계종의 품이 넓어 명진을 키운다. 그렇군.

스스로 그걸 잘 알아 책 제목이 '스님은 사춘기' 다.
철들지 않고 사는것도 좋은 일이다.


2.
'책을 펴내면서'가 책의 마지막에 붙어있다. 이런 편집좋아.
선입견 없이 다본 다음에 뱀발처럼 덧붙이는거다.
작자의 생각을 미리 강조하고 강요하는 느낌 없어 좋다.

마지막 문장
이제 또 부지런히 공부해야 된다. 평생 입바른 소리를 달고 살았으니 죽을 때도 큰소리쳐야 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하하하
이 말이 무슨말인지 안다.

명진, 스스로에게 정직한것으로 세상에 거침이 없다.
술한잔 나누어 좋을 벗, 어디서 철없는 수행을 계속하고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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