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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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쳐야 미친다 이후 정민은 나의 스승이고 벗이다. 

조선시대 고루한 사대부 양반들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마이너 지식인 주로 백탑파 선비들을 통해 바꿔주었지. 

그들의 영민한 꿈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연암이 존경스러웠고, 조선의 선비들을 만만히 보지 않기로 하며 한시를 들추었다. 

눈에 붙은 콩깍지 하나를 정민이 벗겨주었다. 

어쩌면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벽에 걸려 설레는 밤을 보내는 이시대의 아웃사이더가 아닌가 했는데 

그럼에도 시대를 넘어 벗을 만나는 그의 밝은눈이 부러웠는데 

이번에는 정약용과 황상이다. 

최근 그의 저작들을 보면 공부하는것에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할것같은 정민에게 고맙다.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이상 예전의 나일수 없다. 

글을 열며, 정민이 맛나는 글로 유혹한다. 


황상과 관련이 있는 필첩의 소장자를 물어물어 찾아가 그 생생한 묵흔과 마주했을 때는 감격을 가누지 못해다. 다산과 정학연, 그리고 추사 형제가 황상에게 준 여러 권의 친필첩을 보았다. 필치가 황올했고, 내용이 눈물겨웠다. 자료가 나올 때마다 문집 내용과 맞춰보니 알수 없던 여백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이 내 몫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 버린 것을. 

정민은 조선 지식인들의 제한된 자료를 어렵게 만나면 글씨체에 황홀하고 행간의 눈물자국을 읽는다. 

또한 선비들은 여전히 정민의 마음밭을 거닐고 그의 심장을 뛰게 하며 숙제를 주기도 한다. 

그는 벽에 들렸다.

정민선생이 정약용같은 스승을 만났는지는 궁금하지 않은대 황상같은 제자를 만났는지는 궁금하다. ^^

정민의 문장이 더 단단해 졌다. 



2. 

책이 대중화되어 대량생산된 시대는 사실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그 이전의 선비들은 좋은 책을 만나면 친히 붓을 들고 베껴써서 묶어서 자기책을 만들고 지인에게 선물했다. 

자기가 지은 시와 서도 따로 묶고 편지는 편지대로 따로 묶어서 또한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때때로 펼쳐보고 선물하고 

하기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몇달에 걸쳐 전달되는 그 느림과 기다림의 간곡한 편지들을 어찌 한번 읽고 버릴수가 있겠는가. 

전화와 인터넷 메일을 넘어 타임라인으로 대화하는 트위터 세대는 편지문화를 박탈한 문명의 변화를 아쉬워할라나. 

나는 아쉽당^^ 


필명을 날린자들은 죽으면 그 자손이 아버지의 글들을 모다 또 책을 만들었다. 

어떤 이에게 이 작업은 평생의 소명이었을 듯하다.

모두 일일이 써야하니 중노동이지만 또한 각별한 애정이 책마다 있었을 게다. 

책이, 얼마나 소중했겠는가. 말그대로 귀한 책이다. 



3. 

마흔살에 귀양가서 18년을 가족과 떨어져 강진 바닷가 오지에 유배되어 갇혀 있었으니 정약용의 답답한 외로움이야 오죽했겠는가. 

마음둘곳 없어 외롭고 때때로 울분이 치밀어 오르니 몸도 상해 종합병원처럼 안아픈 곳이 없다. 

다산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 가르치며 갈아낸다. 

흔한 양반들의 현학적인 시와달리 당시 시들이 허물없고 진솔하다. 

장맛비라는 시다. 


궁한 살림 찾는 사람 아예 없어서

온종일 의관을 벗고 지낸다. 

썩은 지붕 바퀴벌레 툭 떨어지고

밭두둑엔 팥꽃이 남아 있구나. 

병이 많아 잠도 따라 자꾸 줄어도

책 쓰는 데 힘입어 근심을 잊네.

오랜 비를 어이해 괴롭다 하리

맑은 날도 혼자서 탄식했거니. 


정민의 밝은 눈은 가난과 외로움의 고통, 스승과 제자간에 오가는 도타운 정을 볼 뿐 아니라 

좋은 지인간의 만남에 흥분하여 유배된 선비와 혈기왕성한 천재 학승 헤장의 만남은 무림고수들의 진검승부처럼 묘사했다. 

정민이 옛 스승들의 필채를 읽어 눈빛을 보고 손짓과 발길을 어울려 논다. 좋겠다. 부럽네.^^


공부는 밥먹듯이 해야하는 법이다. 숨 쉬듯이 하고, 습관처럼 해야지.

다산처럼 깐깐하고 잘 삐지는 선생 밑에서 공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을 거야.


다산은 기록한다. 끊임없이 기록한다. 이것은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한 사람이 아니면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공부가 평의 업이 아닌 사람은 또 누가 있겠는가. 

유배된 다산에게 공부는 진리의 탐구이고 삶이다. 

공부는 즐거움이고 위안이고 스스로 부지런히 다그쳐 완수해야 하는 끝없는 목표였다. 

정약용의 책읽기는 수행하는 자의 인내와 닮았다. 


나에게 책은 유희고 휴식이다. 

나는 다그치며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즐겨 읽는다. 

