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다시 찾다
제임스 멀홀랜드.필립 걸리 지음, 이슬기 옮김 / 삼인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1. 

세계를 비참하게 만든것은 폭력적이고 편협한 신의 형상이다. 폭력적이고 편협한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거의 모든 잔혹한 행위들 - 천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 수백 년간의 노예무역,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행렬, 그리고 빌딩 속으로 날아드는 여객기들 - 을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택받은 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에게 끔찍한 악을 저질러도 무방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외침이 생생한 한국땅에서 믿음이란 죄짓고도 용서되는 면죄부이고 죽어서 천국가기 위한 보증수표다. 


하느님의 자비는 변화를 가져다 주는 수단이 아니라 천국행 티켓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속에 본디 내재된 매력이란 없으며, 채찍이나 당근 없이는 아무도 하느님을 걱정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참편리하다는 생각을 최근에는 더 많이 했더니 

살면서 타인을 존중하기는 커녕 남을 못살게 굴고 착취하고 못된짓 겁나 많이 하다가 일요일날 교회가서 회개하면 천국간다니, 

반대로 아무리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아도 교회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철학은 참 천박하다. 

회개하면 되는 면죄부가 있으니 도덕적인 관념은 더 떨어지고 욕망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것에 부끄럼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기독교에 대한 성찰이 솔직하고 겸손하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만 하면 그의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모두가 당신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함으로써

사탄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목사님이 신선하다. 

폭력을 응원하고 복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말한다.  



2. 

나는 목회를 하면서, 재정적으로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가 자비를 행할 수 있는 많은 제안들을 수없이 묵살하는 것을 본다. 반면, 예배당 카펫과 의자를 새것으로 바꾸는 데 얼마나 쉽게 돈을 쓰는 지를 보고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 한쪽에는 천사가 다른 쪽에는 은행원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은행원의 말을 듣는다.

이런식으로 솔직하게 경험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안타깝게도, 종교가 경제적 이익의 노예가 될때 종교 단체들은 분첩을 곱게 발라 홍조 띤 올굴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입찰자에게 상품(?)을 팔아넘기는 창녀촌이 되어버린다. 


많이 가진 자들은 적게 가진 자들을 도덕적으로 게으르거나 사악한 자들이라고 넌지시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풍요로움을 정당화한다. 많이 가진 자들은 적게 가진 자들한테서 가져다가 쌓아놓은 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온두라스를 방문했을때 나는 가는 곳마다 소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저택과 은행, 고급 식당을 보았다. 내가 한 온두라스 사람에게 그것을 지적하자 그는 미국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대답했다. 옳은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풍요를 지키려고 미사일 격납고와 핵잠수함에 무기들을 숨겨두었다. 

자비의 눈으로 현실을 똑바로 보니 에둘러 거짓말할 필요없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말하니 문장이 쉬운것도 장점이다.


저자들이 밝히는 자비로운 세상은 사회주의자들의 미래와 닮았다. 

평등하게 더불어 나누어 풍요로운 세상

기다리지 말고 그런 세상을 현실에서 만들기위한 삶의 방식이 예수처럼 사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근거한 주장들이 어렵지않고 편안하다. 하나도 어렵지 않고 쉽고 당연하다는 듯이 급진적인 삶의 방식을 말한다. 

그것이 기독교라고. 


원수를 사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사람의 완전함은 몇가지 종교적인 규범을 지키는 대 있지 않고, 자비롭지 못한 것들을 자비로이 대하는 데 있다. 

나는 이건 못하겠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같은자, 명박이와 이건희, 정몽구같은 자들이 적이든 아니든 나는 결코 용서할수 없다.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고통이 세상을 끓어오르게 하는 자들

다행이도 책의 저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그것에 침묵하며 무조건 원수를 사랑하라고 후려치지는 않는다.


가장 낮은 자들의 권리가 억압받거나 무시당할 때에는 그것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면서 저항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미국의 중산층집안 장남으로 태어난 저자가 절대 모르는 한국 노동자계급의 분노가 있다.

내 동지들과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해 원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면되지. 난 싫다.  

 

방방곡곡 자비가 흘러넘치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잔치마당 같은 세상을 나는 꿈꾼다. 

예수가 그런 삶을 혁명적으로 살았다는것에 동의한다. 

그렇게 살고 싶기도 하다. 

기꺼이 현실의 고통과 분노를 넘어 즐겁게 저항하며 사는 것을 나는 꿈꾼다. 



3. 

저자들의 대부분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정치적인 여러가지는 나와 다르다. 

저자는 사형제도는 반대하지만 사법제도의 죄있는자를 재판하여 형벌을 정하여 가두는 시스템에 동의한다. 

나는 그 시스템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한다면 인간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감옥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것인지라도 말해야 한다. 

심지어 신도 용서하는데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재판하는가. 더욱이 형벌제도는 동의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뿐 사법시스템이 평등하게 운영되는것을 단한번도 보지 못했다. 


저자는 대화와 타협의 자비로 세상이 바뀔거라 생각한다. 

그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래도 제도의 문제가 있다. 독재국가에서 고문당하며 통제당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독재자를 용서하겠는가. 

저자가 말하는 자비를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다해도 경험과 깊은 성찰에서 나온 그의 신중한 의견들은 기꺼이 경청할 만하다. 

그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나의 이야기도 기꺼이 들어줄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자비로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는 현실의 문제들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할수 있는 실천을 한다. 

낮은 목소리, 쉬운말로 반복해서 말하는 그의 자비에는 통찰의 힘이 있다. 



4. 

붓다는 말했다. "소문으로 들은 것을 받아들이지 말라. 전통을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 경전에 있기 때문에, 네 믿음과 일치하지 때문에, 네 스승이 말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 말들을 받아들이지는 말라.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저자가 인용한 붓다의 이말은 생각보다 어렵다. 

조중동 기사의 대부분은 소문보다 나쁜 거짓말이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사회주의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전을 들이밀며 토론하는 자들을 나는 최근에도 보았다. 하! 

내 믿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행복한것인지 의심하고 있다. 

나를 등불로 삼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예수가 해답이었고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의 임무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납득시키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런 태도의 사회주의자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진리를 독점하며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강요하는 자들. 

이들과 말하는 것은 벽을 향해 말하는 것같다. 그 답답함이라니. 

노동자계급의 원칙에 근거한 진리를 그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토론은 헛되다. 전위투사인 그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그는 마르크스 경전에 의한 진리를 알기때문에 결코 반성하지도 않는다. 

오만한 그의 실천은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인민을 해방하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게 한다. 재앙이지. 


천국갈 사람과 지옥갈 사람을 나누는 기독교는 선진노동자와 후진노동자를 나누는 사회주의와 닮았다. 

전지전능한 그것들이 싫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기독교와 더 많이 닮았구나. 그 오류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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