정리하고 카테고리를 만들어 지식을 쌓는것은 어쩌다 필요하다 느낄때만 한다. 즐거우면 장땡이니까. 

다산이 보기에 나처럼 책을 읽는것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도루묵인 셈이다. 

그러나 정말 다른가. 그의 지식경영법을 읽어 봐야겠다.


깊은 산속에 살며 거친 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고송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다산이 일러주는 청목의 삶이다. 황상은 그렇게 살았다. 부럽다.  



4. 

황상은 강진 아전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병치레하다 10대에 죽어 집안의 가장이 된다. 

어차피 중인이고 다산이 그의 학문을 아껴 과거시험을 권하지만 뿌리친다. 

평생을 귀양온 다산에게 배운 18년을 거름삼아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자갈밭을 일궈 농사짓고 책읽고 시쓰며 살았다.

유가의 제자이나 얼마전에 읽은 노자의 은둔철학이 더 잘 어울리는 삶이다. 

권력다툼에 눈에 멀어 최고의 스승인 정약용을 유배보내 잊어버리는 왕과 사대부지식인들을 어쩌면 황상은 신뢰할수 없었겠지. 

교활한 자들의 농간에 시달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록 아전이었으나 품이 넓었던 아버지를 보고 이미 알았을 터이고 

부귀영화를 탐하여 과거시험을 보면 더욱더 그 구렁텅이로 빠진다는 것이 딱 질색이던 거다. 

더욱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관리라는 것들은 인민의 껍데기를 벗겨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아전의 아들로서 황상은 더욱 예민했을 것이다. 


1803년 봄, 바닷가 노전리에 사는 백성이 칼로 제 남근을 잘라버린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황상이 전후 사정을 듣고는 분을 못참고 이일을 시로 노래했다. 제목이 '남근 자른 일로 슬퍼하다'이다. 


노전 사는 젊은 아낙 곡소리 길고 길다. 

가진 아이 못기르고 지아빈 남근 잘라.

시아버지 죽던 해에 포수로 차출되고

올해는 봉군에다 충군까지 겹쳤구나.

칼을 갈아 방에 들자 피가 자리 가득하니

민 땅 아이 잔혹함이 실로 또한 근심겹다. 

돼지와 말 불알 까도 오히려 구슬픈데

하물며 사람으로 혈맥을 자르다니.

부잣집은 1년 내내 세금 한푼 안걷고

종과 거지 부류들은 착취하여 상케 하네.

이법을 안 바꾸면 나라 필시 야해지리

한밤중 이생각에 속이 부글 끓는구나. 


아낙네의 때아닌 곡성이 날카롭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던 해에도 포수보로 차출되어 군포세를 내야 했다. 그때는 참고 냈는데, 올해는 자신을 봉군으로 동원한다는 영이 내렸다. 여기에 갓 태어난 핏덩이까지 충군한다는 날벼락 같은 통고를 받았다. 이른바 악랄한 백골징포, 횡구첨정의 현장이다. 

이치로 따져본들 눈하나 깜짝할 저들이 아니다. 악이 받쳐 눈이 뒤집힌 그가 칼을 시퍼렇게 갈아 방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제 남근을 잘라버렸다. 이것만 없어도 자식을 낳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나를 죽여라. 방안이 온통 피투성이가 괴고 말았다. 


관리들의 학정에 인민들의 삶이 비참하고, 그것이 분해 밤에 잠도 오지 않는대, 

혁명가가 될수 없으니, 차라리 은둔할 밖에. 

신선이 별건가. 

이렇게 황상처럼 산에들어 한세상 살다가도 좋겠다. 

그의 삶이 비록 유배되었어도 꼬장꼬장 수백권의 저작을 남긴 정약용처럼 행복했을 것 같다. 

문득 문득 저렇게 살고 싶다는 바램이 있다. 

문닫으면 깊은 산인걸, 굳이 산속으로 거처를 옮기는 호사를 부리지 않더라도 

봄다람 불면 엄마 따라 밭을 일구어 볼까. 



5. 

헌대 모든 제자가 황상같지는 않았다오. 

다산을 도와 수많은 저서를 편찬했던 최측근의 총명한 제자들이 스승의 힘으로 관직에 나가길 바란것은 당연해 보인다. 

더욱이 정약용은 실사구시의 학자가 아닌가. 현실에서 쓸모가 없다면 배워서 무엇을 하겠는고. 

유교적 학문의 목적은 왕을 도와 치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글을 쓰고 편찬할 시간이 되었으나

다산조차 강진에 처박혀 18년의 유배생활을 한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유배끝나 휘파람불며 서울로 와보니 정약용에게 현실적인 권력은 없는 것이고 

이것을 눈치챈 제자들은 다만 학문에 힘을써 일가를 이루려면 도로 강진으로 내려가 서원이라도 만들어 거느려야 하는데 

이미 조선의 사대부 사회를 비집고 들어가 세력을 이루기는 벽이 너무 높았던지 

셈은 밝지만 품이 넓지않은 다산의 성정으로 스승만한 제자를 만들지 못했든지

사제지간의 의리가 쓸쓸하다. 

그럴줄 미리 알았던 게지. 차라리 이꼴저꼴 안보고산 황상이 스승보다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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